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도 깊이 들어가면 신관 충돌
창조신 인격신 하느님이 아닌
범신이나 잡신 믿으라 가르쳐

   신흥영성운동에 대한 영적식별과 관련하여 요가 문제를 건너뛰고 넘어갈 수가 없다. 신자들 가운데 요가에 심취한 이들이 많을 뿐 아니라, 요가와 관련하여 문의를 해 오는 이들이 곧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가정 파탄의 위기, 가톨릭 영성의 왜곡, 불교로의 개종 등 심각한 부작용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일단 밝혀 둔다.

‘직업은 요가 강사입니다’

   지난 8월 24일자로 서00라는 자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메일 문의를 받았다.
『저는 신부님께서 가톨릭신문에 연재하고 계시는 칼럼의 열렬 독자입니다. 참고로 저의 직업은 요가 강사입니다. 앞으로 요가공부를 더하기 위하여 인도로 유학도 생각중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요가원도 근사하게 차릴 예정입니다. 요가에 입문한지는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지는 30년이 넘었지요. 꼬박꼬박 성탄 때 면접도 하고 사목회도 하고 꾸르실료도 수료하고 기회가 닿으면 성당에서 원하는 봉사활동도 기쁘게 하고 있는 이 시대 너무도 평범한 가톨릭신자입니다. 여기까지 제 소개를 마칠까 합니다. 궁금하고 답답한 몇 가지에 답변 부탁드립니다.
   1. 신흥영성운동이라고 하는 범주에 제 생업인 요가도 해당됩니까?
   2. 현재 인도에는 가톨릭인구가 3000만명(인구의 3%)이라는데 이들에게 요가는 전통 영성이었을것이고 인도가톨릭은 요가를 배척하지 않는다고 들었고, 같은 이치로 우리나라 제사문화는 전통 관습이자 효의 표현인데 가톨릭이 들어왔을 때 한때 배척했고 지금은 토착화 단계에 들어섰는데 이런 구도를 그려보는 것은 착각입니까?
   신부님의 명쾌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세요』
   필자는 곧바로 답신을 보내지 못했다.
   우선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생업」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악역만은 은근히 피하고 싶어서였다. 필자의 「명쾌한 답변」(?)이 자매의 향후 삶에 대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슬며시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필자는 신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 여유를 갖고 사례를 모아 보았다. 당연히 피해사례였다. 독자들께서는 이해해 주기 바란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의약품의 안전성(安全性)을 검토할 때, 우리는 그 「긍정적인 효능」을 검사하지 않는다. 그 부작용의 가능성을 조사해 본다. 단 한 건의 부작용이 나오더라도 그 문제성을 크게 부각시킨다.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生命)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피해자가 나와도 해당 약품의 안전성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선고된다. 이런 접근법은 문제가 있는 것일까? 최근 모 제약회사의 「감기약」이 위해성분을 함유하고 있다고 하여 강력한 규제를 받게 되었던 사건에서 우리는 요가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법이 어떠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얘기를 해 보자.

인도 요가 연수 체험담

   마침 요가 연수차 인도를 다녀온 이○○자매(문의=017-267-7535)의 경험담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필자의 말 백 마디 보다 훨씬 사실적이며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기에 그대로 소개한다.
  『저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한 신자입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학창시절에 자취를 하면서 몸이 약해진 저는 건강을 위해 요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요가를 하면서 건강을 회복한 저는 요가의 매력에 빠져 신앙생활도 많이 소홀하게 되었고, 요가 예찬론자가 되어 만나는 사람에게 요가를 배우기를 권하였습니다. 점점 요가에 빠진 저는 요가 지도자 3급 자격증을 딴 후 직장 생활을 때려 치고, 요가 학원을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다 주위로부터 이력을 높이기 위해 인도를 다녀오면 좋다는 말을 듣고 여행을 갔습니다. 가톨릭이 전부인양 생각했던 저에게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많은 교리를 수용하는 것 같은 인도는 참 수준 높은 나라같이 여겨졌습니다. 저를 요가 선생이라고 소개했더니 인도인들은 물론이고 유럽에서 온 사람들조차 달리 대우해 주어 요가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저는 유럽사람들과 함께 요가 아쉬람에서 2주간 수련을 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가톨릭에 대해 비판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반발심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며 그들의 말에 호응을 해 주었습니다.
   요가 아쉬람 생활 후 저는 일행과 함께 카주라호라는 유명한 관광지로 여행을 갔습니다. 거기서 평생을 탄트라 요가(섹스 수행)를 수련하고 가르친 요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분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 요기의 설명을 들으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훌륭한 요기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해 열심히 필기를 했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제가 그동안 배워온 가톨릭 교리와 너무 어긋나는 것임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요기의 가르침의 핵심은 신을,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수업이 끝난 후 요기가 한 명 한 명에게 생년월일을 묻더니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우리나라 무속인들처럼 점(오로라라고 하더군요)을 봐주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결혼을 하겠다, 직업은 무엇을 가지면 좋겠다 등등.
   모든 일정을 마치고 뭐가 뭔지 모르겠는 혼돈에 빠진 채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오랜만에 신에 대해, 내가 가진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가를 배운 3년이라는 시간동안 참으로 저는 주님을 잊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건강을 위해 시작했던 요가가 어느새 저에게는 종교가 되고, 즐거움이 되고, 직업이 되고, 인생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요가의 실체를 몰랐고, 요가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질 수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요가를 그만두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남았고, 그렇다고 계속 하느님을 부정하며 살 수는 없는지라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선 요가 학원을 차리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고, 요가도 아침이나 저녁에 집에서 조금씩 운동 대신 하기로요. 아직도 그전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뒤늦게나마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기로 한 것에 감사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만일 신앙의 기본이 없었더라면 이 자매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더 좋은 진리를 만났다며 가톨릭을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잘라 말해서 몸으로만 하는 요가는 스트레칭 정도로 생각해도 된다.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배우고자 하면 겪게 되는 것이 신관(神觀)의 충돌이다. 요가의 그루들이 믿으라고 가르치는 하느님이 가톨릭 신앙인이 믿는 창조신, 인격신 하느님과는 전혀 다른 범신(汎神) 내지는 잡신(雜神)이기 때문이다.

요가의 모체는 힌두교 신앙
예수를 명상가로 치부하고 스스로 구원된다고 주장

   앞의 사례에서 인도 요가 과정을 연수하였던 자매는 다행스럽게도 탄트라요가 그루의 이상스런 가르침과 점술행위를 보고 금세 영적 식별을 하였다. 사실 영적인 것은 우리가 흔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 가운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예수님이 수제자 베드로의 말실수를 가지고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 23)라고 호령했던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오버」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것은 그만큼 예민하고 미묘한 것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라』(1고린 16, 13)하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이 자매가 대수롭지 않은 것에서 실망을 느낀 것 같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자매는 매우 지혜로웠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식별도 불가능하고 나오지도 못한다. 아니 그냥 눌러 앉는다. 이미 「콩깍지」가 씌워져서 말이다.
많은 피해 사례들이 있다.
   -어느 자매는 인도 요가 유학을 갔다가 완전히 가톨릭을 떠나서 신흥영성운동의 일종인 「아바타」의 고급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어느 자매는 인도 요가 유학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요가원을 차렸는데 가톨릭 교회를 떠나서 불교로 개종하였지만 거기서도 안정을 못 찾고 있다.
   -어느 자매는 인도 요가 유학을 다녀와서 가톨릭 신앙과 접맥한 영성과정을 개발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방황하고 있다.
   -어느 형제는 한국에서 요가 집중 교육을 받다가 거의 가톨릭 신앙을 떠나 있으면서 부부관계기피증으로 가정파탄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례들은 책에서 읽고 옮겨 적은 것들이 아니다. 필자에게 접수된 것 가운데 정도가 심한 것을 소개한 것이다.

요가와 그리스도교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할까? 요가의 이론체계를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우리는 흔히 요가하면, 매스컴에서 보여준 이미지대로, 건강하고 날씬해 보이는 여자가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호흡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요가를 체조 같은 단순한 신체 운동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백과사전은 바크티요가(감정순화에 의한 헌신獻身의 요가), 지나나요가(이성 개발에 의한 지식의 요가), 라자요가(심리적 통제에 의한 심신과학의 요가), 카르마요가(사회활동에 대한 행동규제의 요가), 탄트라요가(욕정통제慾情統制에 의한 육신해방의 요가), 하타요가(음양조화陰陽調和에 의한 심신조화의 요가) 및 신경력을 개발하는 쿤달리니요가와 발성(發聲) 통제를 통한 만트라요가 등이 있다고 소개한다.
   이 가운데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주로 배우고자 하는 요가는 「하타요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몸으로만의 하타요가를 배우고자 할 때에도 우리는 결코 거기에만 머무를 수 가 없다. 그 기본 및 궁극적인 정향성은 결국 영성(靈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이기 때문이다.
  『요가란 단순하게 몇 가지 동작만을 가르치거나 체형을 교정하는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건강과 영혼을 맑게 만드는 영적(靈的)인 귀감이 되는 진정한 스승(구루)이 되시기를 권유하는 것입니다』(홍익요가연구원)
   실제로, 한국에 퍼져있는 요가 협회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온다.
   -『요가는 모든 종교의 핵심인 명상을 수행의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붓다, 예수, 마호메트, 선승 등의 깨달음, 계시, 신통력 등이 모두 요가 즉 명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요가 코리아)
   -『요가의 입장은 사람을 처음부터 죄를 저지른 존재(原罪說)로 보지 않고, 자기를 더럽게 보기(不淨)의 입장이 아니며, 이 세상을 환상(maya)으로 보지 않는다』(요가라이프)
   -『요가는 의타적 자세가 아니고 스스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내어 새롭게 배우고 깨치는 자기 믿음의 길이고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이해의 길이다. 요가는 예속된 종의 길이 아니고 자유로운 주인의 길이며, 저 세상으로의 도피적 태도와 사후 지옥에 대한 공포의 태도가 아니고, 이 세상에 대한 탐구와 인간 스스로 해결을 짓는 창조적 성장의 길』이다.(요가라이프)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다른 종교창시자처럼 요가명상가로 보는 점, 인간의 죄성을 부인하는 점, 자력구원을 내세우며 하느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는 점 등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자신 안에 저런 사유방식들과 그리스도교 고유의 신앙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다고 여기고 통합을 도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영적 만용이다. 물론 비슷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영성에서만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공통의 것들만 모으려 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반드시 차이점들이 따라와서 충돌하고 말썽을 부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종교에서 혼합주의(syncreticism)는 금물인 것이다. 이를 어긴 이들이 바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요가의 모체인 힌두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알려져 있듯이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3억 3천만여 신을 숭배하는 다신교를 배경으로 생겨났다. 힌두교는 승려를 정점으로한 엄격한 계급주의(카스트제도)와 나중에 불교의 기본개념이 된 업(業), 윤회(輪廻), 그리고 고행(苦行) 등을 핵심교리로 삼고 있는 종교이다.
   오늘날과 같은 종교간 대화의 시대에 필자는 결코 「그것들은 틀려먹었다」고 공격적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이라고 인정한다. 다만 이것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인 안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신앙요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 안에 저런 신앙요소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때는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가톨릭 신자인 경우를 가정해 보자. 어떻게 「업」(숙명, 팔자소관, 자기잘못은 스스로 책임질 것 등)을 수용하면서 「고해성사」를 볼 수 있으며, 어떻게 「윤회」를 믿으면서 동시에 「부활」을 믿을 수 있으며, 어떻게 「고행」을 중히 여기면서 「은총」 신앙을 견지할 수 있으랴. 그것은 괜한 욕심일 것이다.
   이는 결국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이는 요가의 이론 체계에 깊이 빠지면, 반드시 갈등이나 혼란에 처하게 되어있고 궁극적으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고 마침내는 「떠나느냐 남느냐」의 선택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혹시 『요가를 깊이 배우고도 가톨릭 신앙생활 잘만 하더라』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분에게 필자는 묻고 싶다. 그것이 정말 「깊이」 였을까? 그것이 정말 예수님이 원하는 「신앙」일까?

– 차동엽 신부님
– 가톨릭 신문 20041010 기획/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