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예수께서 에프라임 서쪽에 있는 우거진 수풀 속을 생각에 깊이 잠기신 채 혼자서 천천히 가신다. 개울에서는 물이 흘러 내려가는 소리가 올라오고, 나무들에서는 새들의 노래가 내려온다. 봄날의 강한 햇빛은 얼기설기한 가지들 사이로 퍼지고, 흐드러지게 우거진 풀을 밟는 발걸음은 조용하다. 햇살은 푸른 풀 위에 움직이는 둥근 양탄자와 황금빛 줄무늬를 그려 놓고, 아직 이슬에 젖어 있는 어떤 꽃은 주위는 온통 그늘인데 둥그런 빛살을 정면으로 받아, 그 꽃잎들이 보석인 것처럼 반짝인다.
  예수께서는 발코니처럼 공중에 쑥 내민 낭떠러지를 향하여 올라가신다. 발코니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참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고, 검은 딸기나무나 찔레나무의 낭창낭참한 가지들과 담쟁이와 인동덩굴들이 늘어져 있는데, 그것들은 돋아난 곳이 그것들의 풍성한 생활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좁아 뻗거나 의지할 데가 없어서 헝클어지고 풀어진 머리채 모양으로 공중으로 축 늘어져, 무엇인가에 달라붙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뻗고 있다.
  예수께서는 깎아지른 곳의 높이까지 올라가셔서 덤불이 엉킨 것을 헤치시며 가장 앞으로 내민 끝부분을 향하여 가신다. 새 한 떼가 놀란 소리를 지르고 날개 스치는 소리를 내며 다른 데로 날아간다.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당신보다 먼저 그리로 올라온 사람을 살펴보신다. 그 사람은 낭떠러지 거의 끝에 풀 위에 배를 깔고, 팔꿈치를 땅에 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디어 예루살렘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요나타 벤 우지엘의 이전 제자 사무엘이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흔든다…. 예수께서는 그의 주위를 끄시려고 나뭇가지를 흔드신다. 그러나 그 시도가 헛된 것을 보시고 풀 속에서 돌 하나를 주워서 오솔길 아래로 굴려 내려 보내신다. 비탈에서 튀어 오르는 돌 소리에 젊은이는 움직이며, 놀라서 뒤돌아보고 말한다.
  “거기 누가 있소?”
  “사무엘, 나요. 당신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의 장소 중의 하나에 나보다 앞장서서 왔소”하고 예수께서 오솔길 끝에 있는 참나무의 굵은 줄기 뒤에서 나타나시며 말씀하시는데, 그 때 막 그곳에 도착하신 것처럼 하신다.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러나 즉시 자리를 내드리겠습니다”하고 밑에 깔려고 벗었던 겉옷을 집으면서 급히 일어나며 말한다.
  “아니오. 왜? 두 사람이 있을 만한 자리가 있는데. 이곳은 외따로 떨어져 있어 고적하고, 허공에 매달려 있고, 햇빛이 잘 들고 지평선이 탁 트여 있어 매우 아름답소! 왜 이 자리를 뜨려고 하오?”
  “그야…. 선생님이 기도하시게 하려구요….”
  “그런데 우리가 함께 기도할 수 없소? 혹은 우리가 서로 이야기하고, 우리의 정신을 하느님께로 올리면서… 그리고 사람들과 그들의 결점을 잊고, 우리의 아버지이고, 착한 뜻을 가지고 당신을 찾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인자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묵상까지도 할 수 없소?”
  사무엘은 예수께서 “그리고 사람들과 그들의 결점을 잊고…”라고 말씀하실 때 놀라는 몸짓을 한다. 그러나 대꾸는 하지 않고 돌아와 앉는다.
  예수께서는 그의 곁에 풀에 앉으셔서 말씀하신다. “여기 앉으시오, 그리고 같이 있습시다. 오늘은 지평선이 얼마나 맑은지 보시오. 우리가 독수리 같은 눈을 가졌더라면, 예루살렘을 왕관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꼭대기들에 마을들이 희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할 보석같이 공중에서 반짝이는 한 점, 즉 하느님의 집의 황금빛 둥근 지붕들을 볼 거요…. 보시오 저기에 베델이 있소. 그 집들이 희게 나타나는 것이 보이오. 그리고 저기 베델 저쪽에는 베롯이 있소. 옛날에 그곳과 그 인근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간교가 얼마나 치밀했소! 그러나 비록 속임수가 절대로 좋은 무기일 수는 없지만, 그 간교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소. 그 간교로 인하여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거요. 인간적인 명예가 많고 가치가 있고, 거룩함을 가까이하는 것은 보잘 것 없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거룩함을 가까이 할 수 있기 위하여 항상 인간적인 명예를 잃는 것이 좋소.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바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변화로 인해 당신이 행복해야 할 덴데도 당신은 침울하오. 당신은 침울하고, 괴로워하고, 외따로 떨어져 있고, 당신이 떠나온 곳을 바라보곤 하오. 당신은 새장의 창살 속에 갇혀서 그 놈이 좋아하던 곳을 몹시 동경하며 바라보는 붙잡힌 새와 같소. 당신더러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소. 당신은 자유요 당신은 가도 되오. 그리고….”
  “주님, 유다가 혹 제게 대해서 나쁘게 말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오. 유다가 내게는 말하지 않았소. 내게는 말하지 않았소. 그러나 당신에게는 말했소.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신은 침울하고 그 때문에 낙담해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거요.”
  “주님, 아무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런 일들을 아시면, 선생님을 떠나고 싶은 욕망으로나 제가 회개한 것을 후회해서나, 과거에 대한 향수로… 또는 사람들이 무섭거나 사람들이 제가 암시하고자 하는 그들의 벌에 대한 그 공포로 인해서 제가 침울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제가 저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전에 있던 것처럼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경배하기를 좋아하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곳에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확실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리고 선생님이 제게 그것을 나무라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보다도 먼저, 내 두 가지 본성으로 그 제단을 갈망하오. 그리고 그 제단이 그래야 마땅한 것처럼 거룩함으로 둘러싸여 있기를 바라오. 하느님의 아들로서는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게 대단히 기분좋은 목소리가 되고, 사람의 아들, 이스라엘사람, 따라서 율법의 아들로서의 나는 성전과 제단을 이스라엘의 가장 신성한 장소로, 우리 인성이 거룩한 것에 가까이 가고, 하느님의 옥좌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의 향기에 젖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오. 사무엘, 나는 율법을 폐지하지 않소. – 율법은 내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게도 신성한 것이오. 나는 율법을 완성하고 거기에 새 부분을 첨가하오. 하느님의 아들로서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있소. 이를 위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소. – 나는 내 교회의 영적인 성전을 세우러 왔는데, 이 성전은 사람들도 마귀들도 능가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율법의 십계판은 이 성전에서 상석에 있을 것이오. 그것은 그것이 영원하고 완전하고 나무랄 데 없는 것이기 때문이오, 그 간결함 속에 하느님의 눈에 의인이 되기 위하여 해야 할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이 십계판에 포함된 ‘이러이러한 죄를 짓지 말아라’하는 것은 내 말로 폐지되지 않소. 오히려 나도 당신들에게 이 십계명을 말하고 있소. 다만 나는 이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라고, 즉 그것들을 어기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무서워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이신 당신들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지키라고 말하오. 나는 아들인 당신들의 손을 당신들의 아버지의 손에 놓으려고 왔소. 이 손들이 서로 떨어진 지가 몇 세기나 되었소! 벌도 갈라 놓고 죄도 갈라놓았소. 구속자가 오게 되면, 죄가 없어질 거요, 방벽이 무너지고, 당신들은 다시 하느님의 아들이 되오.”
  “맞습니다. 선생님은 인자하시고 항상 용기를 돋우어 주십니다. 그리고 아십니다. 그러니까 제 고민을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선생님께 여쭙겠는데, 왜 사람들이 그다지도 타락하고 그다지도 미치고 그다지도 어리석습니까? 어떻게 무슨 방법을 가졌기에 그렇게까지 악마처럼 악을 권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은 어떻게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거짓말을 믿을 정도로 눈이 어둡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런 마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선생님 곁에 있으면서 그대로 마귀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저는 저기를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 그곳에서 나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수많은 시냇물 같은 독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라삐들의 지혜가 사람들을 오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사실들을 왜곡하는 그렇게도 많은 사악과 결합할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특히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격분하여 말하였던 사무엘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예수에서 그의 말을 끝맺으신다.
  “…그것은 내 사도인 유다가 그렇고. 나와 내 주위에 있거나 당신이 온 것과 같이 내게 오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오. 나도 아오 유다는 당신을 여기서 떠나가게 하려고 애쓰고, 당신에게 암시를 주고 당신을 비웃소….”
  “그리고 저 하나에게만 그러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정의 안에 있는 제 기쁨을 잡쳐 놓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교묘하게 제 기쁨을 잡쳐 놓는지, 저는 여기에 선생님과 제게 대한 배반자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제게 대해서 그렇다는 것은 제가 선생님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될 터인데, 더 나아졌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아직 저 자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전사람들을 만나면 제 결심을 포기하고… 어떻게 할지도 모릅니다…. 오! 만일 제가 그 때에 그렇게 했더라면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구실을 가졌을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해서는 저를 저주받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사람들이 제게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만일 제가 지금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아들을 배반할 자가 받을 저주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저 자신과 그들에게서 저를 구하기 위해 어디로 도망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디아스포라의 사람들과 합류하기 위해 먼데로 도망칠 생각을 했었습니다…. 멀리로, 마귀가 저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막기 위해 먼데로…. 선생님의 사도가 저를 믿지 않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 사람은 우두머리들을 알아서 우리 모두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저를 압니다…. 그래서 그가 저를 의심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선생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약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걸 모르지요? 깊이 생각해보시오. 사도들이고 선생님과 오래 전부터 같이 있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단 말이오. 그런데 방금 온 당신, 그것도 우리 모두를 벌벌 떨게 하는 시기에 겨우 도착한 당신이, 묵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그렇게 중독된 당신이 당신을 의롭게 지킬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하고 그가 말할 때에는 그의 말이 옳습니다.” 그 사람은 낙망해서 고개를 떨어뜨린다.
  “사람의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 슬픔을 자기 자신들에게 주는지! 정말로 사탄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완전히 공포를 주어, 그들을 구해주려고 마주 오는 기쁨에서 그들을 갈라놓기 위해 이 경향을 이용할 줄을 아오, 정신의 우울, 내일에 대한 공포, 걱정 따위는 항상 사람이 그의 적대자의 손에 들려주는 무기들이오. 이 적대자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환상들을 가지고도 사람을 무섭게 하고, 또 정말이지 사탄과 결합해서 형제들에게 겁을 주도록 사탄을 돕는 다른 사람들도 있소. 그러나 젊은이, 하늘에 아버지께서 한분 계시지 않소? 바위에 벌어진 이 틈에 이 풀포기를 마련해 주시는 아버지 – 이 틈에는 부식토가 차 있는데, 반들반들한 돌 위로 흘러가던 이슬의 축축한 기운이 이 작은 고랑에 모이도록 배치되어 있어서, 풀포기가 살아서 이 조그마한 꽃을 피울 수 있게 하오. 그런데 이 작은 꽃의 아름다움은 저 위에서 빛나고 있는 태양보다 덜 놀라운 것이 아니오. 둘 다 창조주의 완전한 작품이오. – 그 아버지께서 바위에 돋아난 이 풀포기를 보살펴 주시는데, 당신을 섬기기를 단호하게 원하는 당신 아들들 중의 한 사람을 보살피실 수 없겠소? 오!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착한’ 욕망을 실망시키지 않으시오.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들 마음에 그 욕망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오. 선견지명이 있고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들의 소원을 돕기 위한 상황을 조성하시고, 그뿐 아니라, 불완전한 길로 나아가면서 당신을 공경하고자 하는 욕망을 바로잡고 완성하여, 옳바른 길을 따라 가면서 당신을 공경하고자하는 욕망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상황을 조성하시오. 당신은 이런 사람들 중에 들어 있었소. 당신은 나를 박해함으로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소. 아버지께서는 당신 마음속에는 하느님께 대한 증오가 없고 다만 저들이 하느님의 원수이고 영혼들을 타락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한 그 사람을 세상에서 없앰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겠다는 갈망이 있음을 보셨소.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주님을 찬미하겠다는 당신의 욕망을 들어 주시기 위한 상황을 조성하셨소. 그래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오게 된 거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을 이리 데려오신 지금 당신을 버리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소? 당신이 하느님을 버리는 때에만 악의 힘이 당신을 지배할 수 있을 거요.”
  “저는 하느님을 버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 뜻은 진실합니다!”하고 그 사람이 언명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걱정하오? 한 사람의 말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마음대로 말하게 내버려두시오.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 생각하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은 항상 불완전하오. 그러나 거기에 대비하겠소.”
  “저는 선생님이 그를 질책하시기는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죄를 짓지 않으리라는 보장만 선생님이 제게 주시면 됩니다.”
  “당신에게 그걸 보장하오. 당신이 그런 일을 당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을 거요. 젊은이, 알겠소? 당신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대한 증오에서 지키고, 이 증오에 대한 벌을 면하기 위해 디아스포라나 이 세상의 끝까지 간다해도 소용이 없을 거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물질적으로는 죄로 더러워지지 않을 거요. 그러나 내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그 선고를 집행할 사람들보다 죄가 덜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이 이 목적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서 당신과 말할 수 있소. 당신은 내게 대해서 가장 악착스러운 사람들의 이름과 생각을 알고 있소. ‘유다는 모든 우두머리를 알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압니다’하고 당신은 말했소. 그러나 당신들이 가장 큰 유성들 앞에 있는 작은 별들과 같기 때문에, 유다가 아랫사람들인 당신들도 안다지만, 당신들도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일하고 누가 일하는가 하는 것,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고, 어떤 방법들을 연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똑같이 알고 있소…. 그러니까 당신과는 말할 수 있소. 다른 사람들과는 말을 할 수 없을 거요…. 내가 어떤 고통을 당할 수 있고, 무엇을 동정할 수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오….”
“선생님, 그러나 그것을 아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누가 오솔길로 올라오지?”사무엘은 보려고 일어나다가 외친다. “유다가!”
“그렇소, 나요 선생님이 이리로 올라 오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히려 당신을 만나는구려. 그럼 당신의 생각에 잠겨 있도록 나는 돌아가겠소.” 그러면서 코웃음 친다. 그 웃음은 하도 진실성이 없어서 올빼미의 우는 소리만큼이나 음산하다.
  “나도 여기 있다. 마을에서 나를 찾느냐?”하고 예수께서 사무엘의 뒤에서 나타나시면서 말씀하신다.
  “오! 선생님이! 그러면 사무엘, 당신은 좋은 동반자와 같이 있었소! 선생님도 그러시구요….”
  “그러나 정의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은 언제나 좋은 동반자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나와 같이 있으려고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오너라. 너 앉을 자리가 있다. 요한이 너와 같이 왔더라면 요한의 자리도 있었을 것이다.”
  “요한은 저 아래에서 다른 순례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있으면, 그럼 내가 가야겠구나.”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내일까지 하루 종일 있는 답니다. 요한은 그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 침대들에 자리 잡아 주고 있는 중입니다. 요한은 그렇게 하는 걸 기뻐합니다. 하긴 그 사람은 무슨 일에나 기뻐합니다. 선생님과 그 사람은 정말 닮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네가 어떻게 해서 항상 행복하신지, 그리고 가장… 슬픈 일을 당하셔도 어떻게 항상 기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왔을 때 내가 마침 그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소.”
  “아! 그래요! 그러면 당신도 자신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로구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처지보다도 한층 더… 어려운 처지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로구려.”
  “나는 불행하지 않소. – 내게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미래를 환히 알고 계시면서도 아무 것에 대해서도 불안해하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침착성이 어떤 근원에서 오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거요.”
  “그야 천상적인 근원에서 오는 거지요! 그건 당연하오! 선생님은 하느님이시니까! 당신은 혹 그것을 의심하오? 하느님께서 고통을 당하실 수 있소? 선생님은 고통을 초월해 계시오. 아버지의 사랑이 선생님께는 취하게 하는 술과… 같은 것이오. 그리고 취하게 하는 술이 선생님께 있어서는 당신의 행동이 세상의 구원이라는…  확신이오. 또 그리고… 선생님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육체적인 반응을 가지실 수 있소? 그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이오. 죄없는 아담이 어떤 종류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또 무죄한 채로 그대로 있었으면 절대로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터인데, 더할 수 없이 죄없고, 어떻게 부를지 모르겠소. 하느님이시니까 창조되지 않으셨고, 부모가 계시니까 창조되신 인간이신… 오! 선생님, 미래의 사람들에게는 풀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왜’가 있겠습니까! 그런 인간이신 예수님이. 아담이 죄가 없었기 때문에 고통이 면제되었는데,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셔야 한다고 혹 생각할 수 있겠소?”
  예수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계신다. 다시 풀 위에 앉으셨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그래서 나는 예수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역시 서 있는 유다 앞에 서 있는 사무엘은 대꾸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구속자가 되셔야 하니, 실제로 고통을 당하셔야하오. 당신은 다윗과 이사야를 기억 하지 못하오?”
  “그들을 기억하고 말구요! 그들을 기억하고 말구요! 그러나 그들은 구속자의 얼굴을 보면서도, 구속자가… 뭐랄까, 고문을 당하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받았을 무형의 도움은 보지 못했던거요.”
  “그래 그게 어떤 도움이오? 인간은 그의 의덕의 완전도에 따라 고통을 사랑하거나 인종(忍從)으로 참아 받을 수 있을 거요. 그렇지만 언제나 고통을 느낄 거요. 그렇지 않으면… 만일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닐 거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오.”
  “그러나 유령은 아니시오! 진짜 육체요! 육체는 고문을 당하면 고통을 느끼오. 선생님은 참다운 사람이시오! 사람의 생각은 만일 그가 모욕을 당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면 고통을 당하오”
  “선생님의 하느님과의 결합을 선생님에게서 이런 인간적인 것을 제거 하오.”
  예수께서 얼굴을 드시고 말씀하신다.
  “유다야, 나 분명히 네게 말 한다마는, 나는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누구보다도 더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느님의 뜻을 그들의 유일한 신부처럼 선택했기 때문에 세상의 슬픔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거룩하고 영적인 큰 행복으로 행복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큰 행복과 큰 행복에 대한 불안에 관한 인간적인 개념을 내가 초월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큰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 사람이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바로 그것을 내 기쁨으로 생각한다. 사람이 무거운 짐과 고통으로 생각해서 피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내게는 가장 기분 좋은 것을 나타낸다. 나는 현재를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현재가 영원 안에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한다. 내 삽화는 끝나지만 그 결과는 지속된다. 내 고통은 끝나지마는 그 고통의 가치는 끝이 없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부르는 것의 한 시간을 가지고, 여러 해나 여러 달 동안 추구한 끝에 도달한 그 한 시간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 뒤 그 한 시간이 기쁨으로서 나와 더불어 영원 속으로 갈 수 없게 될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지 못하고 나 혼자서만 그것을 누리게 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말이다.”
“아니, 만일 선생님이 성공을 거두시면, 선생님의 큰 행복의 일부분이 선생님을 따르는 저희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하고 유다가 외친다.
“너희들에게? 그런데 내 고통이 기쁨을 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무리와 비교하면, 너희들이 무엇이냐? 나는 세상의 큰 행복 훨씬 저 너머를 본다. 나는 내 눈길을 저 너머로,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낸다. 나는 내 고통이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영원한 기쁨으로 변하는 것을 본다. 나는 고통을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큰 힘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그 완전한 행복이란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기까지 그를 사랑하는 행복이다. 그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는 행복.”
  “저는 그 큰 행복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하고 유다가 잘라 말한다.
  “너는 아직 지혜롭지 못하다. 지혜로우면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럼 요한은 지혜롭습니까? 그는 저보다도 더 무식한데요!”
  “인간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이 몽둥이를 몽둥이가 아니게 하고, 돌을 돌이 아니게 하고, 그것들이 때리는 몸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고통이 선생님께는 사랑이기 때문에 선생님께 소중하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실제로 붙잡히셔서 고문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 선생님이 아직 그 생각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고통을 피하실 수 있는 동안에 그것을 생각하십시오. 그 고통은 무서울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만일 사람들이 선생님을 잡을 수 있으면…. 오! 그들은 선생님께 사정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바라보신다. 예수께서는 매우 창백하시다. 크게 뜨신 눈은 유다의 얼굴 너머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고문을 보시는 것 같다. 그러나 슬픔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눈은 지극히 부드러우시고 특히 차분하시다. 마음이 편안한 죄없는 사람의 맑은 두 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나도 안다. 네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바란다. 죄인들에게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내게도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고통을 받지 않게 해 주시기를 청하지 않고, 고통을 당할 줄 알게 해주시기를 청한다. 그러면 이제는 가자. 사무엘, 당신은 우리보다 좀 앞서 가서 우리가 곧 마을에 갈 것이라고 요한에게 알리시오.”
  사무엘은 머리를 숙이고 나서 빨리 간다.
  예수께서 내려오기 시작하신다. 오솔길은 하도 좁아서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다가 말을 하지 못하지는 않는다.
  “선생님, 저 사람을 너무 믿으십니다. 제가 저 사람의 정체를 말씀드렸지요. 저 사람은 요나타의 제자들 중에서 제일 흥분한 사람이고 제일 흥분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어떻든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 선생님은 저 사람의 손에 걸려드셨습니다. 저 사람은 선생님을 정탐하러 온 밀정입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보다도 더, 저를 밀정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밀정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보신다. 예수의 얼굴과 사도를 똑바로 들여다보시는 예수의 눈길에는 고통과 위엄이 섞이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 너는 밀정이 아니다. 너는 마귀다. 너는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기 위하여 유혹하고 속이는 특권을 뱀에게서 빼앗아 가졌다. 네 행동은 돌도 몽둥이도 아니지만, 돌이나 몽둥이로 때리는 것보다 더 상처를 입힌다. 오! 나의 소름끼치는 고통 중에, 고통 받는 사람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으로서 네 행동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소름끼치는 일을 보지 않으시려는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신다. 그런 다음 오솔길로 해서 빨리 내려오기 시작하신다. 유다가 뒤에서 외친다.
  “선생님! 선생님! 왜 저를 괴롭히십니까? 저 속이는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께 중상을 했군요….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선생님!” 예수께서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내리받이를 뛰어서, 날다시피 내려오신다. 그리고 인사를 하는 나무꾼들과 목자들 곁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신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며 인사하신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으신다. 유다는 체념하고 입을 다문다…. 그들이 거의 아래에 내려왔을 때 요한과 마주친다. 요한은 그의 조용한 미소로 빛나는 맑은 얼굴로 그들을 향하여 올라오는 중이다. 요한은 봉방(蜂房)을 빨아먹으면서 재잘거리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선생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답니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도 말한 사람이 없는데, 선생님이 여기 계신 걸 다들 아니 말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들이 쉽니다. 매우 피로했습니다. 저는 디나에게 가서 양젖과 꿀을 얻어 왔습니다. 병자가 한 사람 있으니까요. 병자는 제 침대에 뉘었습니다.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린 안나가 저와 같이 오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이 애를 만지지 마십시오. 사방이 꿀 투성이입니다.” 그러면서 옷에 꿀방울이 많이 묻고 손가락 자국이 있는 그 착한 요한은 웃는다. 그는 반쯤 빨아 먹은 봉방을 예수께 드리러 가려고 하면서 “오세요 선생님 드릴게 많이 있어요!”하고 외치는 어린 아이를 뒤에 붙들어두려고 애쓴다.
  “그렇습니다. 디나의 집에서는 봉방을 떼내는 중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벌들이 분봉한 지가 얼마 안 되거든요”하고 요한이 설명한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 첫번째 집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는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양봉가들이 사용하는 북이 아직 울리고 있다. 벌의 무리들이 – 그것들은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포도송이 같다. – 어떤 나뭇가지들에 매달려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새 벌통으로 가져가려고 딴다. 더 멀리서는 벌써 자리를 잡은 벌통들이 나오는데, 끊임없이 윙윙거리는 벌들이 그리로 들어간다. 남자들이 인사를 하고, 한 여자가 매우 아름다운 봉방들을 가지고 뛰어 와서 예수께 드린다.
  “왜 이것들을 가지지 않고 주시오? 요한에게도 벌써 줬으면서….”
  “아이고! 제 벌들이 아주 풍성한 수확을 주었습니다. 좀 드려도 저는 곤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 분봉들에 강복해 주십시오. 보세요. 저 사람들은 마지막 분봉을 거두는 중입니다. 올에는 벌통을 곱절이나 더 많이 얻었습니다.”
  예수께서 벌들의 작은 도시로 가셔서 일을 중단하지 않는 일벌들이 윙윙거리는 가운데 손을 들어 한 통 한 통 강복하신다. “벌들은 모두 기뻐하고 또 흥분해 있습니다. 새 집이니까…”하고 한 남자가 말한다.
  “그리고 새 결혼식이고, 정말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여자들 같아요”하고 다른 남자가 말한다.
  “맞아요, 그러나 여자들은 일하는 것보다 수다를 더 떨지요. 그러나 벌들은 반대로 말없이 일합니다. 그리고 혼인잔칫날에도 일을 합니다. 이놈들은 저희들의 나라를 만들고 거기에 저희들의 재산을 갖다 놓으려고 끊임없이 일합니다”하고 또 한 사람이 말한다.
  “덕행을 위하여 항상 일하는 것은 허용되는 일이고, 의무이기까지하오, 이익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는 것은 그렇지 않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날에는 그분을 공경해야 할 하느님이 한분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오. 말없이 일하는 것은 공로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벌들에게서 배워야 할 겁니다. 거룩한 일들은 말없는 가운데에서만 거룩하게 행해지니까요. 당신들도 의덕에 있어서 당신들의 벌들과 같이 지칠 줄 모르고 말없는 사람이 되시오. 하느님께서 보시고, 하느님께서 갚아주시오. 당신들에게 평화”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도들하고만 계시게 되자 말씀하신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일꾼들에게 나는 벌들을 본보기로 추천한다. 벌들은 꾸준한 일로 건전한 꽃부리에서 따서 저희들 안에서 형성된 꿀을 벌통의 은밀한 속에 갖다 놓는다. 벌들이 얼마나 착한 뜻을 가지고 황금빛 점같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고, 그리고 나서는 진액들을 지니고 들어와서 은밀한 방 안에서 꿀을 정성들여 만들어내는지, 그 놈들의 피로가 피로같이 보이지도 않는다. 그 놈들을 본받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참다운 덕행의 진액을 줄 수 있는 가르침과 교리와 건전한 우정들을 고르고 나서, 활발하게 거두어들인 것에서, 마치 건전한 많은 성분에서 끌어낸 꿀과 같은 덕행과 정의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외따로 떨어져 있을 줄을 알아야 하는데, 착한 뜻을 가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착한 뜻이 없으면 여기저기서 따온 진액이 아무 짝에도 소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들은 좋은 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겸손하게 묵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일벌들 곁에 여왕벌들이 있어도, 즉 묵상하는 사람 곁에 그보다 더 의로운 어떤 사람이 있어도 새암을 하지 말아야한다. 벌통 안에는 일벌이나 여왕벌이나 모든 벌이 필요하다. 모두가 여왕벌이라도 불행할 것이고, 모두가 일벌이라도 불행할 것이다. 벌들은 이 놈 저 놈 다 죽을 것이다. 일벌들이 없으면 여왕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생식을 못할 것이고, 여왕벌들이 생식을 하지 못하면 일벌들이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여왕벌들을 새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왕벌들도 피로가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이다. 여왕벌들은 오직 한번 결혼하느라고 날 때에 한번만 태양을 볼 뿐이다. 그전과 그후에는 다만 그리고 항상 벌통의 호박색 벽 사이에 갇혀 있는 것이다. 각자가 의무를 가지고 있고, 각 의무는 선택이며, 각 선택은 명예가 되는 외에 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벌들은 이득없이 날아다니거나 병들고 독있는 꽃 위로 위험하게 날아다니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벌들은 모험을 하지 않고, 그들의 임무에 불복종하지 않으며, 그것을 위하여 그 놈들이 창조된 목적에 거역하지 않는다. 오! 기묘한 작은 생물들!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르침이 되느냐!….”
  예수께서는 입을 다무시고 명상에 잠기신다. 유다는 갑자기 어딘지 모를 곳에 가야 하는 것이 생각나서 뛰어서 간다. 예수와 요한만 남아 있다. 요한은 눈치채지지 않게 예수를 쳐다본다. 주의깊고 다정스러우면서도 고민하는 눈길이다. 예수께서 머리를 들고 조금 돌리셔서 당신을 유심히 살펴보는 귀염둥이의 눈길과 마주치신다. 예수의 얼굴이 환해지고, 그를 당신에게로 끌어당기신다. 요한은 이렇게 안겨서 걸으면서 묻는다.
  “유다가 선생님께 또 다른 고통을 드렸지요? 또 사무엘의 마음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왜? 네게 그 말을 했느냐?”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알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말 착한 분 곁에 있으면 착하게 되네. 그렇지만 유다는 선생님과 같이 사는 것이 3년째나 되지만 착하지 않아. 유다는 깊이 타락해서 그리스도의 착하심이 그 안으로 뚫고 들어오질 못해. 그 만큼 그의 안에는 사악이 꽉 차 있단 말이야’하고요 저는 무슨 말을 할지 몰랐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유다가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언젠가 변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만… 저희들은 모두가 같은 교훈을 받았고… 그가 저희들 가운데 왔을 때에 저희들보다 더 나쁘지도 않았는데요….”
  “내 요한! 내 귀여운 아이!” 예수께서는 그의 넓고 깨끗한 이마에 입맞춤하시고, 금빛으로 가볍게 올려지는 그의 머리카락에 대고 속삭이신다.
  “자기들 안에 있는 선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너는 어부이니까 회오리바람이 찍어 누를 때에 돛이 어떻게 하는지 알지. 돛이 하도 물 위로 기울어져서 배를 뒤집어엎어 배에 대해 위험하게 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때로는 돛을 내리고 날개없이 둥지로 돌아와야 한다.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돛은 날개가 아니라 바닥짐이 되어서 배를 구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물밑으로 죽음으로 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회오리바람의 사나운 입김이 가라앉기만 하면 돛은 즉시 다시 날개가 되어서 빨리 항구를 향해 달려 구원으로 이끌어 간다. 많은 영혼의 경우도 이와 같다. 격정의 회오리바람이 가라앉기만 하면, 낮게 내려졌던 영혼… 말하자면 좋지 않은 것 속에 가라앉았던 영혼이 다시 선을 향한 갈망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러나 그건 그렇고… 말씀해 주십시오…. 유다가 언젠가 선생님의 항구에 이르겠습니까?”
  “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중의 하나의 미래를 바라보게 하지 말아라. 내 앞에는 그들을 위해서는 내 고통이 무익할 수백만 영혼의 미래가 있다!…. 내 앞에는 세상의 모든 오물이 있다…. 구역질 때문에 내 속이 뒤집힌다. 강물처럼 세상을 덮고 있는 저 부정한 것들이 마구 끓어 넘치는 데서 오는 구역질 말이다. 그 부정한 것들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는 하지만 완전에 대해서는 항상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세상 마칠 때까지 땅을 뒤덮을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것을 바라보게 하지 말아라! 타락을 모르는 샘에서 목마름을 가라앉히고 기운을 회복하게 놔두고, 내 평화인 너만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많은 벌레가 꿘 썩은 것을 잊어버리게 놔두어라!” 그러면서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동정이요 다정스러운 사도의 맑은 눈에 그윽한 눈길을 보내시면서 또 다시 입맞춤을 하신다.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온다. 부엌에는 작은 노파에게 불 피우는 수고를 덜어주려고 나무를 꺾는 사무엘이 있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물으신다.
  “순례자들은 잡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말과 나귀들에게 물을 갖다 주겠습니다. 그 놈들은 헛간에 있습니다.”
  “할머니, 제가 할께요. 그보다도 라켈의 집엘 가세요. 신선한 치즈를 주겠다고 제게 약속했습니다. 안식일에 돈을 주겠단다고 말씀하세요”하고 요한이 물이 가득 찬 물통 두개를 들면서 말한다. 예수와 사무엘만이 남았다. 예수께서는 불 위로 몸을 숙이고 불꽃을 일으키려고 불고 있는 그 사람 곁으로 가셔서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말씀하신다.
  “유다가 저 위에서 우리 이야기를 중단했소….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안식일 다음 날 당신을 사도들과 같이 보내겠다는 것이오, 아마 그걸 낫게 생각하겠지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곁을 떠나는 것이 섭섭합니다마는, 사도들에게서도 또 선생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유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더 낫게 생각합니다. 예, 그것을 감히 청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좋소. 그렇게 결정되었소. 그리고 나와 같이 그 사람을 동정하시오. 그리고 거기 대해서는 베드로에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저는 입을 다물 줄 압니다. 선생님 !”
  “그후에는 제자들이 올 거요 헤르마와 스데파노와 이사악이 있소. 두 현인과 한 의인,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주 많이 있소. 당신은 참형제들 가운데에서 마음 편하게 있을 거오.”
  “예, 선생님, 선생님은 이해하시고 구제해 주십니다. 선생님은 정말 인자하신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예수의 손에 입맞춤하기 위하여 몸을 구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