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 성사에 계시는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마테오 1:23 참조)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아르스의 외딴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이가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여기에는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을걸요.” 성인은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야 될 일이겠군요.”
성인은 지체없이 행동을 시작했다. 그는 밤 2시에 기상했으며, 곧 어두운 성당의 제대 앞에서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무 일도를 드렸으며, 묵상을 했고, 미사 성제를 위한 준비를 했다. 미사가 끝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정오까지 계속해서 기도를 드렸다. 방석도 없이 마루바닥에 꿇어서 계속해서 기도를 드렸다. 한 손에는 묵주를 들고, 시선은 감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동안 비안네 신부의 하루 일정은 늘 그와 같았다. 얼마가 지나자 비안네 신부는 일정을 대폭 변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 하면, 성체의 예수님과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바친 그의 열절한 기도는 그 지역의 영혼들을 본당에로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지 성당이 너무 작아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성인께 고해 성사를 보려는 이들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는 하루에 열 시간, 15 시간, 18 시간씩 고해 성사를 주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을까? 그가 오기 전까지는 그 성당은 헐어있었고, 제대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감실은 버려둔 채로 있었고, 낡은 고해소가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비안네 신부는 돈도 없었고 재주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훌륭한 변화가 가능했을까?
산죠반니로톤도의 성 비오 신부님
우리는 꼭 같은 질문을 이태리 가르가노 산 위에 위치한 촌락, 산 죠반니 로톤도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수 십년 전까지만 해도 그 곳은 울퉁불퉁한 험한 바위들이 많은 무명의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산 죠반니 로톤도는 영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변화되어 있으며 그 명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곳에서도 역시 희망없는, 병약한 수사 신부 한 사람과 낡고 무너져가는 작은 수도원과, 버려진 작은 성당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당의 제대와 감실은 그 불쌍한 수사 신부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었다. 신부의 손과 그의 묵주알들은 끊임없이 열심히 바치는 기도 때문에 닳아있었다.
여기서의 변화는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이었을까? 아르스와 산 죠반니 로톤도에서의 놀라운 변화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길래 수 십만, 아니 수 백만의 사람들이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오고 있는가?
“잘난 체하는 것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미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사용”(고린토 전 1:28)하심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다. 그렇다. 그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오로지 그분에 의해서였다. 성체의 신성하고 무한하신 힘에 의한 것이었다. 아르스와 산 죠반니 로톤도의 감실들로부터 비추어나가는 그 힘이 두 분의 신부님들의 활동을 통하여 영혼들에게 미쳐진 것이었다. 그 신부들은 참으로 “감실의 봉사자들”(히브레아 13:10)이었고, “하느님의 신비들을 분배해주는 일꾼들”(고린토 전 4:1)이었다.
임마누엘
“성체 성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성체는 성당들의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당신의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神性)을 지니신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빵의 모습으로 감추어져 계시지만, 축성된 면병 안에 참으로 물리적으로 현존하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며, 우리에게 맡겨져 계신다. 성체의 예수님은 참으로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이시다 (마테오 1:23).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치셨다. “성 교회의 신앙은 이러합니다. 즉 말씀이신 하느님과 십자가 상에서 수난하시고 성체 성사 안에 현존하시며 천국에서 통치하시는 분, 즉 마리아의 아들과는 동일한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체의 예수님은 이곳에서 우리의 형이요, 친구이며, 영혼의 배우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음식이 되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신비체의 일부로 만들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의 신비체 안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구원시기를 원하시며, 그리하여 우리를 하늘 왕국으로 데려가시어 영원한 사랑의 지극한 행복 안에 안주하게 해주시기를 원하신다.
성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성 아오스딩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더 이상 주실 수는 없으시다. 지극히 지혜로우시지만, 더 이상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신다. 무한히 부유하시지만, 더 이상 주실 것이 없으시다.”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가 빠리에 왔을 때, 그는 아주 초라한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 안에는 필요한 많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가 이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또 다른 이가 성인을 측은히 여기는 말을 했을 때, 성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여기에 성체 성사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이 은총을 받기 위하여, 도움과 위로를 받기 위하여 성인에게 다가왔을 때, 성인은 말했다. “당신이 구하는 모든 것을 성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듣고저 하는 따뜻한 말들, 당신이 필요한 지식과 기적들, 예 그렇습니다, 기적들까지도 성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께로 가야만 한다. 예수님께로, 그렇다 우리를 “신성화(神聖化)”하여 당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저 하시는 예수님께로 향해야 한다. 성녀 젬마 갈가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오, 영혼을 강하게 해주는 음식이신 예수님, 저를 강하게 하여 주소서. 저를 정화(淨化)해주시며 신성화(神聖化)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깨끗하고 열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기로 하자. 성인들이 바로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이 표현할 수 없는 신비와 더 친근해지기 위한 노력을 아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매일 일정에 있어서 성체 성사에 대한 묵상, 공부 및 사고(思考)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하루 중에서 가장 많은 축복을 받는 시간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에 유익을 줄 것이다. 성 비오 10세 교황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성인께서 살자노의 본당 신부로 계실 때였는데, 복사하는 소년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를 방문하였다. 꼭 같은 시간에 의사도 도착하였으며 소년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소년은 그날 몇 명의 다른 소년들에게 성체 성사에 대한 도리를 설명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건강하게 느낀다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의사는 큰 소리로 조소하면서 말했다. “오! 거 참 잘 되었구나. 나는 의학 공부를 하면서 크리스챤 교리 교육을 좀 한다고 해서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이 말을 들은 성인 신부는 즉시 그 소년을 옹호하면서 의사에게 말했다. “오, 의사 선생님, 당신이 배운 의학의 효과들은 아주 잘 볼 수 있습니다. 근시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아주 잘 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공동 묘지에 가면 죽은 이들로 꽉 차있기 때문입니다. . . 그러나 크리스챤 교리는 지적으로 근시안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 즉 천국을 (사람들로) 채워줍니다!”
성체 성사는 천국의 “누룩”(마테오 13:33)이다. 이 누룩은 모든 사람의 인성(人性)과 모든 영적 및 현세적인 선(善)들안에서 발효할 수 있다. 성체 그 자체가 너무나 고귀한 선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 이상의 더 좋은 것을 바랄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 안에 예수님, 인간이 되신 하느님,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몸과 피가 되신 말씀이신 그분을 소유한다면 그 이상의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는 그의 임종 때 마지막으로 좋은 말씀을 남겨달라고 청하는 수도자에게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씀을 남겨주셨다. “나는 당신에게 더 말해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성체 성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하십니까?. . .”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성체 성사의 불꽃이 영혼 안에 있다면, 생명과 모든 선의 신성한 싹이 마음 속에 뿌려진 것입니다.”
성체의 신비 안에 저장된 무진장의 보화의 일부라도 캐내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마음과 의지력을 동원하여 집중적인 노력을 하기로 하자.
정신의 수련(修鍊)
먼저, 정신을 가다듬어 성체에 대하여 주의깊게, 질서있게 묵상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 사랑의 신비에 대하여 더 깊은 뜻을 발견하고 묵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서적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 중에는 성 알퐁소 드 리구오리의 성체 성사와 성모님께의 방문, 그리고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의 성체 성사 안의 예수님의 현존과 영성체 등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성체의 사도로서 가장 뛰어났던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께로 향하여 배우도록 하자. 그분의 성소와 사명은 모든 크리스챤들을 성체 성사에로 이끄는 것이었다. 성인께서 그 사명이 어찌나 충실하셨던지, 사람들은 그를 “성체 성사의 사제”라고 불렀다.
성인께서 성체 성사의 사제회를 설립했을 때, 그는 그의 생애를 성체의 예수님께서 다스리시게 되심이라는 목표에 봉헌하였다.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열정의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랑하는 예수님, 여기 저의 생명이 있습니다. 보소서, 당신께 옥좌를 세워드리고 당신께 당신을 흠숭하는 백성, 당신의 친구들의 가정을 이룩해드리기 위해서라면 저는 돌을 먹어도 좋고 버려진 채 죽어도 좋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에 가득한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심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성 벨라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체는 하늘과 땅의 모든 사랑들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성체 성사는 사랑의 성사이다. 그것은 사랑을 상징하며 사랑을 생산한다.”
성체 성사의 이 사랑에로 우리의 주의(注意)를 집중시키는 하나의 구체적인 예는 이태리 란치아노에서의 성체 기적이다. 그곳에서는 축성된 면병이 살아있는 살의 모양으로 변했으며 1,0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그 상태로 보존되어오고 있다. 최근에 이 성체의 작은 조각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것이 아직도 살아있는 살의 조각이며 인간의 심장 근육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체는 바로 주님의 심장인 것이다.
하루는 아라비아의 왕자였던 압데드 카데르가 프랑스 관리와 함께 마르세유의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임종하는 이에게 노자 성체를 모셔가는 신부를 보았다. 그러자, 같이 가던 프랑스 관리가 모자를 벗고 무릎을 꾸는 것이었다. 아라비아의 친구는 왜 그렇게 하는지를 물었다. “지금 사제가 환자에게 모셔가고 있는 나의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왕자가 다시 묻기를, “지극히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을 그렇게 작은 모양으로 빈민의 집을 찾아가신다는 것을 당신이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우리 마호메트 교도들은 하느님을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관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위대하심만 알고 그분의 사랑은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대답이다. 이를 확인하듯이, 성 베드루 에이마르는 외쳤다. “성체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고귀한 증거입니다. 그 다음에는 천국 자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크리스챤들이 성체 성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 사랑의 무한한 깊이를 모르고 있는가!
마음의 수련(修鍊)
둘째, 성체 성사의 보화를 캐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여야 한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저주받을지어다”, 코린토 전 16:22), 모든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면, 성체께 대한 사랑이 마음으로부터 용솟음쳐나와야 할 것이며 우리들 모두 안에 항상 생동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 가운데 성체께 대한 사랑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경우는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는 성체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 강렬하여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성체 성사의 바보”라고 불리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사랑도 또한 수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도 진정한 하느님을 사랑하며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그리워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성체 성사는 이러한 사랑의 수련에 있어서의 정점(頂點)이며, 그 성사의 타오르는 불꽃이 피조물과 예수님의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성녀 젬마 갈가니는 다음과 같이 절규하였다. “당신의 위대하시고 훌륭하신 사랑으로 인하여, 당신의 가장 비천한 피조물에게 당신이 감지될 수 있게 해주시고 당신 성심의 찬란한 광채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심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시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천막”이 되기를 갈망함으로써 성녀 젬마는 마음의 수련을 하였다. 그녀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 자신이 성합 안의 작은 공간을 가질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성녀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를 간구하였다.
예수 영해의 성녀 데레사가 심하게 아플 때, 예수님을 영하기 위하여 성당까지 간신히 기다싶이 하여 갔다. 어느 날 아침, 영성체 후에, 그녀는 자기 방에서 쓰러졌다.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는 안된다고 어느 수녀가 말했을 떄 성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오, 나의 이 고통이 영성체 한 번에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갈멜 수녀원 외의 다른 많은 곳들에서 매일 영성체가 허락되지 않았었다. 성녀는 예수님께 간절히 졸랐다. “당신께서 감실 안에 항상 계시듯이 저와 항상 함께 계셔주소서. 당신의 작은 면병(자신을 말함)으로부터 당신의 현존을 절대로 거두지 마소서.”
성녀 말가리따 마리아 알라콕이 세속을 떠나 봉쇄 수도원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을 때 그녀는 사적(私的)인 서원 하나를 하였으며 이를 자신의 피 속에 기록하였다. “모든 것을 성체를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도록.” 성체께 대한 성녀의 불타는 사랑을 설명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성녀가 성체를 모실 수 없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열절한 사랑의 절규를 하였다. “영성체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강하여 만약 성체를 받기 위하여 불 위를 걸어가야 한다면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그녀의 고해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 즉 성체 안의 주님을 주십시오.” 그녀는 또 말했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에는 나는 성당 안으로 가서 그분을 쳐다 봅니다. . . 그리고 또 쳐다 봅니다. . . 이렇게 저는 만족을 얻습니다.”
성녀 벨라뎃다가 오랜 기간 고통스런 병을 앓고 있을 때, 자신의 불면증에 대하여 행복감을 표시하였다. 왜냐 하면, 깨어있음으로써 성체 성사 안의 예수님과 더 오래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침대 옆 커튼에 그려져있는 작은 금색의 성광 모양을 가리키면서, “제가 외롭게 고통 받고 있을 때 그분의 방문은 저에게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고저 하는 열망과 힘을 줍니다,”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수련”이다.
의지(意志)의 수련(修鍊)
세 번 째로, 성체 성사의 보화를 캐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를 수련해야 한다. 이는 성체에 관한 하느님의 교훈들을 생활화함으로써 실행할 수 있다. 우리가 성체에 대해 묵상하면서 그 무한한 가치를 발견하고 또 영성체 때에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체 성사는 언어의 표현을 초월하는 사랑을 가르친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희생, 그리고 겸손과 나서지 않음에 대한 유일무이한 교훈을 가르친다. 그것은 인내와 무제한적인 헌신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무한한 너그러우심으로써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심”(요한 13:1)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성취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약함을 느낄 때 예수님께로 향해서 그분께 말씀드리며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기를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그분께서는 바로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요한 15:5)고 말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체와 함께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게 될 일을 획득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화되는 것이다. 성 아오스딩은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변화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신비체의) 일부로 변화시켜주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나에게로 오라. .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테오 11:28)라고 하신 그분 앞으로 나아가자. 그분을 자주 방문하자. 우리가 할 수 있을 때마다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자. 우리의 마음과 몸을 그분 앞에 대령해서! 성인들은 성체 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방문하며, 성시간을 지내고, 신령성체를 하며, 화살기도를 바치고, 마음으로부터의 열절한 사랑을 표현하기를 항상 열망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영적인 유익을 얻었으며, 얼마나 많은 선익을 남들에게 끼쳐주었던가!
복자 베드루 죠지 프라싸티가 토리노에 있을 때 대학 시절의 동료였던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 가서 간식이나 사먹을까?” 베드루 죠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대답했다. 가까이 있던 성 도미니끄 성당을 가리키며, “그래, 저 카페에 가서 그렇게 하자.” 그들은 성당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서 잠시 기도하였다. 그리고 봉헌함으로 가서 베드루 죠지가 말했다. “여기에 간식이 있다.” 그들은 호주머니를 뒤져서 불쌍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함에 넣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강론 중에 성체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면병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답을 말했다. “여러분의 눈으로 나쁜 것을 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혀로 점잖치 못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희생이 됩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죄를 짓지 마십시오. 이 또한 번제(燔祭)가 됩니다.”
성녀 꼴레뜨의 눈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성녀는 항상 눈을 내리뜨고 있었으며 감미로운 단정함 속에서 묵상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저의 눈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득차 있습니다. 미사 성제의 거양 성체 때 그분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습이 다른 어떤 모습으로도 대체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의 성체와 접촉됨으로써 축성된 그들의 혀를 자제하여 말을 조심하였다.
성인들은 그들의 모든 이웃 사람들, 특히 가장 궁핍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감정이 성체를 받아모시는 그들에게 전달됨으로써 그들도 사랑에 가득차서 선행을 하였음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성 프란치스코 드 살레즈는 신자들에게 성체 성사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라고 권하였다. 왜냐 하면, “이 신성한 성사에 계신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순결하심을 흠숭하고 또 이에 참여함으로써 여러분들 또한 아름답고, 선하고, 순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성인은 말하였다.
우리들 또한 이렇게 우리의 의지를 훈련할 수 없을까? 성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선행을 본받도록 하자.
– Jesus Our Eucharistic Love. 스테파노 엠 마넬리 신부 (Fr. Stefano M. Manelli, F.F.I.)
–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