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사랑의 진실과 의미에 대해
북-콜로라도의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목서한

바오로 6세는 옳았다
(PAUL Ⅵ WAS RIGHT)

차알스 샤퍼 대주교, 프란치스꼬회
(Archbishop Charles J. Chaput, OFM)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대교구, 1998년 7월 22일

Contraception이라는 단어는 ’시작을 거스른다 (against the beginning)’는 의미로서 ’피임’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피임’은 피임약, 데포-프로베라, 콘돔, 다이아프램, 자궁내장치, 질외사정 등, 그리고 단종술같은 영구피임 등을 포괄하며, 빌링스 배란법, 증상체온법 등의 자연가족계획법 이외의 인공적인 가족계획 방법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 역자

  주님 안에서 친애하는 형제 자매들께,

1. 30년전 이 주간에,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산아조절에 관한 교회의 변함없는 가르침을 재확인한 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을 발표하셨습니다.  분명히 회칙 인간생명은 금세기에서 가장 오해를 많이 받아온 교황 교서입니다.  회칙 인간생명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 특별히 선진국에서 30년간의 의구심과 거부를 빚어왔던 불씨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칙 인간생명은 예언자적이었음이 증명되기도 하였습니다.  회칙 인간생명은 진리를 가르칩니다.

따라서 본 사목서한을 보내는 저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저는 회칙 인간생명의 메시지가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회칙이 보다 깊고 풍부한 결혼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정 교회로부터 찾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비평가들이 부적절한 것으로 논박해버리고 마는 문헌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아니라, 회칙 인간생명을 연구하고 충실하게 우리 교구들에서 가르치며 결혼한 부부들에게 그것을 살도록 격려하는 활동적이고도 지속적인 노력인 것입니다.

Ⅰ. 1968년 이래의 세계

2. 조만간 모든 사목자들은 어떠한 중독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상담을 합니다.  보통 그 문제는 알코올이나 마약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나리오는 동일합니다.  중독자는 문제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항함에 자신이 무력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는 중독자는 그러한 중독이 자신의 건강을 망치고 직업과 가정에 파탄을 가져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부정해 버릴 것입니다.  사목자의 설득이 여하간 합당하며 진실되고 설득력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상황이 여하간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하더라도, 중독자는 단순히 상담을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 또는 상담 내용을 실천할 수 없어 합니다.  중독은 글라스의 두꺼운 유리막처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나 무엇으로부터 중독자를 격리시킵니다.

3. 회칙 인간생명의 역사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은 중독에 대한 이러한 비유를 통해 지난 30년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선진 세계가 이 회칙을 그렇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가 바오로 6세의 논리에 어떠한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교황성하께서 경고하신 바 그대로 선진 세계 스스로가 휘말려 들어간 중독과 모순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4. 당신의 회칙을 제시함에 있어, 바오로 6세께서는 만일 산아조절에 관한 교회 가르침이 무시당했을 때 유발될 4가지 중대한 문제들에 주의를 주셨습니다(인간생명 17항).  우선, 성하께서는 피임의 광범위한 사용이 ’부부간의 불충실함과 도덕성의 전반적인 퇴락(頹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정확하게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낙태, 이혼, 가정파괴, 아내학대와 아동학대, 성병, 그리고 혼외 출산율 모두가 1960년대 중반 이후로 대대적으로 증가했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출산 조절약만이 이러한 문제들의 유일한 요인은 아닙니다.  사실, 1968년 이래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성에 대한 변모된 태도로부터 추진된 문화적 혁명은, 신뢰할만한 피임에 대한 손쉬운 접근 없이는 가능하지도 지속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바오로 6세께서 옳았습니다.

5. 두 번째로, 성하께서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경외심을 잃을 것이며 더 이상 여성의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평형에 개의치 않게 되어 ’더이상 남성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동반자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기적 쾌락의 도구’로 여성을 간주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교황성하의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피임은 성적 공격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정도에까지 ― 남성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지난 세대의 피임에 관한 논쟁의 이상한 역설들 중의 하나는 바로 다음 사실이었습니다 : 수많은 여권주의자들(feminists)이 가톨릭 교회가 여성을 무시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교회를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생명에서 교회는 그러한 메시지가 문화적 대류로 흘러 들어가기 수년 전에 이미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인식하고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또다시, 바오로 6세께서 옳으셨습니다.

6. 세 번째로, 교황성하는 피임의 광범위한 사용은 ’도덕적 위급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공권력자들의 손에 … 위험한 무기를’ 쥐어 주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태껏 발견하여 왔듯이,  우생학은 1945년 나찌의 인종주의 이론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인구 조절 정책은 거의 모든 해외 원조 논상의 한 부분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선진 세계로부터 개발도상국가들에 대한 피임기구들과 낙태와 단종술의 대량적인 수출은 ― 자주 지역의 도덕적 전통에 직접적으로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달러를 원조하는 예비 조건으로서 빈번하게 제시됩니다 ― 얄팍한 가면을 쓴 인구 전쟁과 문화적 재조작의 한 유형입니다.  또다시, 바오로 6세께서 옳았습니다.

7. 네 번째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피임이 인간으로 하여금 몸에 대해 무제한적인 지배권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인간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침습적인 권력의 소유물(object)로 변화시키도록 오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서 또다른 역설이 자리잡습니다 : 과장된 여권주의는 피임과 낙태가 제공하는 거짓 자유 안으로 날아듦으로써 적극적으로 여성의 비인간화에 공모하였던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하느님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을 공동 창조하는 능력으로써 독특하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피임의 심장부는 출산할 수 있는 능력을 ― 마치 항생제가 박테리아를 공격하는 것과 꼭 같이 ― 공격하고 제어해야 할 일종의 감염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이러한 태도 안에서, 우리는 피임과 낙태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출산할 수 있는 능력이 공격해야 할 감염으로 잘못 제시될 수 있다면,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가 되었든, 여성의 주체성(identity)을 규정하는 요소 ―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여성 자신의 잠재력 ― 는 방심치 않는 불신과 ’치료’를 요구하는 나약함이라고 매도당합니다.  여성은 여성 자신의 해방과 방위를 보장하도록 의지하는 도구적 대상(object)이 되어 버리는 반면, 남성은 아무런 책임성도 나누어 갖지 않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더, 바오로 6세께서 옳으셨던 것입니다.

8. 교황 성하의 마지막 논점으로부터 그 외의 많은 사항들이 흘러 나옵니다 : 시험과 수정(in vitro fertilization), 클로닝(cloning), 유전자 조작, 배아(胚兒)에 대한 실험 등 모두가 피임 테크놀로지의 후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외적으로 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적 인간 주체성에까지 파급하는 테크놀로지의 영향들을 단순유치하게도 상당히 과소평가해 왔습니다.  작가 네일 포스트만(Neil Postman)은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부가적(additional)’이 아니라 생태학적이라고 관찰해 낸 바 있습니다.  유의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사회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 빨간 물감 한 방울이 물 한 잔 안에 따로 분리되어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액체의 모든 개별적인 분자를 물들이고 변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피임 테크놀로지는, 바로 성적 친밀함에 대한 그 영향 때문에, 성과 출산 능력과 결혼 자체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피임 테크놀로지는 성과 출산 능력과 결혼을 인간의 자연적이고도 유기적인 주체성으로부터 소외시켰으며 인간 관계의 생태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교만이 바벨에서의 언어를 혼돈에 빠뜨렸듯이 피임 테크놀로지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언어를 혼돈에 빠뜨렸습니다.

9. 이제 우리는 매일같이 그 결과들을 다루어 나갑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들을 쓰고 있는 7월 현재에도 뉴스 미디어들은 거의 14%에 이르는 콜로라도 주민들이 마약이나 알코올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주지사 위원회가 결혼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동성애 관계를 포함한 ’충실한 관계’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평행선상으로 연장시킴으로써 콜로라도에서 결혼의 의미를 전복시키는 조치들을 권장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부 해안에 사는 젊은 커플이 자신의 갓난아기를 잔혹하게 살해한데 대한 형을 선고받았다는 보도도 보입니다.  뉴스 보도에 의하면, 젊은 미혼 부모 모두 또는 그중 한 명이 ’(아기의) 두개골을 부수었는데, 아기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후 아기의 몸을 구타하여 쓰레기장에 죽도록 버렸다’는 것입니다.  위 보도들은 심각한 도탄에 빠진 문화의 머리기사들입니다.  미국 사회는 성 주체성과 행동상의 기능이상, 가정붕괴, 그리고 인간생명의 신성함에 대해 전반적으로 거칠어지는 태도로 인해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중독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명백해 보입니다.  그러한 문제는 우리의 생명을 잠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입니까?  저는 만일 바오로 6세께서 피임으로부터 야기되는 수많은 결과들에 대해 옳으셨다면, 그것은 성하께서 피임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옳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온전해지려고 모색함에 있어, 우리는 마음을 열고 회칙 인간생명을 다시 이해함으로써 새로이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생명은 진리로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생명은 우리가 자유인이 되기 위한 열쇠인 것입니다.

Ⅱ. 회칙 ‘인간생명’은 실제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10.  아마도 지난 30년이 넘도록 회칙 인간생명의 메시지와 의사소통함에 있었던 잘못들 중의 하나가 있다면, 회칙을 가르치는데 사용했던 언어들이었을 것입니다.  결혼한 생명이 갖는 의무의 책임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한 의무와 책임들을 우선적으로 기도 안에서 진중하고 주의깊게 숙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학술적인 신학 용어로써 서로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부부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부부들은 사랑에 빠져 듭니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현시적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자신을 양도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을 증여합니다.  그들은 서로 충만하게 소유하고 소유받기 위해 서로에게 빠져 듭니다.  그리고 그래야 마땅합니다.  결혼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안에서, 그리고 서로를 통하여 ― 남편과 아내, 그 자녀들, 그리고 그들을 아는 모든 이들을 더욱 깊이 하느님의 껴안으심 안으로 모아들이도록 질서지워집니다 ― 기쁨과 즐거움과 희망과 풍부한 생명을 찾도록 의도하십니다.

11. 결과적으로, 새로운 세대에게 그리스도인의 결혼의 본질을 제시함에 있어 우리는 결혼의 의무들과 아울러 적어도 그 충만한 만족스러움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는 결코 청교도적이거나 억압적 또는 반(反)육체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당신 자신을 모상으로 하여 빚어내셨습니다.  따라서 몸이란 선(善)한 것입니다.  사실, 소위 ’억눌린 성’이라 비판받는 가톨릭 도덕 교의(敎義)와 착한 가톨릭 가정들의 규모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이 불평불만하는 것을 익명인으로서 듣고 있는 것은 자주 제게 상당한 유머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누군가가 아기가 어디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가톨릭에서 결혼은 ― 예수 당신과 꼭 같이 ― 희소성이 아니라 풍부함에 관한 것입니다.  가톨릭의 결혼은 불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치적이고 출산적인 사랑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열매 풍성함에 관한 것입니다.  가톨릭의 결혼한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의 결혼한 사랑은 외로움을 몰아내고 미래를 긍정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긍정하기 때문에, 결혼한 사랑은 실망하는 경향을 갖는 세상에서 희망의 용광로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가톨릭의 결혼은 매력적입니다.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결혼은 피조물인 우리 자신 그대로를 위해 디자인됩니다.  서로간의 인격은 친교를 도모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완성시킵니다.  하느님께서 결혼 안에서 남성과 여성을 한데 엮어 주실 때, 부부는 하느님과 더불어 새로운 완전함, 그렇게도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서로에게 ’속해있음’을 창조해 냅니다.  이로써 새로운 생명인 어린아이는 자연적인 표현이며 봉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톨릭의 결혼한 사랑이 본질적으로 일치적이면서도 출산적임을 가르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12. 그러나 결혼한 부부가 단순히 일치적인 국면만을 선택하면서 그 출산적인 본질을 잠시적이나마 막아버리거나 심지어 영구히 제거해 버리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답은 복음 자체만큼이나 간단하며 근원적입니다.  결혼한 사랑의 본질이 의미하고 심지어 요구하고 있는 바, 부부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정직하고도 전적으로 증언할 때 그것은 그들 자신 전체(whole selves)를 ― 그리고 인간의 가장 친밀하고도 강력한 부분은 생식 능력입니다  ― 포함해야 합니다.  피임은 이러한 생식 능력을 부정하고 출산(procreation)을 공격하기만 할 뿐이 아닙니다.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부부간의 일치적인 의미마저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증여하겠소.  그러나 나 자신의 생식 능력만은 제외되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오.  다만 당신의 생식 능력만을 제외되오.”  이러한 자기 견지는 필연적으로 부부를 소외시키고 갈라 놓으며 부부 사이의 거룩한 우정을 즉각적이거나 확연하지는 않지만 깊디깊게 단절시킵니다.  결국에는 결혼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13. 이것이 교회가 단지 ’인공적인(artificial)’ 피임만을 반대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모든 피임에 반대합니다.  ’인공적’이라는 개념은 본 사안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실, 그것은 신체의 유기 조직 안으로의 기계적 침투만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듯한 암시를 줌으로써 논의를 혼란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치유시키려 적절히 개입하는 과학과는 아무런 하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모든 피임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으며, 단순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잘못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부부가 결혼을 시작할 때의 계약은 모든 성관계가 새로운 생명의 전달에 대해 개방되어 있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한몸’이 됨,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아무것도 보류하지 않으셨듯이, 아무런 예외나 주저함 없는 전적인 자기증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출산적 본질에 대한 어떠한 의도적인 간섭도 필연적으로 부부간에 서로로부터, 그리고 성사적 사랑 안에 부부의 파트너가 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보류시키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서로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창조자로부터 무한히 귀중한 무엇 ― 자기 자신 ― 을 도둑질하게 됩니다.

14. 그리고 이것이, 가족의 크기를 조절하는 수단으로써 자연가족계획(NFP)이 스타일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실제에 있어서도 피임과는 다른 이유입니다.  자연가족계획은 피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식 능력에 대한 인식(awareness)과 인정(appreciation)입니다.  그것은 출산을 조절하는데 있어 전적으로 다른 접근법입니다.  자연가족계획은 생식 능력을 공격한다거나 배우자로부터 자기 자신이라는 선물을 거두어 들인다거나 부부관계의 출산적 본질을 막아버리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결혼 계약이 요구하는 바는, 각각의 부부행위가 충만하게 자기 증여의 행위여야 하고 따라서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이유들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부부관계를 한달 중 자연적인 불임시기로 제한하는 경우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여성안에 창조하신 주기를 단순히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식 능력을 전복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법과 더불어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15. 물론, 자연가족계획을 실천하는 데에는 많은 놀라운 선익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침습적인 화학 약품이나 기구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의 자연적인 주기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자연가족계획에 대한 계획과 책임성을 아내와 더불어 나눕니다.  자연가족계획이 부부관계를 주기적으로 삼가는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로 그것은 어려운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품을 받았거나 서원을 하였건, 독신이건 아니면 결혼을 했건 어떠한 진지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수만 쌍의 커플들의 체험은, 기도 충만하고 비이기적으로 살 때 자연가족계획이 결혼을 심화시키고 풍부하게 해 주며 보다 큰 친밀함과 보다 큰 기쁨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원조에게 자식을 낳아 번성하라(창세 1:2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명 3:19).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풍부하게 가져다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멍에가 가벼움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마태오 11:30).  따라서 저는 회칙 인간생명에 대한 핵심이 되는 것은 교도권과 도덕적 적부성, 또는 성(性)의 위기라기 보다 오히려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선(善)하심을 믿고 있습니까?  교회는 자신의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변하며, 자연히 신자들은 열절히 귀기울입니다.  교회는 결혼한 부부들에게 인내하는 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보여 줍니다.  30년간의 역사는 그로부터 벗어난 선택을 함으로써 야기된 결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Ⅲ. 우리는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16. 저는 결혼 생활에서 이미 회칙 인간생명의 메시지를 살고 이는 많은 부부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진리에 대한 그분들의 충절은 자신의 가정과 믿음 공동체 자체를 성화시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고취된 책임성있는 부모 역할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상담해 주고 있으며 자연가족계획을 가르치고 있는 부부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의 노고는 너무도 자주 눈에 띄지 않거나 평가절하된 채로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 혼돈의 시대에 생명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들이십니다.

또한 저는 불임이라는 십자가를 인내하고 있는 부부들에게 저의 기도와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너무도 빈번하게 자녀를 기피하는 사회에서, 그분들은 자녀를 갈망하기는 하나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란 없으며, 주님께 봉헌하는 모든 고통은 어떠한 유형으로든 새로운 생명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그분들께 입양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격려하는 한편, 좋은 목적이 결코 나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호소합니다.  임신을 방지하게 위해서건 성취하기 위해서건, 결혼의 일치적 국면과 출산적 국면을 분리시키는 모든 테크놀로지들은 언제나 그르다는 것입니다.  배아(胚兒)를 사물(object)로 간주하고 기계적으로 아기를 남편과 아내의 팔에 안기게끔 하여 대용품화시키는 출산적인(procreative) 테크닉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범하고 생명을 생산 제품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들의 의도가 아무리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테크닉들은 인간 생명을 조작할 수 있는 재료로 격하시키는 위험스러운 경향을 촉진시킵니다.

17.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 회심하기에는 결코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혼한 사랑에 대한 진실과 우리를 둘러싼 문화(culture)에 대한 충실을 증거함으로써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크나큰 기쁨의 복음(Good News of Great Joy)라는 제목의 사목 서한에서 저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 선포자로서 갖는 중요한 성소(聖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선교사들입니다.  1990년대의 미국은 파괴되어버린 결혼과 조각조각나 부서져버린 가정들로 혼란해진 성문화의 만연과 함께 절실히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에서 결혼한 부부의 가정들은 서로에 대하여, 그리고 둘러싼 문화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갖는다고 쓰십니다(49항, 50항).

18. 그 빛 안에서, 저는 결혼한 부부들께 결혼과 성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윤곽짓고 있는 회칙 인간생명, 가정 공동체 등의 교회 문헌들을 읽고 토론하며 기도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자료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귀중한 지혜를 모르고 있는 수많은 결혼한 부부들은 상호간의 사랑을 지지해주는 아름다운 원천을 스스로 결핍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부부들이 피임에 관해서 자신의 양심을 성찰할 것을 격려함과 아울러 그분들께서 ’양심’이 개인적인 취향 문제 이상의 것임을 기억해 주시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교회 가르침을 탐색하고 이해하며 우리의 마음을 그에 부합시키려고 정직하게 노력함을 요구합니다.  저는 그분들께서 피임에 빠져 들었을 때마다 화해의 성사를 찾아주실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문란한 성은 20세기가 끝나가는 현재 미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중독증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해악을 입힙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이 가르침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빈번하게 실패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19. 저는 형제 사제들께 간청합니다.  제반 교구 업무에서 이러한 이슈들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충실하고도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목적 실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구민들은 인간의 성에 관한 진실과 결혼의 존엄성을 누려 마땅합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저는 사목자들께서 부부 생활의 도덕성의 일부 국면들에 관한 고해 신부를 위한 편람(Vademecum for Confessors Concerning Some Aspects of the Morality of Conjugal Life)을 읽고 정착시키며 아울러 결혼과 가족계획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 특별히 자연가족계획을 촉진할 수 있도록 교구마다 전담자를 임명하도록 촉구하는 바입니다.  피임은 심각한 사안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교회의 좋은 상담을 필요로 합니다.  대부분의 결혼한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의 지도를 환영하며 사제들은 결코 독신 서원 때문에 위축감을 느낀다든지, 교회의 가르침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교회 가르침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목적 경험과 사제의 상담은 피임과 같은 이슈에서 소중합니다.  바로 그로써 사제는 부부에게 새로운 전망을 가져다 주며 교회 전체를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성소에 대해 사제가 보여주는 충실함은 결혼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소를 더욱 충실히 살 수 있도록 강화시켜 줍니다.

20. 대주교로서 저는 결혼한 사랑과 가족계획에 관한 교회 가르침 전체를 제시함에 있어 저의 형제 사제들과 부제들과 평신도 협조자들을 뒷받침하는 직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저는 지역 교회의 사제들과 그 스텝들 ― 특별히 많은 헌신적인 교구 교리교사들 ― 모두에게 이러한 분야에서 이미 수행해 왔던 착한 사업들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혼한 사랑과 가족계획에 관한 과정을 더 많은 대교구민이 정규적 기반 위에서 활용하며 우리 사제들과 부제들이 이 이슈들의 신학적 사목적 국면에 대한 더욱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보증하자는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저는 결혼한 사랑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보다 잘 제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개발하고 대교구내 모든 결혼 예비 프로그램들의 일부분으로서 자연가족계획에 관한 적합한 가르침을 요구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화와 교리 사무국, 결혼과 가정생활 사무국, 가톨릭 학교 사무국, 청소년과 청년, 캠퍼스 사목부, 그리고 성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입문 전례 사무국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21. 두 가지 결론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피임에 관한 이슈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가톨릭의 행보에 있어 지엽적이 아니라 중심적이며 심각합니다.  만일 알면서도 방임적으로 연루한다면, 피임은 대죄입니다.  결혼의 본질 ― 즉, 인격을 결합시키는 성의 의미(사랑)와 생명을 주는 성의 의미(출산, procreation) ― 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결혼에서 개별적으로 들어가는 그 대가를 완전히 차치하고서라도, 피임은 사회 전반에 입히는 대량적인 손상 ― 우선, 사랑과 자녀 출산 사이에, 다음으로는 성(즉, 영구적인 충실성이 결여된 유희적 성)과 사랑 사이에 쐐기를 박음으로써 ― 을 초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리고 이것이 저의 두 번째 요점입니다 ― 언제나 인내와 동정과 굳건함으로써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회는 특이하게 도 청교도주의(puritanism)와 방종 사이를 오가는 듯합니다.  이 나라에서 바오로 6세의 회칙으로부터의 이단을 이끌어 왔던 두 세대 ― 저 자신과 제 교사들의 세대 ― 는 1950년대의 미국 가톨릭 교회의 엄격주의(rigorism)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항하는 세대들입니다.  그러한 엄격주의는 ― 상당 부분이 문화의 산물이며 교의(敎義)의 산물이 아닌데 ― 이미 와해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의주의의 습관은 여전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도달함에 있어, 우리의 임무란 인간의 성의 의미에 대해 세상이 하고 있는 거짓말과 그러한 거짓말이 은폐하고 있는 병리(病理)로 그들의 불신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22. 마지막으로, 우리는 수십 년에 오직 한 번만 다가오는 기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30년전 이 주간에 바오로 6세께서는 결혼한 사랑에 대한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로써, 성하께서는 교회 안에서 ― 심지어 오늘날에까지도 미국 가톨릭의 삶을 특징짓는 ― 투쟁을 시작하셨습니다.  회칙 인간생명에 대한 선택적 반대(dissent)는 곧, 교도권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와 교회 자체의 신뢰성에 대한 공격에 불을 지폈습니다.  1960년대에 교회 가르침을 저버린 사람들이 자신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이라도 전수하는 능력을 전복시켜 버렸음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그 결과, 이제 교회는 자신의 자녀들의 자녀 ― 자신의 도덕적 유산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의미와 공동체와 실제적인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도덕적 혼돈 속에서 자라난 청소년들과 젊은이들 ― 의 세계를 복음화해야 합니다.

비록 도전으로 다가오지만, 지금은 교회에게 엄청난 새로운 가능성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마음 안으로, 하느님 없이 텅빈 자리를 충만케 하는데 대한 대답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복음입니다.

따라서 저의 기도는 단순합니다.  주님께서 결혼한 사랑과 인간의 성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 안에 내재하는 엄청난 보화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기쁨,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정 안에서 그것을 살 수 이는 인내, 그리고 바오로 6세께서 그것을 새로이 강조하실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용기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말 옮김 : 김 신 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