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이라면, 도린,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요. 메이 일은 그만 슬퍼하세요. 그앤 지금 완전히 행복하니까.”
여자는 고개를 흔들어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비치타월로 뜨거운 모래를 차단하고 그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방금 전에 해변과 바다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수 마일 부근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켜서는 고개를 돌려, 말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30대 중반의 잘생긴 남자였는데, 이상한 활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어부세요?”
그가 대답했다.
“그 비슷한 겁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나 할까요.”
그녀는 그가 처음 했던 말을 상기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죠? 우리 메이에 대해서는 무얼 아세요? 그리고 그런 짓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녀는 상황의 심각함을 감지하고는 일어나 앉으며 이 수수께끼를 철저히 풀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노련한 기자로서 그녀는 지금 매우 특별한 사람을 인터뷰하게 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남자는 친구라도 되듯 다정하게 그녀 곁에 앉았다. 동작은 점잖고 편안했다. 그는 그녀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나는 당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도린 매디건. 당신에 대해 알아야 할 건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요.”
그러고는 인명 사전이라도 읽는 듯, 그녀의 생활에서 중요한 사항들을 낱낱이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 정도는 친구들이나 팬들에게서도 알아낼 수 있다.
어쨌든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앵커우먼으로 풀리처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고, 내로라 하는 세계적 인물들은 거의 다 인터뷰한 기자가 아니던가?
실제로 하느님을 믿게 된다면 그분과 인터뷰할 길도 찾아 내리라고 호언한 적도 있지 않은가?
“아직도 내가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아요?”
그녀의 회의적인 태도를 알아채고 그가 물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어떤 일이든 당신 과거에 있었던 아주 비밀스런 일을 한 번 물어 봐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삼년 전 유월 십일 밤에 제가 무얼하고 있었죠?”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는데 그녀에게는 그 특별한 밤을 기억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신은 리우데자네이루 해변에, 정확히 말하면 마라카이보에 그야말로 혼자 있었소. 우연히 샀던 신약 성서를 몇 장씩 뜯어 화톳불을 피워 올리면서 샴페인 한 병을 다 마셨소.
그러고는 물에 빠져 죽어 버릴 생각으로 바다 속으로 헤엄쳐들어갔지요. 그러다 마음을 돌이켜 되돌아나오긴 했지만, 불행히도 당신은 오늘도 똑같은 짓을 저지를 생각이오.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군요.”
그녀는 아연했다. 그건 완전히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인데. 신이 아닌 다음에야 그가 어떻게 그 비밀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평정을 회복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비치 백에서 담뱃갑을 끄집어냈다.
이때 메이에 대해 그가 언급한 말이 생각났다. 그 베트남 아이에게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아파왔다. 이 낯선 남자는 10년 전 사이공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번은 그곳을 여행하던 중, 거리의 갱단이 절망에 빠진 미혼모들에게서 아이들을 사서는 팔다리를 부러뜨린 다음, 거지로 만들어 거리에 내보내 저들의 뱃속을 챙긴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이렇게 불구가 된 아이들 중 하나가 메이라는 어린 소녀였다. 도린은 그 아일 돕고 싶어서 착취자들에게서 그 애를 샀다. 하지만 메이는 그 직후 죽어 버렸다. 학대를 못 견딘데다가 폐결핵이 겹쳤던 것이다.
소녀의 죽음은 도린의 삶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자기 직업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보지 못 했었다.
하지만 죽은 채 팔에 안겨 있는 메이의 뒤틀린 육신을 보고는 하느님은 없으며, 있다 해도 그건 괴물일거라고 확신해 버렸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죄 없는 아이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그걸 참고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메이 일은 더 이상 슬퍼하지 말아요.”
그는 그녀의 속마음마저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아인 이제 영원히 행복하니까요. 과거의 고통은 한갓 나쁜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린은 이 낯선 남자의 태도에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그는 지극히 침착하게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었다, 마치 죽음의 심연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시공에서 메이를 실제 보고 있는 듯이.
“어떻게 그걸 아시죠?”
그녀가 응수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나는 알아요.”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 순간, 자신의 분석적인 기자 정신으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하느님에 대한 회의도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허둥대며 과거의 그 반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그 친절하다는 하느님이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그리 모른 척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녀는 악을 썼다. 그의 눈이 다시 바다로 향했다. 그는 깊은 비밀이라도 전하는 사람처럼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들은 정말 순결하지요. 하지만 이천 년 전 하늘에서 내려오셨던 그분께는 못 미칩니다.
완전히 순결하신 그분도 이 세상의 모든 순결한 이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들의 고통들은 그 수만큼의 시내처럼 모두 그분의 고뇌의 바다로 흘러들어가 거기에 합쳐졌습니다.”
“하지만 무슨 목적에서죠?”
사나이의 말에 뭔지 모를 감정의 동요를 느끼며 도린이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요.”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들어 봐요, 하느님은 인간들이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힘을 나누어 갖기를 원하셨어요.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을 다른 동료 인간과 나누길 원하셨지요.
그리고 그건 고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녀는 사이공의 불구가 된 아이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요, 도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이 그가 말했다.
“그 뒤틀린 팔다리 하나로 하여 수백 명의 죄인들이 아버지의 집에 받아들여집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토록 값진 것입니다.
또한 순결한 입들에서 나오는 굶주림과 절망의 외침 한 마디로, 경멸해 마땅할 천 가지의 죄악들이 용서됩니다.
하느님의 피조물 중 그 어느 것도 쓸모없이 버려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녀는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생명을 주는 데 하느님은 왜 하필 고통을 이용하시는 거죠?
그분은 용기 있는 행동이나 예술적 공헌, 사랑의 언사 같은 것을 이용하실 순 없나요?”
그의 눈길이 다시 바다 쪽으로 흘렀다. 그는 오랫동안 그녀의 질문을 숙고했다. 이윽고 그가 대답했다.
“그것은 고통이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불멸의 영혼이 갖는 무한한 값에 가장 근사한 게 고통입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뭔가 두려울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슬쩍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말을 인정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 낯선 사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어!’
“인간을 강요하는 증거란 있을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는 듯이 그가 말했다.
“하느님의 일들이란 그런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자유가 침해받기 때문이지요.
현상을 넘어서 보아야 할 징표나 암시, 신중한 호소같은 것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갈매기들을 보세요. 갈매기가 굶어 죽었다는 소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갈매기들을 보살피고 계시다는 걸 믿을 수 있다면 그분이 고통받는 아이들을 보살피신다는것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저들의 고통과 죽음은 다함 없는 기쁨의 씨앗이지요.”
그가 일어서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 대해 말한다면, 도린 매디건, 당신을 사는 데 큰 값이 치러졌어요. 저런 곳에 목숨을 내던지지 마세요.”
그는 바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직장으로 돌아가시오. 그 직업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순결한 사람들을 보호하시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갈매기 한 마리기 휙 날아 내려오는 걸 보았는가 싶었는데 그녀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다시 보았을 때는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수 마일 주변에 사람이라곤 흔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꿈을 꾸었던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를 만났던 것인지 분간하질 못 하고 한동안 거기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타월 근처 모래 위에는 그 낯선 이가 앉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이건 아무래도 꿈은 아니야.”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어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볼은 이쪽 코트로 넘어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갈매기들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그들을 보살펴 주는 이라면 누구라도 믿기로 했다. 그녀는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도린은 그 해변에서 인터뷰한 이가 누구였는지 결코 알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닐 기유메트”의 『당신을 적셔 주는 사랑의 물줄기』 가운데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묵시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