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구원사업에 미치는 예수 성심의 지대한 영향

가. 복음서에 나타난 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랑

62.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이러한 고찰에서 풍성하고 유익한 결실을 거두고자 본인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생활 동안 당신 성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지금도 알려주고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알려주실 그분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여러 가지 애정을 살펴보면서 잠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특히 복음 구절들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는데, 그 빛은 우리가 하느님 성심의 은밀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이방인들의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밝혀주고 힘이 되어줍니다.

1) 그분의 감추어진 생활에서 ····

63. 예수 그리스도의 흠숭하올 성심은 동정 마리아께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너그러이 승낙하시자 곧바로 인간적이고 신적인 사랑으로 고동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의 말대로,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율법의 희생제물과 봉헌물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번제물과 속죄의 제물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단 한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64. 그분께서 나자렛의 집에서 고된 목수일을 하시면서 지극히 다정하신 어머니와 양아버지 성 요셉에게 순종하며 친교를 나누셨을 때도 그분께서는 인간적 의지의 애정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룬 사랑으로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2) 그분의 공생활에서······

65.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동안, 곧 긴 사도적 여행에서, 죽은 이를 무덤에서 불러내시거나 온갖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며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실 때, 고통을 견디실 때, 피로와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으실 때, 밤을 지새며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실 때, 설교하실 때, 특히 잃었던 은전과 한 마리 양, 탕자의 비유와 같이 자비에 관한 비유들을 말씀하시고 설명하실 때, 그분께서는 본인이 말씀드렸던 바로 그 삼중적 사랑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행위와 말씀들에서 하느님의 성심 자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들에서 하느님의 성심을 배우십시오. 그리하면 영원한 것들을 더욱 열렬히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6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께서는 그분의 입술에서 지극히 열절한 사랑의 말씀이 나올 때 한층 절박한 사랑으로 움직였습니다. 예를 들어, 지치고 배고픈 군중들을 바라보시며 그분께서는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참 보기에 안됐다.” 그리고 죄로 눈이 멀어 파멸을 향해 치닫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예루살렘 시를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신성을 모독하는 상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시자 그분의 성심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거룩한 분노로 고동쳤고 상인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고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 로 만들었다.”

3)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서······

67. 그러나 예수님께서 혹독한 고통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끼셨을 때, 그분의 성심은 다가올 고통과 죽음에 대하여 자연스런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두려움이 뒤섞인 더욱 강렬한 사랑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리고 배반자에게서 입맞춤의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지극한 슬픔에 잠기셨지만 사랑으로 이겨내시고 당신을 처형자들에게 넘겨주려고 하는 완고하고 사악한 배반자에게 “친구여, 무엇 때문에 왔느냐?” “유다야, 입을 맞추어 사람의 아들을 잡아 넘기려느냐?” 하고 지극히 자비로운 당신 성심의 마지막 초대와 같은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십자가의 부당한 처형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 당신을 위하여 우는 신심 깊은 여인들에게 그분께서는 연민과 깊은 사랑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생나무가 이런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오죽하겠느냐?”
68.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심이 불타는 사랑, 의로움, 연민, 절실한 원의, 흔들림없는 평화 등 갖가지 감정들로 강하게 동요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말씀들이 이러한 감정들을 그대로 나타내 줍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목마르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나. 인류에게 주신 예수 성심의 선물

69. 그려나 그분께서 당신의 가장 큰 선물들 곧 성체성사 안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공유하시는 사제직을 사람들에게 주셨던 그 순간의 무한한 사랑의 표시인 하느님 성심의 고동소리를 누가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1) 성체성사와 사제직

70. 당신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기 전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성사를 제정하시고 피흘림으로써 새로운 계약을 거룩하게 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당신의 성심이 격렬한 감정으로 동요됨을 느끼시고는 그것을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내보이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감정은 다음 순간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
71. 따라서 거룩한 성체성사 – 곧 그분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성사인 동시에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희생 제사-와 사제직은 진정 예수 성심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2) 선물로 주신 당신 어머니

72. 예수 성심의 또 하나 지극히 고귀한 선물은, 본인이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의 사랑하는 어머니이시자 우리가 모두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이신 마리아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육적으로 우리의 구세주를 낳으셨고, 그분과 하나 되어 하와의 자손들을 하느님 은총의 생명으로 소생케 하심으로써 전인류의 영적 어머니로서 마땅한 칭송을 받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분께서는 구세주의 지체들(곧 우리들)의 어머니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머리의 지체들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사랑으로 구세주와 함께 고통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73.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깊고 무한한 사랑의 으뜸가는 증거로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피 없는 선물과 십자가의 피의 희생을 일치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고한 사랑의 표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것을 사랑의 극치로 당신 제자들에게 제시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74.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해골산의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 자신의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많은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사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은 처형자들의 폭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말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그분의 자발적이고 전적인 봉헌은 인간 각자에게 주신 그분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다. 찔리신 예수 성심의 상징적 의미

75. 예수 성심은 육화된 말씀의 일생에 깊이 함께하며, 그런 이유에서 신성의 도구와 같은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은총 사업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사업을 수행할 때 그분의 성심은 그분의 다른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그 무한한 사랑의 진정한 상징인 것입니다.

1) 당신 교회와 맺은 신비적 혼인

76. 이 사랑의 힘으로, 우리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 당신 교회와 하나로 결합되셨습니다. “사랑으로 그분께서는 당신 교회와 혼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구원의 피를 받은 교회가 탄생하였고, 거기에서 성사의 풍성한 은총의 강물이 흘러나와 교회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을 마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한 전례에서 읽게 되는 것과 같이 “찔리신 심장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 성심에서 은총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2)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상

77. 이 상징의 의미에 대해서는 초기교회의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에게까지도 알려져 있었으며,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들의 말을 일부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죄를 씻는 물과 속죄를 위한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피는 성체성사와 연관되며, 물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를 씻는 힘을 가진 세례성사와 연관됩니다.”
78. 여기서 병사의 창에 찔린 상처로 열려진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대한 언급은 창날이 닿았던 것이 분명한 심장에 관해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병사가 창으로 심장을 찔렀던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돌아가셨는지를 정확히 확인해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지상생활을 마치셨으므로, 지극히 거룩한 예수 성심의 상처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보내셨던 그 자발적 사랑의 표상으로,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표현으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해골산의 피의 희생제물로 바치신 그 자발적 사랑의 두드러진 표상으로 세세대대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라. 예수 성심은 천상에서도 당신 교회를 계속 사랑하십니다

79.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몸으로 하늘에 올라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신 뒤에도, 고동치는 당신 성심의 불타는 사랑으로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계속 머무르셨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당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악마와 죄와 죽음을 이기신 삼중의 승리를 나타내는 영광스런 상처 자국들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80. 그분께서는 또한 당신 공로의 무한한 보화인 삼중의 승리의 결실들을 지극히 고귀한 성궤에 간직하듯 당신 성심 안에 간직하고 계시며, 구원된 인류에게 그것을 너그러이 내어주십니다. 이것은 위로가 넘치는 진리로서, 이방인들의 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라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1) 성령의 선물

81. 당신 사도들에게 보내주신 성령의 선물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승리의 승천을 하신 뒤에 보여주신 풍성한 사랑의 첫번째 두드러진 표징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최후의 만찬 때 하신 이 약속 말씀에 따라, 승천 열흘 뒤에 천상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다락방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 인격적인 사랑이신 이 협조자는 그 두 분께서 보내셨으며, 불의 혀 모양으로 나타나시어 제자들의 영혼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다른 천상 선물들을 풍성히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2) 예수 성심의 선물인 하느님의 사랑

82. 이렇게 쏟아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은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구세주의 성심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성부와 성자의 영이시며, 그 영을 통하여 교회와 놀라운 교회 확장의 기원이 우상 숭배와 가족간의 증오, 도덕의 타락과 폭력으로 얼룩진 모든 이교도들에게 드러납니다.

3) 모든 은총의 근원인 하느님의 사랑

83.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심과 그분 성령의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이 사도들과 순교자들에게 불굴의 정신과 힘을 주시어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그것을 증언하려고 죽을 때까지 영웅처럼 싸우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학자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설명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심어준 것도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증거자들의 덕을 강화하고, 그들에게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자기 자신들의 구원에도 유익하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도 도움이 되는 그런 훌륭한 일들을 하도록 고무하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사랑은 동정녀들에게 감각적인 쾌락들을 기꺼이 물리치고 그들의 천상 배필의 사랑에 완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84. 이방인들의 사도는 육화된 말씀의 성심에서 흘러넘쳐 성령의 도움으로 모든 믿는 이들의 영혼에 쏟아부어지는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공경을 표하려고, 사람들 가운데 사랑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방해하는 그 모든 것들을 이기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신비체의 지체들의 승리를 선포하는 승리가를 불렀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마.결 론

1) 성심을 사랑의 상징이자 원천으로 경배할 수 있습니다

85. 그러므로 인류를 위하여 타오르는 구세주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의 자연스럽고 풍부한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우리가 공경하는 것을 그 무엇도 막지 못합니다. 이제 성심은 더 이상 지상생활의 갖가지 감정들의 지배를 받지는 않지만 아직도 살아서 고동치며, 육화된 말씀의 위격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고,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지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심은 인간적이며 신적인 사랑으로 넘쳐흐르고 우리의 구세주께서 당신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얻으신 모든 은총의 보화로 풍성하므로, 그분의 성령께서 당신 신비체의 모든 지체들에게 부어주시는 그 사랑의 영원한 원천인 것입니다.

2) 성심은 구원 신비의 요약입니다

86.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우리 구세주의 성심은 말씀의 신적 위격의 표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인간적 본성과 신적 본성이라는 그분의 이중 본성의 표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구원의 완전한 신비의 상징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그 요약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흠숭할 때 우리는 성심 안에서 성심을 통하여 하느님 말씀의 자존적(自存的) 사랑과 인간적 사랑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감정들과 성덕들을 다 같이 흠숭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 사랑이 우리 구세주를 움직여 그분께서 우리와 당신 배필인 보편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의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 예수 성심은 성부와 함께 강력한 옹호자이십니다

87. 그리스도께서는 본인이 말씀 드린 그 삼중의 사랑으로 전과 다름없이 지금도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의 옹호자로서 “항상 살아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중개자의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 당신 아버지의 은총과 자비를 얻어주십니다. 변함없는 그 사랑에서 나와 성부께로 향하는 그 기도는 결코 그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천상 영광에 싸여서도 당신의 천상 아버지께 똑같이 유효하게 청원을 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로마 병사의 창에 찔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보다 더욱 강렬한 사랑으로 고동치는 당신의 상처입은 살아있는 심장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의 심장이) 상처를 입으신 것은,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해서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상처를 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88.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천상 아버지께서 그처럼 강력한 옹호자이신 그분의 간곡한 탄원을 들으시면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천상 은총을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제 4 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기원과 발전

89.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이와 같은 일반적 개요를 통하여 본인은 교리의 으뜸가는 근원인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밝혀진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께 대한 신심의 내적 본질과 성심에서 샘솟는 끝없는 보화들을 여러분과 신자들에게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복음의 빛으로 인도를 받은 본인의 해설은, 요약해서 표현된 이 신심이 육화된 말씀의 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에 대한 신심이며 죄 많은 인간들을 돌보시는 천상 성부와 성령의 사랑에 대한 신심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가 가르치고 있듯이,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사랑이야말로 인간 구원의 근원이며,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와 그분의 흠숭하올 성심 안으로 넘치도록 흘러 들어가, 그분께서 그 사랑의 충동으로 우리를 죄의 올가미에서 구원하시려고 당신 피를 쏟으시도록 하였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가. 이 신심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90.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의 찔리신 심장의 거룩한 상징을 통하여 본인이 권장하고 있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신심은 최근에 들어서야 더욱 분명히 알려지게 되었고 전 교회에 놀라우리만큼 확산되었지만, 신자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심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 천상 선물을 풍성히 내려주시고 이 신심의 특별한 전달자요 선구자로 뽑으셨던 몇몇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님 친히 이 천상 비밀을 은밀히 계시해 주신 뒤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1) 이 신심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에 대한 신심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91.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어머니와 사도들과 위대한 교회 교부들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인성과 특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통을 감내하시는 중에 입으신 그분 몸의 찢겨진 상처에 대하여 감사와 흠숭과 사랑의 신심을 실천해 왔던, 하느님께 특별히 봉헌된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92. 나아가, 토마스 사도의 말, 곧 불신자에서 충실한 제자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외침 속에는 주님의 상처 입은 인성이 신격의 위엄으로 고양되는, 믿음과 찬미와 사랑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93. 그러나 성 요한 복음사가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가리켜 인용한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즈가리야 예언자의 말이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이래, 사람들이 구세주의 찔리신 심장에 깊은 감동을 받아 인류를 감싸 안아주시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공경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육화된 말씀 안에 존재하는 인간적이고 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성심께 대한 특별한 신심 공경은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2) 현대의 신심의 선구자들

94.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이 신심의 더욱 중요한 단계들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도 단체들 안에서 서서히 개별적으로 점점 더 많은 힘을 모아갔던 이 신심 형태의 선각자들로서, 이 방면에서 특별한 명성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수립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몇 사람을 예로 들자면, 성 보나벤투라. 성 대 알베르토, 성녀 제르트루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복자 헨리 수소, 성 베드로 가니시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등입니다. 성 요한 에우데스는 예수 성심을 위하여 처음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한 장본인으로서, 프랑스의 많은 주교들의 인준을 받아 1672년 10월 20일에 최초로 예수 성심 축일을 지냈습니다.

3)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95. 그러나 이 탁월한 신심 형태를 키워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분명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입니다. 알라코크 성녀는 복자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의 영성 지도를 받았으며, 신심 사업에서도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성녀는, 신자들을 크게 교화시키면서 확장되고 발전한 이 신심의 진정한 의미가 확립되어 사랑과 보상이라는 특성을 통하여 여타 그리스도교 신심 형태들과 구별되도록 하려는 비상한 열의에 불타 올랐습니다.

나. 이 신심의 발전은 교리와 이루는 일치에서 비롯됩니다

1)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사적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96.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경이로운 발전은 그것이 사랑의 신심이었기에, 그리스도교 신심의 본질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의 기록을 상기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이 신심이 하느님의 어떤 사적 계시에서 비롯되었으며 교회에 갑자기 나타난 신심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천상 선물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불타는 신심과 활발한 신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흠숭하올 구세주와 또한 무한한 그 사랑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라고 보았던 그분의 영광스러운 상처들에 이끌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내리신 계시의 중요성

97. 따라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내리신 계시는 가톨릭 교리에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계시의 중요성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심을 열어 보이시면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고 그에 대한 신심을 키우도록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시고자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 특별한 발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듭 분명한 말씀으로 사람들이 당신 사랑을 알고 인정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이끌어줄 상징으로 당신의 성심을 가리키셨습니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성심을 우리 시대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자비와 은총의 표시 또는 보증으로 세우셨습니다.

3) 예수 성심 축일은 성녀의 기록 이전에 승인되었습니다

98. 더구나 이 신심이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핵심적 토대에서 나온다는 것은 교황청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의 기록을 인가하기 전에 이미 전례 축일을 승인하였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예부성성은, 하느님의 어떤 사적 계시를 그대로 참작하기보다는 오히려 너그러이 신자들의 청원에 따라, 본인의 선임자인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그해 2월 6일 승인한 1765년 1월 25일자 교령을 통하여, 폴란드의 주교들과 로마의 예수 성심회라 불렸던 단체에 이 축일의 전례 거행을 허락하였습니다. 교황청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번성하고 있던 이 신심의 확산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신심의 목적이 “이 상징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구세주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희생제물로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4) 보편교회의 축일로 확산

99. 일종의 특권으로 허락되고 어느 정도는 제한이 있었던 이 최초의 승인에 이어, 약 1세기 뒤에는 훨씬 더 중대한 승인이 뒤따랐으며 더욱 장엄한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앞에서 말씀드렸던 1856년 8월 23일자 예부성성의 교령을 말합니다. 본인의 선임자였던 교황 비오 9세는 프랑스 주교들과 거의 모든 가톨릭 세계의 기도에 응하시어, 이 교령을 통하여 예수 성심 축일을 보편교회로까지 확대하였으며 이날을 엄숙하게 지킬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성심 축일 전례에서 봉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칭송받을 만한 행위였습니다. “그때부터 성심께 대한 신심은 모든 장애물을 휩쓸어 내리는 격류처럼 전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100.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명백해진 것은, 신자들이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본질을 통찰하고 깊이 묵상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열의를 북돋우고 키워 나가기 위한 자양분을 얻고자 한다면, 그들은 깊고 더럽혀지지 않은 샘물에서처럼 성서와 전승 그리고 거룩한 전례에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계속 실천해 나간다면, 신자들의 영혼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미로운 지식을 얻을 것입니다. 개인적 체험으로 이를 알고 있었던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립니다. 넘쳐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은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하느님의 충만성의 가장 명확한 표상입니다. 그것은 곧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자비의 충만성을 말합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 성심 공경의 영성적 특성

1) 이 신심은 물적인 것이 아닙니다

101. 그러므로 인류의 스승인 교회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과 관련된 공식 문서를 처음 발표했을 당시부터 이 신심의 본질적 요소들, 곧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공경하는 사랑과 보상 행위들이 결코 이른바 “물질주의”에 물들거나 미신의 독소로 얼룩지지 않았다는 것을 언제나 확신하여 왔습니다. 오히려 이 신심은 구세주께서 친히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실 때 예언하신 진정한 영적 예배와 완전히 일치하는 신심 형태인 것입니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2) 이 신심은 하느님께 대한 내적 사랑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102. 그러므로, 예수님 육체의 심장에 대한 묵상이 하느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고 완덕의 길을 가는 사람을 제지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그릇된 신비적 교리를 강력히 반대합니다. 교회는 본인의 선임자인 인노첸시오 11세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어리석은 주장을 하는 자들의 오류를 배격하였습니다. “(이처럼 내면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나 성인들 또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사랑을 표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로 향한 사랑은 감각적인 것이다. 그 대상 역시 감각적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복되신 동정녀나 성인들을 비롯해 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가슴속에 자리잡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느님 홀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소유하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 성심의 표상이 그분의 인간적인 사랑만을 나타내며, 오로지 신성에만 유보되는 흠숭의 공경이 새로운 기초 위에서처럼 그 표상 속에 자리잡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표상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석은 이 표상들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게 한정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 표장에 대한 그릇된 해석은 단죄받아야 합니다

103. 가톨릭 신학자들의 생각과 가르침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인 성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종교적 예배는 표상 그 자체 곧 사물들에게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육화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예배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표상들에 대한 접근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이 상징하는 바를 향하여 계속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표상들에 종교적 흠숭을 바친다고 해도, 최고의 예배나 신덕에 등급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표상이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던 혹독한 고통의 유물이든 또는 효능과 의미에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표상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찔리신 심장과 같은 특별한 표상이든,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표상들을 향하여 바쳐지는 신심은 그것의 궁극적 대상인 하느님의 말씀의 위격에 바쳐지는 것입니다.

4) 성심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합니다

104.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 의미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과 같은 유형적인 것에서 감각으로만 그 사랑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힘입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그 심장에 주입된 천상 사랑을 고찰하고 흠숭하며, 더나아가 감미롭고 숭고한 영혼의 움직임을 통하여, 육화된 말씀의 신적인 사랑을 묵상하고 흠숭히는 차원에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지당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적이며 신적인 두 가지 본성이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음을 믿는 우리의 신앙에 따라, 예수님의 육체의 심장에서 느끼는 사랑과 인간적이며 신적인 그 이중의 영적 사랑을 결합하는 지극히 긴밀한 유대를 마음속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사랑들은 흠숭하올 구세주 하느님의 위격 속에 나란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서로 자연스러운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느낌에서 오는 사랑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적 사랑이 신성의 지배를 받고 또한 우리에게 적절히 신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성심 안에서 이른바 정식 표상, 다시 말해 그분의 신적 사랑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상징을 묵상하고 흠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창조된 표상도 이 사랑의 본질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함께 예수 성심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육화된 말씀의 심장을 통하여 그토록 많은 죄로 얼룩진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사랑의 상징, 곧 그 사랑의 가시적 표지를 흠숭하는 것입니다.
105. 그러므로 지극히 중요하고도 신중을 요하는 교리에서,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심장과 말씀의 위격을 관련짓는 자연스러운 상징의 진리가 인성과 신성의 본질적 결합이라는 근본 진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고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허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릇된 견해를 되살리는 것이며, 교회에서 다시 한번 단죄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견해들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각기 완전하며 별개이지만 하나라는 그리스도 위격의 단일성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라.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최상의 신심 표현입니다

1) 이 신심은 우리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106. 일단 이러한 본질적 진리가 수립되면, 우리는 예수 성심이 육화된 말씀이신 하느님 위격의 심장이며, 우리를 감싸 주었고 지금도 감싸 주고 있는 그분의 모든 사랑이 그 심장으로 표현되고 또 우리 눈앞에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성심께 드려야 할 공경은, 외적인 신심 행위에 관한 한, 그리스도교 신심의 최상의 표현으로까지 높여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시며 하느님이신 중개자께 중심을 두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그분 스스로 말씀하시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심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성심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2)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사랑의 신심입니다

107. 이제 우리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셨던 하느님의 그 사랑을 공경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연결시켜 주는 우리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종류의 신심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감사 드리며 그것을 본받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 신심의 목적은 주님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거룩한 유산으로 주신 새 계명을 날마다 더욱 열심히 설천함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께 묶어주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 그 새 계명이 충실히 완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 계명은 참으로 새로운 그리스도의 계명입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신약과 구약의 차이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말처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경건한 사랑에 근거하였던 구약의 그 계명은 신약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옛 율법 안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 율법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제 5 부 신자들은 성심께 대한 신심을 연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가. 성심께 대한 신심의 중요성

108. 본인은 지금까지 이러한 유형의 신심에 대한 개념과 그 신심이 그리스도교 생활에서 갖는 장점을 다루어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세 번 사랑을 고백한 후에 최초로 그에게 위탁되었던 그 교황직에 힘입어, 이제 본인이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위로로 가득 찬 주제를 여러분의 고찰에 맡겼으니,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과 그리스도 안의 친애하는 모든 신자들께서는 지극히 훌륭한 이 신심 형태를 육성하는 데 더욱 왕성한 열의를 기울여주시기를 다시 한번 권고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그 신심에서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본인은 믿기 때문입니다.

1) 평범하지 않은 신심 형태

109. 사실상, 찔리신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기초를 형성하고있는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깊이 숙고한다면, 우리가 다루는 신심 형태는 누구든지 자기 기분에 따라 별 중요성 없이 취급해도 되거나 다른 것들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제쳐놓아도 될 그런 평범한 형태의 신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완성에 도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신앙 행위라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널리 인정된 신학적 개념처럼 “신심이란 하느님을 위하여 흔쾌히 자기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사랑에 바쳐지는 예배보다 더 의무적이고 필요하며 동시에 더 탁월하고 매력적인 예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에 경의를 표하고 그 사랑을 위하여 바치는 예배보다 더 하느님을 즐겁게하고 만족시켜 드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유로이 바치는 예배는 어떤 의미에서는 선물이며, 그중 사랑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선물로서, 그 선물을 통해서 다른 모든 선물들이 거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제의하시고 교횡들이 인가한······

110. 따라서 이러한 신심 형태는 사람이 하느님을 더욱 공경하고 사랑하며 더욱 쉽고 지체없이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바치는 수단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구세주께서 직접 제의하시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신 것이고 교황들 또한 길이 기억될 공표된 문서들을 통하여 옹호하고 높이 칭송한 신심 형태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신 이 탁월한 은혜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경솔하고 해로운 행동이며, 또한 하느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행동입니다.

3)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임무를 완수합니다

111. 그러므로 구세주의 성심을 공경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그들 의무의 많은 부분을 완수하고 있으며, 동시에 심적인 애정 면에서나 의적인 삶의 활동 면에서 그들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분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4) 외면적인 신심 행위가 첫째가는 것은 아닙니다

112. 그 밖에도 성심을 공경하는 신자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의 영혼과 육체와 관련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을 위하여 그분께 경의를 표하고, 그분의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며,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전체적인 그리스도교 신앙 정신과 일치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있는 일이지만 일리가 없지 않은 것은, 이 뛰어난 형태의 신심을 잘못 이해한다거나 그릇된 방법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지나친 자애심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나타내는 데에 외면적인 신심 행위가 첫째가는 것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깊이 인식하십시오. 또한 이 신심의 정수는 거기에서 얻게 되는 은혜에서 우선적으로 발견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적 계시를 통하여 그러한 은혜들을 엄숙히 약속하셨다면, 그것은 인간들이 가톨릭 신앙의 주요한 의무인 사랑과 보속을 더욱 큰 열의로써 수행하고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영성적 유익을 위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취하도록 고무하실 목적에서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모든 이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실천해야 합니다

1) 이 신심은 확고하고 인가된 결실 풍부한 것입니다

113. 그러므로 본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친애하는 모든 자녀들, 곧 구세주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의 물을 마시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과 특히 멀리서 주저하며 관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신심을 열심히 받이들이도록 촉구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강력한 힘을 지녀왔고 복음 말씀에 확고하게 기초를 둔 신심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신심은 전승과 거룩한 전례에서 명백한 지지를 받았고, 로마 교황들에게도 자주 아낌없는 칭송을 받아왔습니다. 로마 교황들은 구세주의 지극히 거룩한 성심을 기념하는 축일을 세우고 보편교회로 그것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그 성심께 전인류를 봉헌하는 장엄한 봉헌 예식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114. 더 나아가, 이 신심이 교회에 가져다 준 풍성하고 기쁜 열매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되돌아왔으며,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더욱 활발해졌고 우리의 지극히 사랑하올 구세주와 신자들 사이의 유대는 더욱 긴밀해졌습니다. 특히 최근 몇십 년간 이 모든 은혜들이 수적으로 더욱 증가하였고 더욱 놀라운 의미로 본인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2) 이 신심이 널리 전파되어 실천되고 있음에 대하여 성부께 감사 드립니다

115. 그와 같은 경이로운 광경, 곧 모든 계층의 신자들에게 널리 전파된 예수 성심께 대한 뜨거운 신심을 바라볼 때, 본인의 마음은 감사와 기쁨과 위로로 가득 찹니다. 무궁한 선(善)의 보고이신 구세주께 마땅한 감사를 드렸으니, 이제 본인은 이 신심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공헌해 주신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아버지로서 축하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 교회와 사회에서 절박하게 요구되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

1) 교회의 투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완덕

116.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구원의 결실을 가져왔지만, 교회의 투사가 지상에서, 특히 시민사회에서 교회의 신비적 배필이자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원의에 부응할 만한 신심의 핵심적 완덕에 실제적으로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자녀들이 그들의 수많은 죄와 불완전함으로, 그들 안에 반영되고 있는 어머니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걸맞는 거룩한 행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불행히도 아버지의 집을 버렸던 죄인들이 모두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에 합당하게 영혼의 배필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 그들 손가락에 반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아직은 모든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일원으로 모여든 것도 아닙니다.

2) 호전적인 무신론이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117. 더 나아가, 선한 사람들이 지상 재물에 대한 어리석은 욕망에 현혹되어 그들 영혼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사그라들어 점차 꺼져가는 것을 볼 때 본인은 그들의 나약한 충절에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본인의 마음을 더욱 비통하게 하는 것은 마치 사탄에게서 직접 사주를 받은 듯 하느님께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구세주를 대리하고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는 교황에 대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열을 올려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증오를 드러내고 있는 사악한 자들의 책동입니다. 유명한 밀라노 학자의 말 그대로입니다. “(베드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만 주님께서는 확실히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알려고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당신 사랑의 대리자’로 우리에게 남겨주실 사람을 가르치시고자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118.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 대한 증오나 합법적으로 그분의 대리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고 천상에서 그분의 완전하고 항구한 우애를 영원히 누릴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종류의 죄입니다.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증오 때문에 지고의 선에서 단절되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위 사람들도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둔 모든 것,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는 모든 것, 하느님의 복락으로 이끄는 모든 것, 곧 진리, 덕행, 평화, 정의 등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라.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이러한 악들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입니다

119. 자신을 하느님의 적이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의 수효가 일부 지역에서 늘고 있고, 유물론의 그릇된 표어들이 행동과 논쟁을 통하여 확산되고 있으며, 정당하지 못한 욕구를 위한 지나친 방종이 곳곳에서 찬양되고 있음을 볼 때, 그리스도교 최고의 법이며 참되고 완전한 정의의 가장 확실한 기초이자 평화와 티없는 기쁨의 주요 원천인 사랑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 안에서 그 따스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신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1) 성심께 대한 신심은 현대의 요구에 가장 알맞은 것입니다

120.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그 어느 때보다도 특히 오늘날 개인과 가족과 국가 간에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그 수많은 악들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치료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보다 가톨릭 신앙의 근본 특성에 더 잘 부응하고 오늘날 교회와 인류의 요구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심 형태는 없다고 봅니다. 이 신심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를 향하고 있으니, 어떤 신앙 행위가 이보다 더 탁윌하고 매력적이고 유익하겠습니까? 끝으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통하여 나날이 증대되고 강화되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의 법을 생활 속에 끌어들이도록 신자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의 법을 저버리는 것은 “정의의 활동이 평화를 가져오리라.”고 하신 성령의 명백한 경고 말씀대로 사람들 사이에 그 이름에 합당한 평화를 전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성심께 대한 신심은 인간과 사회의 구원에 가장 알맞은 것입니다

121. 그러므로 본인은 본인의 선임자인 레오 13세의 선례를 따라, 그분이 지난 세기 말경 모든 신자들과 또한 자신들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진심으로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건넨 권고의 말씀을 그리스도 안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다시 한번 전해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하느님 은총의 참된 표징이 또하나 우리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곧 불길 가운데서 눈부신 광채로 빛나는 예수 성심입니다. 그 안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담아야하며, 거기에서 구원을 추구하고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마. 성심은 일치와 구원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122. 마찬가지로 본인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 왕국을 세우려는 노력에 진심으로 동참하는 사람들 모두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 행위를 일치와 구원과 평화의 원천이자 상징으로 생각하기를 간절히 열망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심 행위가 교회의 지도 아래 그리스도인들이 구세주 하느님을 공경해 왔던 다른 형태의 신심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반대입니다. 예수 성심을 향한 열심한 신심 행위는 특히 성 십자가에 대한 신심과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더욱 앙양시키고 발전시키리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녀 제르트루다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명백히 보여주신 계시대로, 예수 성심의 내적인 신비를 알지 못하고는 아무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본인은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내어주시게끔 이끈 사랑의 힘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성체 성심께 대한 신심을 특별히 육성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목적은, 본인의 선임자인 존경하올 레오 13세의 말씀을 인용하면, “우리 구세주께서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머물러 계시고자 당신 성심의 모든 보화를 쏟아서 흠숭하올 성체성사를 세우셨던 지고한 사랑의 행위를 마음속에 상기하는 것입니다.” “성심의 계시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당신 성심의 크신 사랑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체입니다.”

1)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최고의 학교입니다

123. 마지막으로, 하느님과 교회를 증오하는 사람들의 사악한 계획에 맞서 굳건한 방벽을 세우고 동시에 공생활과 사생활에서 사람들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되돌아오도록 인도하고자 하는 진지한 원의에서, 본인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학교라고 서슴없이 단언하는 바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개인과 가족과 민족의 중심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존경하올 본인의 선임자는 다음과 같이 지혜로운 말씀으로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 힘과 형태를 취합니다. 거룩함과 질서를 갖춘 사랑은 그 통치의 기초이자 완성입니다. 그 사랑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곧 불평없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 저급한 인간사를 천상의 원리로 인도하는 것,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우위에 두는 것.”

2)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티없이 깨끗한 성모 성심께 대한 신심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124.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한 성심께 대한 신심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전인류에게 풍성한 은총이 흘러 나오도록 신자들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천주 성모의 티없이 깨끗한 성심께 대한 신심과 밀접히 결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류 구원사업을 수행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통에서 샘솟아 나왔고 그 사랑과 고통에는 그분 어머니의 사랑과 슬픔이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하느님의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성심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고, 그들 천상 어머니의 지극히 사랑하올 성심께도 그에 부응하는 신심과 애정, 감사와 보속 행위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옳을 것입니다. 저희 교황들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께 거룩한 교회와 전세계를 엄숙히 봉헌했던 기억될 만한 봉헌 행위는 하느님 섭리의 지극히 감미롭고 지혜로운 안배에 전적으로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회칙의 결론

125.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본인의 선임자인 비오 9세의 명에 따라 보편교회가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낸 지 올해로 100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본인은 전세계 모든 신자들이 예수 성심께 공적인 공경과 감사와 보속 행위를 바침으로써 이 백주년을 기억하고 경축할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의 사랑과 기도의 끈으로 연결되겠지만, 하느님 뜻의 안배에 따라 한 거룩한 성녀가 이 길을 가르쳐주었고 또한 이 신심의 꾸준한 선구자가 되었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적 기쁨과 신심이 담긴 의식들을 특별한 종교적 열의로 거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126. 한편, 본인의 설명에 따라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정확히 이해되고 적극적으로 실천되기만 한다면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교회 안에 풍성히 열매 맺으리라 확신하면서 본인은 그러한 영적 열매들을 미리 예견하며 달콤한 희망에 부풀어 하느님께 본인의 이 간절한 열망을 당신 은총의 힘으로 자비로이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금년에 계획된 경축 행사를 통하여 하느님 은혜의 징표인 그분의 감화로써 예수 성심께 대한 신자들의 사랑이 나날이 더욱 증가되고 감미롭고 지고한 사랑의 나라가 전세계 곳곳에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이며 은총과 성화의 나라이고 정의와 평화의 나라”입니다.
127.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그 은총의 보증으로서 본인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책임에 맡겨진 신부들과 신자들, 특히 헌신적인 노력으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육성 발전시키시는 분들께 마음을 다하여 본인의 사도적 축복을 보냅니다.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18년,
1956년 5월 15일
교황 비오 1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