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고해가 왜 필요한가? 더럽혀진 옷을 씻기 위해 물이 필요하듯이 죄를 씻어 없애기 위해서는 고해가 그만큼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이와 같이 정하셨고, 예수님께서 이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다른 방법을 정할 수도 있었지만 이 방법을 정해주셨으니 우리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 한번 잘 생각해보자. 이보다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 같다. 비유하건대 하느님께서 사람이 죄를 범할 때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자선을 하도록 정하셨다면, 이것을 여러 사람이 실행 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또 하느님께서 단식재를 지키기로 결정하셨다면 그것을 실행하겠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또 천주님께서 성지순례를 하도록 정하셨다면 그것을 하고 싶어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에 실행하기 어려운 방법을 정하시지 않고 누구든지 실행하기 쉬운 방법,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을 수 없는 제일 쉬운 방법을 실행하신 것이 이 고해성사 제도다. 어떤 사람이 무슨 죄를 범했든지, 또 몇 번이나 범했든지 스스로 하느님의 대리자를 찾아가서 비밀리에 고해함으로써 간단히 죄를 용서받는다. 만일 국법을 어긴 죄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나는 이러저러한 죄를 법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용서를 받게 된다면 감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느님께서 정하신 고해성사는 이 방법이다. 어떤 대죄인일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고해 사제께 고해하면 무조건 용서받는다. 고해는 무거운 짐이 아니요, 어려운 방법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르겠다. 하느님께만 가만히 고하면 되지 않을까? 어째서 신부 앞에 가서 자기의 부끄러운 비밀을 알릴 필요가 있는가?
  신부 앞에 가서 고해를 하든지, 나 혼자 가만히 하느님께 고하든지 간에 죄를 사해주실 분은 하느님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죄를 사하시고, 사하지 않으실 절대권이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법이나 규칙을 정해서 그 법과 규칙에 의해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할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비유하건대 왕과 정부가 세금을 바칠 것을 국민에게 법률로써 정하고, 또 세금을 바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하게 바치라는 규정을 정했다 하자. 그렇다면 국민이 세금을 바칠 세무서나 정부가 정한 은행이나 다른 장소에 내지 않고 직접 정부나 왕에게 갖고 가서 내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고해도 이와 같다. 물론 죄는 하느님께서 사해주시지만 정한 사람, 즉 고해 사제를 통해 먼저 고해하는 것을 듣고 나서 사해주시게 법을 정하셨으니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사정을 알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말인가? 고해로써 알릴 일은 오직 죄의 문제일 뿐이지 다른 사정은 알릴 필요가 없다.
  당신이 두통이나 치통이 날  때 당신의 사정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싫다고 해서 의사나 병원에 가기를 싫어할 수 있을까? 또 당신이 누구에게 고소를 당했으면 해명하고 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변호사에게 가서 당신의 사정을 자세히 알리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신성불가침한 고해에 대해서는 자기 사정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를 싫어하겠는가? 혹시 신부에게 어떤 종류의 죄를 알게 되면 자존심을 상하게 되니까 좀 어려운 일이 아니냐고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꼭 해야 할 의무이며 절대로 필요한 것이니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에게 아무리 부끄러운 곳이라도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의 영혼은 죄의 병을 떼고, 성총의 원기를 받아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식이 되어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 하느냐? 그렇지 않고 악마의 종이 되어 영원한 지옥의 감옥살이를 하려느냐?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문제다. 죄를 범하면 마귀의 종이요, 하느님의 원수이며,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죽을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병을 고치고 마귀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과 다시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써야 할 것이 아닌가? 그 방법이 고해성사다. 고해를 하지 않고는 죄 사함과 마음의 평화와 하늘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이므로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성 베네딕도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적혀 있다. 벨라지오라는 수사가 젊었을 때 불행하게 어떤 대죄를 범하고 그 죄를 고해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매우 큰 고통과 양심의 무서운 가책을 받으면서 여러 해를 지냈다. 어느 날 거리를 지나는 어떤 순례자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그에게 말하기를, “벨라지오여! 고해하시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은 용서해 주실 것이요, 당신은 마음이 평안하리다.”라고 했다.
  벨라지오는 고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는 고해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는 어리석은 헤아림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큰 보속과 고통을 닦아보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수도원에 들어가 겸손과 순명, 단식과 극기로써 모든 수사들의 모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러다가 죽었다. 수도원 전체가 비상한 슬픔에 잠긴 채 당시 교회의 관례대로 그 시체를 성당 가운데 묻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성당지기가 벨라지오의 시체가 무덤 위에 얹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시체를 무덤 속에 묻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또 다시 시체가 무덤 위에 나와 있기에 부닥이 수도원장에게 알렸다. 원장은 다른 수사들과 함께 무덤에 와서 벨라지오의 시체를 보고, “벨라지오여! 그대는 살았을 때 잘 순명하였던 것과 같이 지금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다오! 그대는 지금 연옥에 있는가? 또는 그대 시체를 더 훌륭한 곳에 옮겨 묻어 달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고 무덤 밖으로 나오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시체는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아, 불행한 저는 여러 해 동안 모고해했던 죄를 용서받으려고 다른 방법으로 노력했다가 지금 지옥에 있습니다. 저의 시체를 여기서 끌어내다가 짐승과 같이 들판에 묻어 주시오.”라고 대답했다.

  또 어느 수녀는 7살 때 무슨 큰 죄를 범했다가 그것을 고해하지 않고도 달리 사랑을 받을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해할 때마다 그 죄만은 숨겨오다가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수녀원 규칙도 잘 지키고, 열심하기 짝이 없어 모든 수녀들의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원장까지 되었다. 그녀는 성심을 다해 직책을 완수하고 남이 보기에 갖가지 성덕을 닦다가 숨졌다. 그런데 원장이 임종하자마자 여러 수녀들 앞에 불바다가 나타나고, 그 불길 속에는 방금 임종한 원장이 실망에 찬 목소리로 외치기를, “나를 위해 연도도 하지 말라. 나는 7살 때 고해하지 않았던 죄 때문에 지금 지옥에 와 있노라.”고 한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아닌가! 고해 중에 한마디만 했더라면 저들은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저들은 제 스스로 이 세상이나 후세에서 자신을 지옥으로 빠뜨리고 만 것이다. 이런 불행한 사람의 죄를 없애려면 바른 고해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았다.

  고해는 우리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여러 해 전에 이탈리아의 각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 일이 있다.
  베네도지오의 바사아노 읍내에 사는 어떤 구두 장수가 갑자기 치솟은 분노로 어린 조카 아이를 쇠연장으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살인할 의사가 없는 중과실치사였다.
  그는 이 과실을 다른 사람이 알까 무서워서 밤중에 시체를 슬그머니 묻어버렸다. 사람들은 이 일을 까맣게 모르고 여러 날 동안 그 아이를 찾으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해보았지만 아무도 구두 장수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본 사람이 없었으니 사건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빠져버렸다.
  평소에 명랑한 성질의 소유자였던 구두 장수, 술 잘 마시고 노래 잘하며 유쾌하게 잘 놀았던 구두 장수가 그날부터는 무슨 쇠망치로 얻어맞은 사람처럼, 원기도 없이 항상 우울하게 지내다가, 결국 집안 살림을 팔고 머나먼 아메리카로 이사했다.
  거기서 그는 모든 시름을 잊고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 후 2년이 지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재판관에게 자수하고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취조가 시작되고, 숲 속에 묻은 그 아이의 시체가 검시되고, 소송의 수속이 끝났다. 그래서 재판장은 판결하기 전에 이렇게 물었다.
  “불쌍한 이 사람아! 똑똑히 말해라. 아메리카로 가면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안심하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대는 자수를 했나?”
  “판사님, 제가 아메리카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시면 크게 틀린 생각입니다. 아무도 제가 한 비밀을 알 사람이 없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으니, 그날부터 저의 마음은 평화를 잃게 되었고, 그 아이의 환상이, 피투성이가 된 그 손이, 언제나 제 눈앞에 나타나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감옥에 들어가도 좋고, 사형을 받아도 좋습니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이 괴로운 양심의 가책만 면할 수 있다면…”하고 대답한다.
  과연 고해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한번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이 고해를 잘 활용하자. 발바닥에 가시가 찔렸을 때, 눈에 티가 들어 갔을 때, 그 가시와 티를 빼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듯이, 죄도 고해로써 빼버리지 않고는 절대로 안심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정하셨으니, 우리는 순종할 뿐이다.
  고해는 영혼에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특히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영혼을 위해서는 가장 큰 기쁨과 위안을 준다. 다음의 사실을 읽어 보자.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 브리엔 신부가 알프스 마을에서 피정을 지도하고 있을 때 기병대의 늙은 사관이 호기심으로 그 설교를 들으러 왔다.
  이것은 하느님의 안배일 것이다. 마침 그날 밤의 설교에서는 신부가 고해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좋은 변호인의 간결하면서도 열정이 가득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말씀이었기에 그날의 설교는 사관의 마음속 깊이 울렸다. 그래서 그는 즉시 고해를 하기로 결심했다.
  늙은 사관은 설교가 끝나자 제의방으로 신부를 찾아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고해했다. 신부는 참으로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씨로 그를 타이르고 위로했다. 고해가 끝나자 늙은 사관은 일어서서 신부의 손을 잡고 친구하며 큰소리로, “참으로 저의 생애 중 지금같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 잠기어 있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기쁨과 위안을 맛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저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 프랑스의 늙은 사관이 한 말은 모든 장애를 물리치고 고해로 가서 올바른 고해를 하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말이다. 다른 방법이나 도리가 없다. 오직 고해가 아니고는 안심할 수 없다. 이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계명이요, 쉽고도 편리하며 실행해 보면 위로가 가득 찬 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