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 한밤중의 구원자
이것은 세계 경제 공황(1930-1933) 시기에 미국의 시카고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한밤중에 브라운 박사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잠에 취한 채 수화기를 들었다. 긴장한 쉰 목소리가 애원조로 말했다.
“브라운 박사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좀 와 주십시오. 아주 급합니다.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예, 가겠습니다. 어디십니까?”
“알란가 17번지, 부디 빨리 오십시오.”
브라운 박사는 빨리 옷을 입고 의료 기구를 챙겨 알란가로 떠났다. 인적이 끊겨 어두운 밤길을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가는 곳은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낮에도 길거리에서 사람을 잘 볼 수없는 지역이었다.
브라운 박사는 쉽사리 외딴 그 집을 찾았다. 이상하게도 불빛이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다가가서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다시 두드렸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세 번째 두드렸을 때 누군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누구요?” “브라운 박사입니다.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기가 알란가 17번지이지요?”
“맞소, 하지만 아무도 당신을 부르지 않았소. 돌아 가시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집을 찾기 위해 불이 켜진 집을 찾아 온 거리를 헤매었다. 그러나 모두 깜깜했다. 그는 자신이 번지수를 잘못 받아 적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이 단순한 장난질이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에 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전화가 없어서 다음 날까지 그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서 병원의 당직으로부터 다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엔 낮이었다.
간호사가 말했다. “존 터너라는 사람이 심한 사고로 죽게 되었는데 로버트 브라운 박사를 간절히 찾아요. 박사님, 빨리 오셔야겠어요. 그 남자가 곧 죽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 꼭 박사님에게만 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에겐 아무말도 하려 하지 않아요.”
브라운 박사는 존 터너라는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에게서 이러한 사실을 듣게 되었다.
“브라운 박사님,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죽기 전에 당신과 꼭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당신은 몇 주전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분명히 기억하시겠지요?”
“예, 하지만…”
“그것은 저였습니다. 저는 몇 달 전부터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을 모두 팔았지만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제 자식들의 굶주린 눈빛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절망감에 빠진 저는 한밤중에 어떤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를 불러다가 돈을 빼앗고 그의 물건들을 팔려고 계획했습니다.”
브라운 박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몸이 굳어 버리는 듯했지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곳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저는 박사님이 혼자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크고 힘센 젊은 남자가 당신 곁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주 무뚝뚝하게 당신을 쫓아냈던 것입니다. 부디 절 용서하십시오.”
“물론 그러지요.” 브라운 박사는 멍한 채로 중얼거렸다. 차가운 전율이 그의 등 뒤를 흘렀다. 어리석은 실수거나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죽을 수도 있었던 극단적인 경우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호 천사가 그 날 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것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중에야 그 일에 감사의 기도를 했다. 이 ‘힘센 젊은 남자’는 그를 죽이려는 사람에게만 보였고, 그 때문에 그 사람은 죽음 직전에 브라운 박사에게 용서를 빌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방법은 얼마나 놀라운가! 수호 천사는 얼마나 자주 우리를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가!
두 번째 이야기 – 교황 비오 9세와 수호 천사
재위 32년에 교황의 무류권과 성모님의 원죄없는 잉태 교의를 선언했던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자신의 소년기에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 즐겨 이야기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나는 매일 성당에서 미사 복사를 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미사를 거행하는 동안 저는 제단 제일 아래 계단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내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도움을 청하려 눈을 들어 제단의 맞은 편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름다운 청년 하나가 그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출현에 당황한 나는 감히 내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빛나는 형상은 여전히 자기 쪽으로 오라고 내게 더욱 강하게 손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나 급히 그쪽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제단에서 무거운 성상이 좀전에 내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똑바로 떨어졌습니다.” 비오 9세는 사제로서 또한 주교이며 교황으로서 이 경험을 얘기할 때마다 자신의 수호 천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름다운 청년은 분명히 그의 수호 천사였으며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해 준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들의 하늘나라 동반자를 잊지 말라고 권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나에서)
세 번째 이야기 – 삶의 동반자
현실은 우리가 “판단”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심오하고 깊다. 그리고 천사들이 속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없다면 창조에는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부족할 것이다.
로마에는 자신의 수호 천사를 빛의 형태로 가까이에서 볼수 있는 특권을 오랫동안 누려온 한 부인이 있었다. 한번은 심지어 그녀가 옳지 못한 말에 비겁하게 침묵했을 때 그녀의 뺨을 때린 적도 있다고 한다.
수호 천사를 보거나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 그것은 참으로 드문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 하늘나라의 친구에 대해 알고 있다. 언젠가 도미니코 수도회의 로쿠스 스피커 신부는 말했었다.
“천사, 그대 나의 사랑하는 힘센 동반자여, 나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자랍니다. 지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처럼 나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이는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아마도 시험의 불가마로 이끌 것이나 내가 거기에서 더 커지고 더 정련되어 나오도록 돌볼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과 친밀한 천사인 당신을 믿습니다. 알 수 없는 깊이의 모험가여, 당신은 나를 그분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천사의 세계와 우리 세계 사이의 얇은 막이 언젠가는 걷혀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쁘지 않을 수 없다.(베르니타 발터 수녀)
– 마리아지 11~12월(116호) –
천사들과 미사
미사 때마다 많은 천사들이 돕고 있다.
“하늘이 열리고 한 무리의 천사가 미사성제를 돕기 위해 내려온다”(성 그레고리오)
“천사들은 사제를 둘러싸고 미사 집전을 돕는다”(성 아우구스티노)
“미사가 거행되자 성전은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하느님의 희생 제사를 찬미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로 가득찬다” (성 요한 크리소스모)
미사의 효과는 너무나 훌륭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관대함은 한이 없기에 예수께서 제대 위에 오실 때만큼 은총을 청하기 좋은 때는 없다.
그때 우리가 청하는 것은 거의 확실히 주어질 것이며, 미사 중에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다른 모든 기도와 희생과 순례로도 얻지 못할 것이다.
천사들은 무리지어 하느님을 찬미할 때 자신들의 청원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자비의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성녀 비르짓다는 미사에 대한 환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내가 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 수많은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제대를 둘러싸고 사제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내 마음을 황홀하게 하는 찬미가를 불렀는데 하느님이 몸소 그 미사성제를 바라보시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쌍하고 눈먼 피조물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랑과 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미사에 임하고 있었는지요! 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경이로움을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 주신다면!”
도미니코회의 복자 헨리 수조가 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 천사들이 제대 주위를 둘러싸고 사랑의 환희에 젖어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어도 매 미사 때마다 일어나는 일들이다. 미사 때마다 우리가 수많은 하느님의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가톨릭 사제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폴 설리반 신부의 ‘천사에 관한 모든 것’에서)
교회 안의 천사들
교회 안에는 황홀한 기쁨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는 수많은 천사들의 무리가 있다. 교회 안의 하느님은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이 경배하고 있는 바로 그 하느님이시다. 그 사실이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천사들의 기도에 합쳐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은 더 큰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청원에 귀기울이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때로 너무나 차갑기 때문에 천사들의 기도에 합쳐졌을 때에야 비로소 훨씬 더 큰 효험을 갖게 된다.
왜 우리는 천사들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거의, 아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려면 먼저 그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거룩함과 완전함과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와 탁월한 능력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밖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위대하신 사랑의 행위, 즉 외아들의 죽음의 증인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영혼을 위해 하느님께서 치르신 커다란 대가를 알기 때문에, 더욱 우리를 사랑하고 세심하게 우리 영혼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향한 참사랑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그들을 우리의 형제와 친구들로 환영할 수 있음을 겸손되이 감사할 것이다.
우리는 천사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평생 동안 한결같은 동반자인 자신의 수호 천사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한다. 수호 천사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노력한다면, (그는 그럴한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축복받은 영적 존재들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마음 속에 수호천사의 존재에 대해 분명하고 생생하고 변함없는 생각을 깊이 심어 주어야 한다. 자녀들에게 이 복된 영적 존재에 대해 모호하고 짧은 소견만을 전해 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 그들에게 아침과 밤에 수호 천사에게 짧은 기도를 바치라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아이들의 삶에 중요한 존재인 수호 천사에 대해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바치게 해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신의 수호 천사에게 참된 사랑과 우정과 끝없는 신뢰를 가지도록 어린시절부터 끊임없이 교육해야 한다. 그의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데 익숙해져야 하고, 두려울 때나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부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것은 아이들이 영화나 TV 속에 나오는 귀신과 괴물들에 대한 어리석은 공포로 머리 속을 채우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이겠는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 귀한 가르침을 심어주는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기나긴 삶 동안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을 주는 것이다. 반면에 이들이 이 의무를 소홀히 하고 경시한다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녀들에게서 가장 훌륭하고 강력한 친구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리교사나 학교 선생님, 대학과 수도원의 스승들도 복된 천사들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알려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이성은 발달하고 있기에 가정에서 어머니들이 잘 가르쳤더라도 그 가르침들은 더 완전해지고 발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폴 설리반 신부의 ‘천사들의 모든 것’에서)
천사들과 비오 신부
어떤 교사가 그의 부인과 함께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했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가 열이 나고 아픈 것을 보았다. 그들은 집에 있는 모든 약을 써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학교에 출근해야 하니까 지금 자야만 하오. 여기서 아이와 같이 자구려. 나는 다른 방에 가서 잘 테니.” 그런데 잠들기 전에 그는 비오 신부에 관한 책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수호천사를 비오 신부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했다는 것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때가 새벽 1시 5분이었음을 기억했다. 3시에 그는 잠이 깼다. 맨먼저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걱정되어 가보니 아이는 건강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너무나 기뻐 부인을 깨웠다. “우리 아이가 나았소!” 부인은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비오 신부님 덕분이예요. 난 잠들기 전에 내 수호 천사를 신부님께 보냈었어요.” 두 사람이 똑같은 일을 했음이 밝혀졌다. 몇 주 후 남편은 고마운 마음에 신부님께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리려고 산 지오반니 로톤도에 갔다. 그가 방에 들어갔을 때 비오 신부는 사람들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신부는 그를 보자 그를 가리키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당신과 있으면 누구도 편하게 있지 못할 거요, 밤에도 말이요!” 그가 감사를 드리려 하자 신부는 단호하게 말했다. “성전으로 가든지, 성모님께 가시오.”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보고 있어서 당황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그는 한마디 더 말했다. “비오 신부님, 누구의 수호 천사가 먼저 당신께 왔었나요? 아내의 수호 천사였나요, 아니면 제 수호 천사였나요?” 비오 신부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수호 천사는 1시 5분에 왔고 당신 부인의 수호 천사는 그보다 조금 늦게 왔소.” (‘님 닮았다 하소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