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물을 길으리라
HAURIETIS AQUAS
1956. 5. 15.
비오 12세의 예수 성심 회칙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존경하는 형제들에게
건안을 빌며 사도적 축복을 보냅니다.
머리말
1.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매우 의미심장한 표상을 사용하여 앞으로 그리스도교 시대가 가져올 다양하고 풍성한 하느님의 선물을 예언한 것입니다. 본인의 선임자 비오 9세가 가톨릭 세계 전체의 탄원을 기꺼이 받아들여 보편교회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도록 명한 이후 100년을 돌아 볼 때, 예언자 이사야의 이 말씀이 자연스럽게 본인의 마음에 떠오릅니다.
교회에 주신 고귀한 선물
2.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신자들의 영혼에 여러 가지 천상 선물을 쏟아 부어줍니다. 신지들을 정화시켜 주며, 그들에게 천상의 힘을 주고, 모든 덕에 이르고자 하는 원의를 불러일으켜 주는 이 천상 선물들을 낱낱이 열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라고 한 야고보 사도의 지혜로운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전세계적으로 날로 더해 가는 열심으로 꽃피고 있는 이 신심 안에서, 육화된 말씀이신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 천상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은총과 진리의 유일한 중개자로서 최근 수세기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던 당신의 신비적 배필인 교회에 너무도 값진 선물을 내려주셨음을 보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3.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한 선물을 누리고 있는 교회는 교회의 창립자이신 하느님께 더욱 열절한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으며, 또한 성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그리스도 친히 하신 말씀의 초대에 더욱 풍부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응할 수 있습니다.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말씀이었다.”
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올 “생명수”의 샘을 약속하신 위의 말씀을 메시아의 나라를 예언하는 이사야와 에제키엘, 즈가리야의 거룩한 예언의 말들 그리고 모세가 지팡이로 치자 거기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터져 나왔다는 상징적인 바위와 어렵지 않게 연관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참된 성격
5. 하느님의 사랑은 먼저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품안에 계시는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 사랑이신 성령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는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사랑을 바로 이 사랑의 성령께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매우 적절하게 반향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6.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안에 타올라야 할 하느님의 사랑과 명백히 사랑 그 자체이신 성령 사이에 매우 긴밀한 유대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이 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께 마땅히 드려야 할 그 공경의 내밀한 성격을 우리 모두에게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의 특별한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차원 높은 신앙 행위임이 분명합니다. 그 신심은 우리에게 구세주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봉헌하고자 하는 완전하고 철저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은 예수 성심의 살아있는 상징이며 표상입니다. 그러나 좀더 높은 차원에서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주 하느님께 보답할 가장 강력한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7. 실상, 인간의 마음은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만 절대자의 법칙에 완전하고 철저하게 복종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사랑의 힘이 우리를 하느님의 의지에 가까이 가게 해 이를테면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의지와 완전히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서의 말씀과 같습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제 1 부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토대와 예시
가. 이 신심에 관한 잘못된 견해
1) 교회는 이 신심의 수호자입니다
8. 교회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언제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높이 평가해 왔으며, 세계 곳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방법으로 이 신심의 전파를 장려해 왔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이른바 ‘자연주의’와 ‘감상주의’라는 비난에서 이 신심을 보호하고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과거에도 또 우리 시대에도 지극히 고귀한 이 신심은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영예와 존중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가톨릭 신앙과 성덕 추구의 열의에 차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2) 현대의 일부 가톨릭 신자들의 오류
9. “네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은밀한 계획 안에서 구세주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신앙과 신심의 거룩한 보화의 수호자요 관리자로 선출된 본인은 의무감으로써 그들 모두에게 이 말씀을 충고로 드립니다.
10. 그 이유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요컨대 사람들의 오류와 무시를 극복하고 그분의 신비체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해도, 우리 자녀들 가운데는 아직도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혀 이러한 신심을 이 시대의 교회와 인류의 절실한 영성적 요구에 해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승인하고 장려하지만 명령하지는 않는 다른 여러 개별적 형태의 신심과 이 신심의 본래 성격을 혼동하여, 이 역시 각자가 자기 성향에 따라 받아들여도 되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부수적인 신심 행위의 일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11. 또 한편으로, 임금이신 하느님의 군대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가툴릭의 진리를 수호하고 가르치고 전파하며 그리스도교의 사회교리를 주입시키고 또한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신앙 행위와 사업들을 장려하는 일에 주로 자신들의 힘과 재원과 시간을 쏟아 부어 일한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신심이 부담스럽거나 거의 또는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12. 또한 이 신심이 개인의 사생활과 가정생활에서 그리스도교 윤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쇄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마음과 영혼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 감각적인 신심 형태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신심이 여성들의 성향에는 어울릴지라도 교육받은 남자들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13.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신심을 지나친 참회나 속죄로 여기거나 아무런 의적인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소극적’ 이라고 부르는 다른 미덕들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신심이 현대에 신앙심을 다시 불붙게 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신심은 개방적이고 활기차게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가톨릭 신앙의 승리와 그리스도교 윤리를 강력히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윤리는, 모든 이가 알고 있듯이, 어떠한 형태의 종교에도 관심이 없으며 진리와 허위 사이의 모든 구별을 벗어 던지고 생각으로나 실제로나 물질주의적 무신론 또는 이른바 세속주의의 가장 추악한 타락까지도 받아들이는 자들의 궤변에 쉽사리 더럽혀집니다.
나. 이 신심에 대한 로마 교황들의 존중
1) 위와 같은 견해들은 레오 13세, 비오 11세 그리고 본인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14.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위와 같은 견해들은 본인의 선임자들이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승인하면서 이 진리의 좌(座)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한 가르침들과 전적으로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영원히 기억될 본인의 선임자 레오 13세가 “가장 훌륭한 신심 형태”라고 선포한 그 신심을 우리 시대에는 쓸모 없고 적합하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레오 13세는 오늘날에도 개인과 전인류에게 분명 더욱 폭넓고 심각한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는 바로 그 악들을 치유하는 강력한 치료제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 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든 이들에게 권하는 이 신심은 모든 이들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조언과 격려를 덧붙였습니다. “…그처럼 오랫동안 뿌리박혀 있던 악의 세력들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려는 강한 충동을 받습니다. 오직 그분의 힘으로서만 그 모든 악들을 몰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말고 누가 그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 의지해야 합니다.”
15. 본인의 선임자 비오 11세는 이 신심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육성하는 데 가장 홀륭하고 적합한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비오 11세는 한 회칙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하나의 신심 안에 우리 신앙 전체의 요약과 더 나아가 더욱 완전한 삶을 위한 길잡이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진정 그것은 주 그리스도를 깊이 알도록 우리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이끌어주며, 그분을 더욱 열절히 사랑하고 더욱 완벽하게 닮도록 우리 가슴을 더욱 효과적으로 움직여줍니다.
16. 이러한 기본 진리들은 본인의 선임자들 못지않게 저에게도 명백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교황직을 받아들였을 때 본인은 본인의 기도와 열망대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증가되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승리의 전진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신심에서 온 교회를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익한 결과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본인은 이를 본인의 첫 번째 회칙에서 기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2) 우리 시대에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에서 얻는 유익한 결과들
17.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위로로 가득 찼던 본인의 재임 기간 동안 그 결과들은 양적으로나 힘에서나 아름다움에서 감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였습니다. 실로 다행스럽게도, 이 신심에 다시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될 여러 가지 계획들이 추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과 자선사업의 증진을 위한 문화 단체의 결성,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전반적 주제와 관련한 참된 역사적, 수덕적, 신비적 교리를 담은 출판물의 간행, 경건한 보속 사업들, 특히 ‘기도의 사도직’이 가져온 지극히 열렬한 신앙심의 표현들이 그것입니다. ‘기도의 사도직’ 의 후원과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지역 모임들-가정, 대학, 단체-과 때로는 국가들도 예수 성심께 봉헌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본인은 이 주제에 관한 서한이나 개별 연설을 통하여 또는 라디오 담화를 통하여 여러 기회에 아버지로서 축하를 보냈습니다.
18. 치유의 샘물, 곧 구세주의 성심에서 나오는 하느님 사랑의 천상 선물들이 성령의 고무와 활동으로 가톨릭교회의 수많은 자녀들에게 전파되어 풍요로운 결실을 맺고 있음을 보면서 본인은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에게 그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본인과 함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고 아버지로서 애정을 가지고 권고합니다. 이방인들의 사도가 하신 다음 말씀으로 본인의 말을 대신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3) 신자들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토대를 공부해야 합니다
19. 영원하신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드렸으니. 이제 본인은 여러분과 교회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에게 촉구하고 싶습니다. 성서와,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의 확고한 토대가 되는 그 원리들을 좀더 진지하게 고찰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빛의 도움으로 이 신심의 근본적이고 고귀한 성격을 깊이 연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이 신심의 탁윌성과, 이 신심을 통하여 얻게 되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천상 은총의 풍요로움을 올바로 완전히 깨닫게 되리라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신심에서 생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익함들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예수 성심 축일이 보편교회로 확대되어 거행되어 온 지 100주년이 되는 이 해를 뜻있게 경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심의 주요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
1) 성심께 대한 신심의 중요성은 성서와 성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신자들이 마음에 유익한 양식을 얻고 거기서 자양분을 섭취하여 더욱 쉽게 이 신심의 참된 성격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그 풍성한 열매들을 소유할 수 있도록 본인은 (우리가 결코 온전히 깨달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제시하고 있는 신,구약 성서의 이에 관한 구절들을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교회 교부들과 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주석들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참된 빛 안에서, 구세주 하느님의 성심께 바쳐진 신심의 형태와 모든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 곧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사랑에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할 공경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밝혀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는, 성서와 성전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 탁월한 형태의 신심의 근거가 되는 주요 요소들을 밝히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쉽게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불을 길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자들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교회의 전례에서 그리고 교회의 내외적 생활과 활동에서 갖는 특별한 중요성의 비중을 더욱 온전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교회 주교들이 바라는 대로, 저마다 자신의 행동에 건전한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구원의 결실들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심 공경의 이유
21.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선택한 본문들이 이 신심에 관해 전해주는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이 더욱 정확히 이해하려면, 교회가 왜 구세주 하느님의 성심에 최대의 공경을 드리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거룩한 지체들에도 적용되는 것으로서, 인성 가운데 가장 고귀한 부분인 그분의 성심은 하느님 말씀의 위격에 실체적으로(hypostatice) 결합되어 있다는 원칙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육화된 하느님 아들의 위격에 영광을 드리고자 바치는 공경과 흠숭을 성심께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본인이 여기서 하는 말은 에페소공의회와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 엄숙히 규정되었던 신조입니다.
22. 구세주 하느님의 성심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는 또 다른 이유이자 성심께 최고의 공경을 드릴 것을 특별히 요구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분의 성심이야말로 그분 몸의 다른 어떤 지체들보다 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자연스런 표상이며 상징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본인의 존경하올 선임자 레오 13세가 지적한 것처럼, “예수 성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과 명백한 표상이 있으며, 그 사랑은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향하게 합니다.”
3) 구약성서에는 성심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없습니다
23. 물론 성서는 육화된 말씀의 불타는 사랑의 상징인 그분 육체의 심장에 바쳐지는 흠숭과 사랑의 특별한 공경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도, 또 이 신심의 주된 대상인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의심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신,구약 성서에서 우리에게 강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표상들로 선포되고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이 표상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심을 예언하고 있는 성서 대목들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 곧 구세주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하고 흠숭하올 성심의 가장 고귀한 상징이며 증거의 표시로 여길 수 있습니다.
4) 하느님과 유다인들 사이의 계약은 사랑에 토대를 둔 것이었습니다
24. 오랜 옛날에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를 담고 있는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길게 인용하는 것이 본인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지고 평화의 제물로 거룩해진 계약은 -그 계약의 첫 번째 율법은 두 개의 돌판에 새겨져 모세를 통해 알려지고 예언자들을 통해 해석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절대적 지배와 인간의 복종 의무라는 강력한 토대 위에 세워진 협약일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더욱 고귀한 배려 위에 토대를 두고 강화된 협약이었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복종하는 궁극적 이유는 시나이산 꼭대기에서 번개와 천둥소리로 그들의 영혼을 떨게 하였던 하느님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 품고 있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5) 모세,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의 예
25. 성 토마스 데 아퀴노가 선택된 백성의 “원로들”이라고 적절히 일컫고 있는 모세와 예언자들은 율법 전체가 바로 이 사랑의 계명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였으며 또한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모든 상황과 관계를 하느님의 절대적 지배에서 파생되는 비유나 두려움으로 말미암은 복종의 의무에서 이끌어낸 거친 비유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와 자식 사이 또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자연스러운 사랑에서 이끌어낸 은유법을 사용하여 묘사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부른 그 유명한 노래에서 그는 그 일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다음과 같은 상징적이고 감동적인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독수리(하느님)가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이스라엘)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26. 그러나 거룩한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언제나 당신 백성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호세아만큼 명확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표현한 예언자는 없을 것입니다. 간결한 언어의 극치로 소(小)예언자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이 예언자의 글에서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에 대한 당신의 사랑, 정의와 거룩한 근심이 결합된 그 사랑이 마치 자비롭고 애정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이나 명예를 손상 당한 남편의 사랑과 같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사랑은 그것을 저버린 사람들의 배신 행위나 끔찍한 죄악 앞에서도 감소되거나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죄를 범한 자들에게 공정한 벌을 내리는 경우에도 그것은 그들을 거부하거나 내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부정한 배우자와 배은망덕한 자식들을 회개와 정화로 이끌어 더욱 강해지고 새로워진 사랑의 끈으로 그들을 다시 당신 사랑에 묶고자 하시려는 것입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다시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 나는 그 병든 마음을 고쳐주고 사랑하여 주리라. 이제 내 노여움은 다 풀렸다.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리면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버드나무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27.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선택된 백성의 대화를 문답식으로 소개하면서 이와 비슷한 감정들을 표명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너 시온은 말하였었지.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 하리라.”
28. 이에 못지않게 감동적인 것이 아가서 저자의 말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선택된 백성을 서로 결합시키는 상호 사랑의 유대를 부부애에 비교하면서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가씨들 가운데서, 그대, 내 사랑은 가시덤불 속에 핀 나리꽃이라오.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 임은 나리꽃밭에서 양을 치시네.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에 달고다녀 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요?”
29. 죄에 죄를 거듭 짓는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지극히 온유하고 관대하며 오래 참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그들을 완전히 내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은 강하고 고귀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인류에게 약속된 구세주의 지극히 사랑하올 성심에서 나오는 불타는 사랑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이에게로 열린 우리에 대한 구세주의 사랑의 전형이며 새로운 계약의 기초가 될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30. 성부의 외아들이시며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셨던” 육화된 말씀이신 그분께서 온갖 죄와 불행에 짓눌린 인간들에게 오셨을 때, 메마른 땅을 적셔 비옥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꾸어줄 “생명수의 샘”을 인류에게 열어주실 수 있었던 분은 본질적으로 신격(神格)에 결합된 인성을 지니신 그분뿐이셨습니다.
31. 하느님의 자비롭고 영원한 사랑의 결과로 이러한 지극히 놀라운 효력이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레미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느 정도 예고하는 듯합니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주님인 내가 분명히 일러둔다. …그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제 2 부 신약성서와 전승을 통하여 본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
가. 복음서의 구원 신비에 나타난 하느님 사랑
1) 구약성서에 대한 신약성서의 우위성
32.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계약에 대한 확실하고 명백한 설명이 발견되는 곳은 복음서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서 모세가 맺었던 그 계약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언한 계약의 상징이며 표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새로운 계약은 하느님 은총의 근원인 육화된 말씀의 작용으로 이루어지고 효력을 갖게 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탁월하고 확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계약은 과거처럼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고귀한 피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없는 무죄한 동물들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을 미리 예시한 것입니다.
33. 그리스도의 계약은, 구약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예속이나 두려움에 토대를 둔 협약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들 간에 존재하는 친교로 맺어진 협약으로, 또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더욱 아낌없이 부어져 풍요로워지고 강화된 협약으로 나타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습니다.”
34.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랑하셨고 또한 만찬때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던” 사도가 위와 같은 말을 통하여 우리를 육화된 말씀의 무한한 사랑의 심오한 신비로 안내하였으니, 잠시라도 이 신비를 즐겨 묵상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에 유익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에서 나오는 빛, 신비 자체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그 빛을 받아, 이방인들의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쓴 펀지에서 밝히는 희망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려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2) 구원 신비의 이중적 사랑
35. 하느님의 구원 신비는 무엇보다도 본질상 사랑의 신비, 곧 천상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과 순종의 정신으로 바쳐진 십자가의 희생은 인류의 죄에 합당하게 성부께 지극히 풍부하고 무한한 보속을 드립니다. “사랑과 순종으로 참고 견디신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전인류의 배반을 보상하는 데 요구되는 것 이상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36. 그것은 또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와 구세주 하느님의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에 합당한 보속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피로 우리를 위해 쌓아주신 무한한 공로의 보화를 통하여 처음에는 지상 낙원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그후에는 선택된 백성의 무수한 죄로 깨어져 버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의 계약을 완전히 희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37. 우리의 합법적이고 완전한 중개자이신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열렬한 사랑으로 인류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하느님의 권리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구원의 숭고한 신비를 구성하는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자비 사이에 놀라운 조화가 존재하도록 해주신 분입니다. 이에 관하여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다음과 같이 지혜로운 해석을 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구원되어야 하는 것은 그분의 자비와 정의에 모두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정의에 일치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수난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셨으므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정의에 의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에 일치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인간 본성의 죄를 보속할 수 없었으므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을 위하여 그 죄를 대속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보속 없이 죄를 용서해 주셨을 경우보다 더 큰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
38. 그러나 유한한 인간에게 허용되는 한에서 우리가 천상 아버지께 대한 그리고 죄로 얼룩진 인간들에 대한 육화된 말씀의 감춰진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진실로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고유한 영적인 사랑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분”이시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과 히브리인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은 의심할 바 없이 영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이나 예언자들의 글이나 아가서에서 보는 인간적이고 친밀하고 부성적인 사랑의 표현들은 인류를 끊임없이 지탱시켜 주셨던 하느님의 전적으로 영적인 참된 사랑의 표시이며 상징들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사랑을 보여주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펀지 그리고 요한 묵시록의 구절들에서 숨쉬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의 감정들까지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39.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교 초세기에 일부 이단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실체가 없는 가짜 몸을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준엄한 말로 그들을 단죄한 바 있습니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속이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동정 마리아의 지극히 정결한 태중에서 잉태되어 참으로 인성을 갖춘 완전무결한 개체로서 당신의 신격에 결합되셨던 것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40.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이 그분 자신과 결합된 인성에는 결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취하신 인성은 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과 관련해서 상태가 덜해지거나 의미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곧 그분의 인성은 지성과 의지, 기타 내적 외적 지각 능력 그리고 모든 욕구와 자연적 감각 본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로마 교황들과 모든 공의회에서 엄숙하게 규정하고 인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당신 자신의 것에서 하자 없고 무결하시며 우리의 것에서 하자 없고 무결하십니다.” “당신의 신성에서 완벽하시고 마찬가지로 당신의 인성에서 완벽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은 인간이시며, 완전한 인간은 하느님이십니다.”
5)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심장을 지니시고……
41.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사람의 몸을 받으셨고 육체의 모든 감정을 지니셨는데 그중에서도 사랑이 다른 모든 감정들을 능가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듯이, 우리와 같은 육체의 심장을 지니셨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이 부분이 없이는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감정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신격에 본질적으로 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분명 사랑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감정들로 고동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인간적 의지와 성자께서 성부, 성령과 함께 공유하시는 무한한 사랑 자체와도 결합되어 있어서, 이 세 사랑 사이에는 어떠한 마찰도 불화도 없는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42.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스스로 참되고 완벽한 인성을 취하시고, 또한 당신 자신에게 우리의 심장과 다름없이 고통받고 찔릴 수도 있는 육체의 심장을 부여하셨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신성과 인성의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결합에 비추어 고려하지 않는 한, 또한 그 결합의 완성인 인간 구원이라는 실제에 비추어 고려되지 않는 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인이나 이방인들에게 그러했듯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43. 가톨릭 신앙의 공식 가르침들은 성서와 완전히 일치하여 하느님의 외아들이 고통받고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인성을 취하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이는 특히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인류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려고 피의 희생을 바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방인들의 사도는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 또 다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나.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
1) 사랑의 신비는 강생과 구원의 토대이며 정점입니다
44.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교리의 참된 증인들인 교부들은 성 바오로 사도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한 사실, 곧 사랑의 신비는 강생과 구원의 토대이며 정점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준비하실 목적으로, 그리고 우리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인간적 방식으로 표현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가능한 한 가장 명확히 드러내 보이실 목적으로 완벽한 인성과 우리의 약하고 썩어 없어질 육체를 취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남긴 글에서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45. 성 유스티노는 이방인들의 사도의 말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에게서 나신 말씀을 찬미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지심으로써 그 고통의 치료제를 마련해 주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46. 세 명의 카파도키아 지방 교부들 중 첫 번째 교부였던 성 바실리오는 그리스도의 감각과 감정들이 진실한 동시에 거룩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강생이 가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증거로써 자연스러운 감정을 취하셨다는 것과 또한 우리 삶의 순수함을 더럽히는 부정한 감정들을 신성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하셨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47. 이와 비슷하게 안티오키아교회의 빛이었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감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인성을 갖추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분께서 만일 우리의 본성을 공유하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몇 번이고 슬픔에 사로잡히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48. 라틴 교부들 가운데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들로 존경받는 분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육화된 하느님의 말씀도 면제받지 못했던 감정의 움직임과 성향이 마치 자연적 원천에서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본질적 결합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분께서는 영혼과 영혼의 열정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서는 교란되실 수도 돌아가실 수도 없으셨기 문입니다.”
49. 성 예로니모는 바로 그러한 감정들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주된 증거를 이끌어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취하신 인성의 참됨을 증명하시려고 실제로 슬픔을 경험하십니다.”
50.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노는 육화된 말씀의 감정과 그 감정의 목적인 인간 구원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에 특별히 주목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나 죽음 같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애정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비심에서 자유로이 취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몸인 교회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어주셨습니다-와 당신의 지체인 신자들과 성인들을 당신 자신을 통하여 변화시킴으로써,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 누구라도 인생의 시련 중에 괴로움과 슬픔을 당하게 될 경우 당신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슬픔을 죄가 아니라 인간적 나약함의 표시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울려 퍼지는 조화로운 선율에 맞춰 노래부르는 성가대처럼 그분의 몸도 그 머리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51. 성 요한 다마스체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설명합니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완전히 취하셨고,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수 있도록 완전한 인간과 결합되셨습니다. 취해지지 않은 것은 치유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52. 그런데, 성서의 구절들과 교부들의 글에서 가려 뽑은 이 모든 내용들과 본인이 미처 인용하지 못한 다른 많은 비슷한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애정과 감각적 인식력을 타고나셨으며 우리의 영원한 구원 사업을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음을 명확히 증언하고는 있지만, 그 어느것도 그분의 심장을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명확히 지적할 만큼 그 애정을 그분의 육체적 심장과 관련시켜 언급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시고자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53. 복음서의 저자들과 다른 성서의 저자들이 구세주의 심장, 곧 우리의 심장처럼 강력한 느낌으로 두근거리며 당신 영혼의 정서와 애정 그리고 당신의 이중 의지로 불타는 사랑으로 고동치는 살아있는 그 심장을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분의 신적인 사랑과 그에 따르는 감각적 정서들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곧 그분의 얼굴과 말씀과 몸짓에서 나타나는 원의, 기쁨, 나약함, 두려움, 분노의 감정들이 그것입니다. 찬미하올 우리 구세주의 얼굴은 특히 당신의 영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움직이고 또 출렁이는 파도처럼 당신의 성심을 어루만져 심장을 고동치게 하였던 그 모든 감정들의 지침이자 일종의 충실한 반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심리학과 그 결과에 들어맞는 것은 여기서도 역시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로 생긴 정서는 외부외 지체로 전달되는데, 특히 심장의 인상이 더욱 명백하게 반영되는 지체, 곧 눈, 얼굴, 혀 등으로 전달됩니다.”
다. 육화된 말씀의 심장은 그분의 삼중적 사랑의 상징입니다
54. 그러한 이유로, 육화된 말씀의 심장은 당신의 영원하신 성부와 온 인류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구세주 하느님의 삼중적 사랑의 으뜸가는 표징이며 상징으로 마땅하고 올바르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55. 그 심장은 그분께서 성부, 성령과 공유하시되, 육화된 말씀이신 그분만이 약하고 썩어 없어질 몸을 통해서 드러내신 신적인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56.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혼에 주입되어 그분의 인간적 의지를 강화하고 또한 직접 주입된 지식과 하느님을 뵈옴으로써 얻어진 가장 완전한 지식을 통하여 그 의지의 행위를 밝혀주고 다스리는 불타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57.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욱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면에서 그것은 감각적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실상 다른 어떤 인간의 몸보다 더 완전한 감각과 인식력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라.결 론
1) 우리 구세주의 성심을 공경할 수 있는 방법들
58. 이와 같이 성서와 가톨릭 신앙의 공식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영혼 안에서 모든 것이 완전한 조화와 질서를 찾으며, 그분께서는 명백히 우리 구원의 보증을 위해 당신의 삼중적 사랑을 쏟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세주의 성심을 그분 사랑의 상징적 표상으로, 우리 구원의 증거로, 또한 우리가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품안으로 올라가기 위한 일종의 신비적 사다리로 묵상하고 공경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그분께서 하셨던 모든 일은 그분의 삼중적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59.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과 행위, 계명, 기적 그리고 특히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는 일들, 곧 성체성사의 제정, 그분의 극심한 고통과 죽음, 당신의 거룩한 어머니를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심, 우리를 위하여 교회를 세우심, 사도들과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 등, 이 모든 일은 그분의 삼중적 사랑의 증거로 여겨야 합니다.
3) 우리는 그분 성심의 고동소리를 묵상해야 합니다
60.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 심장의 고동소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사가들이 증언하듯이 그분께서는, “‘이제 다 이루었다.’고 큰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심장의 고동소리로 당신께서 지상에 머무르시는 시간을 재려고 하시는 듯하였습니다. 그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까지, 그분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고 그분의 감각적 사랑은 중단되었습니다.
4) 그분의 심장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분의 삼중적 사랑을 상징할 것입니다
61. 그러나 영광을 받으신 그분의 몸이 죽음을 이기신 구세주 하느님의 영흔에 다시 결합된 후에도,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심장은 고요하고 잔잔한 맥박으로 계속해서 고동쳤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심장은 앞으로도 그분을 당신의 천상 아버지와 그리고 당신께서 그 신비적 머리가 되시는 전인류와 묶어놓는 삼중적 사랑을 계속 상징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