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시 전체가 예수를 마중 나온다. 그들은 어린이들의 미소와 주민들의 찬미외에 산비탈에서 꺾은 들꽃들과 농사지은 것의 맏물들을 가지고 마중 나온다. 그래서 예수께서 시내에 발을 들여놓으시기도 전에 그 모든 착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신다. 그들은 선발대로 파견된 가리옷의 유다와 요한의 기별을 받고, 구세주께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을 모두 가지고, 특히 그들의 사랑을 가지고 달려온 것이다.
예수께서 크고 작은 그 모든 사람에게 손짓과 말씀으로 끊임없이 축복을 하신다. 그들은 예수께로 바싹 다가와서 옷과 손에 입맞춤을 하고, 입맞춤으로 축복해 주십사고 아기들을 팔에 안겨 드린다.
사랑이 어떻게나 열렬한지 걸음을 걷지 못하게 할 지경이다. 그것은 마치 밀어오리는 밀물과도 같다. 나는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데 발로 가시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 물결에 들려가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은 이 사랑이 당신께 드리는 기쁨으로 인하여 저 높이 청명한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시는 것이 틀림없다. 예수의 얼굴은 하느님이신 사람으로서의 당신이 가장 기쁨의 순간에서처럼 빛난다. 그것은 기적을 행하실 때의 사람의 마음을 끄는 눈길을 가진 강렬한 얼굴이 아니고,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일치를 나타내실 때의 위엄있는 얼굴도 아니며, 잘못에 대항하실 때에 보이시는 준엄한 얼굴도 아니다. 그 모든 얼굴이 다른 빛으로 반짝인다. 그러나 지금의 빛은 당신의 온 자아(自我)의 긴장을 푸시는 때의 빛이다. 예수의 자아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셔서 당신의 지극히 작은 몸짓이나 말씀 또는 남의 말도 항상 살피실 수밖에 없으며, 세상의 계략에 둘러싸여 계시다. 세상은 해를 끼치는 거미처럼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하느님의 나비가 나는 것을 마비시키고, 그 분의 정신을 사로잡아 세상을 구하지 못하시게 할 희망을 가지고, 세상의 가장 크고 죄되는 무지를 교육하지 못하시도록 그 분의 말씀을 못하시게 입을 틀어막고, 그 분의 손, 영원한 사제이신 그 분의 손을 묶어 마귀와 육체가 타락시킨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시게 하며, 그 분의 눈을 가려, 자선과 용서와 사랑인 그 눈길, 진짜 사탄의 저항이 아닌 어떠한 저항도 이기는 매력인 그 눈길이 마음들을 끌어당기지 못하시게 할 희망을 가지고 그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하느님의 나비 주위에 악마 같은 그물들을 친다.
오! 그리스도의 적들의 일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직도 이러하고 항상 이러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지식과 이간이, 아직도 증오와 질투가, 아직도 좋은 나무의 독이 든 가지처럼 인류 자체에서 나온 인류의 적들이, 그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미워하는 인류를 죽이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보다 인류를 훨씬 더 미워한다는 것은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고 그들은 티끌이기 때문에 예수에게서는 아무것도 빼앗아갈 수가 없는 반면에 인류는 비그리스도교화로 그의 기쁨을 빼앗아감으로써 적극적으로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충실한 마음들 속으로 피해 들어오시어, 거기서 내다보시고, 거기서 말씀하시고, 거기서 인류에게 강복하시고, 그리고 … 그리고 당신을 그 마음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마음들은 … 이 마음들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그러나 자기 존재 전체에, 즉 관능과 기관과 감정과 생각과 정신과 또 … 에까지도 감미로운 고통을 느낄 정도로 불타면서 무상의 기쁨을 가진 하늘에 이르게 됩니다. 눈물과 미소, 탄식과 노래, 심한 피로와 생명을 구성하는 활동도 우리의 동무들이고, 동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존재 자체이기도 합니다. 과연 뼈가 살 속에 있고 혈맥과 신경이 피부 밑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사람을 이루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생겨난 불타는 이 모든 것도 우리 안에,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성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수 없을 이 순간에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몇 순간 이상 계속 되면 우리는 타고 부수어져서 죽을 터이니까요. 우리는 이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는, 오 주님! 교만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시선이 저를 태우고 열광하게 하므로 당신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하여 이 말을 하게 내버려두십시오. … 그때에는 우리가 세라핌이 됩니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나타날 때에 그렇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는 사람들과 물질이 느낄 수 있는 불꽃과 열이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생각합니다. 과연 지옥에 떨어진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반사광, 다만 한 줄기 나무를 태우고 금속을 녹일 정도로 지옥의 불이 세니, 오, 모든 것이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 당신의 불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열병으로 죽어가지 않고, 열병이 우리를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병이신 당신이, 즉 사랑이 우리를 태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우리는 불살라지고, 죽고, 타서 없어지며, 그 사랑으로, 그 사랑에 의하여 이다지도 위대한 일에 저항할 수 없는 마음의 금선(琴線)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그러나 저는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열광이고, 둑을 무너뜨리고 사랑이 아닌 것은 모두 휩쓸어 넘어뜨리는 폭포이며, 사랑은 영혼에 있어서 아주 참되고 아주 생생한 열중한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느끼는 것을 영이 생각으로 빨리 나타내기 때문에 손은 미처 그 감각들을 옮겨쓰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참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 곱절이나 되는 생명으로 살고, 사랑과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자로 세상의 생명과 천상의 생명, 이렇게 두 가지 생명으로 삽니다. 오! 저는 확신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당신, 한 분이시고 세 위이시며 창조주 하느님이신 당신이 아담에게 주셨던 결함도 없고 타락도 없고 한계도 없는 생명에 도달하고 그것을 능가한다는 것을. 그 생명은 당신께로 올라간 다음에 누리는 생명, 당신께로, 당신께로, 당신께로 가기 위하여 마치 성모님의 조용한 잠과 슬거운 승천이 그랬던 것과 같이 천사들의 사랑하는 품에 안겨서 여행한 후에 지상의 낙원에서 천국의 낙원으로 조용히 건너간 뒤에 하늘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생명의 전조(前兆)입니다.
우리는 참된 생을 삽니다. 그러다가 이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은 초월에 놀라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그렇게도 고상한 것에는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그러면서 교만에 빠지지 않았나 하고 두려워서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빛을 더 두꺼운 휘장을 드리워 가립니다. 그 찬란한 빛은 우리의 한계를 불쌍히 여겨서 더 완전히 왕성하게 계속 타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마음 속에 모여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지복의 순간에 다시 힘있게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불과 당신의 빛과 당신의 사랑으로 불타시는 지성소에 휘장을 드리웁니다. … 그리고 기진맥진했지만 재생하여 다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 세기는 하지만 감미로운 포도주에 취해서 말입니다. 이 포도주는 이성을 무디게 하지 않고 다만 그 눈과 생각을 내 예수님, 주님이신 당신이 아닌 것으로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비참을 천주성에 연결시키는 고리이시고, 우리 죄를 위한 구속의 방법이시며, 우리 영혼을 위하여 지복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성자이신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와 영원히 당신 안에 살게 하시려고 당신의 상처입은 손으로 우리의 손을 성부와 성령의 영적인 손 안에 쥐어 주십니다. 아멘.
아니, 예수께서 당신의 사랑의 눈길로 유타의 주민들을 불태우시면서 저를 불사르시는 동안 제가 어디에 갔었습니까? 신부님은 제가 이제는 제게 대한 말을 아주 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말을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받아쓰기를 하고 난 뒤에 즉시 저를 못 살게 구는 피로와 육체적 쇠약, 그리고 제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따라 점점 더 강해지는 정신적인 수줍음이 제게 입을 다물라고 설득하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 제가 너무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성층권(成層圈)의 공기는 자제력을 잃게 합니다. … 저는 성층권보다도 훨씬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 그래서 저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 그리고 또 제가 생각하기에 저 사랑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우리가 항상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발사체(發射體)처럼, 아니 오히려 밀페되고 과열한 가마솥처럼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신부님,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계속합시다.
예수께서 유타에 들어가시니, 사람들은 장터로 모시고 갔다가, 그곳에서 이사악이 30년 동안 고통을 겪은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모시고 간다. 그들은 설명한다. “저희들은 여기 와서 선생님에 대한 말을 하고, 회당에서처럼 기도를 합니다. 여기가 가장 참된 회당입니다. 그것은 저희가 여기에서 선생님을 알기 시작했고, 한 성인의 기도가 선생님을 이리로 모셔왔기 때문입니다. 들어오셔서, 저희가 성인의 집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보십시오.”
그 작은 집에 지난 해까지는 작은 방이 세 개가 있었다. 첫째 방은 불구인 이사악이 구걸을 하던 방이었고, 둘째 방은 광이었고, 셋째 방은 마당쪽으로 향한 작은 부엌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터서 방 하나를 만들었고, 모임에 쓰이는 걸상들이 있다. 마당에 있는 작은 가건물에는 얼마 안 되는 이사악의 가구를 유물 모양으로 넣어 두었고, 유타의 주민들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마당을 덜 을씨년스럽게 만들어, 덩굴 식물들을 심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꽃으로 투박한 판자울타리가 뒤덮여서, 별로 높지 않은 지붕과 같은 높이에 마당 위에 그물처럼 얼기설기 엮어 놓은 밧줄을 따라 정자가 되기 시작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시며 말씀하신다. “우리는 여기에 묵을 수 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의 잠자리만 마련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아이고! 우리 선생님!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저희들인 선생님을 모시고 이리로 올 터이니 저희에게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러나 선생님과 선생님의 일행은 저희 손님들이십니다. 선생님과 하느님의 종들을 모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들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오직 한 가지 일은 집이 있는 만큼 손님이 많지 않다는 것뿐입니다 ….”
예수께서는 승낙하시고 작은 집에서 나오셔서 사라의 집으로 가신다. 사라는 예수와 일행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그의 권리를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
… 예수께서 이사악의 집에서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방과 마당을 꽉 메우고 집 앞의 빈 터에까지도 꽉 들어찼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방 한 가운데로 가셔서 당신 목소리가 마당과 바깥 광장에서도 들리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누가 한 질문이나 어떤 사건으로 암시된 문제를 다루시는 모양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시련을 겪을 때에 주님을 버린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쓰라린 일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죄에 대하여는 그 흔적을 초석(礎石)이나 붕소(硼素)로도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옥의 불도 그 표적을 지우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예레미야의 말이 올바른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우리 실력자들은 정말이지 예언자가 말하는 야생의 나귀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의 사막에 익숙해 있습니다. 왜그러냐 하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과 같이 있기만 하면, 비록 욥과 같이 가난하고, 혼자이고, 헐벗었더라도, 절대로 외롭지 않고, 절대로 가난하지 않고, 절대로 헐벗지 않고, 절대로 사막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느님을 그들의 마음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마른 사막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야생의 나귀들과 같이 바람에서 수컷의 냄새를 맡는데, 이것이 우리의 경우에는 그들의 격정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음란 이외에도 권력과 돈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그들은 이 냄새를 따라가 죄를 저지르기까지에 이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 냄새를 따라가고 있고, 이 다음에는 더 따라갈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복수하실 하느님의 화살에 맞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 그들의 벗은 발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혹은 더 나쁘게 죄가 되는 것에게 ‘당신이 내게는 아버지요, 당신이 나를 낳았습니다.’ 하고 정말로 말했고 또 지금도 말하고 있는 왕과 왕자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때에는 얼마나 창피스럽겠습니까!
정말 잘 들어 두시오. 모세는 우상숭배하는 백성을 보고 분노해서 십계명판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 기도하고 흠숭하고 은총을 얻었습니다. 오랜 옛날에 있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상숭배는 사라지지 않았고 장차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밀가루 속에 넣은 누룩과 같이 커집니다. 지금은 각 사람이 그의 금송아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마음은 제단인데, 거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 세상은 우상의 수풀이 되었습니다. 어떤 나쁜 정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다른 나쁜 정열을 가지고 있고, 어떤 나쁜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이름을 가진 나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지위만을 생각하고, 순전히 관능만을 생각치 않는 사람은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금송아지가 된 얼마나 많은 자아(自我)가 사람들의 마음의 숭배를 받습니까! 이 때문에 그들이 타격을 받고 주님을 부를 때 ‘너의 신들에게 호소하여라, 나는 너를 모른다.’ 하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 그것은 몹시 무서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셨고,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의지의 온 힘을 다하여 당신의 기억에서 그 사람을 지워버리셨다는 표가 됩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하느님께서 이 판정을 내리시는 것이 지나치게 가혹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늘을 보고 ‘나는 너를 모른다.’ 하고 외쳤고, 하늘도 사람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메아리처럼 충실하게 ….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 보시오. 사람은 감사의 의무와 자기 자신의 지능에 대한 존중으로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시고, 더 말할 수 없는 은총이라는 선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자신의 탓으로 은총이라는 선물을 잃고 나서 사람은 ‘내가 네게 은총을 돌려주겠다.’ 하는 굉장한 약속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모욕을 당하신 하느님께서 마치 당신이 속죄할 의무가 있는 죄지은 분이신 것처럼 모욕을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에게 은총을 도로 주려고 여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선물에만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의 신령한 본질을 낮추시어 사람의 살과 피의 벅찬 필수품들을 마련해 주시어 그에게 따뜻한 햇볕과 위안을 주는 물과 낟알과 포도나무와 갖가지 나무와 갖가지 짐승을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살기 위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서 받습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그분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그 분을 알려고 힘씀으로써 그것을 그 분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이성에 대한 존중으로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미친 사람이나 바보는 치료의 실제적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치료해 주는 사람들을 고맙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씻어 주거나 음식을 먹여 주는 사람, 그들을 침대로 데려가거나 침대에 뉘이는 사람, 그들이 위험을 피하도록 보살펴 주는 사람에 대해서 그들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고질로 인하여 짐승같이 되어 치료를 고문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의무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진 자기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떨어뜨립니다. 바보나 미친 사람들만이 아버지와 외부 사람, 은인과 원수를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능을 갖춘 사람은 아버지와 은인을 알고, 그가 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은인이 그에게 그 물건들의 이익을 얻게 했기 때문에 그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까지도 기꺼이 그들을 점점 더 알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능을 가진 존재이고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주님께 대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아버지와 은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저 미친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처녀가 그의 의상을 잊을 수 있고 아내가 그의 허리띠를 잊을 수 있느냐?’ 하고. 오! 있고말고요. 이스라엘은 그들의 의상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처녀들과 그들의 허리띠를 잊고 창녀들의 야하게 번쩍거리는 옷을 입는 음란한 아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계층이 높아지는 데 따라서 그 비율이 더 커집니다. 그렇지만 지위가 더 높은 사람들은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노여움과 눈물을 곁들인 하느님의 다음과 같은 나무람은 이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사랑을 찾기 위하여 네 행동의 성실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하느냐? 오히려 네 타락과 네 행동을 가르치고, 옷자락에 가난한 사람들과 죄없는 사람들의 피가 묻은 옷을 입은 네가 말이다.’
여러분, 거리(距離)는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쉽게 말하는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여러분이 생명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나쁜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한탄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때문에 여러분이 죄가 술렁이고 타락이 넘치는 곳, 간사한 뱀이 내 일을 방해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내게 대한 의심과 거짓말을 교묘히 주입시킴으로써 내게 영향을 끼치려고 색색거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교육을 마련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우선 우리가 서로 알도록,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마련하셨습니다. 나는 우리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는데도 여러분에게 알렸습니다. 이사악이 나를 여러분에게 알렸습니다. 나는 내 말을 여러분에게 하라고 많은 이사악을 보내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어디에서나 사람의 영과 단 둘이 말씀하실 수 있고, 당신의 가르치심으로 사람의 영을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시오.
고독이 여러분을 오류로 이끌어갈까 봐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치 않으면 주님과 그 분의 그리스도에게 불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정말 메시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못할 사람은 메시아가 그에게 마음을 열고 팔을 벌리며 ‘오시오.’하고 말한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오고 싶은 사람들은 오시오, 그리고 남아 있고 싶은 사람은 남아 있으시오. 그러나 이 사람들이나 저 사람들이나 모두 성실한 생활로 그리스도를 전하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불성실에 반대해서 그리스도를 권하시오. 끝까지 충실할 줄을 모르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영혼들의 의상과 허리띠를 잊어버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경솔에 반대해서 그리스도를 알리시오. 여러분은 내게 기쁘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오신 뒤로 저희들 중에는 병자도 없었고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축복이 저희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고. 그렇습니다. 건강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온 것이 여러분에게 항상 모든 일에 정신의 건강을 주게 되도록 하시오. 이런 목적으로 여러분에게 강복하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밭과 여러분의 집과 여러분의 가축떼와 여러분의 과수원에 내 평화를 줍니다. 그것들을 위해 살지 말고 그것으로 살면서 그것들을 거룩하게 쓰고, 여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강복을 듬뿍 사고 하늘 나라에 자리를 마련하시오. 이제는 가보시오. 나는 남아서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