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ANNIS PAULI PP. II
SUMMI PONTIFICIS
LITTERAE ENCYCLICAE
ECCLESIA DE EUCHARISTIA
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주교와 사제, 부제, 남녀 봉헌 생활자와
모든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차 례
서론
제1장 신앙의 신비
제2장 교회를 세우는 성체성사
제3장 성체성사와 교회의 사도 전래성
제4장 성체성사와 교회 친교
제5장 성찬례 거행의 품위
제6장 ‘성찬의 여인’이신 성모님의 학교에서
결론
서 론
1.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vivit). 이러한 진리는 일상적인 신앙 경험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비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약속의 항구한 성취를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쁘게 체험하지만, 특히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이러한 현존을 매우 강렬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새 계약의 백성인 교회가 천상 본향을 향한 순례 여정을 시작한 오순절 이후, 이 거룩한 성사는 교회가 지내 온 세월을 끊임없이 기념하며, 그 시간들을 확고한 희망으로 채워 주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1)이라고 올바르게 선포하였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생명을 얻고 또 생명을 주는 당신 살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2) 따라서 교회의 눈길은 언제나 제대의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향하며, 그 안에서 그분의 끝없는 사랑이 온전히 드러남을 발견합니다.
2. 2000년 대희년 중에 저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성찬례를 거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친히 처음으로 성찬례를 거행하신 곳입니다. 다락방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가 제정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들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마태 26,26; 루가 22,19; 1고린 11,24 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마르 14,24; 루가 22,20; 1고린 11,25 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2000년 전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되풀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주 예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였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였을까요?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씀들은 성목요일 저녁에서 부활 아침에 이르는 성삼일 끝에 가서야 온전히 밝혀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삼일은 파스카 신비를 품고 있으며, 또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3. 교회는 파스카 신비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파스카 신비의 뛰어난 성사인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은 성찬례를 뜻합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첫 모습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은 파스카 성삼일로, 곧 성목요일 저녁의 사건들, 최후의 만찬과 그 이후의 일들로 되돌아갑니다. 성체성사의 제정은 게쎄마니 동산의 고뇌를 시작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성사적으로 앞당깁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락방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로 내려가시어 올리브 동산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지금도 그 동산에는 매우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 나무들은 그날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기도하시며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을 때”(루가 22,44) 그 나무 그늘 밑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전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에 구원의 음료로 주신 그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피 흘림은 해골산에서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됨으로써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셔서 ……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9,11-12).
4. 우리 구원의 시간.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당신의 ‘시간’ 앞에서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 12,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해 주기를 바라셨으나, 외로움과 버림받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0-41). 오직 요한만이 성모님과 충실한 여인들 곁에서 십자가 아래 남아 있었습니다. 게쎄마니에서 겪으신 고통은 성금요일의 십자가 고통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시간, 세상 구원의 시간.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성찬례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의 ‘시간’, 곧 그분의 십자가와 현양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듯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함께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제는 마음으로 그곳, 그 시간으로 되돌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신앙 고백은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라는 관상과 선포의 말로 울려 퍼집니다. 교회는 성금요일 오후에 모든 이에게 이러한 초대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는 부활 시기 동안 이렇게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도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도다. 알렐루야.”
5.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이러한 말들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교회 자신의 신비, 곧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나왔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으로써 태어나 세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지만, 교회 형성의 결정적인 계기는 분명히 다락방의 성체성사 제정이었습니다. 교회의 토대와 근원은 파스카 성삼일 전체이지만, 이것이 이른바 영원히 통합되고 예시되고 집약되는 것은 성체성사 안에서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성체성사를 주심으로써 교회에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현존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성삼일과 세기의 흐름 사이에서 신비로운 ‘시간의 단일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할 때면 우리는 깊은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파스카 사건과 수세기 동안 그 신비를 현존시켜 온 성체성사에는 구원의 은총을 받은 역사상의 모든 이를 끌어안는 참으로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하고자 모인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놀라움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성찬례를 거행하는 집전자는 더욱 이러한 놀라움에 가득 찹니다. 성품성사에서 받은 권위로 축성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다락방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으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사제이지만, 그는 다락방에서 이 말씀을 하신 분의 뜻에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어느 시대이든 교회 안에서 당신의 사제직에 교역자로 참여하는 모든 사제가 이 말을 되풀이하기를 바라십니다.
6. 저는 제가 대희년의 유산으로 교회에 남긴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와 성모님께 관한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에 이어 이 회칙을 발표함으로써 성체성사의 이러한 ‘경이로움’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제삼천년기가 시작될 때 제가 교회에 새 복음화의 열정으로 역사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도록 권고하면서 교회 앞에 제시한 ‘계획’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께서 여러 현존 양식으로, 특히 당신의 몸과 피의 살아 있는 성사로써 당신을 드러내실 때마다 그분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그분께 양식을 얻고 그분으로 빛을 얻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이며 동시에 “빛의 신비”3)입니다.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어느 면에서 신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겪은 일을 다시 체험합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루가 24,31).
7.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직무를 시작한 이래 저는 성체성사와 사제직이 세워진 날인 성목요일에 해마다 세계의 모든 사제에게 서한을 보내 왔습니다. 교황 재위 25년째인 올해 저는 온 교회가 “은총이며 신비”4)인 성체성사와 사제직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는 한 방법으로 이러한 성체성사를 더욱 완전하게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함으로써 저는 저의 교황 재위 25주년을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보호 아래에서 지내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 성목요일에 ‘성체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 멈추어 서서, 교회를 향하여 성체성사의 중심성을 새롭고 힘차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그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이 ‘살아 있는 빵’에서 자양분을 얻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어찌 재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8. 성체성사를 생각할 때, 또 사제와 주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지낸 삶을 되돌아볼 때, 저는 자연스레 제가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었던 여러 기회와 장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처음으로 본당 사목을 맡은 니에고비치의 성당,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노 대성당, 바벨 주교좌 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을 비롯한 로마와 세계 곳곳의 여러 대성전과 성당들이 기억납니다. 산길, 호숫가, 바닷가 등에 지어진 경당에서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운동장과 도시의 광장에 세운 제대에서도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소에서 거행한 성찬례를 통하여 저는 성체성사의 보편적인 특성, 다시 말해 우주적인 특성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주적입니다! 성찬례는 시골 성당의 초라한 제대에서 거행될 때에도 어떤 면에서는 늘 세상의 제대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결합시킵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끌어안고 그 속에 충만히 스며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단 한 번의 숭고한 찬양 행위로, 모든 피조물을 무에서 창조하신 분께 되돌려 드리고자 사람이 되셨습니다.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성혈로 영원한 지성소에 들어가셨으며, 그리하여 모든 구원받은 피조물을 창조주이신 아버지께 되돌려 드리십니다. 그분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의 사제직을 통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성취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손에서 비롯된 세상이 이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아 하느님께 되돌려집니다.
9. 신자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현존이며 그 영적 양식인 성체성사는 역사를 통한 여정에서 교회가 지닐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재산입니다. 이는 교회가 언제나 성체성사의 신비에 보여 온 생생한 관심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러한 관심은 또한 공의회 문헌과 교황들의 문헌에서 권위 있게 표현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반포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과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에 관한 교령에서 설명하는 교리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교령들은 수세기 동안 신학과 교리교육을 이끌어 왔으며, 지금도 성체성사에 대한 신앙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지속적인 쇄신과 성장을 위한 교의적 준거가 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현대에 발표된 회칙들 가운데에 세 가지를 든다면, 레오 13세의 회칙 「놀라운 사랑」(Mirae Caritatis, 1902.5.28.)5)과 비오 12세의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1947.11.20.)6), 그리고 바오로 6세의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9.3.)7)가 있습니다. 10. 성체성사의 신비를 선포하는 교도권의 노력에 발맞추어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내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공의회가 시작한 전례 쇄신은 신자들이 제대의 거룩한 희생 제사에 더욱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분명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많은 곳에서 성체 조배는 일상의 중요한 신심 실천이 되고 또 성덕의 무한한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하는 성체 거동에 신자들이 경건하게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은총이며, 이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해마다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 성체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드러내는 다른 긍정적인 징표들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제1장 신앙의 신비 11. “주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1고린 11,23) 당신의 몸과 피로써 성찬의 희생 제사를 제정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성체성사가 세워진 그 극적인 배경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성찬례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사건들을 단순히 상기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성사적으로 재현합니다. 성찬례는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십자가의 희생 제사입니다.9) 이러한 진리는 라틴 예법에서 “신앙의 신비여!”라는 사제의 선포에 대하여, 신자들이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으로 잘 표현됩니다. 12. 성찬의 희생 제사가 지닌 이러한 보편적 사랑의 측면은 구세주 자신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그저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다.”(루가 22,19-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시는 것이 당신의 몸과 피라고만 단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희생 제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셨으며,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곧 바쳐지게 될 당신의 희생 제사를 성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영속되는 제사적 기념이며, 동시에 또 이와 분리할 수 없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친교의 잔치입니다.”13) 13. 성찬례는 해골산의 희생 제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희생 제사이며, 단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영적 양식으로 내어 주시는 것이라는 식의 일반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요한 10,17-18 참조) 사랑하시고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선물은 무엇보다도 성부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한 선물(마태 26,28; 마르 14,24; 루가 22,20; 요한 10,15 참조)이지만, 무엇보다도 성부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그 희생 제사를 아버지께서는 받아 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필립 2,8) 당신 아드님의 전적인 자기 증여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의 자부적(慈父的) 선물을 주셨으니, 이것이 부활로 불사불멸하는 새 생명의 보장입니다.”18) 14. 그리스도의 파스카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축성에 이어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하는 신자들의 응답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는 구세주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뿐만 아니라 그분의 희생의 정점인 부활의 신비도 드러냅니다. 이것은 살아 계시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 안에서 “생명의 빵”(요한 6,35. 48), “살아 있는 빵”(요한 6,51)이 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새로 입교한 신자들에게 성체성사는 부활 사건을 그들의 삶에 적용시킨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그리스도이시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날마다 새롭게 부활하십니다.”20)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또한 거룩한 신비에 동참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생명을 얻으셨음을 고백하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21) 15. 부활로써 그 정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미사에서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실체 변화라는 매우 특별한 현존과 관계됩니다. 바오로 6세의 말씀에 따르면, “성체 안에서의 현존이 ‘실제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은 마치 다른 현존 방식이 ‘실제적’이 아닌 것처럼 배타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심 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며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인 현존 방식입니다.”22)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영구적이고 유효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은 빵의 전 실체를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전 실체를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거룩한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적절하게 불러 왔습니다.”23) 참으로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거룩한 성사에 관한 교회 교부들의 교리에서 흔히 설명되듯이,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이며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단지 자연적인 요소로만 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그것들은 당신의 몸과 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다르게 받아들이더라도, 신앙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확신시켜 줍니다.”24) 16. 희생 제사의 구원의 힘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에서 완전하게 실현됩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는 본질적으로 영성체로 이루어지는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내밀한 결합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바로 그분을 받아 모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내어 주신 몸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마태 26,28) 피를 받아 모십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생명의 결합에 비유하신 이러한 결합이 참으로 실현되었다고 직접 우리를 안심시켜 주십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 주시는 진정한 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하자, 당신 말씀의 객관적 진리를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 이것은 비유적인 양식이 아닙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55). 17.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에프렘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당신의 살아 있는 몸이라 부르셨고, 그 빵을 당신 자신과 당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 믿음으로 그 빵을 먹는 사람은 불과 성령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빵을 받아 먹으십시오. 그 빵으로 성령을 먹으십시오. 이것은 진실로 내 몸이며, 내 몸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7) 교회는 성찬례의 성령 청원 기도로 다른 모든 예물의 원천인 이 거룩한 예물을 간청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거룩한 전례」(Divine Liturgy)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 간청하고 애원하고 청하오니, 저희와 이 예물 위에 주님의 성령을 보내 주십시오. …… 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영혼이 깨끗해지고, 죄를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나누어 받을 것입니다.”28) 그리고, 「로마 미사 전례서」(Missale Romanum)에서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게 하소서.”29)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과 피를 주심으로써 당신 성령을 우리 안에 더욱 가득 부어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미 성령을 충만히 받았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인호’를 받았습니다. 18. 빵의 축성에 이어서 하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라는 신자들의 응답 속에는 성찬 예식의 특징인 주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1고린 11,26 참조)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충만한 기쁨을(요한 15,11 참조) 미리 맛보려는 목표를 지향하는 노력입니다. 성찬례는 어느 면에서는 천국의 선취이며, “후세 영광의 보증”30)입니다. 성찬례의 모든 것은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31) 확신을 갖고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나중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인간이 후세에 누리게 될 충만함의 첫 열매입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 종말에 우리의 육체가 부활할 것이라는 보증을 얻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 후세의 부활에 대한 이러한 보증은 우리의 양식으로 주어진 사람의 아들의 살이 부활한 다음에는 영광스러운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성찬례로써 우리는 말하자면 부활의 ‘신비’를 맛봅니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성찬의 빵을 “죽음을 물리치는 영생의 약”32)이라고 적절히 정의한 바 있습니다. 19. 성찬례로 고조되는 종말론적 긴장은 우리가 천상 교회와 이루는 친교를 표현하고 강화합니다. 동방 교회의 감사기도와 라틴 교회의 감사기도가 우리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동정 성모 마리아와 천사들과 거룩한 사도들과 영광스러운 순교자들과 모든 성인에게 공경을 표현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성찬례의 이러한 측면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천상 ‘전례’에 결합되고,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이십니다.”(묵시 7,10) 하고 외치는 수많은 군중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례는 사실 지상에 나타난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입니다. 성찬례는 우리의 암울한 역사를 꿰뚫고 우리의 여정을 비추어 주는 천상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한 줄기 빛입니다. 20. 성찬례에 내재한 종말론적 긴장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성은 성찬례가 역사를 통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에 힘을 실어 주고, 우리 앞에 놓인 일과에 전념하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 준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에 대한 기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현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 의식33)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킵니다. 저는 새 천년기를 시작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시민으로서 완수하여야 할 임무에 어느 때보다 충실하여야 할 의무를 느끼도록 이러한 사실을 강력히 재천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빛으로 더욱 인간다운 세상, 하느님의 계획에 온전히 일치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이바지할 임무가 있습니다. 제2장 교회를 세우는 성체성사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찬례 거행이 교회의 성장 과정의 중심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공의회는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 곧 교회는 하느님의 힘으로 세상에서 볼 수 있게 자라고 있다.”35)라고 언급한 다음, ‘교회는 어떻게 성장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듯이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 희생되신’(1고린 5,7)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며, 동시에 성찬의 빵을 나누는 성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1고린 10,7 참조)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된다.”36) 22.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이루는 결합은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특히 성사적 친교에 완전히 참여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강화됩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를 받아 모신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받아들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나의 벗이다.”(요한 15,14)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와 친교를 맺으십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삽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성찬례의 친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가 서로 안에 ‘머물러 있음’을 탁월하게 드러냅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요한 15,4). 23. 성찬례의 친교는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일치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바오로 성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찬례 참여가 지니는 이러한 일치의 힘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 이 말씀에 대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설명은 심오하고 예리합니다. “빵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면 이 빵을 받아 먹는 사람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여러 개의 몸이 아니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빵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존재하는 수많은 밀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완전한 하나이고, 그 각각의 밀알이 완벽한 전체를 이루고 있어 서로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와 하나로 일치되어 있습니다.”42)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인 그리스도와 이루는 결합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몸인 교회의 일치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받아 이루어진 그리스도와 일치를 강화시켜 줍니다(1고린 12,13; 27 참조). 24. 영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형제적 일치에 대한 염원이 충만히 실현되는 동시에, 같은 성찬의 식탁에 동참함으로써 느끼는 형제애가 더욱 고양되어, 단순히 음식을 나눌 때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친교를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그리스도 안의 성사,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44)가 됩니다. 25. 미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체 공경은 교회 생활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합니다. 이러한 공경은 성찬의 희생 제사 거행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남겨둔 거룩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남아 있는 동안 그 현존은 계속됩니다.45) ─ 희생 제사의 거행에서 비롯되며, 성사적이며 영적인 친교를 지향합니다.46) 목자들은 성체 조배와 특히 성체 현시, 그리고 성찬의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계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흠숭 기도를 각자의 개인적 증거를 통해서도 장려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47) 제3장 성체성사와 교회의 사도 전래성 26. 앞서 말했듯이, 성체성사는 교회를 이루고 교회는 성체성사를 이루는 만큼, 교회와 성체성사의 관계는 너무도 심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는 신앙 고백을 성체성사의 신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도 하나이고 보편되며, 거룩합니다. 실제로 성체성사는 가장 거룩한 성사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가 지닌 사도 전래성을 고찰하여야 합니다. 27.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가 얼마나 사도적인지를 설명하면서 이 말의 세 가지 의미를 보여 줍니다.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선교에 파견하신 증인들인 ‘사도들의 기초’(에페 2,20) 위에 세워졌습니다.”51) 성체성사도 사도들에게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께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셨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내려 왔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사도들이 실천한 바를 이어 받아, 예부터 줄곧 성찬례를 거행해 왔습니다. 28. 마지막으로,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도들의 사목직을 이어받아 그들을 계승한 사람들, 곧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회의 최고 목자와 하나 되어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이 명령을 수행하는’ 주교단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지도를 받는다.”53)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의 사목직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물론 성품성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유효한 주교품을 처음부터 중단 없이 이어받는 것을 뜻합니다.54) 이러한 계승은 적절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29.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직무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한다.”58)는 표현은 교황의 가르침 속에 이미 굳게 뿌리박혀 있었습니다.59) 제가 다른 여러 기회에 지적하였듯이, 그리스도를 대신한다(in persona Christi)는 문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봉헌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대신하다’라는 말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희생 제사의 창시자이시며 근본 주체이신 영원하신 대사제와 성사를 통하여 특별하게 일치한다는 의미입니다.”60) 성품성사를 받은 사제들의 직무는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구원 경륜 안에서, 그들이 거행하는 성찬례가 회중의 힘을 근본적으로 초월하는 은총이며, 모든 경우에 성찬 축성문을 십자가의 희생 제사와 최후 만찬에 유효하게 연결시키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백히 해 줍니다. 30. 사제 직무와 성찬례의 관계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성찬의 희생 제사에 관한 가르침은 최근 몇십 년 동안 교회 일치 영역에서 많은 열매를 맺은 대화 주제였습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을 복되신 삼위일체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젠가 신앙을 충만히 나눌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서양에서 생겨나 현재는 가톨릭 교회와 갈라져 있는 교회 공동체들에 대해서는 공의회의 견해가 지금도 매우 적절합니다. “우리와 갈라진 교회 공동체들은, 비록 세례에서 흘러 나오는 완전한 일치를 우리와 함께 이루지 못하고 또 특히 성품성사의 결여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지 못하였다고 우리는 믿지만, 그래도 그들은 거룩한 만찬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이 만찬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삶을 상징한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62) 31.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라면, 그것은 또한 사제 직무의 중심이며 정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만한 감사의 마음으로, 저는 성찬례가 “성체성사 제정 때에 유효하게 생겨난 성품성사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존재 이유”63)라고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32. 이 모든 것은 충분한 구성원과 다양한 신자들이 본당을 이루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라 할지라도, 그 공동체를 이끌 사제가 없다면 그 공동체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정상적일지를 보여 줍니다. 본당은 무엇보다도 성찬의 희생 제사의 거행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확인하는 세례 받은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사제가 있어야 합니다. 사제만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례를 거행할 자격이 있습니다. 공동체에 사제가 없을 때는, 어떻게든 그러한 상황을 개선하여 공동체가 계속해서 주일을 거행하고, 또 형제자매들을 기도로 이끄는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세례성사의 은총을 바탕으로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결책은 공동체가 사제를 기다리는 동안의 잠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33. 사제가 부족하여 비수품자들에게 본당 사목의 몫이 맡겨졌을 때, 비수품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찬례 거행에 그 기초와 중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세워질 수 없다.”66)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동체 안에 성찬례에 대한 참된 ‘갈망’이 살아 있게 함으로써, 미사 거행의 기회를 놓치는 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관하여 특정 문서를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문헌 전반에 걸쳐, 특히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에서 성체성사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저도 베드로좌에서 사도직을 시작한 첫 해에, 교황 교서 「주님의 만찬」(Dominicae Cenae, 1980.2.24.)8)을 통하여, 성체성사의 신비가 지닌 몇 가지 측면과 그 신비가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다루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때 드렸던 말씀을, 더욱 벅차고 감사한 마음으로, 시편 저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시 한 번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 115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빛과 나란히 그림자도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성체 조배 관습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 교회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 놀라운 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리와 건전한 신앙에 혼란이 생기는 폐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극단적으로 축소하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찬례가 지닌 희생 제사의 의미를 없애 버리고 단순히 형제애의 잔치로 거행하기도 합니다. 또 사도직 계승에 바탕을 둔 직무 사제직의 필요성이 때때로 흐려지고, 성찬례의 성사적 본질이 일종의 선포 형식이라는 단순 효과로 축소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여기 저기에서, 비록 의도는 좋지만 교회의 신앙 표현 원리에 어긋나는 성찬 관습에 빠져 드는 초교파적 행위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상황에 깊은 슬픔을 감출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너무도 큰 은총이어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회칙이, 용인할 수 없는 교리와 관습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성체성사가 그 찬란한 신비로 끊임없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다른 여러 선물 가운데 매우 값진 하나의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분 자신, 곧 거룩한 인성 안에 계신 그분 자신의 선물이며, 당신의 구원 활동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체성사는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 곧 모든 인간을 위하여 그분이 행하고 겪으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0)
교회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인 성찬례를 거행할 때, 이 구원의 중심 사건은 실제로 현존하게 되며,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집니다.”11) 이 희생 제사는 인류의 구원에 매우 결정적인 것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치 그 자리에 함께했던 것처럼 그 희생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남겨 주신 다음에야 희생 제사를 바치시고 성부께 되돌아가셨습니다. 이로써 각 신자는 그 희생 제사에 참여하여 그 열매를 끊임없이 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세 대대 이 신앙으로 살아왔습니다. 교회의 교도권은 그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선물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변함없이 이 신앙을 재확인해 왔습니다.1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다시 한 번 이러한 진리를 상기시키며, 위대한 신비, 자비의 신비인 이 신비 앞에서 여러분과 함께 조배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써 우리에게 “극진한”(요한 13,1 참조)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교회는 구원의 희생 제사에서 자신의 생명을 끊임없이 길어 옵니다. 교회는 신앙으로 충만한 기억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접촉을 통해서 이 희생 제사에 다가갑니다. 이 희생 제사는 축성된 집전자의 손으로 그 제사를 드리는 모든 공동체 안에 성사적으로 영속하면서 언제나 새롭게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대의 인류를 위하여 단 한 번에 이루신 화해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 제사와 성찬의 희생 제사는 동일한 제사입니다.”14)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은 이 희생양을, 내일은 또 다른 희생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희생양을 바칩니다. 그러므로 희생 제사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 지금도 우리는 단 한 번 바쳐졌으며 결코 없어지지 않을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15)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며, 그 희생 제사에 다른 것을 덧붙이지도, 그것을 늘리지도 않습니다.16) 되풀이되는 것은 그 제사를 기념하는 의식, 곧 “기념의 표명”(memorialis demonstratio)17)이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하나이며 결정적인 구원의 희생 제사가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현존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찬 신비의 희생 제사적 성격을 십자가와 별개인 독립된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해골산의 희생 제사를 단지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당신의 희생 제사를 맡기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결합되어 자신을 봉헌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의 영적 희생 제사를 또한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와 관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신적 희생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기 자신을 그 제물과 함께 봉헌합니다.”19)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Adoro te devote, latens Deitas). 우리는 천사 박사와 함께 계속해서 노래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신비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그 한계를 절감합니다.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서 신학이 이러한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해 온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상한 노력은, 특히 교도권의 “확고한 진리의 은사”와 특히 성인들이 도달하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 더 깊은 인식”25)을 통해 파악되는 교회의 ‘살아 있는 신앙’에 비판적 사고를 결합시킬 수 있을 때에 더욱 유익하고 통찰력 있는 것이 됩니다. 바오로 6세께서 정해 놓으신 경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를 이해하려는 모든 신학적 설명이 가톨릭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려면, 빵과 포도주는 축성된 이후에는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더 이상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주 예수님의 숭고한 몸과 피가 그 순간부터 실제로 우리 앞에 성사의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계시다는 것을 확고하게 단언하여야 합니다.”26)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시대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정의와 연대라는 굳건한 전제 위에 민족 간의 관계를 세우며, 임신[受精]에서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명을 수호하여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거의 잃어버린 듯한, ‘세계화된’ 세상의 온갖 모순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할 곳은 바로 이러한 세상입니다. 또한 그러한 까닭에 주님께서는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자 하셨으며, 음식과 희생 제사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인류가 당신 사랑으로 새로워질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최후 만찬 이야기에서 공관 복음서는 성체성사 제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 복음서는 성체성사 제정의 심오한 뜻을 밝히는 한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친교와 봉사의 스승이심을 보여 주는 ‘세족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요한 13,1-20 참조). 또한 바오로 사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분열되어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1고린 11,17-22; 27-34 참조).34)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고린 11,26)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찬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그 삶이 어떤 면에서 완전히 ‘성찬례적인’ 것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찬 예식과 그리스도인 삶 전체에 내재된 종말론적 긴장을 훌륭하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된 삶의 결과와 복음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묵시 22,20).
성체성사는 교회의 기원 자체에 영향을 미친 원인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이들이 열두 사도들이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마태 26,20; 마르 14,17; 루가 22,14 참조). 사도들이 “새 이스라엘의 싹이 되고 동시에 거룩한 교계의 기원이 되었다.”37)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 주심으로써 얼마 뒤 해골산에서 완성될 희생 제사에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그들을 동참시키셨습니다. 번제를 올리고 피를 뿌림으로써 맺어진 시나이 산의 계약과38) 비슷하게,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은 새 계약의 백성인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다락방에서 “받아 먹어라.”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마태 26,26-27)고 하신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임으로써 처음으로 예수님과 성사적으로 일치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교회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성사적 일치를 이룸으로써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25; 루가 22,19 참조).
새 계약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자신 안에 갇혀 있기보다는 인류를 위한 ‘성사’가 되고,39)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표징이며 도구가 되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40) 세상의 빛과 소금이(마태 5,13-16 참조)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교회는 십자가의 영원한 희생 제사에서, 그리고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결합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모든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41) 성찬례는 인류가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와 성령과 친교를 이루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원이며 교회를 굳건히 하고 지속적으로 살아 있게 하는 성자와 성령의 나뉠 수 없는 일치 활동은 성찬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야고보 전례」(Liturgy of Saint James)의 저자에게는 아주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동방 교회의 감사기도에 나오는 성령 청원 기도에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신자들과 예물 위에 성령을 보내 주시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것을 나누어 먹는 모든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거룩하게 하시어 그들에게 도움이 되게 해 주시도록”43) 간청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성찬례를 통하여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굳건해집니다.
일상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죄의 결과로서 인류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불일치의 씨앗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닌 일치를 이루는 힘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바로 교회를 자라나게 함으로써 인간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품에 바싹 기대어(요한 13,25 참조) 그분 마음속의 끝없는 사랑을 느끼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기도의 특성”48)으로 두드러지려면,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나누는 영적 대화와 그분 앞에서 드리는 침묵 조배, 그리고 그분께 대한 진실한 사랑 안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이러한 필요성을 얼마나 자주 느꼈는지 모르며,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힘과 위안과 지원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교도권이 수없이 칭송하고 권장한 이러한 신심 실천은49) 수많은 성인들의 모범으로 뒷받침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뛰어난 분은 알폰소 데 리구오리 성인으로서,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신심 가운데,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사에 이은 가장 뛰어난 신심이며,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도움을 주는 신심입니다.”50) 성찬례는 가치를 따질 수 없이 귀중한 보화입니다.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만 아니라 미사 밖에서도 성체 앞에서 기도드림으로써 은총의 원천 자체에 가 닿을 수 있습니다. 제가 교서 「새 천년기」와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제시한 그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열망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주님의 몸과 피를 통해 우리의 친교의 열매를 지속시키고 증대시키는 성체 공경의 이러한 측면을 또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지적하듯이, “교회는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유산, 사도들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보존하고 전한다.”52)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도 사도들의 신앙에 따라 거행되기 때문에 사도적입니다. 새 계약의 백성이 걸어온 이천 년 역사의 다양한 시기에 교회의 교도권은 성체성사에 관한 적합한 용어를 포함하여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을 더욱 정확하게 정의해 왔습니다. 이는 바로 성체성사의 위대한 신비 안에서 사도적 신앙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며, 이러한 불변성은 교회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성찬례도 이러한 사도 전래성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듯이, “신자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55)하지만, “참으로 그가 지닌 거룩한 힘으로 사제다운 백성을 모으고 다스리며, 성찬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행하고 온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56) 사람은 성품 사제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로마 미사 전례서」는 사제만이 감사기도를 드려야 하며, 그러는 가운데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말없이 동참하여야 한다고 규정합니다.57)
성찬 거행을 위하여 모인 신자들의 모임이 진정한 성찬 모임이 되려면, 그 모임을 주재하는 성품 사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공동체는 스스로 성품 사제를 낼 수 없습니다. 교역자는 신자들이 사도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주교직의 계승으로써 얻는 선물입니다. 성품성사를 통하여 새로운 사제를 만들고 그에게 성찬례를 봉헌할 권한을 주는 사람은 주교입니다. 따라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명백히 가르치듯이, 성품 사제 외에는 어떠한 공동체에서도 성찬례를 거행할 수 없습니다.”61)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이들 갈라진 형제들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지만, 성찬례의 본질을 흐리는 것을 묵과함으로써 진리를 명백히 증언할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그들의 예식에서 나누어 주는 친교의 빵을 거절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눈에 보이는 완전한 일치를 향한 진전이 늦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말한 교회 공동체들의 신자들과 함께하는 초교파적 말씀 전례나 공동 기도 예식, 나아가 그들 공동체의 전례 예식 참여로 주일 미사를 대신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전례나 예식이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성찬의 친교를 포함하여 완전한 친교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아무리 훌륭하게 이바지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성찬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성찬례를 봉헌할 권한이 오직 주교들과 신부들에게만 맡겨져 왔다고 해서 나머지 하느님 백성의 지위가 낮아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의 친교를 통하여 이러한 은총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목 활동에 참여합니다. 현대 세계의 사회 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제들이 그러한 수많은 다양한 임무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목자다운 사랑에서, 사제의 생활과 활동을 통합시켜 주는 끈을 보았습니다.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 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64)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들이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라는 공의회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사제의 영성 생활과 교회와 세계의 선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회의 행위입니다.”65) 그렇게 되면 사제들은 중심을 잃게 하는 일상의 긴장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고, 또 사제 생활과 교역의 참된 중심인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다양한 사목 직무를 다룰 때에 필요한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일상 활동은 진정한 성찬례가 될 것입니다.
사제 생활과 교역에서 성찬례가 차지하는 중심 자리는 사제 성소를 사목적으로 장려할 때 성찬례가 중심이 되는 토대입니다. 성소를 위한 기도는 성찬례에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기도와 가장 밀접하게 결합됩니다. 마찬가지로 성찬 교역을 수행하는 사제들의 성실함은 신자들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이며 충실한 성찬례 참여와 함께, 젊은이들에게 훌륭한 본보기를 보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응답하려는 동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사제 성소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 흔히 사제의 열렬한 목자다운 사랑의 모범을 이용하십니다.
그러한 전례 거행의 성사적 불완전성은, 무엇보다도 모든 공동체가 주님께서 당신의 추수 밭에서 일할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마태 9,38 참조)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어야 하며, 또한 사제직 후보자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교육적 기준을 낮추어 해결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적절한 성소 사목 증진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결집시키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