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처녀가 불행하게도 부끄러워서 고해하지 못할 큰 죄를 범하고 너무나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들은 사연을 모르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조금 나아질까 생각했지만 더욱 무서운 가시에 마음이 찔리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에 매우 열심하고 거룩한 친구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린 지 며칠 만에 죽게 되었다. 그 친구는 어떻게 죽음을 잘 예비하였던지 천사처럼 깨끗하게 임종했다.
  친구를 장례지낸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밤에 이 불쌍한 처녀가 깊이 잠이 들었을 때다.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분명히 죽은 친구의 목소리였다. 처녀는 겨우 정신을 차려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또 다시 소리가 들리기를, “잘 고해하라…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어른이신지 알거든! 고해하라…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어른이신지 알거든!” 한다.
  불쌍한 처녀는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죽은 친구를 시켜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비로소 용기를 내어 그렇게도 부끄럽고, 그렇게도 근심스럽고,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던 그 죄를 시원하게 고해해 버렸다.
  아! 고해소에서 나오는 처녀의 마음은 마치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거뜬하여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처녀는 친구들에게 “고해하라.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어진 어른이신지 네가 알 것이다. 고해하라.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이 가득한 어른이신지, 이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거듭거듭 말했다고 한다.

  자주 고해하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해를 잘해왔으면 하느님께 감사하고 이후에도 항상 올바른 고해를 하도록 힘쓰자. 그렇지 않고 고해를 모독한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모고해의 결과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옥으로 가는 영원한 벌이다.
  어쩌다가 한번 모고해를 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고해를 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영원한 멸망을 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바른 고백을 하지 않기에 지옥으로 빠진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며,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성인 성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다.
  성녀 데레사는 이러한 초성적 영시를 보았다. 성녀가 어느 날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지 않겠는가! 그 불꽃 사이로 큰 구멍이 열리더니 불행한 영혼들이 셀 수 없이 그 안으로 떨어졌다. 성녀는 너무 무서워서 눈을 하늘로 치뜨고 “오, 하느님!” 하고 소리쳤다. “오, 하느님! 지금 제가 보는 이 광경이 대체 무엇입니까?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많은 영혼들이 누구 것들이란 말입니까? 정년 이방인들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미신자들이겠죠? 헤브리아 사람들입니까? 터키 사람들입니까?”라고 물었다. “아니다, 데레사야, 그렇지 않다. 네가 지금 보는 저 영혼들은 너와 같은 신자들의 영혼들이란다.”라고 하느님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신앙심이 없는 영혼들입니까? 신자의 본분을 다 하지 못했거나 성사를 자주 보지 않은 냉담자들의 영혼이겠지요?”
  “아니다, 데레사야! 그렇지 않다. 이 영혼들은 너처럼 세례를 받아 신앙심을 가졌고, 너처럼 본분을 잘 지키던 사람들 것이란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잘 안 보던 사람들이겠죠? 임종 때에도…”
  “아니다. 고해성사도 보았고, 임종 때에도 고해뿐 아니라 갖은 성사를 다 본 사람들이란다.”
  “주님이시여, 그렇다면 어째서 이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진단 말입니까?”
  “그것은 고해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데레사야! 너는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계시를 말해주고, 신부들에게도 고해의 중요함과 모고해에 대해서 자주 강론하고 자주 권하라고 해라. 나의 신자들이 이 좋은 약을 독약으로 만들고, 불쌍한 영혼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이 고해성사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설마 모고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랴 하고 생각할 것이다. 성 알퐁소와 성 필립보 네리와 성 레오나르도 마우리시오는 불행하게도 모고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뿐이 아니라 고해소에서나 임종하는 사람의 베개 옆에서 무수한 고백을 듣던 신부들이 자주 이 슬픈 경험을 했다. 묵상기도를 지도하던 신부들도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서 지적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사르네리 신부는 “불행하게도 모고해하는 사람이 많다. 오랫동안 경험한 신부들은 이를 잘 안다. 이것은 모두 최후 심판 때 알고 나서 깜짝 놀랄 일이다. 큰 도시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열심한 사람 중에도 모고해가 가끔 있다.”라고 말했다.
  한 예수회 신부가 중병에 걸린 어느 부인의 초청을 받아 마지막 고해를 듣고 사죄경을 염하려고 손을 드는데 시커먼 쇠손이 그 손을 잡아챘다.
  신부는 이상히 생각하고 부인에게 “여보세요, 부인! 당신이 혹시 무슨 죄를 빠뜨린 것이 없소?” 라고 물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신부님 저는 나흘 동안 고해를 준비했습니다.” 라고 부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부는 잠깐 눈을 감고 기도하고 나서 사죄경을 염하려고 하는데 또 다시 그 쇠손이 말렸다. 신부는 다시 부인에게 “여보세요, 부인! 혹시 부끄러워서 고해하지 못한 죄가 없습니까?” 라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부님은 저를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요. 제가 그래 모고해를 하는 줄 아십니까?” 라고 분개했다.
  신부는 또 다시 사죄경을 염하려고 했지만 그 시커먼 쇠손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이 이상한 사실 속에는 하느님의 무슨 암시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신부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부인에게 애원했다.
  “부인! 당신의 영혼을 스스로 배반하지 마시고, 당신의 영혼을 지옥에 빠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때야 부인이 부르짖기를, “신부님! 사실 제가 15년 전부터 모고해로 살아왔습니다.”라고 한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모고해는 생각만 해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일이다. 지옥불에 타는 것도 참혹한 일이겠지만 이 세상에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과 공포와 불안과 떨림도 참혹한 일이다.
  참으로 죽음은 바른 고해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서도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거룩하고도 유익한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해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은 준비가 된다. 이번 고해가 임종의 고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말은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음에 고해하기까지 우리가 살아 있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갑자기 죽은 예가 드물지 않다. 저녁 식사를 잘 하고 밤에 이불 속으로 들어간 우리가 아침에 꼭 일어나리라고 누가 보증하겠는가?

  성 돈 보스코에 대해 전해오는 많은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토리노에 있는 살레시오 수도원 성당에서 피정기도가 열리던 때였다. 원생들은 모두 착실하고 열심히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 피정기도에 잘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단 한 원생만이 성 돈 보스코와 다른 신부들의 간곡한 지도와 좋은 권면에 따르지 않고 다른 원생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고해성사를 보는데 자신만은 이번에는 고해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신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다음에 잘 고해하지요. 이번에는 못하겠습니다…. 차차 생각해보지요…. 지금 같아서는 제 마음을 제가 결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돈 보스코 신부는 그가 피정 마지막날까지 이러한 고집을 부리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는 것을 보고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냈다. 돈 보스코 신부는 조그만 종이에 “오늘 밤에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돈 보스코-” 라고만 써서 그 생도의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
  그럭저럭 밤이 되어 모두 자기 침실로 갔다. 고집쟁이 생도도 옷을 벗고 막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뜻밖의 일을 당한지라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종이 조각을 읽어보았다. 눈은 동그래지고, 가슴은 뛰고, 정신은 아찔해진다. 종이에는 “오늘 밤에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돈 보스코-” 이렇게 적혀있지 않은가!
  그 생도는 “돈 보스코! 돈 보스코!” 라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외어보았다. “돈 보스코는 성인이다. 장래 있을 일을 잘 아는 분이다. 나는 오늘 밤에 죽을지도 모른다. 만일 오늘 밤에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더 살련다. 나는 결코 안 죽는다….” 이렇게 마음을 다지면서 다른 친구들이 눈치 채지 않게 이불 속으로 가만히 들어가서 이불자락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용기를 내서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헛일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무엇이 뾰족한 가시처럼 마음을 몹시 찌른다. 내가 죽는다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빼버리고 자려고 애써보았지만 눈은 점점 환해지고, 정신은 점점 더 맑아질 뿐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눈을 꽉 감아도 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돈 보스코 성인의 말씀이 머리에 떠오르고, 불길이 이글이글 치솟는 지옥이 요지경처럼 나타나기도 하며, 너는 지옥으로 가라고 판정하시는 예수님의 엄숙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불쌍한 내가 만일 오늘 밤에 정말로 죽으면….” 갑자기 한기가 들고 식은땀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싫다. 지옥에는 가고 싶지 않다. 고해를 해야지, 고해를 해….”
  신자들의 의탁이신 성모 마리아와 자신의 주보 성인께 열심히 기구한 그는 이불을 확 걷어차고 옷을 주워 입은 후 침실을 빠져 나왔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복도를 지나서 돈 보스코 신부의 방 문 앞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사랑이 깊으신 아버지처럼 그 생도가 오기를 기다린 성인은 문을 열고 친절하게 맞으며 “오, 그대!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고 물었다.
  “신부님, 고해하려고요.” 하는 그는 고개를 숙였다.
  “네, 그래요? 들어오세요.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렸답니다.” 라고 신부는 친절하게 그를 안내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마루 위에 무릎을 꿇고 진정한 통회를 하면서 올바른 고해를 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마음으로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다. 죽음을 생각한 들 무서울 것이 없다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오! 나는 행복한 사람! 이제 죽은들 어떻단 말이냐! 하느님의 성총을 입어 예수님의 벗이 되었으니 이제 죽은들 무서울 것이 무엇이냐!”
  마음의 안정, 스스로의 위로, 말할 수 없는 행복감 속에서 그는 평안히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눈앞에는 천국이 열리고, 그 주위에는 아름답고 장엄한 찬미가를 부르면서 하늘하늘 날아드는 천사들의 무리… 아, 얼마나 황홀하고 만족한 광경이냐!
  이 학생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정말로 이 학생처럼 고해의 유익한 점을 믿고 고해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모고해를 한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참혹한 지경에 이를 것인가!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성 레오나르도 마우리시오가 어느 임종하는 여성의 청을 받아 한 수사를 데리고 급히 그곳으로 갔다. 성인은 그녀의 고백을 듣고 사죄경을 염한 뒤에 가만히 그 방에서 나와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사와 함께 그 집을 막 나오려는데 수사가 매우 슬프고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성인에게 나직이 말하였다.
  “신부님, 제가 본 것이 무엇일까요?”
  “당신이 무엇을 보았는데?”
  “저 응접실 가운데를 빙빙 돌아다니는 시커먼 손을 보았습니다. 아! 무서워…. 그런데 신부님이 나오시니까 그 무서운 손이 번개같이 병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수사는 아직도 벌벌 떤다.
  성인은 그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 다시 병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 얼마나 무서운 광경이냐! 그 시커먼 손이 병자의 목을 조르고 있지 않은가! 병자의 눈알은 튀어나오고, 혀는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무서운 독성(瀆聖)…. 오, 기막히는 독성죄…”하고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숨이 진다.
  참으로 고해 잘못한 죄가 영원한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항상 거짓과 싸우면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고백하지 않으면 이 불쌍한 여성과 같은 길을 밟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