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성체성사와 교회 친교
34. 세계주교대의원회의 1985년 임시 총회는 ‘친교의 교회론’의 개념이야말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사상임을 깨달았습니다.67) 교회는 지상 순례 동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 또 신자들 간의 친교를 유지하고 증진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말씀과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생명을 얻고 자라나며,”68) 성체성사 안에서 자기 본성을 드러냅니다. 친교라는 말이 이 지고한 성사에 주어진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외아드님과 일치됨으로써 우리가 성부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완성시켜 주므로 모든 성사의 정점으로 여겨집니다. 비잔틴 전통의 한 저명한 작가는 분별력 있는 신앙으로 이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성사와 달리, (친교의) 신비는 참으로 완벽해서 우리를 모든 선의 정점으로 이끌어 줍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의 바람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이르고, 하느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결합으로 우리와 일치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69)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마음 안에 성체성사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키우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친교’의 관행은 여기에서 생겨났습니다. 이 영적 친교는 다행히도 교회 안에 수세기 동안 자리잡아 왔으며, 영성 생활의 스승인 성인들이 권장해 온 것입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영성체를 하지 않고, 미사에 참례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영적 친교를 이루지 못합니다. 지극히 유익한 관행인 이 영적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70)
35. 그러나 성찬례 거행이 친교의 출발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례 거행은 이미 존재하는 친교를 전제로 하며, 친교를 공고히 하고 완전하게 합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써 우리를 성부 하느님과 또 우리 서로와 결합시켜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사들과 교회의 위계 질서를 통하여 친교를 낳는 눈에 보이는 차원으로 친교의 유대를 표현합니다. 교회 친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과 눈에 보이는 요소들 사이의 심오한 관계가 구원의 성사인 교회를 구성합니다.71) 이러한 맥락에서만 합법적인 성찬례 거행과 진정한 성찬례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찬례에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성찬례가 친교 안에서 거행되고, 특히 그러한 친교의 다양한 유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36. 본질상 언제나 증대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교는 은총 생활을 전제로 합니다. 은총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은 사람”(2베드 1,4)이 되고,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덕목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참된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인내하며,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교회의 품안에 머물러야 합니다.72) 여기에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갈라 5,6)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유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성찬례에 온전히 참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특별한 윤리적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의무에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1고린 11,28).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감동적인 말로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저 역시 어느 누구도 더럽고 부패한 양심을 가지고 이 거룩한 식탁에 다가오지 않기를 소리 높여 간청하고 부탁하고 애원합니다. 사실 그러한 행위는, 우리가 주님의 몸을 수천 번 받아 모신다 하더라도 결코 ‘친교’라고 부를 수 없으며, 오히려 ‘단죄’이고 ‘고문’이며 ‘징벌의 증대’입니다.”73)
이와 맥을 같이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중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74)라고 올바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바오로 사도의 엄중한 경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중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시려면 “먼저 자기 죄를 고백하여야 한다.”라고75) 확인한 규율이 교회 안에서 지금도 또 앞으로도 유효함을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37.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는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찬례는 십자가의 구원의 희생 제사를 보여 주고 성사적으로 영속시키기 때문에, 바오로 성인이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20)라고 한 호소에 개인적으로 응답할 필요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중죄의 부담을 느낀다면, 성찬의 희생 제사에 온전히 참여하고자 먼저 고해성사로써 참회하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의 은총 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명백히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양심을 성찰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대하고 명백하며 확고하게 도덕 규범에 위배되는 외적인 행위의 경우에, 교회는 공동체의 올바른 질서에 대한 사목적 관심과 성사에 대한 존중심에서 우러나는 직접적인 관련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법전」에서는 올바르고 도덕적인 마음의 준비가 명백히 결여된 상황과 관련하여, “분명한 중죄 중에 완강히 머물러 있는 자들”76)에게는 영성체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38. 교회의 친교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눈에 보이는 것이며, 공의회가 열거하는 일련의 ‘유대’를 통하여 표현됩니다.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교회의 모임에 완전히 합체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모든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됩니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됩니다.”77)
교회 안에서 이루는 친교의 지고한 성사적 표현인 성찬례는 외적인 친교의 유대 또한 손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행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체성사는 “말하자면 영성 생활의 정점이며 모든 성사의 목표”78)이므로 성사들, 특히 세례성사와 사제 서품을 통하여 실재하는 친교의 유대를 요구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거나 성찬의 신비에 대한 신앙의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성체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시며 진리를 증언하십니다(요한 14,6; 18,37 참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는 이중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39. 또한, 교회 친교의 본질과 교회 친교와 성체성사의 관련성을 감안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는 언제나 하나의 개별 공동체 안에서 봉헌되긴 해도 결코 그 공동체 단독의 거행이 아닙니다.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실제로 공동체는 구원의 완전한 선물을 받는 것이며, 지속적이고 가시적인 개별 형태 안에서도 그 공동체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의 참다운 현존과 모습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79) 따라서, 참된 성찬의 공동체는 마치 자급자족이라도 하듯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다른 모든 가톨릭 공동체와 꾸준히 화합하여야 합니다.
성찬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친교는 자기 주교와 교황과 이루는 친교입니다. 주교는 실제로 개별 교회 안에서 일치의 가시적 원리이며 토대입니다.80) 그러므로 교회 일치의 탁월한 성사가 주교와 참된 친교를 이루지 못한 채 거행되는 것은 큰 모순일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이 썼듯이 “주교 아래서 또는 주교가 그러한 임무를 위임한 사제 아래서 거행되는 성찬례는 확실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81) 또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주교들의 일치는 물론 신자 대중이 이루는 일치의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이기”82) 때문에,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려면 본질적으로 교황과 친교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례는 위대한 진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성찬 거행은 주교와의 일치뿐 아니라 교황과 주교단, 모든 사제와 전 그리스도교 백성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며 …… 모든 유효한 성찬 거행은 베드로와 온 교회와 이루는 보편적 친교를 표현하거나 또는 로마에서 갈라진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경우에서처럼 보편적 친교를 객관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83)
40. 성찬례는 친교를 낳고 친교를 강화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성찬 모임에서 드러난 분열이 그들이 거행하는 주님의 만찬과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형제적 친교의 정신을 되찾으려면 성찬례의 참된 실재를 묵상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1고린 11,17-34 참조). 실제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7)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촉구를 되풀이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몸이며 지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신비가 주님의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신비를 받는 것입니다.”84) 여기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식탁에서 우리의 평화와 일치의 신비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평화의 유대를 보존하지 않고 일치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신비가 아니라 자신을 거스르는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85)
41. 친교의 증진에서 성찬례가 지니는 특별한 효과는 주일 미사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주일의 성화에 관한 저의 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에서 주일 미사가 교회 생활과 개별 신자들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되게 하는 이러한 이유와 다른 여러 이유들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86) 「주님의 날」에서 저는 신자들은 심각한 장애가 없는 한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목자들도 모든 신자가 이 계명을 실질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다고 상기시켰습니다.87) 최근에 저는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며 교회가 걸어야 할 사목 여정을 설명하면서 주일 성찬례에 특별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친교를 이루는 데에 성찬례가 매우 효과적임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일 미사는 끊임없이 친교를 선포하고 교육하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다름 아닌 미사 참례를 통하여 주님의 날은 교회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날 교회는 일치의 성사인 자기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88)
42. 교회의 친교를 수호하고 증진하는 일은 신자 구성원 각자의 임무입니다. 모든 신자는 교회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야말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역임을 알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임무는 교회 목자들이 각자의 지위와 교회 직무에 따라 맡게 되는 특별한 책임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신자들이 성찬의 식탁에 자주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또한 성체를 줄 수 없는 객관적인 조건을 결정하기 위한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이 규범을 준수하도록 장려하면서 보여 주는 관심은 성찬례와 교회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실질적인 방법이 됩니다.
43. 성체성사를 교회 친교의 성사로 생각할 때, 그 중요성 때문에 간과해서는 안 될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성체성사와 교회 일치 운동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전세계의 수많은 신자들이 최근 몇십 년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열렬히 갈망해 온 것에 대하여 거룩하신 삼위일체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의 서두에서 이것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보았습니다.89) 그것은 우리들, 곧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과 다른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의 형제자매들을 교회 일치 운동의 길로 들어서도록 고무한 효과적인 은총이었습니다.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은 우리를 더욱 성체성사에 의지하게 만듭니다. 성체성사는 일치를 적절히 드러내고 그러한 일치의 탁월한 원천이므로 하느님 백성의 가장 뛰어난 일치의 성사입니다.90) 교회는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내려 주심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91) 모든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빛의 아버지 하느님께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교회는(야고 1,17 참조), 당신 신부의 이 청원을 당신의 구원의 희생 제사의 청원에 결합시키시는 머리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기도드리기에 하느님께서 교회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44. 성찬례가 주님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또 그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지는 친교를 통하여 이루는 교회 일치는, 신앙 고백과 성사들 그리고 교회 통치의 유대 안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친교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 유대가 완전하게 회복되기 전까지는 같은 성찬의 전례를 함께 거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거행은 유효한 수단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가 그러한 목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에 대한 의식을 약화시키고, 이런 저런 신앙의 진리들에 대하여 모호성을 끌어들이거나 심화시킴으로써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일치를 향한 여정은 진리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 교회법의 금지 규정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규정한 도덕 규범에 충실하여92) 불확실성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93)
그렇지만 저는 제가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에서 성찬을 함께 나눌 수 없음을 인정한 뒤에 덧붙여 한 말을 재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의 유일한 성찬례를 함께 거행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있습니다. 이 열망 자체가 이미 공동의 찬미 기도요 동일한 탄원 기도입니다. 우리는 갈수록 더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로 향합니다.”94)
45. 완전한 친교 없이 성찬례를 공동 거행하는 것은 결코 합법적이지 않지만,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교회나 교회 공동체들의 개별 신자들에게 특별한 상황에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에 그 목적은 개별 신자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중대한 영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이지, 교회 친교의 가시적인 유대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다른 교파 신자들 간의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접근법으로,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진 선의의 동방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역자에게 자진하여 영성체를 요청하고 또 올바로 준비되어 있다면 그들의 요구에 응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95) 이러한 접근법은 이어서 동방과 서방 양 교회법전을 통하여 비준을 받았습니다. 양 교회법전은 또한, 필요하면 수정을 하여,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동방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 신자들의 경우도 고려하고 있습니다.96)
46. 회칙「하나 되게 하소서」에서 저는 올바른 식별력으로 영혼의 구원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러한 규범들에 대한 저의 존중심을 나타냈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는 않지만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받기를 크게 갈망하고 자유로이 이를 요청하며, 이들 성사 안에서 가톨릭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을 표명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톨릭 성직자들이 특별한 경우에 성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 역시, 특수한 경우와 특별한 상황에서, 이 성사들을 유효하게 집전하는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이러한 성사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97)
특수하고 개별적인 경우들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면제도 받을 수 없는 조건들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합니다. 이들 성사에 관한 하나 이상의 신앙의 진리와, 또 그 가운데서도 이들 성사의 유효성을 위하여 직무 사제직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성사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일 적절한 자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그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도 유효한 성품성사가 없는 공동체에서는 성체를 받을 수 없습니다.98)
이와 관련하여 마련된 규범들을 충실히 지키는 것은99)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우리의 증언을 들을 권리가 있는 다른 그리스도교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 일치 증진이라는 대의 자체에 대한 사랑을 표명하는 것이며 보장하는 것입니다.
제5장 성찬례 거행의 품위
47. 공관 복음서에서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던 저녁에 이 위대한 성사를 얼마나 소박하고 ‘장엄하게’ 제정하셨는지를 알고 깊이 감동합니다. 여기에는 어느 면에서 이 사건의 전주가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곧 베다니아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밝힌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값비싼 향유 한 단지를 붓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 특히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궁핍을 생각할 때 이러한 행위는 지나친 ‘낭비’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언제나 특별한 관심을 보여야 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서도, –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마태 26,11; 마르 14,7; 요한 12,8 참조). – 닥쳐올 당신의 죽음과 장례를 예상하시고 향유를 붓는 이 행위를, 당신의 신비와 밀접하게 연관된 당신의 몸, 곧 당신의 죽음 뒤에도 계속해서 누리게 될 당신 몸의 영광을 예시하는 것으로 보십니다.
공관 복음서에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과월절 음식을 나누는 데 필요한 ‘큰 이층방’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라고 명령하시는 일과 성체성사 제정 이야기로 이어집니다(마르 14,15; 루가 22,12 참조). 과월절 음식을 나누는 것에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유다인의 관습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하고 있는(마태 26,30; 마르 14,26 참조) 이 이야기는 전승마다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고 장엄하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당신 몸을 내어 주시고 당신 피를 흘리시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이 모든 일을 초대 교회에 이미 확립된 “빵을 쪼개는” 행위에 비추어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 시대부터 성목요일 사건은, 구약성서 전통에서 형성되었고 그리스도교 예식들을 통하여 부활의 새로운 내용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려 하는 전례적 ‘감수성’의 가시적 흔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48. 베다니아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처럼, 교회는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바쳐 성찬례라는 탁월한 선물 앞에서 놀라움과 흠숭을 표현하였습니다. 교회는 ‘큰 이층방’을 준비할 임무를 맡은 최초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수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문화들과 만나면서 참으로 위대한 신비에 걸맞은 환경에서 성찬례를 거행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따라서, 또 유다교 예식의 유산에 의지하여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이신 신랑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바치신 희생 제사를 대대로 신자들에게 전달하시어 모든 신자의 양식이 되심으로써 당신 신부인 교회에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 주시는 행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이 달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잔치’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연상시킨다 할지라도,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과 ‘잔치’는 언제나 해골산에서 흘리신 피로 얼룩진 희생 제사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갖는 이러한 ‘친밀감’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결코 넘어간 적이 없습니다. 성찬의 잔치는 참으로 ‘거룩한’ 잔치입니다. 성찬례에서는 표징의 단순함이 하느님의 심오한 거룩함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거룩한 잔치여!(O sacrum convivium, in quo Christus sumitur!) 제대에서 쪼개져, 이 세상 길을 따라 걷는 나그네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빵은 천상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마태 8,8;루가 7,6) 한 복음서의 백인 대장의 겸손을 지니지 않는다면 이 빵을 먹을 수 없습니다.
49. 이렇게 강화된 신비 의식으로, 우리는 성찬의 신비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역사적으로 내적 헌신의 자세뿐만 아니라 기념되고 있는 사건의 위대함을 상기시키고 강조하기 위한 외적인 형식으로도 표현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교회 전통들을 마땅히 존중하면서, 성찬 전례를 규정하는 특별한 형식이 점차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풍부한 예술적 유산도 발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로 고취된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등은 직접 간접으로 성찬례를 위대한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건축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 건축은, 일단 역사적 상황이 허락되자, 성찬례가 처음 거행되던 그리스도인 가정들의 ‘집들’(domus)에서 시작하여 초세기의 장엄한 대성전들과 중세의 위풍당당한 주교좌 성당,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 하나 둘씩 세워진 크고 작은 경당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거듭하였습니다. 성당 안의 제대와 감실의 설계는 흔히 예술적 영감뿐만 아니라 신비에 대한 확실한 이해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영감을 받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들과, 미사의 전례서들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던 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을 생각해 보면, 교회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훌륭한 장인의 솜씨에서부터 성찬례 거행에 사용되는 성당 기물들과 전례복 등 진정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그 엄청난 양의 예술 작품들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성찬례는 교회와 교회의 정신을 형성함과 동시에, ‘문화’ 특히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50. 예식적 심미적 차원에서 이해한 성찬례의 신비를 흠숭하려는 노력에서, 서방 그리스도인들과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리스-비잔틴 전통과, 지리적으로 슬라브 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지역의 훌륭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들이 그리스도교 예술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하여 어찌 주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방의 종교 예술은 놀랄 만큼 강한 신비 의식을 간직해 왔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예술가들이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단순히 그들 자신의 재능의 표현으로만 보지 않고, 신앙에 대한 참된 봉사로 보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술가들은 단순한 기술적 재능을 뛰어넘어, 성령의 영감에 순순히 자신을 맡기는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인들의 훌륭한 건축과 모자이크는 모든 신자의 세습 자산입니다. 이 작품들은 우리가 염원하는 신앙과 예식의 완전한 일치에 대한 희망이며 보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치에 전제되고 요구되는 것은, 루블레프의 저 유명한 삼위일체에 대한 묘사에서처럼, 쪼개진 빵 속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이를테면 성삼위의 신성한 일치 속에 녹아들어 교회 자체에서 삼위일체의 ‘성화상’을 만들어 내는 지극히 성찬례적인 교회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례의 의미를 그 모든 요소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이러한 예술의 맥락에서, 종교 건물의 건축과 장식을 규제하는 규범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가 보여 주고, 제가 예술가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강조하였듯이,100) 교회는 항상 예술가들에게 창의력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예술은, 교회의 충만한 신앙 안에서 그리고 관할 권위가 적절히 정한 사목 지침에 따라 받아들인 신비를 충분히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이는 조형 미술과 종교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1. 고대 그리스도교 유산을 물려받은 지역에서 이루어진 종교 예술과 전례 분야의 발전은 젊은 그리스도교 대륙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건전하고 적합한 ‘토착화’의 필요성에 따라 지지한 접근법입니다. 저는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목 방문을 하면서, 성찬례 거행이 다양한 문화 형태와 양식, 감각으로 표현될 때 얼마나 큰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지를 보아 왔습니다. 성찬례는 변화하는 시간과 장소의 조건에 적응하면서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자양분을 제공하고, 그리스도교의 영감을 받는 문화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적응 작업은 표현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보화’는 너무도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라서 관할 교회 권위자들의 신중한 심사를 거치지 않고 도입된 실험이나 실습을 통하여 빈약해지거나 더렵혀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성찬 신비의 중심성은 그러한 심사가 사도좌와 긴밀한 결합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제가 아시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Ecclesia in Asia)에서 썼듯이 “이러한 협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전례는 온 교회의 유산이며 모든 사람이 고백한 유일한 신앙을 표현하고 거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보편 교회와 관련 없이 별도로 지역 교회들이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101)
52. 이 모든 것은 특히 성찬례 거행에 대한 사제들의 막중한 책임을 명확하게 해 줍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례를 거행하고, 거기에 직접 참여하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성찬례의 한 부분인 보편 교회를 위해서도 친교를 증언하고 친교에 봉사할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이 뒤따랐던 시기에 창의성과 적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던 수많은 남용이 있었음은 애석한 일입니다. ‘형식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특히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교회의 위대한 전례 전통과 교도권이 정한 ‘형식들’을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 흔히 전혀 부적절한 독단적 쇄신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찬례 거행의 전례 규범을 매우 충실히 준수할 것을 간절히 호소할 의무를 느낍니다. 전례 규범들은 성찬례의 진정한 교회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점이 규범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입니다. 전례는 전례의 집전자나 신비가 거행되는 공동체 그 어느 쪽의 사적 소유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 거행에서 중대한 잘못을 저질러 분파와 당파를 초래한 고린토 공동체를 질책합니다(1고린 11,17-34 참조). 우리 시대에도,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현존하는 하나이며 보편된 교회에 대한 성찰과 증언으로서 전례 규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전례 규범에 따라 충실히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들과 그 규범을 따르는 공동체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말없이 그러나 설득력 있게 증언합니다. 바로 전례 규범의 이 심오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저는 교황청 관할 부서들에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하여 법률적 성격의 규정들을 포함하여 더욱 구체적인 문서를 준비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맡겨진 신비를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성찬례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그 거룩함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6장 ‘성찬의 여인’이신 성모님의 학교에서
53. 우리가 교회와 성체성사의 깊고 풍요로운 관계를 재발견하고자 한다면,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모범이신 성모님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에서 저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하면서, 빛의 신비에 성체성사의 제정을 포함시켰습니다.102) 성모님께서는 이 지극히 거룩한 성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 거룩한 성사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복음서에는 이 주제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성목요일 밤의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이야기는 성모님께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첫 공동체에서 “마음을 모아”(사도 1,14) 기도하던 사도들 가운데 성모님께서 계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빵을 나누어 먹는 일에 전념한”(사도 2,42)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성찬례 거행에 분명히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성찬의 잔치에 참석하신 일 외에도, 우리는 성모님의 내적 자세에서 성모님과 성체성사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하여 ‘성체성사의 여인’이십니다. 성모님을 모범으로 삼고 의지하는 교회는 성모님께서 이 지극히 거룩한 신비와 맺고 계시는 관계에서도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54. 신앙의 신비여! 성체성사가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기를 요구할 정도로 우리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신앙의 신비라면,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갖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은 성모님 밖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행하신 것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또한 주저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고 하시며 그분께 순명하라시는 성모님의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 주신 어머니다운 관심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내 아들의 말을 믿어라. 그가 물을 술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빵과 포도주도 그의 몸과 피가 되게 하고, 이 신비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부활의 생생한 기억을 전해 줌으로써 ‘생명의 빵’이 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55. 어떤 의미에서 성모님께서는 순결한 당신의 태를 하느님 말씀의 강생을 위하여 바치심으로써 성체성사 제정 이전에 이미 성체성사의 신앙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면서 또한 강생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 때에 성모님께서는 몸과 피라는 육체적 실재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성모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모든 신자 안에 성사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당신 안에서 선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천사에게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말씀하신 것과 모든 신자가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실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도록 요청받으셨습니다(루가 1,30-35 참조). 동정 성모님의 신앙과 일치하여, 우리도 성체성사의 신비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성모님의 아드님이시기도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분의 완전한 인성과 신성으로 현존하심을 믿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성모님께서는 또한 강생의 신비로써 교회의 성체성사 신앙을 선취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되신 말씀을 잉태하고 계셨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현존하신 역사상 최초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태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나, 말하자면 성모님의 눈과 목소리를 통하여 당신의 빛을 비추심으로써 엘리사벳의 흠숭을 받으셨습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를 품안에 안고 들여다보시는 성모님의 기쁨에 넘치는 그 눈길이야말로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비할 데 없는 사랑의 모범이 아니겠습니까?
56. 성모님께서는 해골산에서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예수님 곁에 계시면서 성찬의 희생 제사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가셨을 때(루가 2,22) 늙은 시므온은 성모님께 이 아기가 장차 “반대의 표적”이 되고 예리한 칼이 성모님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루가 2,34-35 참조).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형의 비극은 이렇게 예고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십자가 아래 서 계신 고통의 성모님(Stabat Mater)도 예시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날마다 해골산을 준비하면서 일종의 ‘선취된 성찬례’를 경험하셨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일치함으로써 절정에 달하고 부활 뒤에 사도들이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거행한 성찬례에 참례함으로써 드러나게 될 갈망과 봉헌의 ‘영적 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다른 사도들의 입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가 22,19)라는 최후 만찬 때의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성모님의 느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시고 성사적 표징 아래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몸은 바로 성모님께서 당신의 태중에 잉태하셨던 그 몸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신의 심장과 하나 되어 고동친 그 심장을 당신의 태중에 다시 받아들이고, 십자가 아래서 겪으신 일을 다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57.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여라”(루가 22.19).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성취하신 모든 것이 해골산의 ‘기념제’ 안에 현존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어머니께 해 드린 모든 것도 현존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성모님께 맡기셨으며, 그 제자를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맡기셨습니다. 성모님께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참조).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은 이러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요한처럼, 우리의 어머니로 새롭게 우리에게 맡겨지신 분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학교에 들어가 그분을 우리의 동반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동화되려고 노력함을 의미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교회와 함께 계시며 교회의 어머니로서 현존하십니다. 교회와 성찬례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면, 성모님과 성찬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모님을 기념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서방과 동방 교회의 성찬 거행의 변함없는 일부가 되어 왔던 것입니다.
58.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 제사에 완전히 결합되며, 성모님의 정신을 교회의 정신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성찬례의 관점에서 성모의 노래(Magnificat)를 다시 읽을 때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성모의 노래처럼 무엇보다도 찬미와 감사입니다. 성모님께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라고 외치셨을 때 이미 태중에 예수님을 잉태하고 계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시고, 또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찬의 태도’입니다.
아울러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전에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에 따라 구원 역사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상기시키시고(루가 1,55 참조),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놀라운 일, 곧 구원의 강생을 선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모의 노래는 성체성사의 종말론적 긴장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빵과 포도주라는 ‘보잘것없는’ 성사적 표징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신”(루가 1,52 참조) 새로운 역사의 씨앗이 세상에 뿌리를 내립니다. 성모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성찬례 안에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계획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습니다. 성모의 노래(Manificat)는 성모님의 영성을 드러내며, 성체성사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데에 이보다 더 탁월한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삶이 성모님의 삶처럼 완전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가 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결 론
59. 동정 마리아께 나신 주님, 하례하나이다! 몇 해 전에 저는 사제 수품 50주년을 경축하였습니다. 교황 재위 25년이 되는 해의 성목요일인 오늘 저는 성체성사에 관한 이 회칙을 교회에 바치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크라쿠프의 바벨 주교좌 성당 안에 있는 성 레오나르도 지하 성당에서 제가 첫 미사를 봉헌한 1946년 11월 2일부터 날마다 반세기가 넘게 제 시선은 성체와 성작에 모아졌습니다. 성체와 성작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합쳐지고’ 해골산의 비극이 생생하게 재현됨으로써, 그 비극의 신비로운 ‘동시대성’이 드러납니다. 저는 날마다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며 그들의 눈을 새로운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새 희망으로 열어 주셨던 천상의 나그네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루가 24,13-35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에 함께하고 그 신앙에 힘이 되어 주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저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에 대한 제 자신의 신앙을 기쁘게 증언하고자 합니다. 동정 마리아께 나신 주님,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수난하시고 희생되셨나이다! 여기에 교회의 보화, 세상의 심장이 있으며,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는 성취에 대한 보증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위대하고 초월적인 신비이며, 우리 마음이 현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도록 요구하는 신비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감각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가 천주 성자 예수 흠숭하나이다(Adoro Te devote)의 노랫말처럼 보고 만지는 것으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아는 데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그리스도의 말씀에 뿌리박은 신앙만으로 충분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끝에 베드로가 한 신앙 고백을 제가 온 교회를 대신하여 그리고 여러분 모두를 대신하여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 드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60. 제삼천년기를 맞아 교회의 자녀인 우리는 새로운 열정으로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제가 교서 「새 천년기」에서 언급하였듯이 “문제는 ‘새로운 계획’의 창출이 아닙니다. 계획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과 살아 있는 성전(聖傳) 안에서 발견되는 계획으로,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습니다. 결국 그 계획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본받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삶을 영위하며, 천상 예루살렘에서 역사가 완성되기까지 그분과 함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103)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러한 새롭고 추진력 있는 계획의 실행은 성체성사로써 이루어집니다.
성덕에 대한 모든 노력, 교회 사명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 모든 사목 계획에 필요한 힘은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이끌어 내야 하며, 또한 그 정점인 신비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의 희생 제사, 그분의 부활, 성령의 은사, 성부께 대한 흠숭과 순명과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경시한다면 우리의 결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61. 희생 제사이고 현존이며 잔치인 성체성사의 신비는 축소나 남용을 불허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성찬례 거행 때에 그리고 영성체 후나 미사와는 별도의 기도와 성체 조배 시간에 예수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 안에서 온전히 체험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간들은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는 시간들이며, 교회의 참모습, 곧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 하느님의 백성이고 성전이며 가족인 교회, 성령에게서 생명을 얻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인 교회, 구원의 보편적 성사, 교계적으로 구성된 친교인 교회의 모습이 명확해지는 때입니다.
제삼천년기의 이 첫 몇 해 동안 교회가 걸어 온 길은 새로운 교회 일치 노력의 길입니다. 대희년을 정점으로 한 제이천년기의 마지막 몇십 년 동안 우리는 교회 일치의 길에 박차를 가하였고, 세례 받은 모든 신자는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ut unum sint, 요한 17,11)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께 응답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이 길은 멀고,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장애물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언자 엘리야가 들었던 그 말씀을 마치 우리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듣게 됩니다.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1열왕 19,7). 주님께서 우리 앞에 놓아 주신 성체성사의 보화는 공동의 세례를 통하여 결합된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온전히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하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이 보화를 함부로 쓰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 보화가 신앙과 사도직의 계승을 통한 일치의 성사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요구를 존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체성사에 합당한 탁월함을 부여하고, 성체성사의 모든 차원과 요구를 축소하지 않도록 조심함으로써, 우리가 이 선물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초세기부터 이 ‘보화’를 수호하려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속적인 전통에 따라 이 보화의 위대함을 인식하도록 촉구받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고무된 교회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관한 교회의 신앙과 가르침을 온전히 미래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지나칠 위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사 안에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가 요약되어 있기”104) 때문입니다.
6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성체성사 신심의 위대한 해석자들인 성인들의 학교에 우리도 자리를 잡읍시다. 그들 안에서 성체성사 신학은 생생한 실재의 빛을 얻습니다. 이 빛은 ‘전염’되며, 이를테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특히, 그 누구보다도 성체성사의 신비가 빛의 신비로 드러나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귀 기울이도록 합시다.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 있는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게 됩니다. 성모님 안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새로워진 세상을 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하늘에 들어가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이 지상에서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며, 어떤 면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선취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Veni, Domine Iesu! 묵시 22,20)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의 소박한 표징 안에서, 우리 여정의 힘과 양식이 되시어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신비 앞에서 이성은 한계를 느끼지만, 성령의 은총으로 빛을 받은 마음은 요청된 응답을 명확히 이해하고, 무한한 사랑과 흠숭에 빠져듭니다.
탁월한 신학자이며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노래한 정열적인 시인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희망을 가지고, 기쁨과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 마음의 목적지를 바라봅시다.
착하신 목자, 참된 빵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오소서, 천상의 빵이시며 착한 목자,
저희에게 자비의 표지를 보여 주소서.
저희를 길러 주시고 지켜 주시어,
불멸의 나라에서 당신의 빛나는 영광을 보게 하소서.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현세의 양식이시며 후세의 안식이신 주님,
오셔서 저희가 주님의 초대된 손님,
주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과 사는 성인들과 함께
영복을 누리는 벗이 되게 하소서.
교황 재위 제25년
묵주기도의 해, 2003년 4월 1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67. 최종 보고서, II. C. 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985년 12월 10일자, 7면 참조.
68. 교회 헌장, 26항,
69. 니콜라스 카바실라스, 「그리스도 안에서 삶」(Life in Christ), IV, 10: 「그리스도교 원전」 355, 270.
70. 「완덕의 길」(Camino de Perfeccn), 35장.
71. 교황청 신앙교리성, 친교로서 이해되는 교회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친교의 개념」(Communionis Notio), 1992.5.28., 4항: 「사도좌 관보」 85(1993년), 839-840면 참조.
72. 교회 헌장, 14항 참조.
73. 「이사야서 강론」(Homiliae in Isaiam), 6,3: 「그리스 교부 총서」 56, 139.
74. 1385항; 교회법 제916조; 동방 교회법 제711조.
75.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 내사원과 로마 총대주교좌 대성전 회원들에게 한 연설, 1981.1.30.: 「사도좌 관보」 73(1981년), 203면; 트리엔트 공의회, 제13회기,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제7장과 canon 11: 「신앙 규정 편람」 1647, 1661.
76. 교회법 제915조; 동방 교회법 제712조.
77. 교회 헌장, 14항.
78.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I, q. 73, a. 3c.
79. 「친교의 개념」, 11항: 「사도좌 관보」 85(1993년), 844면.
80. 교회 헌장, 23항 참조.
81.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서간」(Ad Smyrnaeos), 8: 「그리스 교부 총서」 5, 713.
82. 교회 헌장, 23항.
83. 「친교의 개념」, 14항: 「사도좌 관보」 85(1993년), 847면.
84. 「설교집」(Sermo), 272: 「라틴 교부 총서」 38, 1247.
85. 「설교집」(Sermo), 272: 「라틴 교부 총서」 38, 1248.
86. 31-51항 참조; 「사도좌 관보」 90(1998년), 731-746면 참조.
87. 48-49항 참조; 「사도좌 관보」 90(1998년), 744면 참조.
88. 36항: 「사도좌 관보」 93(2001년), 291-291면 참조.
89. 일치 교령, 1항 참조.
90. 교회 헌장, 11항 참조.
91.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는 우리 모두 한 분이신 성령의 친교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자”(성 바실 전례의 성찬 전례문).
92. “교회의 일치를 해치거나, 오류에 대한 공식적 동의, 신앙의 일탈, 악 표양, 무차별주의의 위험을 내포하는 성사 교류는 하느님의 법으로 금지된다”(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 「동방 교회들」
93. 교회법 제908조; 동방 교회법 제702조;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교회 일치 운동의 원칙과 규범의 적용에 관한 지침서(Ecumenical Directory), 1993.3.25., 122-125.129-131항; 「사도좌 관보」 85(1993년), 1086-1089면; 교황청 신앙교리성, Ad Exsequendam, 2001.5.18.: 「사도좌 관보」, 93(2001년), 786면 참조.
94. 45항: 「사도좌 관보」 87(1995년), 948면.
95. 동방 교회 교령, 27항.
96. 교회법 제844조 3항과 4항; 동방 교회법 제671조 3항과 4항 참조.
97. 46항: 「사도좌 관보」 87(1995년), 948면.
98. 일치 교령, 22항 참조.
99. 교회법 제844조; 동방 교회법 제671조.
100.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서한, 1999.4.4: 「사도좌 관보」 91(1999년), 1155-1172면 참조.
101. 22항: 「사도좌 관보」 92(2000년), 485면.
102. 21항: 「사도좌 관보」 95(2003년), 20면 참조.
103. 29항: 「사도좌 관보」 93(2001년), 285면.
104.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I, q. 83, a. 4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