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대사(大赦)라는 말을 어려워하고 있다. 이 주제가 교회일치의 대화를 촉진하는데 알맞지 못하다는 여론이 있다. 대사가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있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생각해 보아야 되지 않겠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2000번째 성탄인 2000년을 대희년의 해로서 축하할 것을 교회에 호소했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최근에 쓰여진 교황님의 대희년 선포 칙서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런 풍부한 문헌의 내용을 우리들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교황님께서 신앙의 위대한 신비를 우리들의 영적인 눈앞에 펼쳐 보여 주는 것으로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강생의 신비’ 가 우리 손을 떠나 가더라도 그것은 마음속 깊은 감동으로 오래도록 남아, 마치 우리 영혼의 기묘한 양식과 동경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칙서의 여러 내용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을 끄는 대목은, 교황님의 특유한 솔직함으로 일찍이 잊혀져있던 테마(금지된 테마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 즉, 대사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장이다. 교황님은 여기서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 주인과 같다” (마태 13, 52)라고 비유하시고 있다.

1. 대사 – 교회가 죄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인가?
이렇게 “이끌어낸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억도 도사리고 있다. 대사를 준다는 것이 변질하여 종교개혁 당시,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를 나눠 놓은 분열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미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그곳에 그냥 놓아두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교회일치 노력을 중단시키고 그 진전을 해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약에 대사 교리의 배후에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 사이의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다면, 이 문제에 관하여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일치되지 않는다. 실제로 교황님은 대사 교리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측면에서 다루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봉사를 통해, 아주 오래된 명칭인 ‘대사’ 라는 귀한 선물로 세상에 자비를 베푸신다.”(강생의 신비 9항) 물론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대사의 오용과 남용으로 더 이상 교회에 해독을 끼쳐서는 안된다. 이런 대사의 남용을 피하는 것은 대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비의 측면을 우리들이 알아듣고 특히 나누어 주는데 있어서 이것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화를 나눠받은 우리들은 옛 것과 새 것의 귀한 선물을 손에 쥐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선입관이라는 먼지를 털어내고 씻어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대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한 요소를 찾는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
만약에 대사가 애초부터 하느님 사랑이 나타난 한 가지의 표현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대사를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또 그 대사를 얻는 것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대사란 무엇인가?

2. 죄에 대한 벌
우리 모두는 일상적인 경험에서 죄에는 그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적인 일로 볼 때, 그 결과는 죄 자체보다 훨씬 나쁘고, 아무리 통회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없을 때가 자주 있다.
물론 하느님 앞에서는 이런 외적인 판단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죄의 신학적인 나쁜 결과는 (대죄를 지었을 때) 한편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아무리 작은 죄라도 죄는 인간에게 해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이런 해로움은 이 지상에서나 죽은 후에, 연옥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정화를 필요로 해야만 한다.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후자와 관련하여 죄의 결과들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즉 죄사함은 죄와 관계 있는 것이고, 대사는 죄의 결과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KKK)는 더 나아가 죄의 결과는 ‘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 가르치고 있다.(KKK 1472) 죄의 결과들은 하느님의 공동체 전체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들은 하늘나라에 올라가기 전에 완전히 정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연옥”이다.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당하는 각가지 고통들과 시련들을 인내로이 견디면 이미 죄의 결과를 이겨낸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사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대사는 보다 덜 고통스런 영혼의 정화이며, 자비로운 연옥이다. 역설적으로는 “고통이 없는 보속”이다. 이 보속은 항상 내적인 회개를 요청하며, 회개에 따르는 노력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서 회개없이도 이 고통을 감당해 낼 수 없다.

3. 죄는 용서받으나 죄에 대한 잠벌은 남아있다.
죄의 용서와 대사는 구별됨과 동시에, 죄 자체와 그 결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곧 하느님은 죄인이 통회한 행위는 용서해 주신다. 그러므로 죄의 가장 나쁜 결과인 하느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오는 일은 없어진다.
그렇지만 죄의 “잠벌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잠벌은 하느님과 일치되는데 있어 심한 장애를 마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대한 친교를 회복하면 죄의 영벌은 면제 되지만 잠벌은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각가지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이 견디고, 때가 되면 죽음을 침착하게 맞음으로써 죄의 잠벌들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비와 자선의 행위와 더불어 기도와 여러 속죄행위로 ‘묵은 인간’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갈아입도록 힘써야 한다.” (KKK 1473)

4. 선으로 향하는 공동체와 악으로 향하는 공동체 – 대사이론의 전제조건
바오로 사도는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1고린 12,26). 그리고 이 말은 특별히 죄에 관해 잘 들어 맞는다. 죄는 남몰래 저질러지더라도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서로 통하는 하나의 그릇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사적인” 죄가 공동체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결과를 낳게 된다.
다른 일에 있어서도 개인의 죄가 모두에게 해당되며, 아니 더 많은 분야에 해당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교황 바오로 6세의 교황령(Indulgentiarum Doctrina 5)에서는 “성도들의 통공 안에는 ‘신자들 – 이미 천상 고향에 이른 사람들, 연옥에서 속죄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는 사람들 – 사이에 변함없는 사랑의 유대와 모든 선의 풍부한 나눔이 있다.’ 이러한 놀라운 교류로, 어느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 끼칠 수 있었던 손해보다는 한 사람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선익이 훨씬 더 크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의 통공에 의지하면 통회하는 죄인이 죄의 벌에서 더 일찍, 더 효과적으로 정화될 수 있다.” (KKK 1475)
먼저 대사에 관한 말을 하기 전에 두 가지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그러나 죄인은 자기 혼자서만 ‘문제’에 부딪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가 그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하느님 자녀 각자의 생명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초자연적 단일성 안에서 마치 신비로운 한 인격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생명과 놀랍게 연결되어 있다.” (Indulgentianrum Doctrina 5, KKK 1474) 이렇게 해서 신자들 사이에서 영적인 통공이 이루어 질 수 있으며 한 사람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의 거룩함을 돕게 된다. 즉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사랑이 넘치고, 많은 고통을 견디어 낸 사람, 풍부한 진리와 깨끗한 순결을 지닌 그런 사람들은 이런 넘치는 덕행으로 타인의 구원을 도와준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님이 새로운 것을 선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사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이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대속의 원칙” 이고, 궁극적으로는 이 원칙 위에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가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대사에 관한 가르침이 완전히 제2차적인 진리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될 수는 없다!

5. 교회의 보화 :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업적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성도들의 통공이라는 보화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쌓이는 물질적인 부(富)와 같은 어떤 재물의 총화가 아니라, 인류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도록 바쳐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이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무한하고 무궁한 가치가 있는 보화이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구속 공로가 충만하다.” (KKK 1476) 성인들의 선업들은 그리스도께 예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라 걸으며, 성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자신들을 정화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기도와 선행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풍부하고 막대하며 항상 새로운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는 이 보화에 포함되어 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면서, 신비체의 일치 안에서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협력하였다.” (KKK 1477)

6.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대사를 얻는다
그럼 “대사를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교회의 보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교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이 보화를 “관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현대인들과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는 탐탁치 않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 문제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를 통하여 대사를 얻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매고 푸는 권한으로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개하여, 그의 죄로 인한 잠벌의 면제를 하느님 아버지께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의 보고를 그에게 열어준다. 이처럼 교회는 그 신자를 도울 뿐 아니라, 신심행위와 참회와 자선을 행하도록 그를 격려하기도 한다.” (KKK 1478)
이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인 회개를 하든 대신으로 하든 어떤 방법으로 대사를 얻든, 그것을 필요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기계적인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대사는 회개를 전제로 하며, 회개를 쉽게 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이 교리에 의지하여, 교회의 어머니다운 뜻을 해설함으로써, 모든 신자들이 알맞게 준비하여 대희년 동안 계속해서 대사의 선물을 풍부히 받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지시를 따르기를 바란다.”

7. 죽은 신자들에게도 “대사를 얻어줄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죽은 신자들을 위한 대사”를 통해 죽은 이들도 도울 수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정화 중에 있는 죽은 신자들도 성도들과 통공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위한 다른 도움과 더불어, 특히 그들의 죄로 인한 잠벌을 면하게 하는 대사로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 (KKK 1479) 대사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시 한번 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죽은 이들에게 대사를 얻어주는 것은 특별한 “초자연적 사랑”의 한 형태이다.

끝으로 이 대사에 관한 가르침에 대해 정확한 뜻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대사에 관한 편견을 많이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신자들이 이런 하느님의 사랑의 방법에 눈을 뜨게 되고 – 이 하느님의 사랑의 방법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소홀히 했으며 또한 이 사랑을 받는데 있어 대사를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하며 – 하느님의 귀한 선물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풍부한 재산을 풍요롭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안드레아 라아운 주교 – 마리아지 2000년 1~2월(9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