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자 이순옥 사비나씨의 증언 중 일부 발췌 –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채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고 사형집행날 극적으로 사형을 최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을 때 보았던 북한의 신자들 모습입니다.
저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 여명이 수용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 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담당하고 있던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는, 단단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만 모여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 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곳에 가야된다. 그리고 그 미친 자들하고는 절대 눈길한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은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 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전 너무나 놀랬습니다. 잡혀올때는 정상인들이 잡혀왔는데, 거기와서 하루 열여섯시간, 열여덟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노동 속에서 일을 하다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로 찍어도 한판에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만하는 그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빛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떡지가 안고 그 자리에 또 쇳물이 떨어지고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곳도 성한 곳이 없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날 저는 그곳에서 정말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 안이 쥐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가운데 수백명의 그 죄수아닌 죄수들을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소리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 하면서 그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곤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백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겠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속에서 떨고 있는데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명을 끌어내다가 땅바닥에 엎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 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중에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 하느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보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에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들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뛰던 교도관 두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면서 달려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시뻘건 쉿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잡아야만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어가면서까지도 저렇게 거부하지 않고, 저렇게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나를 좀 도와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저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과 성모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달이 멀다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때는 언제나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 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야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꺽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못 보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 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도 할 수 없었고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 하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그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아들과 제가 숨막히는 과정을 거치면서 홍콩으로 왔을 때, 제일 먼저 만난 분이 사비나라는 수녀님이었고 그 수녀님께 교리를 받았는데 수녀님께서 처음 성모님 상본을 저희에게 선물하셨을 때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예쁜 성모님은 우리 어머니께서 제가 덮고 자는 이불이나 제 소지품 그리고 항상 저에게 옷을 만들어 입힐 때마다 속옷이건 겉옷이건 어느 옷에나 수를 놓아주시던 내 어머니의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에 내 어머니의 그림이 성모님인 것을 처음 알았지만 저희 집에는 성모님을 수놓은 수예품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대대로 큰 부자집의 따님이셨는데, 소련에서 태어나신 아버님을 따라 6.25전에 불란서에 가서 디자인을 공부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간직하고 계시던 유물을 제게 넘겨주시면서 다른 말은 안하시고 ‘다만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라’면서 언젠가 이것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나중에 탈북한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저를 잡아온 다음 저희 집을 몽땅 몰수하고 다 해체해보니 큰 보석함 속에 어머니의 묵주가 여러개 들어있고 성모님 상본이 다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그것이 큰 사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유물인 진주로 된 그것이 묵주인지 몰랐습니다. 수녀님께 묵주기도를 배우다보니 손재주 좋으셨던 우리 어머니께서 그렇게도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진주로 만들어 놓으신 묵주가 여럿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께서 평생동안 숨어서 몰래 기도하셨던 그 기도의 축복과 은총이 저희 대에 와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들 100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북한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로사리오 성모님의 동산 월간 소식 138호 남양 성모성지 200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