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고대로부터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와 신도들이 교송(交誦)으로 순교자들과 성인(聖人)들의 이름을 불러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신앙인들을 위하여 빌어 줄 것을 당부하는 특유한 기도문이 있다. 이것을 “호칭 기도”(呼稱祈禱 litania)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산 이든 죽은 이든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느님 안에서 서로 친교를 나누고 보우(保佑)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데 이것을 “성인(聖人)들의 통공(通功)”(communio sanctorum)이라고 하며 호칭기도는 이 믿음에 근거하는 기도 양식이다.
여기에 참고삼아 소개하는 호칭기도는 성칼리스토 카타콤바 속에 무덤이 있는 순교자들과 성인들만을 기념하는 것이다. 신앙을 함께하는 무수한 교우(敎友)들과 더불어 바로 이 사람들이 감행한 신앙의 증언이 로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탄생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유명한 표현에 의하면 “순교자들의 피는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는 씨앗이다.”
그리스도교는 순교자와 성인들을 각별한 존경으로 떠받드는 습속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성인 공경”(聖人恭敬)이라고 하며, 보통 그들의 “탄신일”(dies natalis), 즉 그들이 하늘 나라에 탄생한 사망일을 가려 특별하고 장중한 종교 행사를 갖는다. 교회의 오랜 습속은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신앙의 증거를 바친 장소나 그들의 영광스러운 묘소에 모여서 전례(典禮) 집회를 개최한다.
다음에 나오는 글은 로마 가톨릭의 미사 중에 올리는 기도문으로 <순교자 축일 감사기도>라고 일컫는 것인데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근본 취지가 간추려져 있다.
“지상에 순례하는 교회가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증거에 고무되어, 나날이 신앙의 훌륭한 싸움을 마주하고, 순교자들이 얻은 영광의 관을 함께 나누고자 하나이다. 또한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오니, 아버지께서는 약한 이들에게서 당신 권능을 드러내시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베푸시나이다.”
호칭기도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백성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총애받는 사람들 곧 순교자와 성인들에게 간구(懇求)하는데 있다. 호칭기도의 짜임새를 보면 반드시 하나이요 삼위이신 하느님과, 주님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호칭 기도들이 앞서고, 이어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받드는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뒤따르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교는 인류 구속(救贖)의 가장 존귀한 열매를 발견하고 경탄하며 찬양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성칼리스토 묘역에 묻힌 교황, 주교, 순교자 및 동정녀들이 차례로 호명된다.
이렇게 해서 호칭 기도라는 이 특유한 기도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서 아직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신도들과 천상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 신도들이 찬미와 기원을 함께하는 가운데 하나로 맺어짐을 느낀다. 특히 로마 가톨릭 신도들은 성찬을 거행하면서 그 자리에 시공을 초월하여 하늘과 땅, 천사와 성인들과 지상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일치 속에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의식하고 있다.
2. 순교자 공경
지금의 터키 땅 스미르나에 있던 그리스도 교회는 서기 156년(167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에 사형당한 그곳 주교 폴리카르푸스(Polycarpus)와 열 한명의 신도들의 순교 직후, “프리기아 땅 필로멜리온에 있는, 순례하는 하느님의 교회와 거룩한 세계 교회”에 소식을 전하여 그들의 영광스러운 최후를 알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공경하여 그들이 자기 임금이요 스승이신 분에게 바친 최고의 충성을 보아서,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동료가 되고 함께 제자가 될 수 있게 해 주십사 기원하는 뜻에서, 그들을 주님의 제자요 주님을 본받은 사람으로 떠받듭니다. 우리는 폴리카르푸스의 유골을 무엇보다도 귀한 보석처럼, 순금보다 더 깨끗한 보물처럼 거두어서 안장하고서 의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소에는 희열과 용약의 분위기에서 가능한대로 우리가 자주 모여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대로 그의 순교를 기립니다. 아울러 과거에도 같은 싸움에 임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장차 당면하게 될 싸움을 연습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폴리카르푸스 순교록 17.3; 18.2-3).
스미르나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이 가톨릭 교회에는 꾸준히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오늘에 와서도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의 영예로운 순교자 무덤 곁에서 기도하는 관습이 지속되고 있다. 순교자들의 전구(轉求)를 힘입어 신앙을 돈독히 한다는 뜻에서 이 카타콤바에서 엮어져 사용되어 온 호칭기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Antonio Baruffa, LITANIE DEI MARTIRI E DEI SANTI DELLE CATACOMBE DI SAN CALLISTO, Collegium Cultorum Martyrum, Città del Vaticano 1990). 이곳을 방문하는 신도들이 함께 바치면 유익할 것이다.
3. 성칼리스토 카타콤바 순교자 호칭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거룩한 생명을 바쳐 주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 그 중에는 피를 흘려 증거한 형제들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리나이다. 그들의 모범이 빛이 되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저희 발걸음을 비추고 북돋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성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요 순교자들의 여왕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하 같은 후렴)
성 요셉, “의인”이요 하느님 어머니의 배필이며 예수의 수호자여
성 베드로와 바울로, 그리스도의 순교자요 로마 교회의 초석이여
순교자 교황들
성 칼리스토, 교황 순교자요 여기 묻힌 신앙의 형제들을 지키는 이여
성 폰티아노, 교황 순교자요 광산 노역에 처해진 이여
성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요 로마 교회의 조직을 가다듬은 이여
성 코르넬리오, 교황 순교자요 “겸손과 인내와 선량함의 모범”이여
성 식스토, 교황 순교자요 이 카타콤바 경내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당한 이여
성 에우세비오, 교황 순교자요 용서를 구하는 배교자들에게 자비를 베푼 이여
순교자 부제들
성 야누아리오와 마뇨와 빈첸시오와 스테파노와 펠리치씨모와 아가피토, 거룩한 부제들이여
성 타르치시오, 용맹한 이상을 품은 젊은이요 성체를 지킨 수호자여
순교자들
성 체칠리아, 그리스도께 동정을 봉헌한 용감한 순교자여
성 소테르, 로마의 귀부인으로 복음에 충실하다 죽음당한 이여
성 폴리카모, 거룩한 교회의 영예요 영광이여
성 칼로체로와 파르테니오, 목숨을 버리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실했던 이들이여
성 마르코와 마르첼리노, 피흘려 순교를 함께한 형제들이여
성 체레알레와 살루스티아와 동료 순교자 스물 한 명, 노바티아노 이단*에 대항하여 신앙을 지킨 이들이여
그리스인 순교자, 마리아와 네온과 힙폴리토와 하드리아와 파올리나와 마르타와 발레리아와 에우세비오와 마르첼로, 성칼리스토에 묻힌 동방 교회의 선물이여
성인품에 오른 교황들
성 제피리노, 교황이요 이 무덤이 로마의 교회를 위한 것이 되기를 바란 이여
성 안테로스, 교황이요 짧은 재위 기간을 오로지 감옥에서 보낸 이여
성 루치오, 교황이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유배를 당한 이여
성 스테파노, 교황이요 신앙의 순수함을 보전한 이여
성 디오니시오, 교황이요 곤궁에 처한 형제들을 자상하게 보살핀 어버이여
성 펠릭스, 교황이요 복음선포 사업에 매진한 이여
성 에우티키아노, 교황이요 정통 신앙의 사도여
성 가이오, 교황이요 가난한 이들의 벗이여
성 밀티아데스, 교황이요 도나투스 이단**을 거슬러 신앙을 옹호한 이여
성 마르코, 교황이요 로마 교회의 목자며 전례력을 만든 이여
성 다마소, 교황이요 순교자들을 거룩히 공경한 이여
그리스도의 첫 번 제단을 지키는 모든 교황 반열이여
성인품에 오른 주교들
성 옵타토와 누미디아노, 주교요 아프리카 땅에 복음을 전한 이여
성 우르비노와 라우디체오와 폴리카르포와 만노, 주교요 사도들의 직무를 계숭한 이들이여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에 묻힌 모든 거룩한 주교들이여
성인품에 오른 이들
거룩한 사제들, “오랜 태평” 시대에 살다 죽은 이들이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결을 간직한 청소년들이여
범죄하였으나 선하신 하느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고 성령으로 성화된 이들이여
성 칼리스토의 무덤에 몸을 쉬는 모든 거룩한 영혼들이여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를 순례한 성비르지타와 스웨덴의 가타리나여
카타콤바를 순례한 성 가롤로 베로메오와 성 필립보 네리여
성 요한 보스코와 복자 미카엘 루아여
성 마리아 마자렐로와 아기 예수의 데레사여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를 순례하고 초대 신자들의 신앙에 심취한 모든 성인들이여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합시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 순교자들의 피로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의 땅을 풍요케 하시고 무수한 성인들의 현존으로 이 땅을 축복하셨으며, 용맹한 증언이 담긴 저들의 빛나는 모범으로 우리를 신앙에 보존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거둔 희생의 열매를 함께 거두고 미리 맛보며 즐거워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참 고
* 노바티아노 이단: 박해시에 배교한 사람이 용서받고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을 반대하다 이단으로 판정받은 그리스도교 종파.
* 도나투스 이단: 배교나 중죄를 지어 도덕적으로 부적격이 된 신도나 성직자가 집행하는 세례나 성찬의 성사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다 이단으로 판정받은 그리스도교 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