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회개하여 바로 고해하면 하느님은 언제든지 용서해 주시며,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통회하는 사람을 항상 용서해 주신다.
  성서에 저 불쌍한 탕자의 비유를 돌이켜 생각해보기로 하자.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서 전 재산은 유흥과 방탕으로 탕진하고 한 푼 없는 거지가 되어 돼지를 치는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 그는 굶어 죽지 못해 돼지가 먹는 여물을 주인 몰래 훔쳐 먹음으로써 주린 창자를 채우다가 주인에게 들켜 죽도록 얻어맞고 배고프고 고달픈 생활에 지쳐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었다.
  잠들지 못하는 그의 눈앞에는 아버지의 집이 나타났다. 풍족한 음식과 의복이며 인자하신 아버지와 인정 많은 형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결심했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동구 밖 외딴 곳에서 멀리 바라보시며 내 아들이 오늘이나 돌아오나 하고 기다렸던 아버지는 탕자를 끌어안고 친구한다.
  탕자는 아버지의 발 앞에 엎드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불안하여 잠을 못 이루고, 남 몰래 걱정과 눈물로 세월을 보냈던 그 아버지는 한 마디도 나무라지 않고, 그를 내쫓지도 않고, 도리어 자식의 초라한 꼴이 남에게 보이지 않게 자신의 겉옷으로 가리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빨리 제일 좋은 옷을 가져오고, 금반지와 가장 값진 목걸이를 내어 오라. 내 자식에게 입히고 단장해야겠다. 그리고 가장 살찐 송아지를 잡아 저녁 잔치를 준비하고, 친척과 이웃 친구들을 청하라. 노래 부르는 사람, 춤추는 사람을 불러 크게 즐기려 한다. 이는 죽었던 내 아들, 잃어버렸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기 때문이다.”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 굉장한 저녁 잔치가 마련되고 방안에 초청받은 손님이 가득 찼다. 식탁에는 맛있는 온갖 음식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향기로운 술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조금 전까지 참으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더러웠던 자식이 훌륭한 의복으로 화려한 몸치장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나타났다. 장소를 가득 메운 손님들은 박수로 환영하고 축하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즐겁게 잔치를 마쳤다.
  보라! 이 탕자는 누구였으며, 그 아버지는 누구였던가? 아들은 불행한 죄인이요, 아버지는 자애로우신 예수님이 아니던가! 가장 큰 죄인일지라도 고해 사제 앞에 엎드려 진실한 통회를 하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방금 이야기한 그 광경이 곧 전개될 것이다. 예수님의 대리자인 고해 사제가 그 가련한 사람에게 사죄경을 염할 때 그에게 말할 수 없이 고귀한 은총의 옷을 입히며, 좋은 권면의 말씀이 마디마디 진주가 되고 금은 보석이 되어 몸치장이 될 것이며, 예수님의 저녁잔치인 성체배령을 동반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마귀의 종이었으며, 지옥불의 섶이었던 가련한 악인이 이제 성찬의 주인공이 되고 왕자가 된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에서는 회개가 필요 없는 아흔 아홉 명의 의인보다 한 명의 죄인이 회개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이 있다”고 하셨다.
  이것은 모두 올바른 고해가 가져오는 결과다. 고해는 실로 용서와 위로의 성사다. 그러면 왜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가? 이것은 필경 바른 고해의 효험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면, 그분의 말씀을 신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저 간음한 여성의 이야기로써 잘 알아들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어느 날 간음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 한 명이 예수님의 발 앞에 꿇어 앉았다. 군중은 예수님께 모세의 율법대로 저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던 그 여인을 보시고, 몸을 굽혀 흙 위에 손가락으로 무슨 말씀을 쓰고 계셨다. 군중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예수님은 일어서시더니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쳐라.” 하시고, 또 다시 굽혀 땅에 글을 쓰신다. 그 동안에 그 여인을 송사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그들이 모두 가버린 다음에 예수께서 일어서시더니 여인에게
  “너를 죄로 다스리려던 자들이 모두 어디로 갔느냐?” 라고 물으신다.
  그 여인은 울면서 “다 갔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죄로 판단하는 자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면 나도 너를 죄로 판정하지 않겠다. 안심하고 가라.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고 그녀를 돌려보내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그 마음씨를 넉넉히 헤아릴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죄를 판정하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온 세상 사람이 어떤 사람의 죄를 판정한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려고 한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시면서 그 죄를 용서해주시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야 지극히 인자하신 어른이어서 그런 죄인을 용서하시겠지만 고해 사제야 예수님처럼 무슨 죄든지 몇 번이나 용서해줄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요, 의심이다. 고해 사제는 언제든지 용서해주신다. 아무리 큰 죄를, 아무리 여러 번 범했을망정 예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항상 용서해주신다.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의 한 사람인 모사브레 신부가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생각만 해도 무섭고 지겨운 저 프랑스혁명 때 있었던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던 혁명의 마지막 해였다. 가난하고도 악한 어느 노인이 파리의 한 누추한 움막 속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젊은 신부 한 분이 와서 그의 머리 맡에 앉아 있었다. 병자는 그 신부를 쳐다보고는 한숨을 크게 쉬면서, “신부님! 제 말을 좀 들어보시고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어떤 귀족의 하인으로 있었는데 그 주인은 저를 매우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혁명의 무서운 순간이 닥쳐왔을 때 그 은혜를 잊은 이놈의 마음은 주인의 은혜를 보답하기는커녕 무섭게 무고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현장에서 끌려가게 하고, 나는 그 재산을 모두 빼앗아 그것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답니다. 아, 신부님!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보십시오. 저 이가 바로 저를 그렇게도 사랑해주시던 착한 주인이랍니다.” 하고는 주인 가족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열어보인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그 초상화는 바로 그 신부의 아버지, 어머니가 아닌가! 너무나 놀란 신부는 나무처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이 창백해지며 벌벌 떨더니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대리자가 자기 양친을 죽인 그 원수를 바라본다. 거의 임종에 다다른 그가 유령과도 같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말라 빠진 가슴을 헤치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자, 원수를 갚으시오. 이놈의 원수를 갚으세요.”라고 소리를 지른다.
  열심한 그 신부는 마음이 무척 산란했지만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기를, 나는 희생당한 분들의 자식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대리자가 아니냐 하며, 그 대죄인의 어깨 위로 울며 쓰러졌다. 그리고 노인의 입에 십자가를 대게 하고는 “나의 벗이여! 나의 형님이여! 나의 아들이여! 당신의 생각은 잘못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지 결코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그를 가슴에 껴안고 사죄경을 염해주고 나서 위로했다. 이처럼 노인은 자신이 모함했던 그분의 아들의 팔에 안긴 채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보면 무슨 죄든지 고해 사제에게 고해하기를 무서워하고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아, 과연 고해는 용서와 위로의 성사다!
  만일 나에게 여러 개의 혀가 있다면 나는 전세계를 향해 이렇게 부르짖고 싶다.
  “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어른인지 알 것이다.”라고.
  무서울 것도 없고 부끄러울 여지도 없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이 세상에서의 위안과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항상 바른 고해를 하기로 하자. 한번 고해하는 것이 당신 일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프리노의 복자 안젤라는 젊었을 때, 고해할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어떤 죄를 짓고는 오랫동안 그 죄를 고해하지 않고 지냈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마음이 편할 수 없어서, 견디다 못해 열심히 기도한 뒤에 용기를 내서, 모든 죄와 그동안 모고해한 죄를 전부 솔직하게 고해하기로 결심했다. 그 고해야말로 그녀에게 있어서 행복의 바탕이 되었다. 왜냐하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성녀가 될 힘을 얻어서, 선종한 지 6백 년만에 복녀로서 전세계 교회가 우러르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마리라 폴나리가 자서전에 이런 이야기를 썼다.
  그녀는 처녀 시절에 불행히도 조심성 없이 어떤 죄를 범했다가 그 뒤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았지만 부끄러워서 그 죄를 바로 고백할 용기를 내지 못해 거듭거듭 모고해를 하며 지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수녀원에 들어가면 나을까 생각하고 움브리아주 도디시에있는 수녀원에 들어가 착복식과 3대 서원식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얼마나 비통에 잠긴 나날을 보냈던가! 그녀는 어느 해 성모 승천 전 9일 기도중에 마음을 바로잡을 은혜를 성모님께 간구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즉시, 고해 사제 앞에만 아니라 수녀원에 있는 모든 수녀들 앞에서 자기 죄를 고해할 결심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예로 보건대 예수님께서는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성인이 되는 힘까지 주시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았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올바른 고해는 성인이 되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고 말했으니, 우리도 이 말씀을 믿고 바른 고해를 하도록 힘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