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감으로 저희의 모든 행동을 이끌어 주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그것을 완성해 주소서. 저희의 모든 기도와 모든 일이 당신에게서 시작되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완성되게 하소서. 아멘. 천상 은총의 어머니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우리는 거룩함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사실 다음 주말에는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성인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막상 ‘성인이란 무엇인가’를 실제로 정의해 주는 설명은 거의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그것부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덕에는 여러 정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가장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습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진정한 거룩함인지 분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성인이란 ‘성화의 완전함’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옛 영성가들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은 성인을 바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성화의 완전함에 이르렀다.” 그러면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성화의 완전함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정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이든 제대로 정의하지 않으면 개념이 모호해지고, 결국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화의 완전함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풍성한 은총, 그리고 모든 덕으로 영혼이 아름답게 꾸며진 상태 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목표입니다. 풍성한 은총과, 모든 덕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영혼. 여기서 ‘풍성함(excellence)’이란 단지 조금 갖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생활에서 평범함이나 적당함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목표가 겨우 평범한 수준에 머무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뜨겁거나 차갑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진지하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적당한 수준에 머무는 것이, 그 근본에서는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안락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조금 뒤 강의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적 생활에서 어느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대개는 대죄를 짓지 않게 되는 단계에 이르면 거기서 멈춰 버립니다.
가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이렇게 형편없는 지도자들만 있는 걸까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받을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도 좋은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통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나라에서 결혼 전에 동거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98%입니다. 가톨릭 신자만 따로 보면 97%입니다. 통계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이처럼 가톨릭 신자들이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하면, 결국 일반적으로는, 물론 여기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반드시 그렇다는 뜻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습관적으로 대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성화와 완전함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풍성한 은총과 풍성한 덕이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은총을 풍성히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은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성화은총입니다. 성 토마스는 성화은총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험은 없습니다…아니, 있기는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시험이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은 걱정하지 맙시다. 성 토마스는 성화은총을 “영혼의 본질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적 습성(entitative habit)으로서, 이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일까요? ‘존재적 습성’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본성상 철저히 타락한 존재이며 결코 변화될 수 없고, 하느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다르게 바라보실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사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종교 체계 전체는, 인간은 실제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존재적 습성’이란, 우리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서, 우리가 성화은총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존재 자체가 질적으로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성인들이 우리의 영혼을 바라보실 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어떤 것을 그 안에서 보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은총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이십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조금 이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선 자체 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선은 하느님을 어떤 방식으로든 닮고, 하느님 안에 참여하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선의 기준은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느님의 선하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는 한에서 그 사람에게 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이 내주(內住)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은 질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토마스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당신의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능력을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화은총입니다.
성화은총은 우리를 하느님을 닮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 사이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 대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그 차이를 압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네 행동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선을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참된 선을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기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하느님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성화은총이 이루어 줍니다. 성화은총은 우리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존재로 만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시며, 실제로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옛 신학자들은 성화은총을 ‘구원하는 일치’라고도 불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 은총의 상태에서 죽는다면,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당신에게서 떼어 놓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언제나 성화은총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온 이유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우리 안에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성화은총이 바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풍성한 은총(excellence in grace)’이라는 것은, 성화은총에도 정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성화은총을 지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도 완전함과 성덕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천국 자체가 하나의 질서와 위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지닌 성화은총의 정도가 그들의 본성에 직접 비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화은총의 상태에 있을 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등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고, 그것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곧 초자연적인 지향을 가지고 행한다면,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성화은총이 실제로 증가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성화은총을 더 많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천국에서 차지하게 될 우리의 자리도 더욱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가, 실제로는 엄청나게 높은 성덕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미국 대통령도 아닙니다. 세계경제포럼의 수장도 아닙니다. 그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성덕이 너무도 뛰어나서, 성덕의 정도에 있어서는 어떤 천사들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상을 받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처럼 달려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성화은총에 관한 한, 가능한 한 많이 얻으십시오. 욕심을 내십시오. 성화은총은 많이 가질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가질수록 하느님 마음에 더욱 드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이 될수록,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은 더욱 큰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사실 하느님도 이 점에서는 우리와 다르지 않으십니다. 가족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기뻐할수록, 그 사람이 부탁하는 것을 더 잘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더 거룩할수록, 여러분 안의 성화은총은 더 큰 공로를 낳습니다. 따라서 같은 선행을 하더라도, 성화은총이 많은 사람은 더 큰 상급을 받습니다. 성화은총의 정도가 기도의 효력을 얼마나 좌우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는 성모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모님의 단 한 번의 탄식, 그저 한 번의 한숨만이라도, 모든 성인들의 모든 선행과 모든 순교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공로를 지닌다.” 성모님의 성화은총은 모든 지성적 피조물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더 뛰어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무엇이든 청하시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주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너무나 신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한 번도 하느님의 마음을 거슬러 죄를 지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께서 청하시는 것을 그대로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면 거룩할수록 그 기도는 더욱 큰 효력을 지닙니다. 얼마 전 한 사제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몇몇 신부님들이 이 점에 대해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 이것은 제 개인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 전체가 언제나 가르쳐 온 내용입니다.” 참 흥미로운 일입니다. 50년 동안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내용을 말해 주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런 생각은 어디서 해 오셨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여기 계신 신부님들 가운데 한 분이 미사를 봉헌해야 하는데, 직접 봉헌할 수는 없고 다른 신부님께 미사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선택권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한 분은 비오 신부께서 미사를 봉헌해 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방에 계신 다른 어느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한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불공평한 비교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공평한 비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일을 이루고, 하느님께 어떤 은총을 얻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가장 거룩한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거나 그 일을 맡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 그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더 높여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풍성한 은총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우리를 하느님과 닮게 만들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는 이 성화은총은 끝없이 계속 증가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더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곧 조금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우리 영혼에는 결점이 하나씩 더해집니다. 이 결점들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덜 완전해지므로, 그만큼 하느님께서도 그것을 덜 기뻐하시게 됩니다. 반대로 성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하느님의 마음을 거스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는 언제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성화은총을 증가시켰고, 덕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생 동안, 성모님께서 하신 모든 행동은 예외 없이 덕을 더욱 성장시켰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에서 모든 덕의 충만함, 곧 모든 덕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상태를 지니신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 두 분뿐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완전한 사랑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인간처럼 여러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사랑(애덕)만 완전하면 됩니다. 다른 덕들을 인간처럼 완성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화은총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이란 무엇입니까? 덕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가지가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의도적으로 덕의 삶을 쌓아 가지 않는 한 결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성덕에 이르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가끔 한 시간 성체조배를 한다고 해서,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성덕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내 덕은 지금 어느 정도인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더 길러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덕을 모두 합하면 64가지라고 합니다. 물론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조금 달라질 수 있지만, 보통 64가지 덕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단계는 획득덕(acquired virtues)입니다. 즉, 신중(Prudence), 절제(Temperance), 용기(Fortitude), 정의(Justice) 입니다. 획득덕은 우리 자신이 원인이 되어 기를 수 있는 덕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여 쌓아 갈 수 있는 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향주덕(신학덕)이 가장 높은 덕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자연적인 덕들이 영적 생활의 성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스스로 길러 나갈 수 있는 획득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화은총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초자연적인 윤리덕(supernatural moral virtues)도 함께 부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자연적인 신중이 있고, 자연적인 절제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절제의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치토스를 좋아하지만, 건강에 더 좋으니까 치토스 대신 이 음식을 먹겠다.” 혹은 “치토스 대신 두부를 먹겠다.” 물론 두부가 정말 건강에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요점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자연덕은 우리의 하위 능력을, 믿음의 빛으로 비추어진 올바른 이성에 복종하도록 훈련시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자주 묻습니다. “신부님, 저는 어떤 덕을 길러야 합니까?”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감정이나 욕망에 대해 완전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부분에 덕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여러분을 쉽게 화나게 만든다면, 그것은 최소한 온유(meekness)라는 획득덕조차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덕을 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처럼 획득덕은 자연적인 차원을 다룹니다.
반면, 주입덕(infused virtues)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합니다. 예를 들어 절제를 생각해 봅시다. 단식은 사실 자연적인 차원에서도 하나의 덕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최근에야 간헐적 단식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떠들어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납니다. 마치 엄청난 신기원을 발견한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교회는 오래전부터 단식이 우리에게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육체 건강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단식을 할 때에는, 비록 우리의 하위 능력은 치즈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더라도, 이성과 의지는 ‘옳은 것을 계속 선택하라’는 방향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단식은 우리의 하위 능력을 통제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이 부분은 조금 있다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편 초자연적인 덕들은 하느님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단식의 덕은 건강을 위해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단식하는 것입니다. 또 초자연적인 정의의 덕이라면, 하느님을 위해 어떤 희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덕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가 성화은총의 상태에 있을 때 이러한 덕들을 우리 안에 주입해 주신다면, 우리 모두 그 덕들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고해성사를 보고, 현재 성화은총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내 안에 그런 덕들이 모두 있다면, 왜 나는 완전히 덕스럽게 행동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성 토마스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주입덕은 먼저 그에 해당하는 자연덕이 길러지지 않으면 완전히 작동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삶 안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없습니다. 먼저 그 영역의 자연덕이 형성되어야, 그 위에서 초자연적인 덕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온유(meekness)라는 자연덕이 부족하다면, 초자연적인 온유의 덕도 실제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여러분 안에 주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덕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자연적인 온유의 덕을 길러 가기 시작하면, 성 토마스의 말처럼, 우리의 하위 능력 안에 있던 장애물이 제거됩니다. 그 결과, 더 높은 차원의 덕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더 온유해지고, 더 절제하게 되고, 더 정의롭게 되고, 더 신중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신중(Prudence)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지 못합니다. 덕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교회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덕에 대해 거의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덕을 쌓아 가는 것이 영적 성장의 핵심입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고, 그것을 초자연적인 지향으로, 곧 하느님을 위해 행하며, 또 성화은총의 상태 안에 있다면, 그 순간 내 안의 성화은총은 실제로 증가합니다. 그 결과, 나는 더욱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덕을 참으로 잘 실천하는 단계에 이르려면, 먼저 이러한 하위 차원의 덕들을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부터 확실히 익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영적 생활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덕이 부족한 상태를 다른 말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악습이라고 부릅니다. 또는 결점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편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아내와도 잘 지내지 못합니다. 딸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하위 능력이 아직 이성의 지배에 완전히 복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향주덕(신학덕), 곧 믿음(Faith), 희망(Hope), 사랑(Charity)입니다. 그런데 사랑(애덕)은 언제 완전해질까요? 초자연적인 윤리덕들이 충분히 성장하여 자유롭게 활동하게 될 때까지는 결코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은 예를 들어 절제라는 가장 기본적인 덕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결코 이웃 사랑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덕은 서로 위에 쌓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영적 생활에서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덕들을 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덕을 쌓아야 하고, 악습과 결점을 제거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생활의 정상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영성가들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 생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활 속에서 소죄까지도 뿌리 뽑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요? 영성가들은 내적 생활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능동적 정화의 길(Active Purgative Way)입니다. 이 단계의 핵심은 아주 단순합니다. 죄를 끊고, 자신 안에 있는 이러한 낮은 차원의 덕들을 가능한 한 잘 다듬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큰 손상을 남기는지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해성사를 봤으니 이제 내 일은 끝났다. 더 할 일은 없다. 나는 이제 성화은총의 상태에 있으니 괜찮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죄의 책임은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정의의 법정에서는 더 이상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법을 어긴 죄책은 실제로 용서되었습니다. 그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를 때마다, 우리의 이성은 더욱 어두워지고, 우리의 하위 능력들은 사물을 잘못된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기울어지며, 우리의 하위 능력 전체가 무질서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정말 엉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엉망인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단순히 “이제 죄를 그만두면 모든 것이 저절로 사라지겠지.”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능동적 정화의 길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결점을 하나씩 제거해 나갑니다. 그리고 결국 가능한 범위 안에서 죄를 끊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아주 가끔 실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생활 속에서 소죄조차 거의 범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능력들을 너무나 깊이 무질서하게 만들고, 우리의 의지까지도 어지럽혀 놓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같은 정화의 과정 안에서 다음 단계로 이끄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동적 정화의 길(Passive Purgative Way)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깊은 영적 어둠과 커다란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남아 있는 모든 결점들을 완전히 정화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이러한 수동적 정화를 반드시 행하셔야 하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기(mortification)의 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극기란 고난을 잘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기(Fortitude)라는 덕에 속한 하위 덕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덕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이 성덕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때 자주 말하는 한 가지 징표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했지만,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거두신다면 자신은 여전히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극기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들이 아직 완전히 단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큰 고난은 잘 참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작은 일에서는 쉽게 무너집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아이가 방으로 뛰어 들어옵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아이는 계속해서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고 한참을 부릅니다. 1분이 넘도록 계속 그럽니다. 결국 엄마가 참지 못하고 “왜!”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대로 도망가 버립니다. 제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겉으로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더라도, 마음속 평화는 이미 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 안에 아직 질서가 부족하다는 표시입니다. 평화란 무엇입니까? 평화의 정의는 ‘질서가 가져오는 고요함(Tranquility of Order)’입니다. 곧 내적 생활의 모든 것이 완전히 질서를 이루고 있을 때, 비로소 평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몹시 짜증 나게 하는 일을 하더라도, 평소 같으면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마음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적인 힘만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극기의 시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그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완전히 정화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정화를 끝내지 못한다면 연옥에서 그것을 겪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 다음이 조명의 길(Illuminative Way)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심지어 하느님을 기억하는 능력조차 거두어 가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능력도, 하느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들도, 모두 벗겨져 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개념들이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 요한은 말합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의 참모습에 비하면 너무나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것들마저도 거두어 가십니다. 그 결과 사람은 엄청난 영적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애덕(Charity)은 오히려 크게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결점들이 정화되어 가면서 애덕은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이전보다 훨씬 더 하느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너무나 갈망하지만, 그분을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참된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직접 부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은 평범한 기도의 삶에서, 곧 조금 뒤에 이야기할 신비적 기도의 삶으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은 어떤 여성이 이야기하는 것을 약 10분 동안 듣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느님은 이러실 거예요.” “제 생각에는 하느님은 저러실 거예요.” “저는 하느님이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저는 하느님이 저렇게 하실 것 같아요.” 이런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10분쯤 듣고 나니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시는구나.’ 그래서 저는 속으로 성령께 기도했습니다. “성령님, 제가 이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말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때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은총이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쭤보면 어떨까요?” 그분은 저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참신한 생각이네요.” 그래서 저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직접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왜 중요할까요? 만일 여러분의 목표가 하느님이라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조준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표적을 맞힐 수 없습니다. 정확한 각도로 조준경을 바라보고, 정확하게 목표를 맞추어야 합니다. 성 토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적인 하느님께서 수단을 결정하신다. 다시 말해, 목적이 곧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는 데 필요한 수단을 완전하게 계시해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궁극적인 목적이신 하느님에 대해, 그리고 그 목적에 이르는 길에 대해, 완전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길이십니다. 이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를 맞추어야 한다는 뜻이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맞추셔야 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종교는 각자가 선택하는 것이다.” 라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에 관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것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따라야 할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단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이 전체 구조 속에서, 두 번째 단계인 조명의 길(Illuminative Way)에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고, 우리 마음 안에 당신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일치의 길(Unitive Way)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너무나 무질서해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의지를 정화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맞추시는 것입니다. 이 세 단계를 거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 세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이 세 단계가 기도의 아홉 단계와 정확하게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홉 단계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우선 처음 네 단계만 말씀드려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구송기도(vocal prayer)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다음이 묵상기도(mental prayer)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묵상기도에는 입으로 하는 말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상상력과 생각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어떤 완전성을 묵상하고,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기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인 애정기도(affective prayer)로 나아갑니다. 성인들은 이 기도의 단계에서는 의지가 중심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 마음속에서 불타오릅니다. 사람은 그저 하느님과 함께 있고 싶고,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고 싶고, 그분과 함께 머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다음이 단순기도(Prayer of Simplicity)입니다.
보통 우리가 묵상할 때는, 하느님을 여러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고, 저것도 생각해 보고, 이런저런 측면을 차례로 묵상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점점 더 거룩해지고, 네 번째 기도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아직 다섯 번째인 신비적 관상(Mystical Contemplation)에도 이르지 않았습니다.) 단순기도에서는 지성이 오랫동안 같은 대상 위에 머물게 됩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께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모든 과정이 필요할까요? 이유를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내와 단둘이 방 안에 있다고 합시다.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여러분을 가끔 한 번씩만 힐끗 바라볼 뿐, 계속 방 안 여기저기만 둘러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일을 하러 가는 게 낫겠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이 온전히 우리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다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온전한 집중과 온전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덕을 기르는 것과, 성화의 문제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의 묵상이 여러 생각으로 흩어지는 이유는, 우리의 하위 능력이 아직 충분한 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위 능력들이 계속 지성을 방해합니다. 그 결과 지성은 오랫동안 한 대상에 집중해 머물지 못합니다. 따라서 묵상기도 안에서 성장하고, 기도의 여러 단계를 올라가기 시작하려면, 먼저 묵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묵상은 모든 기도의 아홉 단계를 향한 입구라고 말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 단계인 변모의 일치(Transforming Union)에 이르면, 사람은 자신의 신분과 직분에 따른 모든 의무를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신비적인 기도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고 싶다면, 성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께서는 성육신을 받아들이신 순간부터 이미 그러한 상태에 계셨습니다. 또한 성 요셉도 성모님을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러한 은총을 받았다고 합니다. 보다 현대적인 예를 보고 싶다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생애를 읽어 보십시오. 그녀는 스물네 살에 이미 변모의 일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상기도조차 제대로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영적 생활에서 얼마나 나태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우리의 하위 능력 안에 결점이 남아 있으면, 그것이 지성을 계속 산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을 합니다. 묵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냉장고 안에 파이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냅니다. 잠시 다시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아, 내일 잔디가 마르지 않도록 물 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또 떠오릅니다. 이런 식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감정은 원래 하느님을 직접 대상으로 삼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여러 가지 피조물을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감정적인 위로를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감정의 본래 대상은 아닙니다. 따라서 감정을 절제하기 시작하고, 감정이 아직 제대로 질서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곧 덕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묵상을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은 주의력결핍이 있는 산만한 아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뭐라도 해야 해.” “이렇게 가만히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어.”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묵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쉽게 산만해지고, 집중력이 계속 흐트러집니다. 왜냐하면 하위 능력들이 이리저리 사람을 끌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의 여러 단계를 향해 성장하기 시작한다면, 그 기도의 성장은 덕이 얼마나 자라고 있는가에 정확히 비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여러분의 영혼 안에 성화은총이 얼마나 있는가에 정확히 비례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기도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결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며, 그 결점들을 하나씩 없애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점차 더 높은 기도의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여러분이 더욱 거룩해지고 있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은 기도의 높은 단계에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결점을 제거하고, 하위 능력을 바로잡으며, 획득덕을 익히고, 초자연적인 덕들이 여러분 삶 안에서 더욱 우세하게 활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를 의미합니다. 덕을 쌓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걸음은 이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악습과 결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의 성모님께 기도하십시오. ‘제 결점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청하십시오.” 또한 수호천사에게도 물어보십시오. 수호천사는 여러분과 늘 함께합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수호천사에게 당신의 결점을 보여 달라고 청해 보십시오.” 라고 말하면, 대개 일주일에서 한 달쯤 지나 다시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제 안에 문제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면 저는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눈이 먼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수호천사들이 우리 결점을 하나씩 보여 줄 때, 얼마나 기뻐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마 우리가 정말 정신을 차리고 거룩하게 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에게도 무척 기쁜 일일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에 대해서도 성 토마스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기도의 높은 단계에 오르려면, 이러한 결점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 토마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꾸준한 묵상생활 없이는 결코 극복하거나 뿌리 뽑을 수 없는 결점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 안에 오랫동안 고치지 못하고 있는 소죄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규칙적으로 묵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묵상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묵상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묵상을 계속해 나가면,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기도의 여러 단계를 하나씩 올라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위 능력이 모든 덕으로 잘 다듬어지면, 성 토마스는 말합니다. 그 능력들은 이성에 완전히 복종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묵상을 시작할 때, 하위 능력들은 더 이상 시끄럽게 떠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지금 이성이 해야 할 올바른 일은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산만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모든 단계에서 산만함을 경험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를 시작할 때 나타나는 초기의 현상입니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다시 묵상 안으로 아주 쉽게 들어가게 됩니다. 묵상에 매우 익숙한 사람은 다시 그 높은 기도의 단계로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기도는, 물론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제 내적 생활(interior life)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적 생활이란 무엇일까요? 내적 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성화은총(sanctifying grace)입니다. 둘째는 실제은총(actual grace)이 우리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실제은총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실제은총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의 지성과 의지 안에 부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도움으로서, 이를 통하여 지성은 밝아지고 의지는 강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실제은총입니다. 그리고 실제은총이 우리 안에서 더욱 활발하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도 하느님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제가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는데, 여러분은 계속 그것을 무시한다고 합시다. 그것이 바로 은총에 대한 충실함의 결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계속 그렇게 한다면, 결국 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 이상 선물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것을 준 저도 사랑하지 않으며, 계속 저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크고도 가장 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그 은총에 충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이런 은총을 주십니다. “기도생활을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 가서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니야. 그냥 앉아서 폭스 뉴스를 보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제 말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은총에 충실하지 않은 삶을 계속 살아가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람의 영적 성장은 점점 더 늦어지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초자연적인 덕들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덕들이 제대로 활동하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주시는 실제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신중,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초자연적인 윤리덕을 완성하려면, 그리고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향주덕까지도 완성하려면, 은총에 완전히 충실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은총에 대한 완전한 충실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적 생활은 첫째,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성화은총이며, 둘째, 실제은총이 역사하여 모든 덕으로 영혼을 아름답게 꾸며 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길러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이루어야 할 목표입니다. 가끔 제 덕에 관한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신부님 강의를 듣고 나니, 제가 또 하나의 덕이 부족하다는 사실만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바로 영적 생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생활의 출발점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겠구나.” “내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여기 있구나.” 그것을 깨닫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조차 기본적인 이해가 없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 생활을 신비롭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치 ‘무지의 구름’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개 속을 헤매듯,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이끌어 주셔서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적 생활의 원리와 구조는 이미 성인들이 모두 밝혀 놓았습니다. 문제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버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왜 오늘날 성인이 그렇게 드문지를 궁금해합니다.
오늘날 성인이 너무나 적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도들이 예수님께 “마지막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바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제가 지금이 종말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종말의 날짜를 예언하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틀렸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식어 버리고,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문화가 직면한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제 다시 묵상기도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묵상기도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영적 생활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도 분명한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상력을 사용하여 어떤 거룩한 대상, 하느님의 어떤 완전성, 어떤 성인, 그 성인이 지닌 덕, 또는 교회의 어떤 교리를 묵상하고 있다면, 내 마음은 초자연적인 대상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의 하위 능력도 차분해집니다. 감정도 가라앉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초자연적인 대상은 감정이 본래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거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성 토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구는 자기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 움직인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정은 상상 속에 무엇을 그리고 있느냐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상상력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단지 묵상기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아마 다른 강의에서도 이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남자가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를 얻었어. 우리 아내는 정말 아름답고, 성격도 너무 좋고, 우리는 정말 잘 맞아. 결혼이 러시안룰렛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정말 대박을 터뜨린 거야.” 친구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런데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기억들이 쌓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러자 인간 안에는 사유 능력이라고 불리는 기능이 작동합니다. 이것은 여러 기억과 경험을 서로 연결시키는 정신의 기능입니다. 그 능력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 온갖 좋지 않은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지금 눈앞에 있는 아내의 모습과 합쳐 버립니다. 그래서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 남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저 성가신 여자’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분노, 미움, 슬픔과 같은 감정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아내는 지난 10년 동안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그 남자가 아내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구와 감정은 상상 속에서 어떤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늘 하느님에 관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러한 부정적인 과정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사랑스럽게, 기쁘게 생각하면서 감정적으로도 하느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의지에 있습니다. 곧 애덕입니다. 성 토마스는 애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애덕은 하느님께서 의지 안에 부어 주시는 덕으로서, 우리가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덕입니다. 단지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이방인들도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애덕은 하느님을 위해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성 토마스는 애덕은 모든 덕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처음 이 말을 읽었을 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른 영성가들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었지만, 도대체 왜 애덕을 ‘모든 덕의 형상’이라고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이것입니다. 만일 내 의지 안에 애덕이 풍성하여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면, (참고로 여러분 안의 애덕은 성화은총이 얼마나 많은가에 정확히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애덕이 많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성화은총은 있지만, 아직 그 양이 풍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덕을 오직 하느님을 위해 실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애덕은 우리 삶의 모든 행위를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해 줍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가 애덕을 모든 덕의 형상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애덕은 우리가 모든 행동과 모든 덕을 어떤 관점에서 실천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느님을 위해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이 모든 덕을 완성하고 싶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들도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능력들은 오늘날의 미디어에 너무 쉽게 산만해집니다. 휴대전화, 텔레비전, 컴퓨터, 그 밖의 모든 전자매체들이 그렇습니다. 철학자 보건(Vog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오늘날의 뇌과학 연구도 같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휴대전화가 “딩!” 하고 알림 소리를 낼 때마다,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됩니다. 우리는 그 알림 소리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보건은 말합니다. 만일 이러한 현상을 상쇄하기 위한 어떤 형태의 극기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영적 산만함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 생활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생활이 제대로 시작조차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휴대전화와 컴퓨터, 그리고 다른 여러 매체들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에 너무 강하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트럭을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엔진 덮개 위에 올려놓았는데, 수리를 마친 뒤 그 사실을 잊은 채 덮개를 닫았습니다. 그러자 “우지직!”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 잘됐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휴대전화는 하루 종일 끊임없이 울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한때는 하루에 스무 통씩 전화가 오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휴대전화가 망가진 덕분에 사흘 동안 아무 전화도 받지 않아도 되었는데, 정말 행복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묵상기도를 제대로 익히려면, 삶 속의 미디어 사용을 과감하게 줄여야 합니다. 정말 필요한 만큼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디어는 우리 안에 끊임없이 산만한 사고 습관을 만들고, 우리의 감정과 욕구까지도 그런 산만함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내적 생활이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내적 활동은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전화입니까? 컴퓨터입니까? 미디어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다스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내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결국 영적 생활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전부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애덕 안에서 하루 종일 꾸준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에 이르려면, 반드시 내적 수렴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 수렴이란, 마음을 하느님께 모으고 그분께 집중하는 능력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디어가 그렇게 위험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디어는 우리의 내적 수렴을 무너뜨립니다. 곧 하느님께 집중하는 능력을 파괴해 버립니다. 또 한 가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덕을 기르려면, 그 가운데 하나인 종교의 덕도 길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사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고해성사 없이 자신의 결점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를 위한 통상적인 길은 교회의 성사들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 영성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능하다면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영적 생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과 의무축일에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의 최소한의 계명, 곧 대죄를 지었을 경우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만 하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너무나 빈약한 삶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사생활에 마음을 쏟고, 그것을 꾸준히 쌓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왜 제가 고해성사를 이렇게 강조할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사죄경을 바칠 때마다, 여러분의 영혼 안에는 성화은총이 새롭게 부어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각 성사에는 그 성사만의 특별한 성사은총이 있습니다. 모든 성사는 그 성사에 고유한 실제은총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 줍니다. 특히 고해성사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고백한 바로 그 죄를 이겨 내도록, 또 앞으로 그 죄를 피하도록, 그에 꼭 맞는 성사은총을 주십니다. 바로 그 죄를 극복할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영적 생활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른 사람들, 거의 소죄조차 짓지 않게 된 사람들도, 고해성사를 너무 오래 보지 않으면 한 가지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조금씩 예전에 지었던 죄들 쪽으로 다시 끌려가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대죄가 아니라, 작은 소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 안에 어떤 찝찝함, 마치 영혼이 조금 더러워진 듯한 느낌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꼭 죄를 지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경향을 억제해 주는 추가적인 성사은총을 오랫동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가기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사생활과 기도의 삶은 반드시 꾸준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꾸준한 기도생활 없이 성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의 아홉 단계를 기억해 보십시오. 기도의 단계를 차례로 거쳐,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한 가지 대상에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신비적 기도의 다섯 단계로 들어가, 계속해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변모의 일치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단계에서는 끊임없는 신비적 그리스도 관상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기도의 최고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우리의 지성이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항상 기도하여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먼저 기도하기 시작해야 하고, 마침내 그 상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에 이르려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팔고, 은수자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말은 모든 피조물에 대해 완전한 초탈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단계를 거쳐 올라가는 모습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네 번째 기도의 단계에서는, 무릎을 꿇고 묵상을 시작합니다. 어떤 신비를 묵상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면, 15분이 지나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에게는 겨우 몇 초가 지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한 번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너무 겸손한 분이라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한 가르멜회 수도회의 장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섯 시간 동안 머리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런 기도의 모습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셨을 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우셨습니다. 그런 기도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그 단계에 이른다고 해서, 곧바로 다섯 시간씩 기도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생활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해서 그러한 기도의 단계에조차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묵상기도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결점을 고치기 시작해야 합니다. 덕을 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악습을 하나씩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 중 여러 차례,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주님, 사랑합니다.”하고 자주 말씀드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애덕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애덕이 자라면, 앞에서 말씀드린 하위 덕들에도 생명을 불어넣게 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기도도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도에 많은 시간을 기꺼이 투자해야 합니다. 정말 많은 시간을 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또 윤리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에 적어도 15분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대한 정의의 의무조차 제대로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의의 차원에서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가족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하듯, 늘 하느님과 함께 있고 싶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성인들은, 영적 생활의 중간 단계를 지나면서 기도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너무나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연옥에 관한 책을 읽어 보셨다면, 이런 표현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연옥 영혼들은 상실의 고통을 겪습니다. 물론 지옥에서의 상실의 고통과는 다릅니다. 지옥에서의 상실의 고통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영원히 뵐 수 없다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 서게 되면, 그때 무엇보다도 너무나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을 뵙지 않고서는 어떤 형태의 행복도 결코 누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뵈어야만 합니다. 그분을 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지옥에 있는 모든 영혼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연옥 영혼들도 같은 고통을 어느 정도 겪습니다. 그러나 지옥과는 다릅니다. 연옥 영혼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는 애덕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은 불타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그분을 뵐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뵙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을, 이 세상에서도 기도의 여러 단계를 거쳐 올라가는 성인들에게서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도 일종의 상실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하느님을 너무나 뵙고 싶지만, 아직은 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인들은 말합니다. 변모의 일치에 이르게 되면, 그 이후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이 세상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분을 뵙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모든 이야기가 중요할까요? 처음에 저는 ‘목표는 하느님이고, 그분께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길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하느님께 이르는 방법입니다. 만일 천국의 본질이 하느님을 끝없이 직접 뵈옵는 지복직관이라면, 물론 천국에는 이 외에도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그 영원한 하느님 직관에 맞추어 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여러분 삶 안에서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하느님께 맞추어, 장차 하느님을 직접 뵈올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옥에 갈 필요가 없도록, 우리의 모든 능력을 믿음의 빛으로 밝혀진 지성의 참된 대상, 곧 하느님께 이미 맞추어 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인들은 말합니다. 변모의 일치에 이른 사람에게는, 이제 하느님을 직접 뵙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죽음이라는 장막이 걷히는 것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연옥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불완전함을 이미 제거했고, 또한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죄에 대한 보속도 충분히 마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장애 없이 곧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그 모습을 조금씩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결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우리는 영적 성장의 여러 단계를 지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는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묵상할 수 있을 때에는 깊은 기쁨도 함께 찾아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기쁨의 정의는 감정의 즐거움이 아니라, 의지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성 토마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위 차원의 덕들을 정복하여 초자연적인 덕들이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애덕도 계속 성장합니다. 애덕이 점점 더 커질수록, 성령의 열매도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쁨입니다. 성 토마스는 기쁨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쁨은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을 때 의지 안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묵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현존하실 때, 그 현존을 통해 우리의 의지 전체를 사로잡는 깊은 기쁨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 수렴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거룩한 수녀님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수도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얼굴에는 기쁨이 머물러 있고, 마치 안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의 초점이 고통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초점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 안에 있는 기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질서가 가져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이 하느님을 향하여 질서 있게 정돈되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질서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질서입니다. 사람들은 요즘 “세상을 리셋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오셔서 ‘리셋 버튼’을 누르시는 것입니다. 제 말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이 하느님을 향해 질서 있게 정돈되면, 거기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령 큰 고통을 겪고 있어도, 마음 안에는 놀라운 평화가 있습니다. 또한 온유(meekness),정결(chastity), 인자함(benignity), 자애(benevolence)와 같은 덕들도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은 애덕 안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성 토마스는 이런 덕들이 영혼 안에서 더욱 활발하게 작용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 삶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은 애덕이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을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으로만 사랑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는 영성가들이 말하는 이해관계가 있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영신학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새 비행기를 주셨다.” “새 자동차를 주셨다.” “새 집을 주셨다.” “은행에 수백만 달러가 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하느님을 사랑한다.” 아닙니다. 사실은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관계가 있는 사랑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받는 감정적인 위로를 자신의 영적 성장이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 감정적인 위로입니다.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만드시려 할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의 삶을 힘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그 사람을 정화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감정적인 위로입니다. 감정적인 위로는 영적 생활의 정상(頂上)이 아닙니다. 오히려 출발점입니다. 그런 위로가 모두 사라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영적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다음이 영성가들이 말하는 이해관계 없는 사랑(disinterested love)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 사랑은 은총의 도움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기쁘게 해 주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정을 도와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무한히 선하시며, 나의 모든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정의는 다른 사람의 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는 사랑에 대해서도 또 하나의 구별을 합니다. 첫 번째는 단순한 사랑입니다. 곧 좋은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는 사랑입니다. 반면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선을 원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이해관계 없는 사랑입니다. 결국 사람의 완전함은 어디에서 이루어질까요?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이유만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모든 것을 받으실 만큼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