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는냐!”

지금 당장 하느님께 회심하지 않으면 전 인류에게 큰 정화의 시기가 올 것이다.
그것은 징벌이 아니라 자비의 심판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는냐!”(마태 16, 3)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너희는 그 모든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징조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오늘날 그 징조란 무엇인가? 엄청난 산림 화재를 일으킨 2003년의 대재앙적 가뭄, 끔찍했던 홍수, 두 개의 고층 건물이 파괴되었던 2001년 9월 11일의 뉴욕 참사, 지진, 새롭게 등장하는 불치의 질병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자연적인 현상에서만 찾는다. 정말 중요한 원인, 바로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려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벌한다. 교통 규칙을 지키지 않는 운전자가 사고를 일으키듯이 하느님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 인간들이 스스로 벌을 받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천지만물의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이다. 복잡한 기계를 사용할 때 사용 지침을 지키지 않으면 기계가 고장난 것처럼,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으며  생태학적 자연의 법칙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었고 식물과 동물이 죽어가고 있으며 사람들도 곧 죽게 될 것이다.

시대의 징조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두 가지 재앙이 일어났다. 탑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고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그것이다(루가 13, 1-4 참조).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치셨다.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두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 13, 2-3 참조).
  이 말씀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재앙에도 해당된다. 하느님께서는 재앙으로 인간을 징벌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죽음의 잠에서 흔들어 깨우시려는 것이다. 이는 불타고 있는 집 안에서 잠이 들어있는 사람을 깨우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잠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을 깨우기 위해 심하게 흔드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버림받을 사람은 이것도 별로 효과가 없다.
  기계 장치에는 경고 표시가 있다. “보일러가 과열되지 않았는지 주의하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그것은 폭발할 것이다!” 재앙은 보일러가 과열되었다는 경고 표시이다. 지금 당장 하느님께서 회심하지 않으면 전 인류에게 큰 정화의 시기가 올 것이다. 그것은 징벌이 아니라 자비의 심판이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써 잠자고 있는 인류를 깨우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테러에 맞서 싸우는 것은 옳은 일이나 그는 그릇된 방법을 취하고 있다. 무력은 또 다른 무력을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가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무엇보다 예언직을 수행하고 있지 못한 교회의 잘못이다. 교회는 모든 영역에서 부르짖어야 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너희는 짖지 못하는 개들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외친다. “너희들은 짖지도 못하는 개들이다”(이사 56, 10 참조). 사람들은 교회를 보면서 짖지 못하는 개들만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 그럴까? 예언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소명이므로 사람들이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너무나  힘든 나머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 반면에 거짓 예언자들은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간다. 너희는 너희의 삶을 바꿀 필요가 없다.” 라는 입에 발린 소리만 했기 때문에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거짓 예언자처럼 자신들의 안정을 누리기 위해 인간적인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입을 다물고 큰 고난의 시기들을 눈감아버린다. 그러나 인류의 삶이 대재앙으로 위협받을 때 그들은 주목하고 대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회심을 권하는 설교는 언제나 희망으로 열려있으며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께 회심하면 불행을 피할 수 있다.

회심의 세 가지 유형
첫 번째, 신앙이 없는 자나 대죄 중에 있는 죄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심.
두 번째,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주 최소한의 믿음에 만족하는 사람의 회심.
세 번째, 열심한 신앙인들의 회심.
그 중에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모두 미지근한 자, 이름뿐인 신자들을 말한다. 이들이 구원받으려면 통회와 회심이 필요하다.

  묵시록의 심판관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 3, 16).
  하느님께서는 성서에서 이런 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 때문에 내 이름이 더럽혀졌다!” 이들은 아주 잘못된 하느님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과 교회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한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모두 복음 말씀에 따라 산다면 더 이상 이슬람교도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마호멧 시대에 아리아니즘이나 그 밖의 다른 이단들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이 갈라졌고 초대 교회의 열심한 신앙을 잃어버렸다.’
  이 이름뿐인 신자들은 낙태와 이혼, 동성애자간의 결혼, 남색, 등 모든 죄악과 악덕을 가진 “거짓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서너 살짜리 어린 아이가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괜찮다.” 라고 말한다면 이는 자연을 거스르는 잘못이 될 것이다. 미지근한 신자는 바로 이런 미성숙한 상태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유형에 해당되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성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성숙은 평생 계속 된다. 누구도 “이제는 충분하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성덕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루는 예술 작품 같은 것이다. 예술가는 사라지고 말 현세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명성을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일에 매달린다.  

아담과 하와의 유산
  왜 사람들은 하느님께 향하고, 하느님을 흠숭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 그 근본 원인은 아담과 하와의 비극적 유산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는 악한 자만으로 가득 차서 그들 스스로 자아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순종할 때에만 자녀로서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아버지의 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결코 굴욕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처음으로 그렇게 그들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인간의 자만이 승리를 구가하며 하느님을 피했다. 그들은 완전히 홀로 서자 곧 배고픔과 비참함을 느꼈다. 그들은 세상을 파괴하고 자기 자신을 파괴했다. 이것은 오늘날 아주 쉽게 확인된다. 학생이 존경심을 가지고 훌륭한 스승의 수업을 들으면, 그는 곧 자아를 실현하고 자신의 참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어리석은 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애써서 하느님께 회심하려고 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시며 귀한 분이신지를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편의 저자는 말한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 때문에 하느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개인적이고 내적이며 친밀한 관계에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물이 가득 찬 병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병이 우리처럼 지성과 의지를 가졌다고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그 병에 매 값비싼 포도주를 넣으려 할 때, 그 가엾은 병은 물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값비싼 포도주를 온 힘을 다해 밀어낼 것이다. 그 병은 자신의 잘못으로 귀한 포도주를 얻지 못한다. 현대인의 태도가 바로 이러하다. 현대인은 사라져갈 값싼 만족이라는 물 속에 뛰어든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값비싼 포도주를 놓쳐버린다.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쾌락에 자기를 바치면서 하느님과의 친교인 귀한 포도주는 놓치고 있다.

  제삼천년기는 고층 건물 두 개가 불타는 뉴욕 테러로 불행한 시작을 했다. 그 건물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벽두에 불타는 기념물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너희가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너희는 모두 멸망할 것이다.” 사람들은 짐승보다 더 어리석다. 짐승들은 위험이 시작되면 그것을 직감하고 곧 피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주어진 구원을 거절한다. 그것은 자만심 때문에 “하느님께로 회심하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 마리아 2004년 2~3월 123호 : 스위스 ‘SKS’, 2003, 11월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