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어떤 죄를 고해하면 고해 사제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고해자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지면서 멸시하지 않을까? 사죄경을 거절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공연한 걱정이다. 고해 사제는 누구든지 이 세상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대가 고해하는 죄를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몇 번이나 듣는다. 그대가 어떤 죄를 고해하더라도 그대 혼자 범하는 죄가 아닐 것이요,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그런 죄를 범하기 쉽고 또 흔히 그런 죄를 고해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고해 사제 자신도 역시 우리와 같은 약한 인간이므로 우리가 범하는 같은 죄를 범할 수 있고 또 범하게 되어, 신부들끼리 서로서로 고해하는 것이다. 고해 사제는 훌륭한 공을 세우고 죄를 범하지 않는 성인을 발견하려고 고해석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요, 어떤 대죄를 고해받을지라도 결코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친절하게 또한 깊은 온정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주기 위해 고해석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해자에게서 듣는 죄가 신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요, 마음을 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죄의 권한을 잘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더 드러내게 되었다고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어부가 아주 큰 고기를 잡았을 때 슬퍼할까, 기뻐할까? 고해 사제 또한 이와 같다.
  의사가 중환자를 만나면 반가울까, 귀찮을까? 중환자이므로 돈을 많이 받겠으니 반가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의술이 훌륭한 의사는 다른 사람이 잘못 고칠 환자를 자신있게 고쳐 의사로서의 명예와 직무를 완수하게 되므로 반가워하는 것과 같이, 고해 사제도 우리의 영혼병의 의사이므로 중범죄자를 만나 그가 병의 원인을 바로 이야기해주면 그 병에 적당한 약, 즉 좋은 권면과 위로와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어주게 되니 기뻐하고 반가워한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 인자한 아버지는 잘못한 자식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발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놈이 나쁜 놈이구나, 이놈이 이런 죄를 지었구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멸시하고 분개하고 꾸짖겠는가? 도리어 위로하고 더 사랑하고 더 신용하겠는가? 다음에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어느 날 성 루이지 벨드란드에게 상당히 중죄를 범한 사람이 고해하러 왔다. 그 사람은 완전히 통회했지만 매우 무섭고 부끄러워서 그 죄를 마지막에 고하려 하고 다른 죄를 하나씩 고해하면서 곁눈으로 슬그머니 신부의 얼굴을 보면서 신부가 어떤 얼굴로 자기를 대하는지 살폈다. 성인은 놀란다든지, 이상히 여긴다든지 하는 눈치나 표정이 조금도 없이 태연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가장 더럽고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던 그 죄를 고해했다. 그때 그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고백받는 신부가 입술에 미소를 띠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죄를 다 고하고 나자 신부는 눈을 뜨고 매우 친절하고도 자애 깊은 말씨로 다른 고해할 죄는 없느냐고 물었다.
  “신부님, 또 한 가지 죄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고해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라고 그는 대답한다.
  “어째서 용기가 나지 않소? 지금까지 많은 죄를 용기 있게 고해하지 않았소?”
  “아닙니다. 신부님! 그것은 다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범한 죄입니다.”
  “그렇다면 더구나 좋지 않소.? 방금 생긴 죄를 지금 당장에 없애버리면….”
  “그렇지만 신부님에 대해 범한 죄인데요.”
  “내게 대해서요? 더구나 관계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해 범한 무슨 죄든지 모두 사해드리려는데 내게 대한 범한 죄가 있다면 왜 우리 둘이 의논해서 사해드리지 못하겠소.”
  “신부님! 제가 아까 그 큰 죄를 고할 때 신부님이 미소하시는 것을 보고, 제 마음속으로 ‘이분은 확실히 나보다 더 큰 죄를 범한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성인은 이 말을 듣고 또 다시 얼굴에 미소를 가득히 지으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나는 다행히 그런 큰 죄는 범한 일이 없소마는 만일 하느님의 성총이 없었던들 그런 죄를 범했을는지 모릅니다. 왜 내가 미소를 지었느냐 하면, 당신이 통회하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또한 솔직하게 죄를 고해하자 당신 마음에서 마귀가 나가고 하느님의 은총이 스며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너무 기쁘고 너무 반가워서 그랬소.” 하였다.
  사실 고해 사제의 마음은 다 이런 것이다. 신부들은 고해하는 사람의 죄에 눈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용기와 마음의 준비가 잘되고 안 된 것을 주목하다가, 잘 준비되어 용기있게 고하는 것을 불 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미소로써 그를 환영하고 속으로 축복한다.
  내가 신부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런 사실에 대해 잘 믿지 않았지만, 차츰 여러 번 경험한 뒤에는 이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강론 중에 할 수 있으면 자주, 또한 항상 솔직하게 고해하라고 권면까지 할 수 있게 되었고, 누구의 영혼이든지 위로할 수 있었으며,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해 사제는 어떤 대죄를 고해받아도 고해자에 대해 존경심을 줄인다든지, 멸시한다든지 하는 일은 조금도 있을 수 없다. 고해 사제는 도리어 정직하게 바른 고해를 하기 위해 고해자가 결심을 한 용기와 자기 죄를 바로 잡으려는 착한 뜻을 보고, 예수님께서 확실히 그 사람에게 내리시는 은혜와 성총을 생각하고,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더 갖게 된다.
  어느날 성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한 여성이 고해하러 왔다. 그녀는 여러 가지 죄를 다 고해한 뒤에 사죄를 받고 돌아가려다가 성인에게 묻기를, “지금 저에 대해서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하였다.
  “네, 부인이 성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농담을 하시는군요.”
  “아니오.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에게 통회 넘치는 바른 고해를 할 수 있는 은혜와 용기를 얻었으니 성녀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노니, 고해 사제는 존경심을 줄이기보다는 도리어 고해를 잘해서 사함을 받은 죄의 중함에 따라, 또한 그 고해가 솔직했고 통회하는 마음이 깊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키운다.
  
  그런데 고해 사제가 죄를 사해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매우 드문 일이지만 어떤 경우에 사죄를 거절하는 수가 있다. 가령 고해하는 사람이 어떤 대죄를 자주 범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습관적으로 같은 죄를 범한다든가, 범죄할 기회를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 하지 않고 일부러 그런 기회에 부닥쳐 범죄를 자진해서 저지른다든가, 또는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를 갚지 않는다든가, 같은 죄를 계속 범할 눈치를 챘을 때, 고해 사제는 사죄를 보류 또는 거절하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 죄를 사해준들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람에게 큰 해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고해 사제는 진실한 통회와 정개가 없이 고해만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요, 하느님을 모독하기 때문에, 그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자신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푸지니아 신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남성 신자가 오래 전부터 어떤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자주 고해했다. 그 고해를 받은 신부는 그 사람이 죄에 빠진 생활을 한다는 것도 알았고, 그가 그녀를 끊어버릴 결심도 없는 것을 알면서 사죄경을 염해주었다. 바람 피우는 그 남성의 아내는 눈물이 마를 사이도 없이 기도하면서 남편이 진심으로 회개하도록 힘썼다. 그러나 남편은 비웃으며 “당신은 미친 사람이 아닌가? 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이라면, 신부님이 나를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 아닌가?” 라고 도리어 큰소리를 친다. 그 사람은 부정한 관계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죽은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밤에 매우 괴로워하는 어떤 사람에게 업혀 아내에게 나타났다.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 들어 있는 그가 극도로 실망한 소리를 지르며, “나는 그 여자를 떼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다. 나를 업고 있는 이 사람은 사죄받아서는 안될 나를 번번히 용서해준 고해 사제요.”라고 말한다.
  아! 무서운 일이다. 두 사람은 모두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고해자가 진심으로 통회하고 잘 준비하여 고해할 때, 고해 사제는 그 사람의 죄가 아무리 커도 항상 죄를 사해준다.

  프랑스의 유명한 신학자 요한 고우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프랑스혁명 때의 일이다. 어떤 고약한 사람이 무서운 죄를 많이 범했을 뿐 아니라 여러 신부를 죽이기까지 했는데 우연히 중병에 걸려 눕게 되었다. 그는 자기 방에 어떤 신부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만일 들어오면 당장에 죽여버린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러나 병이 점점 위중해갔다. 그 말을 들은 어느 착한 신부 한 분이 불행한 영혼을 구해주려고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그 병자 곁으로 왔다. 들어오는 신부를 쳐다본 그는 마지막 기운을 다 내어 소리지르기를, “뭐야 내 집에 신부가 오다니? 당장 무기를 가져오라.”고 발악한다.
  신부는 친절하게, “무기는 무엇하시려고요?” 하고 물었다.
  “내 방에까지 들어올 용기를 가진 너를 내가 죽이고 말겠다. 내가 너 같은 신부를 열두 명이나 죽인 것을 네가 아느냐?” 하고 그는 치를 떤다.
  신부는 더욱 친절하고 온순한 말로, “아니, 당신 셈은 틀렸소. 내 형제여! 열두 사람이 아니고 열하나뿐입니다. 열두 번째 신부는 죽지 않고 당신과 이야기하는 나요. 당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흥,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나같이 고약한 놈이 영혼을 구제받을 수 있는가?”
  “있고 말고요. 당신이 진심으로 통회하고 내가 사죄함으로써 의심없이 영혼을 구제받습니다.”
  “아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놈인 줄 모르고 하는 수작이다. 너는 나를 알면 저주할 것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을 저주하다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를 용서해줄 참인가?”
  “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시니까 용서하고 말고요.”
  이와 같은 문답이 있은 후에 신부는 애정과 친절과 위로를 다하여 그가 선종하도록 지도했다.
  이 신부야말로 자애 깊은 신부지만 모든 고해 사제가 다 그럴까?
  그렇다. 고해 사제는 모두 자애 깊은 아버지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무슨 죄든지 항상 사해주라고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없다. 고해 사제는 바른 고해를 하려는 사람을 항상 용서한다. 고해 사제는 자애 깊으신 아버지다.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샤또브리앙의 프란치스꼬 르네는 <나의 뒷세상 일기>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내가 첫영성체할 날이 가까워 왔다.(당시 프랑스에서는 14세가 되어야 첫영성체를 할 수 있는 관습이 있었다) 나는 참으로 열심이어서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나의 고해 사제는 조금 엄한 편이었다. 고해소에 갈 때마다 그는 내가 고하는 죄가 너무 가볍다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까닭은 사실 내가 고해하기에 껄끄러운 죄 한 가지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슬퍼하는 모양이 내 얼굴에 나타났기에 신부는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자세히 질문했던 것이다.
  부활 대축일이 가까워질수록 신부의 질문은 점점 더 심각했다.
  “무슨 죄를 숨기지 않았나?”
  “아니오, 신부님!”
  “이러이러한 죄, 저러저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나?”
  “아니오, 신부님!”
  신부님이 아무리 질문하셔도 나는 “아니오, 신부님!”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 신부는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으셨는지 나의 마음속 밑바닥까지 뒤져보려고 힘쓰시다가 나중에야 한숨을 쉬면서 나를 돌려보내셨고, 나는 고해소에서 물러나왔다.
  그러는 동안 성 수요일 밤과 성 토요일이 닥쳐왔다. 나는 성당에 들어가서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그만 기운이 빠져 쓰러졌다. 나는 제의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해 사제에게 가려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니 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걸음이 휘청거린다. 겨우 신부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목 메인 소리로 고해한다는 것이 여느 때와 같이 흔한 죄만 고했다. 신부는 또, “무슨 잊어버린 죄는 없나?” 하고 물으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또 다시 질문하기 시작하신다. 저 운명적인 한 마디, “아니오, 신부님!”이란 말이 내 입에서 또 나왔다.
  신부는 다시 생각하시더니  눈을 감고 기구하면서 나에게 사죄경을 염해주시려고 한다. 나는 신부를 힐끗 쳐다보다가 그만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에 내가 본 신부의 얼굴처럼 무섭고 엄숙한 얼굴을 일찍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떨리는 소리로 “신부님! 아직 다 고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신부의 얼굴은 재판관의 얼굴처럼 엄숙하고 무서웠다. 나는 그 위력에 눌려 지금까지 숨겼던 죄를 고할 생각이 났던 것이다. 하느님의 대리자가 지금 나에게 제일 친절하고 애정이 많은 아버지로 변하여 울면서 나를 껴안으시더니 “용기를 내라. 내 아들아, 용기를 내”라고 하신다.
  내 일생 중 이만큼 기쁜 순간은 없었다. 나는 너무너무 기뻐서 몸을 꼿꼿이 하고 숨겼던 죄를 고해버렸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술술 단숨에 죄를 다 고할 수 있었다.  신부는 손을 들고 사죄경을 염하셨다. 이번에야말로 신부의 손이 내 영혼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리신 것이다. 나는 이 이슬을 받기 위하여 이마를 숙였으며, 마음은 천사와 같이 환희에 잠겼다.
  이튿날 아침에 성체가 내 혓바닥에 놓이실 때 나의 영혼은 찬란한 광채로 빛났다. 그때 나의 마음속에는 어떤 형틀이 놓이든지, 어떤 맹수가 달려든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순교자의 용기와 담력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고해 사제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고해 사제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항상 친절하고 정이 많으신 아버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