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제는? 너희 믿음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는 영혼들아, 이제는 너희들에게 무슨 말을 하랴?
  저 동방의 현자들은 그들에게 진리를 확증해 주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들의 천문학적 계산과 그들의 청렴한 생활로 완전하게 된 심사숙고의 노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음을 가졌었다.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을, 지식에 대한 믿음, 그들의 양심에 대한 믿음, 하느님의 인자에 대한 믿음을. 지식으로 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인류가 기다린 ‘그 별’, 즉 메시아의 별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별의 신호를 믿었다. 양심으로는 하늘의 ‘목소리들’을 받아서 그들에게 ‘저 별이 메시아가 오신 것을 가리키는 별이다’하고 말하는 같은 목소리를 믿었다. 그들의 착함으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속이지 않으셨을 것이고, 또 그들의 의향이 옳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이 목적을 달성 하도록 어떻게든지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하였다. 징조를 연구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들만이 이 징조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들만이 올바른 뜻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불안스러운 소원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의향의 깊은 생각은 지체하지 않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출비와 피로를 미리알고 떠난다. 그들은 다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영원히 구원해 주시기만을 청한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위하여도 아무런 인간적인 보상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들이 길을 떠나기로 결정할 때에 아무런 인간적인 걱정도 하지 않는다. 너희들 같으면 수많은 핑계를 내놓았을 것이다. 말이 서로 다른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로 그렇게 먼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나를 간첩이라고 잡아 가둘 것인가? 사막과 강과 산을 넘고 건너라고 사람들이 내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그리고 더위는? 또 고원의 바람은? 늪이 많은 지대에 창궐하는 열병들은? 비가 와서 불어난 강물들은? 서로 다른 말들은? 그리고‥‥또‥‥또’하고 너희들은 이렇게 따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하고 거룩한 대담성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가 어떤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온전히 당신께 맡깁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당신의 둘째 위(位)에 경배하는 초인간적인 기쁨을 주십시오.’
  그만하면 됐다. 그래서 그들은 머나먼 인도에서부터 길을 떠난다. 수리와 독수리들만이 그 위로 날아다니고, 바람과 급류 요란스럽게 몰아치는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눈이 덮인 끝없이 넓은 책장에 하느님께서 신비스러운 말을 쓰는 몽고의 첩첩산중에서 떠난다. 나일강이 발원하여 하늘빛을 띤 초록색 혈맥처럼 지중해의 파란 심장에까지 흘러가는 오지에서 떠난다. 그리고 산봉우리도, 산림도, 모래도, 대양보다도 더 위험한 물 없는 사막도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별은 그들의 밤 동안에 빛나서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 하느님을 찾을 때에는 동물적인 습관이 초인간적인 초조함과 욕구에 양보해야 한다.
  별은 그들을 북쪽과 동쪽과 남쪽에서 데려오며, 하느님의 기적으로 그 세 사람을 위하여 같은 지점을 향하여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기적으로 그렇게 오랜 여행을 한 뒤에 그 같은 지점에 모이게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기적으로 성령강림의 지혜가 미리 그들에게 주어져, 오직 한 가지 말만을, 즉 하느님의 말만을 하게 될 천국에서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고 그들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게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
  별이 사라졌을 때에만 한동안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 때에는 실제로 위대하기 때문에 겸손한 그들은 그 일이 사람들의 악의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것과, 예루살렘의 타락한 사람들은 별을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잃을 행위를 하였다고 생각하고 몸을 떨고 뉘우치고 벌써 용서를 청할 각오를 하고 성찰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 묵상에 습관이 된 사람들이라 그들의 양심은 매우 민감하다. 그들의 양심은 끊임없는 주의와 예민한 내성으로 세련되어서, 그 안이 마치 거울같이 되어 날마다 일어나는 일의 지극히 작은 흔적도 거기에 나타난다. 그들은 양심을 주인으로 삼고, 그들에게 알려 주고 이해시키는 목소리를 삼았다. 아주 작은 잘못에 대하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것을 향하여, 나라는 것에 대한 영합을 향하여 빗나가는 쪽이나 잘못된 생각 쪽으로 눈길을 한번 돌리기만 해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주인 앞에, 이 엄격하고 밝은 거울 앞에 있을 때면 그들은 그것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지금 그 양심이 그들을 안심시키니 그들은 다시 용기를 얻게 된다.
  ‘아아! 우리 안에 하느님께 반대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식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느님께서 충실한 아들의 영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축복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러한 감정에서 믿음과 신뢰와 희망의 증거가 오고 영혼의 힘과 인내가 온다. 지금은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내가 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며, 틀림없이 한번 더 나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에 폭풍우는 지나갈 것이다.’ 평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상권을 가지고 지도하는 양심에서 오는 평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실제로 위대하기 때문에 겸손’하였다고 나는 말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너희들의 생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어떤 개인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난폭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영향력과 너희들의 어리석은 맹목적 숭배의 공모로 그의 권력을 얻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겸손하지 않다. 어떤 세력 있는 사람의 우두머리 하인이라든가, 어떤 관청의 안내인이라든가, 어떤 행정기관의 공무원이라든가, 그들에게 자리를 하나 마련해 준 사람에게 달린 사람이라든가 하는 사실 때문에 가엾고도 비열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불쌍하다!‥‥
  그런데 저 세 현자는 실제로 위대하였다. 우선 그들의 초자연적인 덕행으로 그러하였고, 다음에는 지식으로, 끝으로는 재물로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미소 한번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씨앗처럼 뿌려서 그 별들의 목걸이로 천사들의 눈을 만족시키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 비하면 자기들은 땅의 먼지에 앉은 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사는 유성을 창조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사는 유성을 기막히게 다양하게 만들어서 한없는 작품을 만드는 무한한 조각가로서 여기에는 화관과 같은 완만한 야산들을 엄지로 한번 눌러 배치하시고, 저기에는 땅덩어리라는 엄청나게 큰 이 몸의 척추와 같은 둥근 산봉우리와 뾰족한 산붕우리로 된 골격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이 터무니없이 큰 몸뚱이의 정맥은 강들이고, 골반은 호수들이고, 심장은 대양들이며, 옷은 삼림들이고, 베일은 구름들이고, 장식품은 투명한 빙하들이고, 보석은 다양한 뉘앙스를 보이는 터키옥과 에머랄드, 오팔과 녹주석들인데, 이것들은 수풀과 바람과 더불어 그들의 주께 찬미의 대합창을 노래한다.
  그들은 그들의 지혜의 원천이시며, 그들의 눈의 시선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을 주시어 현실을 보게 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서는 그들의 지혜로 자기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더 날카로운 시선은 사물 안에서 사람의 손이 쓰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으로 새겨진 말을 읽을 줄 아는 영혼의 눈이다.
  그들은 재물의 소유자로서 자기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한다. 천체와 유성들 금속과 보석들을 뿌려 놓으신 우주의 소유자의 재물과 비교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한없는 재물과 비교하면 티끌인 재물의 소유자로서 말이다.
  유다의 읍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읍내의 초라한 집 앞에 이르러, 그들은 ‘그럴 수가 없어’하고 머리를 가로젓지 않고, 몸을 구부리고 무릎을 꿇고, 특히 마음 속으로 자기들을 낮추고 경배한다. 저기 저 초라한 벽 뒤에는 하느님이 계시다. 멀리서라도 뵈올 가능성을 가지기를 감히 절대로 바라지 못하면서 가호를 비는 그 하느님이 계시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위하여 그 하느님께 비는 것이다. 아! 그들이 바라던 것은 이것뿐이었다. 즉 이제는 새벽도 없고 황혼도 없는 생활에서 그분을 뵙고 그분을 알고, 그분을 차지할 수 있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
  그 하느님이 저 초라한 벽 뒤에 계시다. 그래도 하느님의 심장인 어린 아이의 심장이 아마도 길의 먼지 속에 엎디어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그분의 종들에게는 평화, 영광, 영광과 축복’하고 외치는 그 세 사람의 심장의 고동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사랑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청하는 것은 이것이다. 밤 동안, 그리고 이튿날 아침나절, 그들은 지극히 열렬한 기도로 하느님이신 아기와 깊이 통할 준비를 한다. 그들은 하느님이신 희생제물을 안고 있는 동정녀의 품이라는 제대를 향하여, 너희들이 가는 것처럼 인간적인 일에 몰두하는 영혼으로 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침식을 잊는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인간적인 허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왕중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이다. 군주들의 궁정에서는 고관들이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온다. 그러니 이 왕을 뵈러가는데 왜 명절빔을 입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명절이 어디 또 있겠느냐?
  아! 그들은 먼 그들의 나라에서 그들과 동등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여러번 성장을 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최고의 왕의 발 앞에 홍포와 보석, 비단과 귀한 깃털을 엎드리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의 발 앞에, 그의 부드러운 작은 발 앞에 세상의 직물, 세상의 보석, 세상의 깃털. 세상의 금속들-그의 일에 속하는 모든 것-을 놓아서, 세상의 물건인 그것들도 그것들의 창조주께 경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린 것이 그들에게 땅바닥에 엎드려서 어린 아이가 걸어가는 데 산 양탄자를 바치라고, 먼지, 먼지, 먼지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위하여 별들을 떠나온 그가 그 위로 걸어가게 하라고 명령하면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겸손하고 너그럽고 지극히 높은이의 ‘목소리’에 순종한다. 그 목소리는 갓난 왕에게 선물을 가져가라고 명한다. 그들 자신이 선물을 가지고 온다. 그들은 ‘그분은 부유하시니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하느님이시니 돌아가시지도 않을 것이다’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종한다. 그래서 그들이 구세주의 가난을 구제하는 처음 사람들이 된다. 내일이면 도망자가 될 그들에게 이 금은 얼마나 유익하겠느냐! 멀지 않아 사형을 당하게 될 그에게 이 몰약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이겠느냐! 그의 무한한 순결 주위에서 끓어오르는 사람들의 음탕의 역한 냄새를 맡아야 할 그에게 는 이 유향이 얼마나 경건한 것이겠느냐!
  그들은 겸손하고 너그럽고 순종하고 서로 존경한다. 덕행들은 언제나 다른 덕행들을 낳는다. 하느님께 보내지는 덕행들 다음에는 이웃에게 보내지는 덕행들이 여기 있다. 존경이 사랑이 되는 것이다. 제일 연세 많은 분에게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말하고, 주의 입맞춤을 제일 먼저 받고, 손을 잡아 인도하는 권리가 보류된다. 다른 사람들은 주를 또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세가 높아서 그러지를 못할 것이다.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갈 날이 매우 가까웠다. 그는 이 그리스도를 참혹한 죽음 후에 볼 것이고, 그리스도가 하늘로 돌아갈 때에 구원받은 사람들과 같이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벌써 주름이 잡힌 그의 손에 내맡기는 작은 손의 온기가 노자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새암도 없고, 오히려 나이 많은 현자에 대한 존경이 더 커진다. 그는 자기들보다 더 공로를 세웠고, 더 오랫동안 공로를 세웠다. 하느님인 아기는 그것을 안다. 아버지의 말씀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기의 행동이 말이다. 나이 많은 이를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내는 아기의 순진한 말이 찬양받기를!
  그러나 내 자녀들아, 이 환상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다른 교훈이 있다.
‘자기’ 자리에 있을 줄을 아는 요셉의 태도이다. 순결과 성덕의 수호자와 보호자로 거기 있다. 그러나 권리를 부당하게 가로채지 않는다. 경의를 받고 말을 듣는 것은 그의 예수와 더불어 마리아이다. 요셉은 마리아를 위하여 그것을 기뻐하고, 자기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되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요셉은 의인이다. 둘도 없는 의인이다. 그리고 항상, 이 시간에도 올바르다. 축제 분위기로 흥분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의롭다.
  요셉은 선물들을 다행스러워한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선물들을 가지고 아내와 아기에게 더 안락한 생활을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셉에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는 노동자이니,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그의 두 사랑은 유족과 안락을 좀 누려야 한다. 요셉도 동방박사들도 그 선물이 도망하는 데와 망령 생활하는 데 쓰일 것이며, 망명지에서 그리고 또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흩어지리라는 것을 모른다. 그 때에는 그들이 단골과 가구 따위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하느님이 동정녀와 결합하여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께 의하여 보호된 그들의 집의 벽들 밖에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보호자이고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정배인 여자의 보호자인 요셉이 하느님의 저 신하들이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겸손하다. 사람들의 폭력으로 인하여 다윗의 상속인들이 왕의 소유지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는 보잘 것 없는 목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왕족이고, 왕다운 태도를 보인다. ‘그는 참으로 위대하였기 때문에 겸손하였다’는 말은 그의 경우를 두고도 말한 것이다.
기분좋고 의미심장한 마지막 교훈은 이렇다.
  마리아가 아직 강복할 줄을 모르는 예수의 손을 붙잡고 거룩한 손짓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손을 붙잡아 인도하는 것은 언제나 마리아이다. 지금도 아직 그렇다. 이제는 예수가 강복할 줄을 안다. 그러나 때로는 강복을 해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꿰뚫린 그의 손이 지치고 낙담해서 떨어진다. 너희들이 내 축복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 때에는 마리아가 이 손에 입맞추면서 그 노여움을 억제한다. 아아! 내 어머니의 입맞춤! 그 입맞춤에 저항할 사람이 누구냐? 그런 다음 아주 거역 못할 사랑을 가지고 그 가냘픈 손가락으로 내 손목을 잡고 강복하라고 강요한다. 나는 어머니를 물리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어머니를 너희들의 변호인을 만들려면 내 어머니를 통해야 한다.
  마리아는 너희들의 모후이기 전에 내 모후이며, 너희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내 사랑조차도 알지 못하는 관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말없이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며 내 십자가를 상기시키고 공중에 십자 성호를 긋게 하면서 너희들의 사정을 변호하고 나를 설득시킨다. ‘너는 구세주이니, 구하여라!’ 하고.
내 자녀들아.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광경을 보여 주는 환상에 들어 있는 ‘믿음의 기쁜 소식’이다. 너희들의 이익을 위하여 묵상하고 본받아라.”

  1944년 3월 3일, 금요일.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만을 써라. 며칠 전에 너는 성지를 참배하고자 하는 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다고 말하였지. 너는 그 성지를 보고 있다. 그것도 내가 내 현존으로 그것을 거룩하게 한 그때 그대로의 성지를 보고 있다. 증오나 사랑으로 20세기 동안을 남용하고 난 지금은 그때의 모습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지금 너는 성지를 보고 있지만, 팔레스티나에 가는 사람은 성지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아라.
  둘째 사항, 내게 대하여 말하는 책들까지도 전에는 몹시 좋아하였었지만, 지금은 아무 맛도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한다. 이것도 네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오는 것이다. 내 배려로 실제적인 사실들이 네게 나타났는데, 사람들의 작품이 어떻게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느냐? 이러한 인상은 잘된 번역의 경우에도 생길 수 있다. 번역들은 언제나 원문의 힘을 변질시킨다. 사람들의 기술은 장소에 대해서나 사실과 감정에 대해서나 ‘번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과 사실에 관하여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감정에 관하여 항상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다. 특히 합리주의가 그 기술에 표현되던 생명을 거기에서 상하게 한 지금은 더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보고 알기를 허락하면, 다른 기술은 일체 생기없는 것으로 보여서 불만족스럽고 지긋지긋하게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셋째로, 오늘은 금요일이다. 나는 네가 내 고통을 다시 생활하기를 원한다. 나는 오늘 이것을 네게 요구한다. 즉 내 고통을 네 정신과 육체로 다시 생활하는 것을 말이다. 이만하면 되었다. 평화와 사랑으로 고통을 당하여라. 네게 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