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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실리아 성녀의 생애

   세실리아 성녀의 생애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5세기에 쓰여진 “순교성녀의 행전”에 나와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중요한 사실만이 진실한 근원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이 행전들은 수많은 사본을 통해 전해져왔고, 또한 희랍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그것들은 세실리아 성녀를 기리는 다섯 개의 서로다른 미사의 감사송에 사용되었다. 세실리아 성녀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는 이 오래된 이야기의 내용이다.
   세실리아는 로마의 북서부지방인 캠퍼스 마르셔스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방인 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교인이었던 것 같다. 세실리아는 조상들이 로마역사에도 화려하게 등장하는 고귀한 귀족 가문에 속했다. 아직도 아피안로(路)에는 고올에서 시저의 총독을 지냈던 크라서스의 부인인 세실리아 미텔라의 무덤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이 가문은 로마의 위세와 영광에 크게 기여했다. 18명의 집정관과 많은 고위 관리들, 그리고 화려한 정복의 댓가로서 칭호를 얻었던 유명한 장군들이 이 고귀한 가문에서 나왔다.
   매우 부유하고 고귀한 가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실리아는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기의 지위에 어울리는 옷보다 거친 천의 의복을 입었고, 일주일에 몇일은 단식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때문에 동정이 될 결심을 하였다. 그녀가 매우 젊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발레리안이라 불리는 젊은 이방인 귀족에게 결혼을 시켜버렸다. 발레리안은 그녀를 현재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구역에 있는 자신의 궁으로 데려갔다.
   혼인하던날 음악과 먹고 마시며, 즐기는 하객들 가운데서, 세실리아는 혼자 떨어져 앉아서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노래를 부르며, 이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구하며 기도를 했다.
   그들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세실리아는 그녀의 남편에게 부드럽게 말을 했다. “당신께 말씀드릴 비밀이 있어요. 저에게는 저를 지켜 보고 있는 하느님의 천사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셔야해요. 만약 당신이 결혼한 입장에서 저를 범하시면, 그 천사는 화를 내고 당신은 고통을 받게 될 거에요. 하지만 당신이 저의 동정을 지켜주신다면 그 천사는 저를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도 사랑하실 거에요.”
   발레리안이 대답했다. “그 천사를 나에게 보여 주시오. 만약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면 당신이 원하는 데로 내가 삼가겠소.”
   세실리아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살아계시고 오직 한분이신 참된 하느님을 믿고 영세를 받는다면, 천사를 보게될 거에요. 사람을 정화수에 깨끗이 씻어 천사를 보는데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해주는 힘을 가지고 계신 노인이 한분 어딘가에 계세요.”
   발레리안이 물었다. “어디로 가면 내가 이 노인을 만날 수 있겠소?”
   세실리아가 대답했다. “아피안로에서 세번째 길안내 표석이 있는 곳까지 가세요. 거기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구걸하고 있는 가난뱅이를 볼 수 있을 거에요. 저는 항상 그들을 도와왔고, 그들이 그 비밀을 쥐고 있어요. 그들을 보면 제 이름으로 인사한 뒤 ‘세실리아가 나를 당신들한테 보내서 왔으니 나를 거룩한 노인 우르바노에게 인도해 주시오. 나는 그녀로부터 노인에게 전할 비밀 임무를 가지고 왔소’ 라고 말하세요. 그 노인에게 제가 당신에게 천사에 대해 한 얘기를 말하세요. 그분은 당신에게 세례를 주고, 빛나는 새옷을 당신에게 입혀줄 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그옷을 입고 이 방에 들어오면, 거룩한 천사를 보게될 거에요.”
   발레리안은 아피안로를 따라가다가 세번째 길안내 표석에서 도로를 벗어나 오래된 모래 구덩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몇몇 늙은 거지들과 불구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카타콤(지하묘지)으로 통하는 비밀 출입구를 지키고, 그 쪽으로 오는 병사나 수상한 사람들을 보고하는 그리스도교 감시자들이었다. 발레리안은 비싼옷을 입었고 그의 뽐내는 태도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드러냈지만, 그가 필요한 인사와 암호를 대자 그들은 그를 지하묘지로 인도해 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기쁘게 맞아 주었다. 위엄있는 노인인 우르바노 주교가 그를 맞았다. 이분은 성 우르바노 1세 교황이 아니다. 주교는 다음과 같이 적힌 쪽지를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한 주님이시며, 한 믿음, 한 세례, 한 분이신 하느님, 모든이의 아버지시며, 모든이보다 높이 계시며, 우리모두 안에 계시는 분.”
   “이것을 믿습니까?” 우르바노 주교가 물었다.
   발레리안은 기꺼이 믿겠다는 마음을 표시했다. 그는 주교로부터 교리를 받고 영세를 받았다.
   발레리안은 자신의 하얀 영세식 옷을 입고 돌아왔다. 그는 세실리아의 방으로 자신이 새로이 발견한 믿음 때문에 느끼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왔다. 그가 세실리아의 방에 있는 커텐을 걷었을 때, 그는 그녀가 기도하며 무릎꿇고 있는 모습 주위에서 빛나는 환한 빛에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옆에는 천사가 서 있었는데 그 얼굴이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감동에 휩싸여 발레리안은 세실리아 옆에 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천사는 장미와 백합으로된 관을 그 둘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나서 천사는 발레리안에게 어떤 청을 하면 들어주겠노라고 제의를 했다. 발레리안이 청한것은 자신의 동생 티베르시우스에게도 영세의 영광이 주어지는 것뿐이었다. 그 동생은 형인 발레리안에게서 발견한 변화에 감명을 받고 있는 터였다. 그러자 티베르시우스가 나타났다. 그에게도 또한 그가 거짓된 신을 저버린다면 받을 불멸의 관이 제의되었다.
   처음에는 그는 믿기가 힘들었다.
   그가 물었다. “누가 우리에게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해주려고 무덤 저편에서 돌아왔단 말이오?”
   세실리아는 그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마침내 그녀가 예수에 대해 말한것을 믿게 되었다. 그도 역시 우르바노 주교에게 영세를 받았다.
   네로 황제(서기 64년)시대부터 313년에 이르기까지 초기 교회는 혈세(血洗)의 피를 뿌렸다.
   이 기간의 반에 해당하는 기간에 교회는 모진 박해를 당했다. 때로는 관대한 황제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법을 집행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평화를 누리기도 했다. 많은 교인들이 감옥에서 죽었고 고문을 당했다. 수천명이 광산에서, 채석장에서, 노예선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형을 받았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공개를 피하기 위해서 종종 자신의 집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가장 주목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원형 경기장, 특히 로마시 안에 있는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를 당한 이들이었다.
   이 당시 로마의 제독은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기로 유명한 테르시우스 알마치우스였다. 때는 봄이었다. 관습에 따라 로마군대는 막 여름출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황제는 웅장하게 로마를 떠났다. 황제가 로마에 없는 동안, 테르시우스 알마치우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진 칙령을 수행할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의 폭력은 우선 하층계급의 신자들에게 향해졌다.
   발레리안과 티베르시우스는 자신의 재산을 자선기부금으로 내놓고 자신의 시간은 로마제국경찰이 매장하기를 거부한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에게 적당한 안장지를 제공해 주는 일에 전부 할애했다.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들도 테르시우스 알마치우스에게 체포되어 그의 앞으로 불려나갔다. 그들은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피터신에 대한 숭배 행위를 거부했다. 발레리안은 매를 맞았다. 결국 두 형제를 아피안로에 끌려져 나와 참수형을 당했다.
   막시무스는 발레리안과 티베르시우스의 사형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는 공증인이었다. 그는 그들의 자기희생에 감명을 받고 개종하여 영세를 받았다. 그는 즉시 납으로 채워진 채찍을 맞고 죽음을 당했다. 세실리아는 세 순교자들이 성 프라텍타투스 묘지에 안장되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그녀도 역시 위험에 처해있었다.

   세실리아 성녀의 순교 (서기 177년)

   두 형제의 재산을 소유하고 싶어 조바심이 난 알마치우스는 그들의 재산 전부에 대한 압수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세실리아도 처치를 해야만 했다. 세실리아는 발레리안과 티베르시우스의 유해를 매장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녀에게는 신에게 희생 제물을 드리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든지 하는 선택만이 주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대신 그녀는 그녀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설득하러온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우르바노 주교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400명을 영세시켰다. 영세를 받은 사람 중의 하나가 고르디언이었는데, 그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나중에 우르바노 주교가 성녀의 이름으로 축성한 교회를 성녀의 집에 세운 사람이다.
   세실리아는 결국 법정에 불려 나오게 되었다. 알마치우스는 한참동안 그녀와 논쟁을 벌였다. 그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 버렸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의 말끝마다 그를 꼼짝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독의 위협에 대한 대답은 “제가 저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였다.
   알마치우스는 자신이 그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신이 죽음을 줄 수는 있어도 생명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녀의 젊음과 고귀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이 그녀가 공개적으로 사형당했을 때, 사람들을 선동시킬 것을 우려한 나머지, 제독은 그녀를 그녀의 집의 증기 목욕탕에 가두어 질식사를 시키고자 하였다. 이 목욕탕의 벽둘레에는 납 파이프가 둘러져 있었는데 죽음이 불가피할 정도로 뜨겁게 달구어졌다. 아궁이에는 평소보다 일곱배나 많은 연료가 채워졌다.
   세실리아는 꼬박 하루 낮과 하루 밤을 이 숨막히는 증기 속에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보냈다. 하는수없이 이 로마 귀부인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안 알마치우스는 그녀를 참수시킬 사형집행인을 보냈다. 성녀의 모습을 보자 사형집행인은 그만 용기를 잃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법이 허용한 세번의 일격을 가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이틀 밤과 낮을 그녀는 살아서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목이 반쯤 잘린채 자신의 목욕탕 바닥에 누워 있었다.
   교인들은 사형집행인이 황급히 떠나자 곧 달려와서 린넨 천으로 그녀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지만 그녀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지는 않앗다. 세번째 되는 날 아침에 존엄한 우르바노 주교가 세실리아에게 작별을 고하러 찾아왔다. 그녀는 누워 죽어가면서 그녀의 궁을 교회로 만들 것과 그녀가 항상 사랑했던 가난한 이들을 보살펴 줄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기도할 때 합장한 것처럼 손을 앞으로 모으고 오른쪽으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와 하느님의 마지막 비밀 대화를 방해할 수 없도록 자신의 얼굴을 바닥 쪽으로 돌렸고, 이렇게 죽어갔다. 그녀의 손가락의 위치 – 오른쪽 세 손가락과 왼쪽 한 손가락을 편 위치 – 는 거룩한 성삼에 대한 마지막 무언의 신앙 고백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아마도 177년에 일어났을 것이다.

   세실리아 성녀의 무덤 발견 (서기 822년)

   교인들은 그녀가 순교 당시 입고 있었던 비단과 금으로 된 화려한 옷을 그대로 입힌 채로 삼나무 관에다가 그녀가 숨을 거둘 때의 위치 그대로 넣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신자들이 그녀의 피를 닦았던 린넨 천과 베일을 놓았다. 그 다음날 밤 그들은 그녀의 유해를 아피안로로 운반을 하고 세번째 표석근처 성 칼리스투스 지하묘지에, 교황들의 토굴에서 가까운 세실리 토굴에 그녀를 묻었다.
   서기 817년 1월에 파스칼 1세 교황이 교황청의 대를 이었다. 그 다음 7월에 교황은 여러 군데의 지하묘지에 있는 2300 명의 순교자들의 유적들을 같은 도시의 다른 성당으로 옮겼다. 그 당시의 지하묘지들은 개탄할 정도의 폐허 속에 있었다. 이 유적이동의 이유는 아마도 이탈리아를 위협하고 있는 사라센족들에 의한 신성모독을 두려워한 때문일 것이다.
   교황은 세실리아성녀의 유적들도 옮기고 싶어했지만 그녀의 무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교황은 성녀의 유해가 롬바드 왕인 아스투르푸스에 의해 옮겨져 갔다는 보고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 왕은 로마를 포위하고 묘지를 약탈한 왕이었다.
   4년이 지난 후, 세실리아성녀는 꿈 또는 환시에서 나타나 교황에게 자신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파스칼 교황 자신이 직접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는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전의, 사도들의 우두머리 성 베드로 무덤 옆에서 성무일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졸음이 엄습했다. 갑자기 매우 아름다운 젊은 동정녀가 그의 앞에 나타나서 얘기했다. “당신에게 많은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그러나 당신은 간단한 보고서와 잘못된 풍문을 듣고 저를 찾는 희망을 모두 버리셨단 말인가요? 한 번은 당신이 저와 대화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깝게 다가온 적도 있었답니다.”
   깊게 감동된 교황이 물었다. “그렇게 확신있게 나에게 이야기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의 종, 세실리아 라고 합니다.” 라고 동정녀가 말했다.
   교황은 물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거룩한 순교자의 유해는 롬바드인들이 가져갔다고들 하오.”
   세실리아가 대답했다. “그들이 물론 꽤 오랫동안 끈질기게 저를 찾았었죠. 그러나 하느님의 동정 모친께서 저를 보호해 주셨어요. 성모님께서는 그들이 저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아직도 제가 처음 잠든 그곳에 있습니다. 제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저의 무덤이 당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저의 유해를 제곁에 있는 다른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당신이 방금 복원한 성당으로 옮겨 주세요.” (교황 파스칼의 증언)
   그리고나서 성녀는 사라졌다.
   이 환시에 용기를 얻은 교황은 지하묘지 탐색을 다시 새롭게 시작했다. 두 지하화랑이 교차한 지점에서 교황은 지금까지 탐색되지 않은 무덤이 교차로 옆쪽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교황은 그 무덤을 열어 보라고 명령했다. 매우 기쁘게도, 깊고 좁은 구멍 안에서 교황은 세실리아의 무덤을 발견했다.
   세실리아는 우르바노 교황이 그녀를 묻었을 때 입고 있었던 비단과 금으로 된 옷을 입은 채 삼나무 관에 잠들어 있었다. 성녀의 몸은 처음 무덤에 묻혔을 때와 똑같이 생기가 있었으며 완벽한 상태였다. 그녀의 상처를 지혈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던 린넨천과 베일은 함께 뭉쳐져서 그녀의 발치에 놓여 있었다. 파스칼 교황은 자신의 손으로 세실리아가(家)의 딸의 존경스런 유적들을 만져 보았다고 증언했다. 가까이에서 교황은 성 발레리안과 성 티베르시우스, 성 막시무스의 유해를 발견하였다.
   822년 5월 8일에 교황은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 세실리아 성당을 장엄하게 축성하였고 그녀의 유적을 성당의 토굴에 안치했다. 교황 우르바노의 모범을 따라, 교황은 성녀를 발견했던 모습 그대로 삼나무 관에 남겨 두었다. 성녀의 유해 위에 교황은 엷은 비단베일을 덮었다. 그리고나서 관을 하얀 대리석 무덤 또는 석관이라 불리는 곳에 안치하고 발레리안과 티베르시우스, 막시무스의 유해를 다른 무덤에 안장했다. 세번째 무덤에는 그가 이미 전에 발견했던 우르바노 교황의 유해아 우르바노 교황의 후계자인 성 루치우스 교황의 유해를 안치했다.
   파스칼 교황은 세 무덤 주위에 원형 벽을 둘러 쌓았고, 그 위에 다음과 같이 새겨진 대리석 석판을 올려 놓았다 : “이 거대한 성전은 파스칼이 관대롭게 복원했을 당시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파스칼은 이 성전에 세실리아 성녀와 그녀의 동료들의 유해를 한 곳에 모았다. 유해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하묘지에 숨겨져 있었던 이 젊은 귀족들의 가족은 이제 여기에 잠드노라.” 8세기 동안 그 수면은 방해받지 않았다.

   세실리아성녀의 무덤 공개 (서기 1599년)

   1599년에 바오로 손드라티 추기경은 성 세실리아 성당을 위임받았다. 교회에 더 많은 유적들을 내놓기 위해서 그는 제대 바로 밑의 벽을 뚫었는데 하얀 대리석 무덤을 발견하였다.
   그 무덤을 열기전에, 그는 몇몇 신임할 수 있는 증인들을 부르러 보냈다. 그들은 그 무덤을 열고, 세실리아성녀의 유해를 담은 길이 4피트 3인치의 삼나무관을 발견했다. 비단 베일과 옷, 피묻은 베일들이 파스칼 교황이 남겨두었던 바로 그대로였다. 성녀는 오른쪽으로 누워있었는데,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목은 아직도 칼자국의 표시가 있었으며 머리는 관의 밑바닥을 향하여져 있었다. 유해는 전혀 부패되지 않고 온전하였으며, 우아하고 진짜 살아있는 것 같은 모습은 이 순교자가 목욕탕 바닥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의 모습을 생생히 회상시켜 주고 있었다. 그 다음날 그들은 발레리안과 티베르시우스, 막시무스의 유해가 담겨있는 두번째 무덤을 열었다. 손드라티 추기경은 세실리아성녀의 관을 옆에 인접해 있는 성당으로 옮기게 하고, 클레멘스 8세 교황이 가계신 프라스카티로 급히 달려갔다. 때마침 중세기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였던 바로니우스 추기경이 교황과 같이 있었다. 그는 세실리아성녀의 유해를 검사하고 난 뒤, 생생한 묘사를 기록해 놓았다 *

   (* 다음은 이 유명한 학자의 보고이다 : “클레멘스 교황은 급성 통풍에 걸려 몸져 누워있었고 아무에게도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드라티 추기경이 온 취지를 듣자, 곧 교황은 그를 만나서 그에게서 직접 이 놀라운 발견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교황은 크게 기뻐하며 이 이야기를 들었고 자신이 아프기 때문에 곧장 달려가서 이 위대한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할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까와 했다. 그러나 교황의 실망이 곧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세실리아성녀의 유해를 확인하고 공경을 드리는 임무를 나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손드라티는 곧 로마를 향해 떠났다. 나는 그를 수행했고, 그날 저녁 우리는 성 세실리아 성당에 도착하였다.

   “나는 대리석 관에 들어있는 삼나무 관을 보았다. 그것은 세실리아의 유해를 담고 있었고 매우 얇고 약간 손상된 덮개로 덮어져 있었다. 나는 878년 이상이나 빛도 공기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관이 들어있던 대리석에서 나오는 습기에 계속 노출이 된 채로 이렇게 완전무결하게 보존된 단순한 나무관을 탄복하여 바라보았다. 그 관은 너무 단단하여서,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고 만지고, 심지어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 유적들을 완전히 조사하고 경탄한 후에 우리는 그 관이 담고 있는 신성한 유해를 보기를 원했다. 우리는 세실리아의 유해가 파스칼 교황이 발견하고 묻은 똑같은 바로 그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발치에 놓인 피 묻은 린넨천과 비단과 금으로 된 옷은 비록 시간의 경과에 따라 손상이 되었지만, 교황이 묘사한 그대로였다.

   우리는 성녀의 유해가 보통 죽은 사람들의 유해처럼 관에 길게 눕지 않은 것을 보고 경탄에 사로잡혔다. 순결한 동정녀는 마치 소파위에서 우아하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누워있었고, 무릎은 얌전히 모아져 있었으며 그녀의 전체적인 모습이 너무나 존경심이 불러 일으켜 아무도 감히 그녀를 만지려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마치 성녀의 천상 배필이 그녀가 자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나는 아무도 나의 사랑하는 이를 그녀가 원하기 전까지는 깨우지 말도록 엄명 하노라’ 라고 말씀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두 깊이 감동되어 있었다.”)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이 동정 순교자를 보러 왔고, 성녀의 유해는 4주 내지 5주 정도 일반 사람들이 공경을 드릴 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1599년 세실리아성녀의 영명 축일에 무덤이 다시 폐쇄되었을 때에, 교황 자신이 미사를 집전하였다. 성 로버트 벨라민이 집전한 행렬에는 42명의 추기경이 참석하였다.
   손드라티 추기경은 현재 성녀의 무덤 위에 있는 아름다운 대제대를 세웠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뛰어난 조각가였던 스테파노 마데르나를 불러 대리석으로 성녀의 모습을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야기에 의하면 조각가 마데르나는 “무덤에 등을 뒤로하고 똑바로 누워있는 유해와는 달리 침대위에 누워 있는 소녀처럼 오른쪽으로 누워, 무릎은 한데 모으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유해를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을 실물크기로 조각했다고 한다. 이 조각가는 관 위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새겻다 : “가장 고결한 동정녀 세실리아를 보라. 나는 성녀가 무덤 안에 부패되지 않은 채로 누워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이 대리석으로 유해의 모습 그대로 성녀의 상을 만들었다.” 이 조각은 성 세실리아 성당의 제대 밑에 있고, 제대에 인접한 곳에는 유적들이 은으로 만든 관에 담겨져 묻혀있다.
   모든 역사의 연대기 안에서도 이러한 일은 찾아 볼 수 없다 – 죽었을 때와 똑같은 위치대로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유해와 가장 솜씨있고 힘들게 정확도를 기해서 대리석으로 영구히 만들어진 유해를. 그것은 1700년 전에 하느님께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내쉬면서 누워 있던 위대한 순교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성녀 세실리아의 성당과 축일

   로마의 옛날 성세실리아의 주보성당은 ‘인 트라스테베레(In Trastevere), 즉 ‘타이버강 저편’ 이라고 불리워 졌는데, 이는 성녀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로마의 다른 두 성당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의 주보 성인들의 선물인 로마의 다른 옛날 성당들처럼 로마교회는 이 성당을 거룩한 순교자 자신의 은덕에 힘입고 있다. 이는 성 칼리스투스의 원래 지하묘지의 가장 오래된 부분이 세실리아성녀의 가문에 속한 까닭이다. 4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분명히 이 성당은 아피안로에 묻힌 성녀의 이름으로 5세기에 축성되었다. 파스칼 1세 교황은 이 성당을 개축하였다. 822년 5월 8일에 교황은 성 세실리아 성당을 장엄하게 축성하였고, 그녀의 부패되지 않은 유해를 토굴에 넣었다.

   손드라티 추기경이 1599년 대성전을 원래의 형태로 되돌리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18세기 동안 그가 한 대부분의 작업들이 변화를 겪음으로써 유명무실 해졌다. 1899년과 1900년에 람폴라 추기경은 성당 밑에서 성 세실리아와 발레리안의 오래된 궁의 일부분을 발굴했다. 바둑판 무늬로 된 바닥은 현재 몇몇 방에서 잘 보존이 되어있고 폐허 속에서 발견된 많은 귀중한 조각의 파편들은 이제 벽위에 전시되어 있다. 변경작업에는 성인들의 유해를 그들을 위해 다시 지은 새 제대로 옮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세실리어 성녀의 유해를 담고 있는, 무게가 400파운드 이상 나가는 화려한 은으로 만든 관이 파헤쳐지게 되었다. 추기경은 자기 자신의 손으로 은에 묻어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고, 관을 열지 않은 채로 귀중한 천으로 싼 후 새 성전으로 옮겼다. 중간 복도 아래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지하성당 또는 토굴이 세워졌고, 그 안의 제대위에 난 격자창은 세실리아의 부패되지 않은 유해와 성 발레리안과 성 티베르시우스, 성 막시무스의 유골이 들어있는 돌로 된 무덤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성 세실리아 성당에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성체가 대개 모셔져 있는 부속성당이 있다. 그 옆으로는 세실리아성녀가 고통을 받고 죽어간 목욕탕이 있다. 1599년에 손드라티 추기경이 그곳에 쌓인 폐물들을 대부분 꺠끗이 치우고, 원래의 형태대로 가능한한 복원을 하였다. 그 밑에서 그는 커다란 보일러인 고대 로마의 용광로와 증기를 목욕탕으로 올려 보내는데 사용된 납 파이프 조각들을 발견하였다. 제단위에 놓인 대리석 석판은 그 위에서 세실리아가 사형집행인의 칼을 맞았던 것이며, 제단 위편으로는 구이도 레니가 정교하게 그린 성녀의 순교장면이 있다. 반대편 벽에는 천사가 세실리아와 그녀의 젊은 배우자 발레리안에게 관을 씌워 주는 것을 묘사한 도메니치노의 인상적인 그림이 있다.

   대제대에는 아르놀포 드 캄비오(1283)의 작품인 아름다운 닫집이 있고 그 아래에는 스테파노 마데르나가 하얀 대리석으로 제작한 경탄스러운 세실리아 성녀의 누운 모습이 있다. 성녀는 1599년 손드라티 추기경이 무덤을 열었을 때 발견한 유해의 위치 그대로 묘사된 것이다. 대제대 뒤의 주교좌에는 9세기의 고대 모자이크가 있는데, 주님과 베드로, 바오로 사도, 성녀 세실리아와 성 발레리안, 성녀 아가다, 그리고 교황 파스칼 1세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세실리아 성녀의 축일은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의 성당에서는 11월 22일에 지켜졌다. 축일의 기원은 아마도 이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비록 성녀의 이름이 가장 초기(4세기) “레오교황의 성인목록”의 축일표(순교자 축일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5세기 말에 완성된 서로 다른 다섯개의 미사집에는 언급이 되어있다. 성녀의 이름이 사용된 것을 보면 그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성녀가 얼마나 큰 공경을 받았나를 알 수 있다. 교황 파스칼 1세가 9세기에 성녀의 성당을 개축했을 때, 같은 교황이 근처에 세운 수도원의 수사들이 대성전 안에서 매일 일과를 노래 부르는 의무를 떠 맡았다. 이 시대부터 이 거룩한 순교자 공경은 계속 퍼지게 되었고 많은 교회들이 성녀의 이름으로 축성되었다.

   예술과 음악에서의 세실리아성녀

   세실리아성녀는 종종, 조형예술과 시, 음악으로 예찬되어 왔다. 그녀는 그리스도교 초기시대부터 가장 공경받던 순교자들중에 하나이다. 세실리아 성녀의 가장 오래된 묘사는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흔히 순교자들을 묘사하듯이 성녀가 손에 순교의 관을 들고 있거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성녀의 토굴에 있는 6세기와 7세기의 두 그림)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녀의 성당 후진에는 성녀가 교황의 수호자로서 화려한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 9세기 파스칼 교황시대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성녀는 중세시대의 그림에는 매우 자주 등장한다.

   14세기 이후부터는 “악사들이 그녀의 결혼식에서 연주하고 있는 동안 성녀는 마음속으로 단지 하느님께 노래를 불러 드렸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왔다. 적어도 16세기 초부터 음악의 주보라는 명칭이 성녀에게 주어졌다. 1505년에는 라파엘이 성녀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을 묘사했다. 로마에서 음악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을 때(1584), 성녀는 그 학교의 주보 성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 교회 음악의 주보로서의 성녀 공경은 더욱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세실리안 협회(음악협회)가 도처에 있다.

   그러나 세실리아 성녀가 교회음악의 주보로 간주되는 이유는 성녀가 하느님께 찬미 노래를 부를 때의 그 열정 떄문이다. 성녀의 행전에 따르면 성녀는 찬미를 드릴 때 목소리와 함께 종종 악기를 같이 연주했다고 한다. 성서, 특히 시편은 하느님께 찬미드릴 때 경건한 음악을 사용하는 종교적 관습을 추천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모두가 사용했던 보편적 관습이었다. 이러한 찬미의 형태로 우리는 천상 영혼들의 끊임없는 흠숭과 사랑과 찬미의 노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영적 기쁨의 표현이다.

   우리는 이미 로마의 성 세실리아 성당의 대제대 밑에 있는 대리석 상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것은 성녀가 사형집행인으로부터 마지막 일격을 받고 목이 반쯤 잘린 상태로 오른쪽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스테파노 마데르나가 묘사한 것이다. 이 상의 복제본이 세실리아성녀의 유해가 177년부터 822년까지 머물렀던 지하묘지의 무덤에 있다.

   마데르나가 조각한 세실리아성녀의 상의 똑같은 실물크기 복제본이 위스콘신주, 이스트 트로이에 있는 신언회 신학교의 유적 성당에도 모셔져 있다. 상의 토대에는 성녀 세실리아와 성 발레리안, 성 티베르시우스, 성 막시무스, 성 우르바노의 유적이 있다. 성녀의 경당 주변에는 약 300명의 순교자들과 참회자, 동정녀들의 유해에서 나온 유적들이 있다.

   순결의 모범

   세실리아 성녀의 순교에 이은 잔인한 박해동안에, 세속적인 의미로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던 이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범은 수천명의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관대한 헌신을 하도록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1599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명무실해지고 소위 개혁이 승리를 거두며 어머니 교회로부터 전체 지방과 나라를 떨어져 나가게 하고 있을 때, 우리 성녀의 유해는 마치 천상 믿음의 불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교회가 또 다시 공격을 받고 물질주의와 무관심이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 속에 침투를 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시대에도 성녀의 용기와 자기희생, 하느님께의 복종의 태도는 우리에게 영감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실리아 성녀는 순결의 찬란한 모범이다. 순결의 덕이 존경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하느님의 윤리 계명이 결혼을 한 사람이나 안한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이렇게 자주 위반되어지고 있는 우리의 시대에, 성녀의 모범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 빛나고 있다. 결혼한 이들은 확신을 가지고 세실리아성녀에게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녀는 헌신적인 아내였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는 거룩한 순결을 보존하기 위하여 성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녀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순결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녀의 박해자 앞에서 “저는 저의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성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세속적 사랑보다 더 값있게 생각했다. 성녀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자기 양도는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제일 좋은 친구로 사랑하도록 용기를 주어야만 한다. 이것은 단지 세실리아 성녀가 그랬듯이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일 뿐 아니라, 기도와 특히 영성체를 자주 영함으로써 가장 성실한 사랑속에 우리 자신을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녀의 아름답고, 부패되지 않은 몸에서 하느님께서 거룩한 순결을 보답해주신 영광의 상징과 하느님의 거룩한 법을 지키고 당신의 교회에 충성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필요한 자기 희생의 상징을 본다. 그러므로 세실리아 성녀는 순결의 모델이라 불릴만한 모든 이유를 가졌다.

– ‘성녀 세실리아 순결의 모범’ / 로렌스 G. 로바식 신부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