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의 해(2004년 10월-2005년 10월)에 주교들, 성직자들, 신자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Mane nobiscum Domine)

서  론

1.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Mane Nobiscum Domine). “저녁 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가 24,29 참조).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들과 함께 길을 걷던 나그네에게 건넨 권유였습니다. 슬픈 생각에 잠겨 있던 제자들은 이 나그네가 바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들의 스승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루가 24,32 참조). 말씀의 빛으로 그들의 닫힌 마음과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던”(루가 24,31)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가는 그림자 속에서, 그들의 정신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나그네는 그들에게 희망을 다시 일깨우는 한 줄기 빛을 던져주며, 충만한 빛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하며 두 제자는 간청하였고, 나그네는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지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 그분을 알아보게 한 “빵 나눔” 안에 감추어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머무실’ 것입니다.

2.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은 거룩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살아가려고 특별히 노력하게 될 교회에 한 해 동안 적절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가지 문제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에나 몹시 낙담했을 때에도, 그 거룩한 나그네께서는 늘 우리 곁에서 걸어가시며, 우리에게 성서를 설명해 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만나 뵐 때, 우리는 말씀의 빛을 지나 ‘생명의 빵’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옮아가게 됩니다. ‘생명의 빵’이야말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최상의 방식으로 이행된 것입니다.

3. “빵 나눔”은 초기 교회 때에 성찬례를 일컫던 말로서 언제나 교회 생활의 핵심이 되어 왔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시간 안에 현존하게 하십니다. 빵 나눔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51)으로서 당신 자신을 직접 내어 주시고, 우리는 그분을 받아 모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보증을 받고 천상 예루살렘의 영원한 잔치를 미리 맛보게 됩니다. 교부들과 세계 공의회들, 그리고 저의 선임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저는 여러 번, 가장 최근에는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를 통하여, 교회가 성체성사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가르침이 더 깊이 연구되고 성찰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이 놀라운 성사에 한 해 전체를 바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4. 아시다시피, 성체성사의 해는 2004년 10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거행될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해를 거행하자는 생각은 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게 될 두 행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곧, 2004년 10월 10-17일까지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릴 세계성체대회와, ‘교회의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체성사’라는 주제로 2005년 10월 2-29일까지 바티칸에서 열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총회가 그것입니다. 또한 2005년 8월 16-21일까지 쾰른에서 열릴 세계청년대회도 고려하였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믿음과 열의를 자라나게 하는 활력의 원천인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모이기를 바랍니다. 성체성사에 관한 이러한 계획은 한동안 제가 마음속에 품어왔던 것으로서, 특별히 대희년을 준비하는 여러 해 동안 그리고 대희년 이후 몇 해 동안 제가 교회에 주려고 했던 사목적 자극의 자연스러운 발로입니다.

5. 이 교황 교서에서, 저는 이러한 사목적 지속성을 재천명하고 모든 사람이 그 영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성체성사의 해를 지낼 것인지는 개별 교회 목자들의 재량에 맡기려 합니다. 목자들은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한 깊은 신심으로 적절한 접근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형제 주교님들께서는 물론 이해하시겠지만, 묵주기도의 해에 이어 바로 거행되는 이 ‘성체성사의 해’는 매우 깊은 영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므로, 개별 교회의 사목 계획들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조명함으로써 이 계획들이 신자들의 영성 생활과 지역 교회의 활동들을 성장시키는 바로 그 신비 안에 뿌리내리게 할 것입니다. 저는 개별 교회들에게 그들의 사목 계획들을 바꾸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한 부분인 성체성사의 차원을 강조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서를 통하여 몇 가지 기본 지침을 제시하고자 하며, 하느님의 백성은 모든 단계에서 열의와 열렬한 사랑으로 저의 권고를 환영하리라 믿습니다.

제1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대희년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6. 저는 10년 전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 1994년 11월 10일)에서 교회에 2000년 대희년 준비 계획을 제안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제게는 이 역사적 사건이 그 자체로 커다란 은총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저는 단순한 연대기적 사건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그 자체로는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삼천년기는 과거와 연장선상에 있고 흔히는 최악의 모습을 한 비극적인 사건들로 시작되었습니다. 일부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긴 하지만, 폭력 행위와 유혈로 얼룩진 미래의 전망이 드러나며, 끊임없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교회에 구세주 강생 이천년 대희년을 거행하도록 권고하면서 이 거행이 ‘장기’적으로는 인류에게 도움을 주리라고 확신하였고, 지금 그 확신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중심에 서 계시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됩니다(에페 1,10; 골로 1,15-20 참조).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의 목적이시고 역사와 문명이 열망하는 초점이시며 인류의 중심이시고, 모든 마음의 기쁨이시며 그 갈망의 충족이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45항.)고 선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열정을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공의회의 가르침은 우리가 교회의 본성을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해 주었고, 믿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신비뿐만 아니라 현세 사물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라봄으로써 그에 대한 더욱 명확한 시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강생하신 말씀 안에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의 신비가 함께 계시되었고, (같은 곳, 22항 참조.) 그분 안에서 인류는 구원과 충만함을 얻습니다.

7. 교황직을 시작하며 저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를 통하여 이 주제를 발전시켰고, 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를 자주 다루었습니다. 대희년은 신자들에게 이 기본 진리를 다시 한번 숙고하도록 권유하기에 알맞은 시기였습니다. 이 큰 행사를 위한 준비는 전적으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계획 안에는 명백히 성체성사를 위한 자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성체성사의 해를 시작하며, 저는 제가 「제삼천년기」에서 한 말을 다시 들려 드립니다. “2000년은 열렬한 성찬의 해가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20세기 전에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을 취하셨던 구세주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적 생명의 원천으로서 인류에게 계속하여 내어 주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 55항: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87(1965), 38.) 또한 그 해 로마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도 대희년의 이러한 측면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희년을 준비하며 펴낸 교황 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에서는 신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며 교회의 특별한 날인 주일에 대하여 묵상해 보도록 권유하였다는 사실도 되새겨 볼만합니다. 그 당시에 저는 모든 이가 성체성사 거행이 주일의 핵심임을 재발견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 32-44항: AAS 90(1998), 732-734 참조.)

성모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8. 대희년의 결실은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체계적인 문서에서 저는, ‘높은 수준의’ 성덕을 목표로 하고 특히 기도의 기술을 통하여 이행되는 교회 교육의 일부로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사목에 더욱 열심히 참여해 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30-32항: AAS 93(2001), 287-289 참조.) 전례, 특히 성찬 생활의 촉진을 위한 노력 없이 어떻게 그러한 계획이 완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제가 말씀드렸듯이 “20세기에는, 특히 공의회 이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사 거행 방식, 특히 성찬례 거행 방식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향의 진전은 계속되어야 하며, 특히 주일 성찬례와 주일 자체를 강조하여야 합니다. 주일은 특별한 신앙의 날, 부활하신 주님의 날, 성령을 주신 날, 진정한 주간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곳, 35항: 같은 곳, 290-291.) 기도에 대한 훈련의 맥락에서 저는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성무일도를 통하여 교회는 하루의 시간들과 전례 주기를 성화하기 때문입니다.  

9. 이어서,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하고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ts Mariae)를 발표하면서, 저는 성모 마리아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주제로 돌아갔으며,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다시 한 번 장려하였습니다. 교도권이 높이 장려하고 하느님 백성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이 전통적인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과 얼굴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신비들을 관상하고 성모송을 반복하여 바침으로써 성서와 복음의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그 반복되는 흐름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께 대한 성모님의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사랑의 학교’입니다. 따라서 저는 빛의 신비를 추가함으로써 수세기에 걸친 오랜 전통을 발전시켜, 이 탁월한 형태의 관상을 더욱 완전한 “복음의 요약”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ts Mariae), 2002년 10월 16일, 19-21항: AAS 95(2003), 18-20 참조.)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빛의 신비는 거룩한 성체성사에서 절정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묵주기도의 해에서 성체성사의 해로

10. ‘묵주기도의 해’ 중간에 저는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를 발표하여 성체성사와 교회의 뗄 수 없는 생생한 관계 안에서 성체성사의 신비를 조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미사 안팎에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지극히 위대한 신비에 맞갖은 예배를 드릴 때에 신자들이 모두 합당한 공경으로 성찬의 희생제사를 거행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의 영성에 대한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제시하고, “성찬의 여인”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2003년 4월 17일, 53항: AAS 95(2003), 469.)이신 성모 마리아를 그 본보기로 들었습니다.

‘성체성사의 해’는 그리스도와 그분 얼굴에 대한 관상이라는 주제에 변함없이 충실하면서도,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풍요로워진 배경 위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체성사의 해’는 우리가 걸어온 여정의 정점이며 그 여정을 종합하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 해의 거행 방법에 대하여 여러 제안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우리가 성체성사의 해를 더욱 깊이 그리고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간단히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하겠습니다.  

제2장
빛의 신비인 성체성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루가 24,27)

11.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성체 신비의 첫째가는 측면, 하느님 백성의 신심 안에 늘 자리하여야 하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줍니다. 곧 성체성사는 빛의 신비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며, 그리스도교 생활과 영성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주님의 변모와 부활 사건처럼 그분 생애의 여러 사건들에서 명백히 드러났으며, 이를 통해 그분의 신적 영광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러나 성체성사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탁월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완전히 감추어진 그 신비를 통하여 빛의 신비가 되시고, 그 신비 덕분에 신자들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루블레프의 유명한 삼위일체 성화상은 적절한 통찰력으로 성체성사를 명백히 삼위일체 생명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12. 성체성사는 무엇보다도 빛입니다. 미사 때마다 두 ‘식탁’, 곧 말씀의 식탁과 빵의 식탁이 일치를 이루면서 하느님 말씀의 전례에 이어 성찬의 전례가 거행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연속성은 요한 복음의 성찬례 이야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신비에 대한 말씀으로 가르침을 시작하신 다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요한 6,55)라고 말씀하시며 그 신비의 성찬례적 차원을 밝혀 주셨습니다. 청중들 대부분은 이 말씀을 듣고 놀라워했으며, 이에 베드로는 역사 전체에 걸쳐 다른 사도들과 교회의 믿음이 된 신앙을 표현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이야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개입하시어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가 당신의 신비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루가 24,27 참조). 그분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켜, 그들을 슬픔과 좌절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려는 열망을 그들 안에 불러일으킵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루가 24,29 참조).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전례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에서, 성서의 보고를 더욱 풍부하게 제공하는 ‘말씀의 식탁’을 신자들에게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51항 참조.) 그리하여 그들은 전례의 성서 독서를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언어로 선포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같은 곳, 7항.) 또한 공의회 교부들은 집전자가 하느님 말씀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하여 그 의미를 해설해 주는 강론을 전례의 한 부분으로 여기도록 권장하였습니다. (같은 곳, 52항 참조.) 공의회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 성체성사의 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이 분야에서 이룬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복음 선포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경건하게 귀 기울여 들으며 조용히 묵상하지 않는다면, 성서 구절을 모국어로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도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루가 24,35 참조).

14.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탁에서 “빵을 떼어 주시는” 단순한 행위로도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정신이 빛을 받고 마음이 불타오를 때, 표징들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성체성사는 풍부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담은 표징들의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펼쳐지고, 이러한 표징들을 통하여 그 신비는 어떤 식으로든 믿는 이의 눈 앞에 활짝 열리게 됩니다.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 강조했듯이, 이 성사의 어떠한 차원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체성사를 우리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려는 유혹을 받지만, 실제로는 우리 자신이 그 신비의 차원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체성사는 너무도 큰 은총이어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10항.)  

15. 성체성사의 가장 분명한 차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찬례가 식사라는 데에 있습니다. 성찬례는 과월절 음식이 차려진 성목요일 저녁에 생겨났습니다. 식사라는 것이 바로 그 본질적인 구조의 한 부분입니다. “‘받아 먹어라.’ …… 또 잔을 들어 ……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27). 이처럼, 성찬례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루시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서로서로 쌓아가야 하는 친교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찬의 식사는 근본적으로 또 일차적으로 희생 제사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책;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준수하여야 하거나 피하여야 할 특정 사안에 관하여는, 경신성사성 훈령 「구원의 성사」(Redemptionis Sacramentum), 2004년 3월 25일, 38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지(L’Osservatore Romano) 영어판, 2004년 4월 28일, 특별 부록 3면 참조.) 성찬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해골산에서 모든 이를 위하여 단 한번 바치신 그 희생 제사를 우리에게 다시 재현하십니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현존하시지만 당신 수난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계십니다. 미사 전례에서 성체 축성에 이어지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는 환호를 통하여 기억하듯이, 모든 미사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입니다. 성찬례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재현하는 동시에 세상 끝날 때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미래로 우리를 향하게 합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측면으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이 성사로 이끌고 우리의 그리스도인 여정을 희망으로 채워 주는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16. 성체성사의 이 모든 차원은 하나의 측면 안에 수렴되는데,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는 ‘실제적’ 현존의 신비입니다. 교회의 모든 전승과 더불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 안에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올바르게 설명하셨듯이, 이 현존이 “실제적”이라 불리는 것은,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실제적이 아니라는 듯이 배타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 현존이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의 실재 안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실체적으로 현존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6세, 회칙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년 9월 3일, 39항: AAS 57(1965), 764; 성체성사 신비 공경에 대한 예부성성 훈령 Eucharisticum Mysterium, 1967년 5월 25일, 9항: AAS 59(1967), 547 참조.) 신앙은 우리에게 성체에 다가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 다가가고 있는 것임을 온전히 인식하도록 요구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이야말로 성체성사의 다른 측면들 ― 식사이며 파스카 신비의 기념이고 종말론적 선취인 성체성사 ― 에 단순한 상징주의를 훨씬 뛰어넘는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성체성사는 현존의 신비이며, 이를 통하여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완전하게 실현됩니다.

거행하고, 공경하고, 관상하며

17. 성체성사는 위대한 신비입니다! 무엇보다도 잘 거행되어야 하는 신비입니다. 거룩한 미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에 자리하여야 하고, 모든 공동체 안에서 품위 있는 방식으로 정해진 규범에 따라, 회중이 참여하고 성직자들이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노래나 전례 음악의 ‘거룩한’ 특성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거행되어야 합니다. 이 성체성사의 해에 구체적인 계획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각 본당 공동체가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표징들’ 안에 현존하는 구원의 신비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례주년의 흐름에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교회 교부들이 즐겨 하던 ‘신비’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이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은 전례 언어와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전례의 표징에서 그것의 신비로 넘어가며 그들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도움을 받습니다.

18. 미사 거행에서든 미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체 공경에서든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에 대한 생생한 인식을 특별히 길러야 합니다. 어투, 몸짓, 자세, 행동을 통하여 그러한 인식을 보여 주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례 규범이 요청하고 저 자신도 최근에 재천명하였듯이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 반포 40주년 기념 교황 교서 「성령과 신부」(Spiritus et Sponsa), 2003년 12월 4일, 13항: AAS 96(2004), 425 참조.), 미사 거행에서나 성체 조배에서 침묵이 중요합니다.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깊은 존경으로 성체를 대해야 합니다.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준수하여야 하거나 피하여야 할 특정 사안에 관하여는, 「구원의 성사」 참조.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은 자석의 양극과 같이 더 많은 영혼들을 끌어당겨야 합니다. 이들은 그분께 매료되어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이른바 그분의 심장 박동을 느끼려고 끈기 있게 기다릴 준비를 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시편 34<33>,8).

성체성사의 해 동안 미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체 조배는 개별 본당들과 수도 단체들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됩니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을 가집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믿음과 사랑으로 부주의하고 태만한 행동들을 고쳐나가고, 우리 구세주께서 세계 도처에서 견디셔야 하는 상처들까지도 치유합시다. 또한 오래되었거나 새로운 수많은 신비주의 체험과 하느님 말씀에 영감을 받은 기도문들에 의지하여,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인 관상에 깊이를 더해 나갑시다. 제가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권고한 대로, 묵주기도를 성서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틀 안에서 이해한다면, 이 기도는 우리의 동반자이며 안내자이신 성모님과 함께 성체를 관상하도록 이끄는 데에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같은 곳, 137항 참조.)

또한 성체성사의 해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그 날의 전통적인 성체 행렬과 더불어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거행합시다. 우리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자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어디에서나 특히 거리마다 집집마다 우리의 감사가 깃든 사랑의 표현으로, 또 무한한 은총의 원천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3장
친교의 원천이며 현현인 성체성사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 15,4)

19.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큰 선물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들 ‘안’에 머무시는 방법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심오한 친교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 15,4). 이 심오한 상호 ‘일치’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지상에서 천상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가장 염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실 때 생각하시던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의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심어 주셨습니다(아모 8,11 참조). 이 굶주림은 그분과 충만히 일치할 때에 비로소 충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천상에서 맛볼 완전한 충족을 기대하며 여기 지상에서 하느님으로 ‘배부를’ 수 있습니다.

빵 한 덩어리와 한 몸

20. 영성체에서 오는 특별한 친근감은 교회의 친교를 떠나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도 없고 완전하게 체험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저는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시어 이러한 일치를 이루시고 자라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직접 성체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이 일치를 끊임없이 증진시키십니다. 성찬례의 빵 하나가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빵은 하나이고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7).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에서 말씀하신 최고의 본보기대로 교회를 하나의 친교로 세우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1).

21. 성체성사는 교회 일치의 원천이자 그 최고의 현현입니다. 성체성사는 친교의 공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이 성찬례 거행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조건을 지웁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44항: AAS 95(2003), 462; 「교회법전」(Code of Canon Law), 제908조; 동방교회 교회법, 제702조;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일치운동 지침」(Directorium Oecumenicum), 1993년 3월 25일, 122-125.129-131항: AAS 85(1993), 1086-1089; 신앙교리성, 서한 Ad Exsequendam, 2001년 5월 18일: AAS 93(2001), 786 참조.) 이런 다양한 제한들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친교가 요구하는 것들에 한층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기도에서 교황과 교구장 주교를 언급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역할과 직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교계적 친교입니다. 그것은 또 상호 개방과 애정, 이해와 용서를 촉진하는 ‘친교의 영성’으로 자라나는 형제적 친교입니다. (「새 천년기」, 43항: AAS 93(2001), 297 참조.)

“한마음 한뜻”(사도 4,32)

22. 거룩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모든 세대에 교회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친교의 이상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평가해 보도록 요청받습니다. 교회의 모범은 곧 하느님 말씀의 부름을 받아 물질적 재화뿐만 아니라 영적 선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입니다(사도 2,42-47; 4,32-35 참조). 이 성체성사의 해에 주님께서는 이 이상에 되도록 가깝게 다가가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교좌 성당에서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에 주교가 자기 사제들과 부제들과 함께 거행하는 ‘장엄 미사‘ 전례에서 그러한 순간들을 충만히 체험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탁월한 ‘현현’을 보게 됩니다. (전례 헌장 41항 참조.) 본당 사목구 차원에서도, 친교 의식을 키우고 성찬례 거행에서 새로운 열정의 원천을 발견하는 다른 중요한 기회들을 지정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주님의 날

23. 특별히 저는 올해에 주일을 주님의 날로 그리고 교회의 날로 체험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당부합니다. 모든 이가 다시 한 번 교황 교서 「주님의 날」에서 제가 한 말에 대하여 성찰해 주면 기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 미사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함께 모여 있던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이 체험하였던 것을 특별히 강렬하게 다시 체험합니다(요한 20,19 참조). 어떤 의미에서 모든 시대의 하느님 백성은 교회의 첫 열매인 제자들의 이 작은 핵심 조직 안에 현존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날」, 33항: AAS 90(1998), 733.) 이 은총의 해에, 사제들은 사목 직무를 통하여, 다양한 집단과 운동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 본당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예식인 주일 미사에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4장
“선교”의 원리이며 계획인 성체성사

‘그들은 곧 그 곳을 떠났다’(루가 24,33 참조)

24. 엠마오의 두 제자는 주님을 알아보고는 “곧 그 곳을 떠나”(루가 24,33 참조)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알려 주러 갔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 뵙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그 기쁨을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게 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심화되는 그리스도와 만남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증언과 복음화의 절박성을 일깨워 줍니다. 성체성사의 해를 선포한 강론에서 저는 바오로 성인이 한 말을 바탕으로 이를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바오로 사도는 식사와 선포를 밀접하게 관련지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며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은 그 예식이 되살리는 사건의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 강론, 2004년 6월 10일: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지2004년 6월 11-12일, 6면 참조.) 미사 끝에 하는 파견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임무로서, 그들이 복음을 널리 전하고 사회에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고취시키도록 노력하라는 권유입니다.

25. 성체성사는 이러한 사명에 필요한 내적 힘을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계획이기도 합니다. 성체성사는 존재 양식으로서, 곧 예수님에게서 개별 그리스도인에게로 전달되고, 이들의 증언을 통하여 사회와 문화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신자 구성원이 개인 묵상과 공동체 묵상을 통하여 성체성사가 표현하는 가치들, 성체성사가 고무하는 자세들, 성체성사가 불러일으키는 결심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체성사의 해에서 생겨날 수 있는 특별한 임무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감사하며

26.계획의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는 ‘성찬’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인 ‘감사’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희생 제사, 아버지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순종’ 안에는 모든 인류의 ‘순종’과 ‘감사’와 ‘아멘’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이 위대한 진리를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망각하고 홀로 서려고 헛되이 추구하는 오늘날의 세속화된 문화적 상황에서 특히 절실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살고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곧 가정이든, 학교든, 일터든, 삶의 모든 현장에서 성체성사의 ‘계획’을 실현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재가 창조주와 관련을 맺지 않고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목 헌장, 36항.) 이러한 초월적인 준거는 우리가 소유하고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그 모든 것에 감사하도록, 다시 말해, ‘성체성사의’ 자세를 가지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속박하지만,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을 (같은 곳.) 전혀 해치지 않고 오히려 그 적절한 한계 안에 둠으로써 이 자율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줍니다.

성체성사의 해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더욱 설득력 있게 증언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고 우리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증언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의 문화’는 대화의 문화를 촉진하고, 그것에 힘과 자양분을 줍니다. 신앙에 대한 모든 공개적 발언은 국가와 국가 제도의 정당한 자율성을 해치거나 나아가 불용의 자세를 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제가 희년을 맞아 인정하였듯이, 이 영역에서 신자들이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을 역사가 입증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뿌리에 충실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탓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자세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순교자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박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연대의 길

27.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에서 친교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연대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성찬례 거행을 통하여 교회는 자신이 하느님과 이루는 긴밀한 결합과 또 온 인류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라는 인식을 끊임없이 새롭게 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항 참조.) 모든 미사는 드러나지 않게 또는 외따로 드릴지라도 언제나 보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상황에서 친교와 평화와 연대의 촉진자가 되는 법을 배웁니다. 새 천년기를 테러리즘의 망령과 전쟁의 비극으로 시작한 이 혼란한 세계는 그 여느 때보다 더, 그리스도인들이 성체성사를 사회, 문화, 정치 생활에서 다양한 책임을 지며 대화와 친교의 촉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위대한 평화의 학교로 체험하는 법을 익혀나가도록 요구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28.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진정한 친교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한 가지를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찬례가 공동체에 더욱 정의롭고 우애로운 사회 건설에 실제적으로 투신하도록 재촉하는 자극입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 하느님께서는 인간관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힘의 모든 기준을 뒤엎으시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는 섬김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천명하시면서, 최상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이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 대신, ‘발씻김 예식’(요한 13,1-20 참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몸을 숙이심으로써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가난한 이들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표현되는 애덕이 결여된 성찬례 거행은 적절치 못하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1고린 11,17-22.27-34 참조).

우리는 이 성체성사의 해를, 교구와 본당 공동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형태의 가난 가운데 하나라도 형제적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대처하고자 노력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수많은 사람을 허덕이게 하는 기아, 개발도상국을 괴롭히는 질병들, 노인들의 고독, 실직자들의 불안, 이민들의 고충과 같은 비극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막대한 부를 지닌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요한 13,35; 마태 25,31-46 참조). 이것은 성찬례 거행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결 론
  

29. “오, 그리스도를 모시는 거룩한 잔치여!” 성체성사의 해는 놀라움 안에 그 원천을 두며, 교회는 놀라움으로 이 위대한 신비를 관상합니다. 그것은 제 자신이 끊임없이 체험하는 놀라움으로서, 저의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를 태어나게 한 촉진제입니다. 베드로 직무 제27주년을 맞으면서 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소중한 이 성사를 온 교회가 특별한 방식으로 관상하고 찬미하며 공경하도록 요청할 수 있어서 큰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성체성사의 해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소중한 보화를 알아보며 성장해 나가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성체성사의 해가 성찬례를 더욱 활발하고 열심히 거행하도록 하는 자극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사랑으로 변화되도록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개별 교회의 목자들의 판단에 따라 여러 가지 활동을 실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경신성사성은 몇 가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제안과 권고를 잊지 않고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특별한 것을 요청하기보다는 모든 활동이 내적 깊이를 지니기를 당부합니다. 이 해의 결과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주일 미사 거행이 활기를 띠고 미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체 조배가 증가하는 것뿐이라 하더라도, 이 은총의 해는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목표를 높이 세우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도움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0.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저는 여러분께서 충만한 사도적 열정으로 제 권유를 받아들이시리라 믿고 여러분께 이 성체성사의 해를 맡깁니다

날마다 축성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여러분 손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사랑의 기적을 증언하며 전달하는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이 특별한 해의 은총이 도전이 되게 하십시오, 첫 미사 때와 같은 기쁨과 열정으로 날마다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십시오. 자발적으로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 해가 말씀의 직무와 제대 봉사에 매우 가까이에서 종사하는 부제 여러분에게도 은총의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독서자와 시종자, 그리고 비정규 성체 분배자 여러분, 더욱 합당한 성찬례 거행을 위하여 여러분에게 맡겨진 봉사를 통하여 여러분이 받은 은총을 더욱더 깊이 깨닫도록 당부합니다.

특별히 미래 사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신학교에 머무는 동안 날마다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일정한 시간을 바쳐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대화하는 기쁨을 맛보도록 노력하십시오.

봉헌 그 자체로 더 오래 관상에 투신하도록 부름 받은 남녀 봉헌 생활자 여러분, 감실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당신 곁에 머무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 의미와 충만함을 주는 당신 친교의 경험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 여러분, 지극히 다양한 상황에서 각자의 직업에 종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성체성사를 여러분의 삶에 빛과 힘이 되는 은총으로 생각하십시오. 특히 가정의 아름다움과 사명을 충만히 체험하려면 성체성사의 은총을 재발견하여야 합니다.

쾰른에서 열릴 내년 세계청년대회에서 제가 만나기를 고대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우리 만남의 주제인 “우리는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라는 성서 구절은 여러분에게 이 성체성사의 해를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세대의 모든 열정과 희망과 사랑의 열망을 가지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만나십시오.

31. 우리 앞에는, 성체성사에서 완덕을 향한 여정에 힘을 주는 자양분을 발견한 성인들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그들은 이 위대한 신비 앞에서 깊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며, 제대의 성체 앞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배우자”의 기쁨으로 가슴 벅찬 시간들을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의 의미를 당신의 온 생애로 보여 주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성모님을 모범으로 삼고 의지하는 교회는 성모님께서 이 지극히 거룩한 신비와 맺고 계시는 관계에서도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53항: AAS 95(2003), 469항.)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찬의 빵은 그분 아드님의 흠 없는 육신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 동정 성모께서 나신 주님”(Ave verum corpus natum de Maria Virgine). 이 은총의 해에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새로운 열정을 발견하고 성체성사가 교회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라는 것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은총과 기쁨의 징표로서 여러분에게 저의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교황 재위 제26년
2004년 10월 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