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은 다시 안티오키아의 집에 있고, 이들과 함께 두 제자와 안티고니아의 모든 남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일할 때 입는 짧은 옷을 입고 있지 않고, 긴 명절빔을 입고 있다. 이로써 나는 오늘이 안식일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필립보는 이제 임박한 그들의 출발 전에 적어도 한번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라고 사도들에게 청한다.
“뭣에 대해서요?”
“무엇이든지 맘대로요. 선생님들은 요새 저희가 말하는 것을 들으셨지요. 그것을 참고해서 말씀하시지요.”
사도들은 서로 쳐다본다. 이것은 누구의 소관인가? 물론 베드로가 할 일이다. 우두머리이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말하는 영광을 제베대오의 야고보나 요한에게 준다. 그리고 이들이 막무가내로 말을 안 듣는 것을 보고서야 말을 하기로 결정한다.
“오늘 우리는 회당에서 이사야서 52장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해설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유식하게, 영원한 지혜의 기준으로는 불완전했습니다.
그러나 해설자를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해설자는 손상된 그의 지혜를 가지고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즉 메시아에 대한 지식과 메시아가 가져온 새로운 시대에 대한 지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이 두 가지 은총을 알게 되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믿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은 과월절 동안에 선생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말하는 것도 들었지만 업신여기면서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라자로의 집의 사람들의 마음,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믿음 때문에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넣어주는 암시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그 다른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교사들이었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식하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뜻도 아니고,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이렇습니다. 나자렛의 예수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언약된 메시아이시고 구세주이십니다. 예언자들 중의 마지막 예언자는 정의를 위해 당한 영광스러운 순교 후에 얼마 전부터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있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 말을 여기 있는 사람들 중의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것은 겸손은 믿음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는데, 교만한 사람들에게-그들이 꼼짝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 믿음이 순결하고 빛나게 살고 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겸손했고, 또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주 예수의 군대에서 첫째가 되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속한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는 겸손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고 반대되는 겉보기를 무시하면서까지 믿을 줄을 알면 얼마나 상을 받게 되는지 보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이 두 가지 자질을 갖추어 가지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군대의 일원이 될 것이고, 하늘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열성당원 시몬, 이젠 자네가 말할 차롈세. 나는 끝냈네. 자네가 계속하게.”
이렇게 허를 찔리고, 둘째 연사로 이렇게 분명히 지명된 열성당원은 지체하지 않고 불평도 없이 앞으로 나와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하면서 말한다.
“나는 주님의 뜻으로 우리 모두의 우두머리인 시몬 베드로의 말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신 영원한 진리를 아는 어떤 사람, 사람이 되신 진리의 영원한 종인 어떤 사람이 본 이사야서 52장에 의지해서 말하겠습니다. ‘너 시온아, 힘을 내어라. 찬란하게 몸을 단장하여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약속이 이루어질 때에는 평화가 이루어지고, 유죄판결이 중지되고, 기쁨의 때가오며, 사람들의 마음과 도시들은 그들이 이제는 미움을 받지 않고, 패배하고 매를 맞지 않고, 사랑을 받고 해방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화려한 옷을 입고 숙였던 고개를 번쩍 쳐들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비난하기 위해서 여기 모인 것은 아닙니다. 모든 덕행 중에서 첫째가는 덕행인 애덕이 그것을 금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을 그만두고,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봅시다. 시몬이 말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힘을 내게 하고, 메시아에 대한 수천 년에 내려오는 우리의 믿음이 이제는 그 일이 실현됨으로 인해서 이룩되었기 때문에 화려한 옷을 입읍시다.
메시아,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영혼들만이 그들을 강하게 하고 그들 안에 거룩함과 평화를 부어주는 지혜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육체들도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거룩하신 분의 행위로 가장 끔찍한 병에서 풀려나고 죽음에서까지도 풀려납니다. 이것은 다윗의 후손에 대해서와 성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당신의 말씀을 보내주신 지극히 높으신 분에 대한 환희의 노래가 우리 조국의 산과 들에 울려 퍼지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나도 문둥병자로, 문둥병자들만이 쓰기로 된 야수들이 있는 고독 속에서 여러 해 동안 견디기 어려운 고민 끝에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보고 ‘나자렛의 선생님께로 가보게, 그러면 자네 병이 고쳐질 걸세’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믿고, 갔습니다. 그리고 병이 고쳐졌습니다. 내 몸과 마음의 병이 고쳐졌습니다. 몸에는 나를 사람들과 갈라놓는 병이 사라지고, 마음에서는 나를 하느님과 갈라놓는 원한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추방당하고 병들고 불안하던 내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봉사자가 되어, 사람들 가운데에 가서 그분의 이름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뿐인 필요한 지식을 그들에게 가르치라는 행복한 사명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뿐인 필요한 지식이란 나자렛의 예수가 구세주이시라는 것과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지극히 행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는 알패오의 야고보, 자네가 말하게,”
“나는 나자렛의 선생님의 형제입니다. 내 아버지와 선생님의 아버지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선생님의 형제라고 말할 수 없고, 그분의 하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형제인 요셉의 아버지 자격은 정신적인 것이고, 사실에 있어서 우리 선생님이신 예수의 진짜 아버지는 우리가 흠숭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는 하나이시고 3위이신 당신의 천주성이 제 2위를 하늘에 남아 계신 다른 위들과 결합해 계시면서 세상에 오시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 나자렛의 예수는 한 여인에게서 나셨고, 그의 인성으로 우리와 같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형제이십니다. 그분은 지혜 자체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 말씀하시고, 우리가 하느님께 속해 있게 하기 위해서 오신 하느님의 말씀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계시고, 그분들과 사랑과 능력과 본성으로 항상 결합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뚜렷한 증거로 은총에 의해서 내 친척이었던 의인이 아셨던 이 진리를 여러분이 차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서 억지로 떼어 놓으려고 애쓰며 ‘그 사람은 그저 보통 사람이오’하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하시오. ‘아니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야곱에게서 난 별이시며, 여기 이스라엘의 권위의 지팡이시고, 지배자이시오’하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향을 바꾸지 말도록 하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안드레아, 자네 차롈세.”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갈릴래아 호수의 보잘것없는 어부입니다. 그래서 별빛 아래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조용한 밤에는 나 자신과 말없는 대화를 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분은 언제 오실까? 내가 아직 살아 있을까? 예언에 따르면 아직 여러 해가 모자라는데’ .…생명이 한계가 있는 인간에게는 몇 십 년도 몇 세기나 같습니다.…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오실까?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나실까?’하고, 그리고 내 우둔한 인성은 찬란한 왕의 화려함, 왕궁, 행렬, 잘 울리는 말방울 소리, 권력, 견딜 수 없는 권위 같은 것…을 꿈꾸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 위대한 왕을 누가 쳐다볼 수 있을까’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권력의 나타남은 시나이산에서 야훼께서 친히 일으키신 두려움보다도 더 많은 두려움을 일으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히브리인들은 산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영원하신 분이 구름 저쪽에 계셨기 때문에 그들은 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분이 우리를 죽음을 가져오는 눈으로 보실 것이니, 우리는 죽을 것이다…’ 하고.
나는 세례자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고기잡이를 하지 않고 쉬는 때에는 다른 동료들과 같이 세례자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이 달의 어느 날이었습니다.…요르단강 기슭에는 군중이 꽉 차 있었는데, 세례자의 말을 듣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솔길을 따라 우리에게로 향해오는 아름답고 조용한 한 청년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의 옷은 보잘 것 없는데, 그의 외모는 지극히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사랑을 구하고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파란 눈이 잠시 내게 와서 멎었는데, 나는 그 후에는 다시 느끼지 못한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내 영혼을 쓰다듬어주고, 천상의 날개로 나를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얼마 동안 세상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도 달라진 것같이 느껴져서 ‘이제 나는 죽는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 영을 부르시는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나는 황홀해서, 알지 못하는 젊은이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젊은이는 이번에는 세례자를 그 파란 눈으로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자는 돌아서서 그에게로 달려가 몸을 굽혀 인사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의 목소리는 줄곧 천둥소리 같았기 때문에 수수께끼 같은 말이, 알지 못하는 젊은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긴장해서 듣고 있는 내게까지 들려 왔습니다. 내 마음은 그 젊은이가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말들은 이러 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지금은 그대로 두시오. 모든 정의가 이루어져야 하오 ….”
요한은 이미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내가 그분의 신발끈을 끌러 드릴 자격도 없는 그런 분이 오실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벌써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여러분들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어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벌써 키를 들고 계셔서, 짚을 꺼지지 않는 당신 불로 태움으로써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내 앞에는 외모가 부드럽고 겸손한 서민층의 젊은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인이요 마지막 예언자요 예고자인 분이 신발끈을 끌러 드릴 자격도 없다고 한 그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더없이 황홀케 하는 우뢰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평화의 비둘기 모양의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빛이 있은 다음 요한이 ‘여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계십니다’하고 말했을 때 외모가 부드럽고 겸손한 그 젊은이를 메시아 왕으로 예감한 환희 속에서 내 영혼의 목소리로, 내 정신의 목소리로 ‘나는 믿습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나는 이 믿음으로 그분의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의 봉사자가 되시오. 그러면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마태오, 자네가 주님의 다른 영광들을 이야기할 차롈세.”
“나는 안드레아와 같은 차분한 말을 들 수는 없습니다. 안드레아는 의인이었는데,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말에는 축제의 노래와 같은 기쁜 억양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노래와 같은 신뢰하는 평화는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큰 죄인이었습니다. 나는 완전한 오류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감각하게 되었었고,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회당장이 하느님께서는 준엄하신 심판자이시라는 것을 내게 상기시키면서 욕설이나 비난으로 나를 자극할 때에는, 잠시 두려운 생각을 가졌습니다.…그러다가는 어떻든 간에 나는 지옥에 가게 된 놈이야. 그러니 내 관능아, 그렇게 할 수 있는 동안 즐기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만족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더 죄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2년 전에 어떤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파르나움에 왔습니다. 내게도 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분의 전도가 시작되는 때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몇몇 사람만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이 사람들과 또 다른 몇몇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동정녀보다도 더 순결한 그의 훌륭한 씩씩함에 놀랐습니다. 이것이 내게 충격을 준 첫째사항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엄격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꽃을 찾아 가는 벌들처럼 그에게로 오는 어린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기분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기분전환은 어린이들의 순진한 놀이와 악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은 마귀를 몰아내는 사람이고, 성인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앞에서 나는 너무도 소름끼치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그를 피했습니다.
그이는 나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내가 그런 느낌을 가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내 계산대 앞을 지나가면서 언제나 다정스럽고 약간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둔해진 내 양심은 소스라치는 것 같았고, 다시는 그전과 같은 무감각 상태의 정도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사람들은 항상 그분의 말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말을 듣겠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짐 뒤에 숨어서 그분이 작은 사람들의 집단에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에 대한 대사(大赦)와 같은 자선에 대해서 친숙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습니다.…탐욕스럽고 마음이 냉혹한 내가 그날 저녁부터 내 많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일을 비밀히 했습니다.…그러나 그분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 한 번은 그분이 마침 이사야서 52장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나라인 천상 예루살렘에는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과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이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그분에게로 오는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이 하도 설득력이 있어서 그 말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리고.…또 그리고.…오! 그날은 서글픈 눈길이 아니라, 명령적인 눈길이었습니다. 그분은 내 마음을 찢어, 내 영혼을 벌거숭이를 만들고, 불로 지지고, 그 가엾은 영혼을 맡아 많은 것을 요구하는 당신의 사랑으로 그 영혼을 괴롭혔습니다.…이렇게 해서 나는 새 영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뉘우침과 갈망을 가지고 그분께로 갔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분께 ‘주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드러우신 분이 죄인의 마음속에서 사탄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만일 여러분 중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불안해하면, 그 사람은 선생님은 착하신 구세주이시니까, 그분을 피할 것이 아니라, 죄인이면 죄인일수록 용서를 받기 원하며 겸손과 뉘우침을 가지고 그분께로 더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제베대오의 야고보, 이제는 자네가 말할 차례네.”
“정말이지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구먼. 자네들이 말을 했고, 또 내가 했을 말을 다 했거든. 그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조금도 바꿀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나도 안드레아와 함께 요르단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가 가리키기 전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도 곧 믿었습니다. 그분이 빛나게 나타나셨다가 떠나가신 다음 나는 햇빛이 환하게 비추는 산꼭대기에서 어두운 감옥 속으로 들어온 사람 같이 그냥 있었습니다. 나는 태양을 다시 만나기를 갈망했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내게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신 뒤로는 세상에 빛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는 혼자였습니다. 배불리 먹는 동안에도 나는 시장기를 느꼈습니다. 자는 동안에도 나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은 깨어 있었고, 돈이며 직업이며 애정들은 모두가 내가 그분께 가졌던 이 간절한 갈망 뒤로는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 내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게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나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주님의 어린 양, 돌아오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라파엘을 보내셔서 토비아를 인도하게 하신 것처럼, 당신의 천사를 보내셔서 하신 것처럼, 당신의 천사를 보내셔서 저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게 하시고 , 주님의 어린 양인 그분을 찾아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러나 쓸 데 없이 기다리고 고민하며 찾기를 수십 일 동안 하고, 그것이 무익한 것으로 인해 첫번째 붙잡힌 우리 요한을 잃은 것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끝에, 광야에서 돌아오시는 그분이 나타나셨을 때 나는 이내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주님을 통한 형제들인 여러분에게 그분께로 가고 그분을 알아보는 또 다른 길을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요나의 시몬은 그분을 알아보려면 믿음과 겸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열성당원 시몬은 나자렛의 예수를 성경에 있는 말과 같이 존재하시는 분으로 알아보기 위하여는 믿음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다시 단언했습니다. 그런데 열성당원은 그의 고칠 수 없는 육체를 위해 바람을 가지려면 매우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성당원 시몬은 믿음과 바람이 하느님의 아들을 얻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우리가 찾아낸 것을 보존하기 위한 힘의 능력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는 세상과 사탄의 계략을 막는 힘 말입니다. 안드레아는 어떤 거룩한 입이 진리를 전하거나, 유식하다는 인간적인 교만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자하는 갈망으로 진리를 알고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정의에 대한 갈망을 믿음에 결합시키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은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전에 죄인이었던 마태오는 하느님께 이르는 또 다른 길을 여러분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본받는 정신으로 말하자면 무한한 순결이신 하느님을 반영함으로써 관능을 버리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마태오는 우선 가파르나움에 온 알지 못하는 사람의 ‘순결한 씩씩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순결한 씩씩함은 그의 죽은 절제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었으므로 육체적인 본능을 스스로 금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 오시고, 죽었던 다른 덕행들이 다시 살아나기 위한 길에서 장애물을 지웠습니다. 절제에서 마태오는 자비로 건너갔고, 자비에서 뉘우침으로, 그리고 뉘우친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기고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렀습니다. ‘나를 따라라’, ‘갑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벌써 ‘갑니다’하는 말을 했었고, 또 구세주께서는 선생님의 덕행이 죄인의 주의를 처음으로 끌었던 그 순간부터 벌써 ‘나를 따라라’ 하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본받으시오. 남의 경험은 괴로운 것까지도 모두 우리를 인도해서 악을 피하게 하고,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선을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사람이 정신으로 살기를 힘쓰면 그럴수록 주님을 더 잘 알아볼 수 있게 되고, 천사와 같은 생활은 이것을 최고로 돕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요한의 제자였던 우리 가운데에서 그분이 없어졌다가 나타나셨을 때 알아본 사람은 동정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고행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어린 양의 얼굴이 변했었지만, 그는 안드레아보다는 그분을 훨씬 더 잘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순결하시오’ 하고 말합니다. 유다, 이제는 자네가 말하겠나?”
“그러지. 그분을 알아보기 위해서 순결하시오. 그러나 그분을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사랑과 그분 자신 전부와 더불어 여러분 안에 간직하기 위해서도 순결하시오. 이사야가 52장에서 또 이런 말도 합니다. ‘부정한 것은 건드리지도 말아라.…주님의 그릇들을 받들고 가는 자들아, 너희 몸을 깨끗하게 하여라.’ 사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영혼은 모두 하느님이 가득 찬 그릇과 같고,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는 거룩한 그릇을 하느님께 가져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정이 있는 곳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마태오는 천상 예루살렘에는 더러운 것과 하느님과 갈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을 주님이 어떻게 설명하셨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하여는 이 세상에서도 부정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과 갈라져서도 안 됩니다. 최후 순간을 기다려 뉘우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그래도 그렇게 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을 중상하는 사람들이 그분이 승리하실 때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승리의 결과를 누릴 시간이 없을 것과 같이 말입니다. 거룩하고 겸손한 왕을 이 세상의 왕으로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분을 이 세상의 왕으로 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한층 더 그 시간을 위해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고, 오류에 끌려들어가고, 또 하느님의 생각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인간의 생각인 그들의 생각에 실망한 그들은 한층 더 죄가 많을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는 모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하느님의 ‘위’이신 분을 흔해빠진 외양 속에 집어넣어서 괴롭히고 있다고 이사야가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치 더럽혀진 딱딱한 껍질처럼 인류가 있기 시작한 때부터의 그 인류의 비참으로 둘러싸여 계시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그분의 티없는 영혼이 그로 인하여 당하시게 될 고통을 깊은 동정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생각하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이 자기가 어떤 문둥병자의 누더기 옷을 걸치고 더러움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불쾌감을 말입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 죄로 꿰뚫리셨고, 사람의 모든 사욕(邪慾)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사시는 그분의 영혼은 이 접촉에 마치 열병의 불쾌감을 느끼듯이 몸서리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너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고 말하려고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다만 ‘너희 죄를 없애주게 내게로 오너라’ 하고 말하려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인자로 그분은 당신의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하늘에서와 같은 그 아름다움이 그때도 우리에게 나타났더라면 안드레아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분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순한 어린 양의 아름다움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아름다움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의기소침과 그분에 대한 비난은 이분이 불완전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계시고자 하는 노력으로 소모되셔서 당신의 거룩한 왕권의 승리 가운데 구원을 받은 많은 무리 위에 우뚝 일어서실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을 체험하신 하느님으로 말입니다! 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여러분이 주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야고보와 함께 그분과 같이 자란 나는 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분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그것을 인정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계속 하겠습니다. 제베대오의 요한, 자네 차롈세.”
“산 위에 있는 사자(使者)의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화의 사자, 지복을 예고하고 구원을 전하는 사자, 시온에게 ‘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리라!’하고 말하는 사자의 말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2년 전부터 이스라엘의 산들을 지칠 줄 모르고 누비고 다니며 하느님의 양떼의 양들을 모으기 위하여 부르고, 기운을 회복시키고, 병을 고쳐주고, 용서하고, 평화를 주고 합니다. 그분의 평화를.
그분의 말이 어루만지는데, 조국의 야산들이 기장으로 떨지 않고, 강물들이 기뻐서 솟구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 놀라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떨지 않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주님께 영광! 기다리던 분이 오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찬미 받으소서!’ 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은총과 강복, 평화와 구원을 널리 베푸시는 분, 우리에게 나라의 길을 닦아주시며 그 나라로 부르시는 분이시고, 특히 당신 모든 행위와 말씀으로, 당신의 모든 눈길로, 당신이 숨을 쉬실 때마다 사랑을 널리 베푸시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도대체 세상이 무엇이기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빛 앞에서 눈이 멀어있습니까? 대관절 무덤을 막는 돌보다도 더 두꺼운 어떤 판이 영혼의 눈을 둘러쌓기에 이 빛을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얼마나 큰 죄의 산이 세상 위에 있기에 이렇게 찍어 눌리고, 분리되고, 눈이 멀고, 귀가 먹고, 사슬에 묶이고, 마비되어서 주님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단 말입니까?
구세주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사랑과 하나가 된 빛이십니다. 내 형제들의 입은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업적을 떠올리고, 그분의 길에 이르기 위하여 알아야 할 덕행들을 일러 주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사랑하시오 하고 말합니다. 이보다 더 크고 그분의 본성과 더 비슷한 다른 덕행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면 순결을 비롯해서 모든 덕행을 힘들이지 않고 닦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여러분이 아무 다른 사람도 무질서하게 사랑하지 않을 터이니까 순결을 지키는 것이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그분에게 무한한 완전이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에 겸손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그 보잘 것 없는 완전을 뽐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은 구원하는 고통으로 마음이 부수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고통이 올바른 고통, 즉 여러분이 겪어 마땅한 벌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고, 그분께 드린 마음 괴로움에 대한 고통이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강할 것입니다. 오! 그렇고말고요! 예수님과 일치해 있으면, 우리는 강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강합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 중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까 바라는 마음 가득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것 모두일 것입니다. 참된 지극한 행복을 전하시는 분을, 구원을 전파하시는 분을, 당신의 양떼를 모으시려고 양들을 부르면서 산과 들을 지칠 줄 모르고 돌아다니시는 분을 사랑하시오. 그분의 길에 평화가 있고, 평화는 이 세상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참되신 것과 같이 참된 그분의 나라에 있습니다.
그분의 길이 아닌 길은 어떤 것이든지 버리시오. 일체의 안개에서 빠져나와 빛으로 가시오. 빛을 보기를 원치 않고, 빛을 알기를 원치 않는 세상과 같이 되지 마시오. 그러지 말고, 세상의 빛이신 아들을 통하여, 빛의 아버지이시며 한없는 빛이신 우리 아버지께로 가서, 세위를 하나이신 분으로 결합시키는 오직 하나인 사랑의 지복(至福) 속에 빛의 섬광(閃光)이신 바라끌리토 성령의 포옹 속에 하느님을 누리시오. 폭풍우가 없고, 어두움이 없는 사랑의 무한한 바다여, 우리를 받아들이소서! 우리 모두를! 죄없는 사람도, 회개한 사람도 모두! 당신평화 안에! 모두를! 영원히. 이 세상에 있는 모두를 받아들이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모두를 하늘에 받아들이시어 우리로 하여금 또 항상 당신과 하늘에 사는 분들뿐 아니라, 평화를 기다리면서 세상에서 싸우고 있는 형제들도 사랑하고, 사랑의 천사들과 같이 그들이 싸우고 유혹을 당할 때에 지켜주고 부축해 주어, 그들이 나중에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당신을 끝없이 숭고하게 소멸시키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우리 주 예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평화 속에 당신을 모시고 있을 수 있게 해 주소서.”
언제나 그런 것과 같이 요한은 사랑의 날개짓으로 올라가면서 사람이 잠기는 그곳으로, 신비스런 고요 속으로 영혼들을 데리고 간다.
한참만에야 듣는 사람들의 입술에 다시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말하는 사람은 필립보이다. 그는 베드로에게 “그런데 교사 요한은 말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한다.
“이 사람은 우리 대신 계속 말할 것입니다. 지금은 이 사람을 조용히 놔두시고, 우리도 이 사람과 같이 놔두십시오. 사바 당신은 전에 말한대로 하고, 또 착한 베레니스도….”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모두가 얼굴이 창백하다, 사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고, 두 제자는 그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그렇다.
베드로가 말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저 “기도하세” 하고만 말하고는“주의 기도”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어쩌면 그가 죽는 날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창백해져서 두 사람 사이로 가서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한다. “여보게들, 이제 작별의 시간일세. 자네들을 대신해서 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나? 분명히 자네들의 성덕에 대한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실 주님께?” 신디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무릎을 끊고, 요한도 그렇게 한다. 베드로의 발 앞에 그들이 있다. 베드로는 기계적으로 그들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감정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문다.
엔도르의 요한은 마음의 동요로 몹시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을 쳐들고 말한다. “저희는 선생님의 뜻을 행한다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신디카는 “선생님께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을 끝까지 행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구요….”
그러나 눈물 때문에 그들은 더 긴 말을 하지 못한다. “알았네. 작별의 입맞춤을 하세. 이 시간이 와야만 했어….” 베드로도 흐느낌으로 목이 메어 말을 중단한다.
“우선 저희에게 강복을 주십시오”하고 신디카가 베드로에게 청한다.
“아니야, 나는 안 돼. 예수님의 형제가 하는 게 더 좋아….”
“아니야, 자네가 우두머리야. 우리는 입맞춤으로 축복을 하겠네. 남아있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우리 모두에게 강복을 주게” 하고 타대오가 제일 먼저 무릎을 끊으면서 말한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목소리를 침착하게 하려는 노력과 그의 앞에 있는 작은 집단에게 두 손을 내밀고 축복을 할 때 느끼는 감정으로 얼굴이 빨개진 가엾은 모습으로 힘이 들어 더 거칠어지고, 거의 노인의 목소리처럼 된 목소리로 모세의 축복을 한다.…
그런 다음 마치 누이동생에게 하듯이 여자의 이마에 입맞춤하고, 요한을 일으켜 꼭 껴안고 입맞춤한다. 그리고는…용기를 내어 방에서 빠져나간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도 남아 있는 두 사람에 대하여 베드로가 남아 있는 두 사람에 대하여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이 한다….
밖에는 마차가 벌써 준비되어 있다. 필립보와 베레니스와 말을 붙들고 있는 하인밖에 없다. 베드로는 벌써 마차 위에 올라가 있다.…
“제 주인님께 당신이 제게 부탁하신 친구분들에 대해서는 안심하시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필립보가 베드로에게 말한다. “마리아에게 그애가 제자가 된 다음부터 내가 에우게리아의 평화를 느낀다고 말씀해 주세요” 하고 베레니스가 열성당원에게 조용히 말한다.
“주인님과 마리아와 모두에게 저희가 그분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오! 우리는 저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야! 형제님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
두 제자가 길로 뛰어 나온다.…그러나 속보로 떠난 마차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사라졌다.…
“신디카!”
“요한!”
“우리만 남았구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요!…가엾은 요한, 이리 오세요. 해가지는데, 당신이 여기 그대로 있는 건 몸에 해로울 거예요….”
“내게는 해가 영원히 졌어.…이제는 하늘에서나 해가 뜰 거야.”
그들은 앞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던 방으로 들어가서 탁자에 털썩 엎드리며 걷잡을 수 없이 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에 의해서 생긴 고통, 악의를 가진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고통이, 마치 제 길을 다 흘러 내려오고 나서 호수에 들어가 정지하는 것처럼 정지하면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나는 알패오의 유다가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를 더 많이 얻으며 자랐으면서도 구세주로서의 내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인간적인 해석을 했는지를 네게 지적하겠다. 예언의 현실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내 고통에 관계되는 예언들을 비유와 상징으로 관찰하던 이스라엘 전체도 그와 같았다. 그 때문에 구속의 시간에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을 아직도 메시아로 보는 사람이 이스라엘에 별로 없었던 큰 오류가 되었다. 믿음은 화관일 뿐 아니라, 가시도 있는 관이다. 그래서 영광의 시간뿐 아니라 극적 시간에도 믿을 줄 알고, 하느님께서 그를 꽃으로 덮어 주실 때만 아니라, 가시밭에 누이시는 때에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