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해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희년(禧年)과도 특별한 관련이 있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희년에 풍성히 주어지는 대사(大赦)의 선물이다. 이에 대해서는 교황칙서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와 이 칙서의 부록으로 펴낸 성청 내사원(聖廳內赦院)의 교령 지침들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 대사 문제는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교회일치운동이 활발한 환경에서 우리 교회는 이 오랜 관습을 하느님의 자비라는 의미 심장한 표현이 담겨진 것으로써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바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봐서 실제로 대사를 흔히 그저 피상적인 자세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선물을 파괴하고 교회의 교도권이 제시하는 진리와 가치들을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
2. 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무궁무진한 하느님의 자비로써, 이는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연히 드러나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 ‘대사’ 그 자체로써, 곧 성부께서 성령 안에서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과 더불어 인류에게 주셨던 것이다(요한 1,12-12; 갈라4,6; 로마5,5; 8,15-16참조). 그렇다면 구원경륜 전체의 핵샘을 형성하는 계약의 놀리에서 볼 때, 이 대사의 선물은 우리 편에서의 믿음과 응답없이는 수령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서 본다면, 하느님과의 화해가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자비에 기인하는 것이긴 하지만 또 동시에 인간 자신의 개인적 노력과 교회에 위임된 성사적 실천이 함께 어우러진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길에서는 고해성사가 중심점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성사 후에도 계속적인 성숙이 필요하다.
죄가 그 인간 안에 남겨놓은(신학이 전통적으로 죄의 ‘벌’이라고 부르는) 부정적인 결과로부터 인간은 실제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치유’되어야 한다.
3. 고해성사에서 이미 죄를 용서해 주었으면 그만이지 그 뒤에 또 벌(罰)을 논하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논리에 맞지 않는듯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용서 후에 속죄벌을 받는 것이 정상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자비와 은총의 신” 이라 말씀하시면서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신” 이시자만,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라고 덧붙이신다(출애 34,6-7참조). 사무엘 하권에서는 ‘다윗’ 왕이 중죄(重罪)에 대해 겸손되이 고백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얻긴 하지만(사무 하 12,13참조), 예고된 벌의 취소를 얻어내진 못하였다(사무 하 12,11;16,21참조).
하느님의 부성애(父性愛)라고 해서 견책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견책은 항상 자비로운 정의(正義)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견책은 손상된 질서를 인간의 행복 자체의 가치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히브리 12,4-11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잠벌(暫罰)은 그 사람이 이미 하느님과 화해를 했건, 아니면 아직도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지 못하게 하는 죄의 결과에 머물러 있건, 그 사람이 고통 중에 머물고 있음을 뜻한다. 완전한 치유의 차원에서 죄인은 사랑의 충만함에로 향하는 정화(淨化)의 길에 나서도록 불리움을 받고 있다.
이 길에서 우리는 특별한 도움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된다. 잠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약(藥)’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근본적인 회개를 요구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고해성사가 요구하는 ‘보속(補贖)’ 의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4. 대사의 의미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교회의 봉사를 통한 인간의 완전한 갱신(更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사의 역사적인 기원은 초기교회가 성사적 용서를 위해서 부과한 교회법적인 보속의 완화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할 수 있다는 교회의 자각(自覺)에 있다.
그런데 이 완화는 언제나 상응하는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 의무들을 통해서만 주어졌는데, 이 의무들은 벌의 ‘약’ 역할 대용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왜 대사(大赦)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대사는 “이미 용서되어 소멸된 죄 자체에서 나오는 일시적인 벌(잠벌)을 하느님 앞에서 사면(赦免)해 주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의 분배자로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희생과 보속의 보물을 권위있게 나누어 주고 있는데, 신자는 이 사면을 얻으려는 선한 지향으로 일정한 조건들을 정화하게 준수할 때 교회의 행위를 통해 얻게 된다” (가톨릭교회의 교리서 1471 참조)
따라서 대사를 통해 나누어 주는 ‘교회의 보물’이 있다. 그런데 이 ‘나누어 준다는 것’을 하나의 물건처럼 자동적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구속 공로와 천주이 모친과 성인들의 통공을 기대하며, 아버지께 벌의 고통스러운 면을 완화 내지 소멸시켜 주시고 ‘구원의 효험있는’ 은총의 길로 확산시켜 주시기를 청하면,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는 교회의 완전한 신뢰의 표현인 것이다.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의 신비 안에서 통공의 선물이 이미 세상을 떠난 신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5. 이리하여 대사가 회개에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속전(贖錢: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이 아니라,오히려 더 열심하고, 더 고매하며 더 철저한 노력을 위한 도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도움은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어떤 조그마한 소죄라도 짓지 않으려는 영성적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반드시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 선물을 그저 어떤 특정한 외적인 규정을 채우기만 하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외적 규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도 회개에로의 길을 위한 표현이요 보조로서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로써 특별히 의미하는 바는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그리고 신부(新婦)로 자신과 뗄 수 없이 하나로 일치시키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룩된 공동체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경이적인 사건에 대해 믿고 있음의 외적 표시라는 사실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9년 9월 20일 일반알현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