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나가 집 뒤의 과수원 겸 채소밭으로 나오는 모습을 본다. 그녀는 한 여인의 팔에 몸을 기대고 있는데, 서로 닮은 것을 보니 가까운 친척인 것이 분명하다. 안나는 배가 많이 불러 있었고, 아마도 지금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과 같은 찌는 듯한 무더위 때문인지 몹시 지쳐 보인다.
과수원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공기는 여전히 뜨겁고 무겁다. 마치 부드럽고 뜨거운 반죽처럼 칼로 잘라낼 수 있을 것만큼 공기가 짙고 농후하다. 하늘은 인정사정없는 푸른빛을 띠고 있지만, 허공에 떠도는 먼지 때문에 그 푸름마저 약간 흐릿해 보인다.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된 것이 분명하다. 물이 닿지 않는 땅은 문자 그대로 매우 고운 먼지로 변해 거의 흰빛을 띠고 있다. 그 흰빛은 약간 탁한 장밋빛을 머금고 있다. 반면 물을 댄 곳은 짙은 적갈색이다. 나무 밑동과 짧은 채소 이랑을 따라, 그리고 장미와 재스민, 그 밖의 여러 꽃들이 피어 있는 주변에는 물기가 배어 있다. 꽃들은 특히 집 앞과, 정원의 절반을 가로질러 이제는 곡식을 모두 거둔 밭이 시작되는 곳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덩굴시렁을 따라 무성하게 피어 있다.
집의 경계를 이루는 잔디밭도 풀이 더위에 타 버려 듬성듬성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장자리, 작은 붉은 열매가 루비처럼 빼곡히 맺힌 야생 산사나무 울타리 근처만은 풀이 더욱 푸르고 무성하다. 그곳에는 먹이와 그늘을 찾아온 어린 양 몇 마리가 어린 목동과 함께 풀을 뜯고 있다. 요아킴은 포도밭의 이랑과 올리브나무 사이를 오가며 일하고 있다. 두 사람이 그의 일을 거들고 있다. 나이는 많지만 몸놀림은 민첩하고, 일하는 모습에는 즐거움이 배어 있다.
그들은 밭 가장자리의 작은 물막이를 터서 목마른 나무들에게 물이 흘러가도록 하고 있다. 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마른 풀과 메마른 흙 사이를 헤쳐 나아간다. 그리고 포도나무와 탐스럽게 열매를 맺은 올리브나무 둘레를 둥글게 감싸며 퍼져 나간다. 그 물은 잠시 동안 누르스름한 수정으로 만든 고리처럼 반짝이다가, 이내 젖은 흙으로 이루어진 짙은 색의 둥근 띠만 남겨 놓는다.
안나는 천천히 그늘진 덩굴시렁 아래를 지나 요아킴에게 다가간다. 그곳에서는 황금빛 벌들이 금빛 포도송이의 달콤한 즙을 탐내며 윙윙거리고 있다. 요아킴은 그녀를 보자 서둘러 다가와 맞이한다.
“여기까지 나왔소?”
“집 안이 화덕처럼 뜨거워요.”
“힘들지 않소?”
“임신의 마지막 시기에 겪는 유일한 고통이에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가 겪는 더위지요. 요아킴, 당신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비가, 사흘 전부터는 금방이라도 내릴 것 같더니 아직도 내리지 않는군. 들판은 타들어 가고 있소. 우리에게는 가까이에 물이 풍부한 샘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오. 수로를 열어 놓았소. 잎은 시들고 먼지에 뒤덮인 나무들에게는 겨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뿐이지만, 그래도 살아 있게 할 만큼은 되오. 비만 내려 준다면!…”
모든 농부가 그러하듯 애타는 마음으로 요아킴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지친 안나는 여러 빛깔의 실을 엮어 단단하게 만든 마른 야자잎 부채로 연신 부채질을 한다.
그 친척 여인이 말한다.
“저기, 저 큰 헤르몬 산 너머로 구름이 빠르게 올라오고 있어요. 북풍이네요. 날씨가 좀 선선해질 테고, 어쩌면 비도 내릴지 모르겠어요.”
“사흘째 저렇게 헤르몬 산 너머로 구름이 일어났다가 달이 떠오르면 사라져 버리오. 이번에도 또 그럴 거요.”
요아킴은 낙심한 표정이다.
“집으로 돌아가요. 여기 역시 숨이 막혀요. 그리고… 이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안나는 얼굴이 창백해져 본래의 올리브빛 피부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어디 아프오?”
“아니에요. 하지만 성전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을 때 느꼈던 그 크나큰 평화가 다시 느껴져요. 그리고 제가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바로 그 평화도요. 마치 황홀경에 들어간 것 같아요. 몸은 달콤한 잠에 빠져드는 듯하지만, 영혼은 기뻐 뛰며 인간 세상에서는 견줄 수 없는 평화 속에 잠겨 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요아킴. 당신의 집에 들어와 ‘나는 의로운 사람의 아내가 되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되뇌던 그날, 내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다정하고 자상한 사랑이 언제나 당신의 안나를 보살펴 줄 때마다, 나는 그 평화를 다시금 느끼곤 했지요. 하지만 지금의 평화는 달라요.
보세요. 내 생각에는, 이것은 우리 조상 야곱이 천사들의 꿈을 꾼 뒤 그의 영혼을 가득 채웠을 평화와 같은 것이에요. 마치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기름이 모든 것을 감싸고 어루만지듯 영혼을 감싸는 그런 평화 말이에요. 아니, 오히려 라파엘 천사가 토비야 가족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뒤 그들이 누렸던 그 기쁨에 찬 평화와 더욱 닮았다고 해야겠어요. 이 평화 속으로 깊이 잠기면 잠길수록, 그 달콤함을 맛보면 맛볼수록 평화는 더욱 커져만 가요. 마치 내가 푸른 하늘의 끝없는 공간을 따라 올라가는 것만 같아요….
그리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평화로운 기쁨이 내 안에 깃든 뒤부터는 늘 한 노래가 내 마음속에 울려 퍼져요. 바로 늙은 토비야의 찬가(토빗기 13장)예요.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쓰인 노래 같아요…. 이 기쁨을 위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땅을 위해…. 죄를 지었지만 이제 용서를 받은 예루살렘을 위해…. 하지만… 어머니가 된 여인의 망상이라고 웃지는 마세요…. 내가 이렇게 노래할 때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너희 가운데 당신의 성막을 다시 세우시도록 하여라.’
나는 예루살렘 안에 참하느님의 성막을 다시 세우실 분은 이제 곧 태어날 이 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찬가가 이렇게 노래할 때에는, 나는 그 예언이 더 이상 거룩한 도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 아이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너는 찬란한 빛으로 빛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이 네 앞에 엎드릴 것이다. 모든 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네게 올 것이며, 네 안에서 주님을 경배하고 네 땅을 거룩한 땅이라 부를 것이다. 그들은 네 안에서 위대한 이름을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 자녀들로 말미암아 복될 것이며, 그들은 모두 복을 받아 주님께 모여들 것이다. 너를 사랑하고 네 평화를 기뻐하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리고 그 평화를 가장 먼저 기뻐하는 사람은 바로 나예요. 이 아이의 복된 어머니인 나 말이에요….”
안나는 이 말을 하는 동안, 달빛 아래 놓였다가 갑자기 강렬한 불빛 아래로 옮겨진 물건처럼, 또 그 반대로 불빛에서 달빛으로 옮겨진 물건처럼 얼굴빛이 창백해졌다가 다시 붉어지기를 거듭한다. 달콤한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기쁨에 잠긴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남편과 친척 여인의 사이에 끼어 집을 향해 걸어간다. 두 사람은 감동에 젖어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높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떠밀린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러 맹렬히 달려오며 점점 불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판은 점차 어두워지고, 다가오는 폭풍우를 예고라도 하듯 전율하는 듯 보인다. 그들이 집 문턱에 이르렀을 때, 창백한 번개 한 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번쩍이고, 첫 번째 천둥소리는 거대한 큰북을 울리는 듯한 굉음으로 메마른 나뭇잎 위에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들의 하프 선율과 뒤섞인다.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간다. 안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요아킴은 일꾼들이 다가오자 문간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이 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비는 목말라하던 대지에 내리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번개가 번쩍이고 우박을 잔뜩 머금은 먹구름을 동반한 거센 폭풍우가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저 구름에서 우박만 쏟아지면 포도도 올리브도 맷돌에 짓이겨진 것처럼 산산조각 나고 말 거예요. 우리는 다 끝장이예요!”
그러나 요아킴에게는 또 다른 걱정이 있었다. 아내가 이제 아이를 낳을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친척 여인은 안나가 전혀 고통을 겪지 않고 있다고 안심시키지만, 그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친척 여인이나 다른 여인들, 그 가운데 알패오의 어머니까지도 안나의 방을 드나들며 뜨거운 물과 대야, 그리고 널찍한 부엌 한가운데 있는 화덕의 불에 말린 깨끗한 아마포를 가져갈 때마다, 그는 달려가 안나의 상태를 묻는다. 그들이 아무리 안심시켜도 그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는다. 더구나 안나에게서 아무런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걱정스럽게 만든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남자라서 아이 낳는 것을 본 적이 없소. 하지만 진통이 없으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소….”
폭풍우가 너무도 거세게 몰아친 탓에, 저녁은 예정보다 일찍 찾아온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번개가 하늘을 가른다. 온갖 것이 뒤섞여 몰아치지만, 다행히 우박만은 다른 곳으로 쏟아진다. 일꾼 하나가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사탄이 악령들을 거느리고 게헨나에서 뛰쳐나온 것 같군. 저 검은 구름 좀 보게! 공기 속에서 유황 냄새가 나지 않나? 휘파람 소리와 쉭쉭거리는 소리, 울부짖음과 저주의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 정말 사탄이라면 오늘 밤은 단단히 격노한 게 틀림없어!”
그러자 다른 일꾼이 웃으며 말한다.
“큰 먹잇감을 놓쳤거나, 아니면 미카엘이 하느님의 새로운 번개로 한 대 후려쳐서 뿔도 꼬리도 타 버리고 잘려 나갔겠지.”
그때 한 여인이 달려오며 외친다.
“요아킴! 곧 태어나요!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롭고 평안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녀는 작은 물항아리를 두 손에 든 채 다시 급히 안으로 사라진다. 마침내 마지막 번개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번쩍이며 세 사람을 벽 쪽으로 밀쳐낼 만큼 강하게 내리친 뒤, 폭풍우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잦아든다. 집 앞뜰의 땅에는 그 번개의 흔적으로 검게 그을리고 연기를 내뿜는 커다란 구덩이 하나만 남아 있다. 그리고 안나의 방 문 너머에서,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작은 산비둘기가 처음으로 삐약거리는 대신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듯한 갓난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무지개 하나가 하늘 가득 반원을 그리며 그 찬란한 띠를 펼친다.
그 무지개는 헤르몬 산 정상에서 솟아오르는 듯 보였다. 햇살 한 줄기를 받은 헤르몬 산은 섬세한 분홍빛이 감도는 흰 설화석고처럼 빛났다. 무지개는 더없이 맑게 갠 9월 하늘 높이까지 치솟아, 티 하나 없이 씻긴 푸른 창공을 가로질러 갈릴래아의 언덕들을 넘어, 무화과나무 두 그루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남쪽 평야 위를 지나, 다시 또 하나의 산을 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험준한 산맥이 더 이상의 시야를 가로막는 저 먼 지평선 끝에 그 한쪽 끝을 내려놓는 듯 보였다.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야!”
“보게! 어서 저것 좀 보게!”
“마치 이스라엘 온 땅을 하나의 둥근 띠로 감싸 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보게,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벌써 별이 하나 떠 있네. 저 별 좀 보게! 거대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군!…”
“달도 보게! 아직 보름까지 사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보름달처럼 둥글게 차 있잖아. 저렇게 눈부시게 빛나다니!”
그때 여인들이 기쁨에 넘친 얼굴로 새하얀 포대기 속에 싸인 분홍빛 작은 생명을 안고 다가온다. 마리아다, 어머니이신 그분이다! 어린아이의 두 팔로 만든 동그라미 안에서도 편안히 잠들 수 있을 만큼 작은 마리아. 길이라고는 겨우 어른의 팔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리아. 옅은 장밋빛이 감도는 상아 같은 조그마한 머리, 더 이상 울지는 않고 본능적으로 젖을 빨려는 움직임만 보이는 진홍빛 작은 입술. 너무도 작아서 과연 젖꼭지를 제대로 물 수나 있을지 싶을 만큼 앙증맞은 입이다. 동그란 두 볼 사이에는 자그마한 코가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 살며시 건드려 눈을 뜨게 하면, 가늘고 거의 분홍빛이 감도는 금발 속눈썹 사이로 두 조각의 하늘 같은, 티 없이 맑고 푸른 두 눈동자가 세상을 바라본다. 아직은 바라볼 뿐, 무엇을 보는지는 알지 못한다. 둥근 머리를 덮은 가느다란 머리카락도 거의 흰빛에 가까운 어떤 꿀처럼 은은한 분홍빛 금발을 띠고 있다.
귀는 어떠한가? 분홍빛이 감도는 투명한 작은 조개껍데기 두 개처럼, 더없이 완전하다. 그렇다면 저 작은 두 손은 무엇일까? 공중을 더듬다가 이내 입으로 향하는 저 조그마한 두 손은 무엇일까? 지금처럼 꼭 쥐고 있을 때는, 초록빛 꽃받침을 막 뚫고 나와 연분홍 비단 같은 꽃잎을 살짝 드러낸 작은 장미 봉오리 두 송이 같다. 활짝 펼쳤을 때는,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상아로 만든 두 개의 작은 보석 같고, 엷은 장밋빛 설화석고를 깎아 만든 두 개의 작은 예술품 같다. 그리고 손가락마다 달린 손톱은 마치 연한 석류석을 잘게 다듬어 박아 놓은 듯하다. 저 작은 손으로 어떻게 그토록 많은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 발은 또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포대기 속에 감춰진 채 꼬물거리는 움직임만 보일 뿐이다. 그런데 친척 여인이 자리에 앉아 포대기를 살며시 젖힌다. 오! 저 작은 발! 길이라고는 고작 4센티미터쯤 될까. 발바닥은 산호빛 조개껍데기 같고, 발등은 푸른빛이 은은히 비치는 눈처럼 흰 조개껍데기를 닮았다. 발가락 하나하나는 마치 난쟁이 조각가가 빚어 놓은 걸작 같고, 그 끝마다 달린 작은 발톱 역시 연한 석류석 조각을 얹어 놓은 듯하다. 저 인형 같은 발에 맞는 조그만 샌들을 과연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저토록 작은 발로 첫걸음을 떼게 되면 말이다. 그리고 저 작은 발이 어떻게 그토록 험한 길을 걸어가고, 십자가 아래에서 그토록 큰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일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포대기 속에서 꼬물거리고, 다리를 힘차게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며 웃고 또 미소 짓는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귀여운 주름이 잡힌 작은 허벅지와 팔찌를 두른 듯 둥글둥글한 종아리, 뒤집어 놓은 작은 잔 같은 배, 그리고 눈처럼 흰 피부 아래로 숨결의 오르내림이 고스란히 비쳐 보이는 작고도 완전한 가슴을 바라보며 모두가 기뻐한다. 행복에 겨운 아버지 요아킴처럼 입을 맞추려고 그 작은 가슴에 살며시 입술을 대면, 분명 그 안에서 뛰는 작은 심장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심장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 가장 아름다운 심장이다. 인류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티 없는 심장이다.
등은 어떠한가? 보라, 아기를 살며시 뒤집는다. 허리가 오목하게 들어간 아름다운 곡선이 보이고, 통통한 어깨와 연분홍빛 목덜미가 드러난다. 그 목은 제법 힘이 있어, 보라, 조그만 척추 위로 작은 머리를 번쩍 들어 올린다. 마치 이제 막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어린 새 한 마리의 머리 같다. 그러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난 것이 못마땅한 듯 작은 항의의 울음을 터뜨린다. 이 아이는 티 없이 순결하신 분, 지극히 동정이신 분이다. 이 아이는 다시는 어떤 남자의 눈앞에서도 알몸으로 드러나지 않으실 분, 평생 동정이신 분, 거룩하시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다.
아, 가리십시오. 가리십시오. 이 백합의 꽃봉오리를. 이 꽃봉오리는 이 땅에서는 결코 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끝내 꽃봉오리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서만, 삼위일체이신 주님의 이 백합은 그 모든 꽃잎을 활짝 펼치실 것입니다. 그곳에는 죄의 티끌이 없어, 그 순결을 자신도 모르게 더럽힐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에서는 온 천상 궁정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제 몇 해 뒤면 티 없는 한 마음속에 감추어진 채 그분 안에 계시게 될 삼위일체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아기는 다시 흰 포대기 속에 싸여 지상의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그리고 아버지를 꼭 닮았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직 사람의 모습을 겨우 갖추기 시작한 작은 아기일 뿐이다. 그러나 장성한 뒤에는 분명 아버지를 닮게 될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어머니를 닮은 데는 하나도 없다. 피부빛과 눈빛은 아버지를 닮았다. 머리카락도 틀림없이 아버지를 닮았을 것이다. 지금은 백발이지만, 짙은 금발 눈썹이 말해 주듯 젊은 시절에는 분명 금발이었을 것이다. 얼굴 생김새도 아버지를 닮았다. 다만 여인이기에, 그리고 그 여인이기에 더욱 완전하고 더욱 고우며 부드럽게 다듬어졌을 뿐이다. 미소와 눈빛과 몸가짐, 그리고 키까지 모두 아버지를 닮았다. 예수님을 떠올려 보면, 안나는 자신의 큰 키와 조금 더 짙은 상아빛 피부를 손자에게 물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마리아는 키가 크고 유연한 종려나무 같은 안나의 당당한 풍채를 닮지 않았다. 마리아에게는 아버지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다.
여인들도 폭풍우와, 달과 별과 드넓은 무지개가 보여 준 놀라운 표징에 대해 이야기하며, 요아킴과 함께 행복에 가득 찬 산모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아기를 안겨 준다.
안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저 아이는 별이에요. 저 아이의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어요. 마리아, 평화의 무지개! 마리아, 나의 별! 마리아, 티 없이 맑은 달! 마리아, 우리의 진주!”
“마리아라고 이름을 지으려는 거요?”
“그래요. 마리아. 나의 별, 나의 진주, 나의 빛, 나의 평화….”
“하지만 그 이름에는 ‘쓰라림’이라는 뜻도 있지 않소. 그 아이에게 불행을 가져올까 두렵지 않소?”
“하느님께서 저 아이와 함께 계세요. 저 아이는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하느님의 것이었어요. 그분께서 저 아이를 당신의 길로 이끄실 것이고, 모든 쓰라림은 천국의 꿀처럼 달콤한 기쁨으로 바뀔 거예요. 자, 이제는 엄마의 아이로 있으렴…. 조금만 더….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환시는 어머니 안나와 아기 마리아가 함께 첫 잠에 드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일어나 서둘러 오너라, 작은 친구야. 나는 너를 나와 함께 마리아의 동정성을 관상하는 천상의 푸르름 속으로 이끌고 가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에 불타고 있다. 그 관상을 마치고 나면, 너의 영혼은 마치 성부께서 방금 창조하신 아직 육신을 알지 못하는 작은 하와처럼 싱그러울 것이다. 너의 정신은 빛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걸작을 관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온 존재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실 줄 아시는 분이신지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잉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푸르름 속으로, 빛 속으로, 사랑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오너라. 그리고 선조의 책에서 그녀의 영광을 읽어 보아라.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언 8장 22-31절)
너희는 이 말씀을 지혜에 대한 것으로 적용해 왔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로 그녀, 곧 아름다운 어머니, 거룩한 어머니, 지금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나의 어머니이신 지혜의 어머니, 동정 어머니를 가리킨다. 내가 너에게 이 책의 첫머리에 이 찬가의 첫 구절을 적게 한 것은, 하느님의 위로와 기쁨이 세상에 알려지고 고백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곧 너희를 다스리시고 사랑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완전하게, 깊은 내적 기쁨을 누리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에게서 너무도 많은 슬픔의 이유를 받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셨다.
또한 인류가 첫 번째 시련에서 멸망을 받아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혈통을 보존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너희가 용서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리아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오! 아름다우신 동정녀, 거룩하신 동정녀, 티 없으신 동정녀, 사랑으로 충만하신 동정녀, 사랑받는 따님, 지극히 순결하신 어머니, 사랑하는 신부를 얻기 위해서라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가 살아가도록 허락하시며, 마침내 그를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 참으로 합당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기쁨의 피조물, 당신 태양의 태양이요 당신 동산의 꽃이신 그분을 얻기 위해, 이미 너희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베푸셨고, 그보다 더 많은 것까지도 베푸셨을 것이며, 기꺼이 베푸셨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마리아를 위하여, 마리아의 청에 따라, 마리아의 기쁨을 위하여, 끊임없이 너희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마리아의 기쁨은 하느님의 기쁨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 기쁨을 더욱 크게 하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낙원의 위대한 빛을 수많은 광채로 가득 채우며, 그 광채 하나하나가 우주를 위한 은총이 되고, 인류를 위한 은총이 되며, 복된 이들에게조차 은총이 된다. 복된 이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동정녀의 찬란한 기쁨의 미소를 보고자 하시는 열망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새로운 기적 하나하나에, 자신들의 찬란한 알렐루야의 외침으로 응답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무(無)에서 창조하신 우주 안에 인간이라는 임금을 세우고자 하셨다. 그 임금은 육체라는 본성으로는, 물질로 창조되고 물질을 지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 되는 존재였다. 영의 본성으로는, 죄 없던 첫날 은총과 하나 되어 있었기에, 거의 신적이라 할 만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지고하신 지성께서는 먼 훗날의 모든 일까지도 알고 계셨다. 그분의 눈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바라보신다. 과거를 관조하시고 현재를 굽어보시는 동시에, 마지막 미래에까지 시선을 내리시며, 마지막 인간이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까지도 혼동이나 단절 없이 모두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 곁에 있으면서 성부의 상속자가 되고, 반(半)신적 존재가 되도록 창조하신 그 임금이, 이 세상에서는 자신을 빚어 낸 어머니인 땅에서 영원하신 아버지의 어린 자녀로 살아가는 유년 시절을 보낸 뒤, 마침내 당신 나라의 성숙한 백성이 되었을 때, 스스로 은총 안에서 자신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하늘을 훔쳐 버리는 도둑질까지 저지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분명 많은 사람이 그렇게 묻는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을 바랐겠느냐? 비록 이 지상의 하루가 그 자체로는 이처럼 가난하고 헐벗었으며, 너희의 악함 때문에 거칠어졌을지라도, 하느님의 손이 우주에 흩뿌려 놓으신 무한한 아름다움을 알고 찬미하기 위해 살아 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았겠느냐?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이 별들과 행성들을 만드셨겠느냐? 어떤 것은 번개와 화살처럼 창공을 가르며 달리고, 어떤 것은 느리게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장엄하게 제 길을 운행하며, 너희에게 빛과 계절을 선사한다. 영원하고 변함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그들은 저 푸른 하늘 위에, 저녁마다, 달마다, 해마다 너희가 읽어야 할 새로운 한 페이지를 펼쳐 놓는다. 마치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너희를 가두고 있는 감옥에서 잠시 눈을 돌려라. 어둡고, 썩고, 더럽고, 독이 가득하며, 거짓되고, 하느님을 모독하며,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들로 가득 찬 너희의 글들을 내려놓아라. 적어도 눈길만이라도 하늘의 끝없는 자유를 향하여 들어 올려라. 이처럼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너희의 영혼도 푸르게 하여라. 어두운 감옥으로 다시 돌아갈 때 가져갈 빛을 마음속에 간직하여라. 우리가 들려주는 말을 읽어라. 우리는 별들의 합창을 노래하며 그 말을 쓰고 있다. 그 합창은 대성당의 오르간이 내는 어떤 선율보다도 더 아름답다. 우리는 빛나면서 그 말을 쓰고, 사랑하면서 그 말을 쓴다. 우리는 우리에게 존재의 기쁨을 주신 분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으며, 우리에게 존재를 주시고, 빛나게 하시고, 운행하게 하시며, 이 온화한 하늘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고 아름답게 존재하게 하신 그분을 우리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 하늘 너머에는 더욱 숭고한 하늘, 곧 낙원이 있음을 우리는 바라본다. 우리는 너희를, 우리의 보편적인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계명의 둘째 부분을 실천한다. 너희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고, 빛과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베풂으로써 말이다. 우리가 들려주는 말을 읽어라. 우리의 노래와 우리의 빛남과 우리의 기쁨을 이끄는 그 한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
또 누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저 푸른 물을 만드셨겠느냐? 하늘을 비추는 거울이요, 땅으로 향하는 길이며, 물의 미소요, 파도의 목소리인 저 푸른 물을 말이다. 그것 또한 한마디의 말이다. 비단결 스치는 듯한 잔잔한 물결 소리로, 평온한 소녀들의 웃음소리로,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물짓는 노인의 한숨으로, 거칠게 내리치는 파도의 매질로, 부딪치는 굉음으로, 울부짖음과 포효로, 바다는 언제나 한마디만을 말한다. ‘하느님.’
바다는 너희를 위한 것이다. 하늘과 별들이 너희를 위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바다뿐 아니라 호수와 강과 못과 시냇물, 맑은 샘들도 모두 너희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실어 나르고, 먹여 주고, 목을 축여 주며, 깨끗하게 씻어 준다. 그들은 창조주를 섬김으로써 너희를 섬기며, 너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처럼 넘쳐나 너희를 삼켜 버리지도 않는다.
또 누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셀 수 없이 많은 동물의 무리를 만드셨겠느냐? 노래하며 하늘을 나는 꽃 같은 새들과, 달려다니며 일하고, 너희를 먹여 살리며, 너희, 곧 임금인 인간을 즐겁게 하는 종과 같은 짐승들을 누구를 위하여 만드셨겠느냐? 또 누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셀 수 없이 많은 식물과 꽃들을 만드셨겠느냐? 나비를 닮은 꽃들, 보석을 닮은 꽃들, 가만히 앉아 있는 작은 새를 닮은 꽃들, 목걸이를 닮은 열매들, 보석 상자를 닮은 열매들, 너희의 발아래에서는 양탄자가 되고, 머리 위에서는 그늘이 되어 주며, 마음과 몸과 눈과 후각에 기쁨과 유익을 안겨 주는 이 모든 것을 누구를 위하여 만드셨겠느냐?
또 누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대지의 깊은 품속에 광물들을 감추어 두시고, 차가운 샘과 뜨겁게 솟는 온천에는 온갖 무기염류를 풀어 두셨겠느냐? 유황과 요오드와 브롬을 누구를 위하여 마련하셨겠느냐?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한 존재가 그것들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 바로 인간이다.
하느님의 기쁨을 위해서도, 하느님께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만으로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을 바라보시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행복을 누리시고, 충만하시며, 살아 계시고, 안식을 누리신다. 온 피조물이 창조되었다고 해서 하느님의 무한한 기쁨과 아름다움과 생명과 권능이 티끌만큼이라도 더 커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셨던 피조물, 곧 인간을 위하여 만드셨다.
하느님의 이토록 위대한 작품을 바라보고, 그것을 너희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분의 권능에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한다. 비록 세상 끝날에 이르러서야 구원을 받게 되었을지라도, 너희는 살아 있음에 감사했어야 했다.
너희는 인류의 첫 조상들 안에서 이미 하느님을 거역한 자들이었고, 지금도 저마다 교만하고, 음욕에 사로잡히며,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너희가 우주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우주의 선함을 누리도록 허락하신다. 그리고 마치 착한 자녀들에게 하시듯, 삶을 더욱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허락해 주신다. 너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으로 아는 것이다. 너희가 발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 발견하는 것이다. 선한 것 안에서 말이다. 그러나 악의 흔적을 지닌 다른 모든 지식과 발견은 최고의 악, 곧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다.
지고하신 지성께서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도둑이 되고 자기 자신의 살인자가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영원하신 선하심은 그 선하심에 한계가 없으시므로, 죄가 있기 전에 이미 죄를 없애실 방법을 생각해 두셨다. 그 방법은 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도구는 마리아였다. 이렇게 하여 동정녀께서는 하느님의 지고한 생각 안에서 창조되셨다. 모든 것은 성부께 사랑받는 아들인 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나는 임금이므로, 내 신적인 임금의 발아래에는 어느 궁궐도 가져 본 적 없는 양탄자와 보석들이 펼쳐져 있었어야 했다. 어느 군주도 누려 본 적 없는 노래와 찬미와 수많은 종들과 시종들이 내 곁을 에워싸고 있었어야 했다. 꽃과 보석과, 숭고한 것과 장엄한 것과 아름다운 것과 섬세한 것, 곧 하느님의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영이면서도 육신을 취해야 했다. 육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야 했고, 육신을 영광스럽게 하여 정해진 때보다 수많은 세기를 앞서 하늘로 올려 보내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야 했다. 영이 거하는 육신은 하느님의 걸작이기 때문이다. 하늘도 바로 그 육신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육신이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어머니가 필요했다.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아버지께서 하느님이셔야 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배필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셨다.
“이리 오너라. 나와 함께 있어라. 내 곁에서 내가 우리 아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지 보아라. 바라보고 기뻐하여라, 영원한 동정녀여, 영원한 소녀여. 너의 웃음이 이 천상을 가득 채우고, 천사들에게는 첫 음을 들려주며, 낙원에는 하늘의 화음을 가르쳐 주어라. 나는 너를 바라본다. 지금은 아직 영으로만 존재하지만 장차 어떤 모습이 될지를 나는 본다. 오, 티 없는 여인이여! 지금 너는 아직 영일 뿐이다. 나는 바로 그 영 안에서 더없는 기쁨을 누린다. 나는 너를 바라보며, 너의 눈의 푸른빛을 바다와 하늘에 주고, 너의 머리카락의 빛을 거룩한 밀에 주며, 백합에는 너의 흰 순결을, 장미에는 비단 같은 너의 피부를 닮은 분홍빛을 준다. 너의 가지런한 작은 이를 본떠 진주를 만들고, 너의 입술을 바라보며 달콤한 딸기를 만든다. 꾀꼬리에게는 너의 음성을 목에 담아 주고, 산비둘기에게는 너의 눈물을 담아 준다. 또 너의 미래의 생각을 읽고, 너의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나는 창조의 영감을 얻는다.
오너라, 나의 기쁨이여. 네가 내 생각 안에서 춤추는 빛이 되어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들을 너의 놀이터로 삼아라. 이 세상들을 너의 웃음을 위한 선물로 받아라. 별들의 화관과 천체들의 목걸이를 받아라. 달을 너의 고운 발아래 두어라. 은하수의 별 띠를 너의 어깨에 둘러라. 별들과 행성들은 모두 너의 것이다.
오너라.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라. 그것들은 훗날 네 아기의 놀이감이 되고, 네 태에서 태어날 내 아들의 베개가 될 것이다. 오너라. 양과 어린양을, 독수리와 비둘기를 내가 창조하는 것을 보아라. 내가 바다와 강의 그릇을 만들고, 산을 높이 세우며, 눈과 숲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곡식과 나무와 포도나무를 심을 때 내 곁에 있어라. 그리고 너를 위하여 올리브나무를 만든다. 오, 평화의 여인이여! 너를 위하여 포도나무를 만든다. 오, 성체의 포도송이를 맺게 할 가지여! 달려라. 날아라. 기뻐하여라. 나의 아름다운 이여!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씩 창조되고 있는 온 세상이, 사랑이신 너를 통하여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여라. 그리고 너의 웃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지게 하여라. 내 아들의 어머니여, 내 낙원의 여왕이여, 너의 하느님의 사랑이여.”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죄를 바라보시고, 죄 없으신 분을 바라보시며 다시 말씀하셨다.
“이리 오너라. 너는 인간의 불순종이 가져온 쓰라림을, 인간이 사탄과 저지른 영적 간음을, 인간의 배은망덕을 지워 버릴 이다. 나는 너와 함께 사탄에게 승리를 거둘 것이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사랑의 법 안에서 창조하셨다. 그 사랑의 법은 너무나 완전하여, 오늘날의 너희는 그 완전함을 더 이상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너희는 인간이 사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인류가 어떻게 이어졌을지를 생각하면 어리둥절해하는 것이다. 씨를 맺는 식물들과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보아라. 그들은 음란한 결합을 통해, 수많은 배우자와의 수정을 통해 씨를 맺고 열매를 맺더냐? 아니다. 수꽃에서 꽃가루가 나와, 기상과 자력의 복합적인 법칙에 이끌려 암꽃의 씨방으로 들어간다. 씨방은 열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으며, 너희처럼 받아들인 것을 내친 뒤 다음 날 또 같은 쾌락을 맛보려 하지도 않는다. 열매를 맺고 나면, 다음 계절이 올 때까지 다시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꽃을 피울 때에도 오직 생명을 이어 가기 위해서이다.
동물들을 보아라. 모든 동물을. 수컷과 암컷이 아무런 결실도 없는 포옹과 음란한 교접만을 위해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없다. 가까이에서든 멀리에서든, 날아서든, 기어서든, 뛰어서든, 달려서든, 때가 되면 그들은 생명을 낳는 결합의 예식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쾌락에 머물러 그 예식을 피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엄숙하고도 거룩한 결실인 자손에게까지 나아간다. 바로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거의 신적인 존재였으며, 내가 다시 온전한 은총을 회복시켜 준 인간에게는, 너희가 동물 쪽으로 한 단계 내려온 뒤부터 필요하게 된 그 행위의 동물성마저도 오직 그 목적 때문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너희는 식물이나 동물처럼 하지 않았다. 너희는 사탄을 스승으로 삼았다. 너희 스스로 그를 스승으로 선택했고, 지금도 그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는 일들은 너희가 선택한 그 스승에게 걸맞은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하느님께 충실했더라면, 너희는 거룩하게 자녀를 얻는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고통도 없이, 음란하고 품위 없는 교접으로 기진맥진하는 일도 없이. 그러한 행위는 이성적이고 영적인 영혼조차 없는 짐승들마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탄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남자와 여자에 맞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지극히 드높이신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실 한 사람을 세우고자 하셨다. 그 여인은 남자를 알지 않고도 잉태하도록 드높여진 분이었다. 씨앗 없이 꽃을 피워 내는 꽃. 오직 태양의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백합이신 마리아의 훼손되지 않은 꽃받침에서 또 하나의 꽃을 피워 내는 꽃이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승리였다!
쉿쉿거리며 분노를 터뜨려 보아라, 사탄아. 마리아가 태어나는 이 순간에도 너의 증오를 내뿜어 보아라. 이 어린 소녀가 이미 너를 이겼다! 네가 반역자도, 간교한 자도, 타락시키는 자도 되기 훨씬 전부터, 너는 이미 패배한 자였고, 마리아는 너의 승리자였다. 수천 군대가 진을 친다 한들 너의 힘을 이길 수 없고, 사람들의 무기는 너의 비늘 앞에서 힘없이 꺾이며, 영원한 자여, 아무리 거센 바람도 너의 입김에서 풍기는 악취를 흩어 버릴 수 없다. 그런데도 이제 막 태어난 이 아기의 발꿈치는, 분홍빛 동백꽃 속잎처럼 붉고, 비단조차 거칠게 느껴질 만큼 부드러우며, 튤립 꽃잔 안에 쏙 들어가 그 꽃잎을 작은 신발 삼을 수 있을 만큼 작지만, 두려움 없이 너를 짓밟고, 너를 네 소굴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 아기의 울음소리는, 군대도 두려워하지 않는 너를 달아나게 하며, 그 아이의 숨결은 너의 악취로 더럽혀진 세상을 깨끗이 정화한다.
너는 패배하였다. 그 이름과 그 눈빛과 그 순결은 창이 되고, 번개가 되며, 거대한 바위가 되어 너를 꿰뚫고, 쓰러뜨리며, 너를 지옥의 소굴에 가두어 버린다. 오, 저주받은 자여! 너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시는 기쁨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이제는 헛된 일이다. 너는 죄 없이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켜 음욕의 구불구불한 길을 통하여 남녀의 결합과 잉태를 알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피조물 안에서, 당신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자녀를 주시는 분이 되지 못하시게 하였다. 만일 그 질서가 지켜졌더라면, 세상에는 남녀 사이와 민족들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어, 민족들 사이의 전쟁도, 가정 안의 불행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순종했더라면 인간도 사랑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오직 순종했더라면 비로소 참된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으로서, 초자연의 차원에서 인간의 육신에까지 흘러내린다. 그리하여 영과 결합되어 있고, 영을 창조하신 바로 그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육신마저도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게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너희 인간들의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친 육욕일 뿐이다. 혹은 배우자가 자기의 육욕이나 다른 사람 때문에 자기 사랑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치유될 수 없는 불안일 뿐이다. 육욕이 세상에 들어온 뒤로는, 너희는 남편이나 아내의 마음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다는 확신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는 떨고, 울며, 질투 때문에 미쳐 버리고, 때로는 배신에 복수하려 살인자가 되며, 때로는 절망하고, 어떤 이는 의욕을 완전히 잃고, 또 어떤 이는 정신을 잃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사탄아, 네가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저지른 일이다. 네가 타락시킨 이들은, 고통 없이 자녀를 얻는 기쁨을 알 수 있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태어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는 한 여인 안에서, 그리고 한 여인을 통하여 패배하였다. 이제부터 그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티 없는 순결을 바라볼 수 있기 위하여 너의 유혹을 이겨 낼 것이다. 이제부터 어머니들은 고통 없이 아이를 잉태할 수는 없지만, 그분을 위로로 모시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아내들은 그분을 삶의 길잡이로 모시게 될 것이며, 죽어 가는 이들은 그분을 어머니로 모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주받은 자여, 너를 막아 주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도 방패가 되어 주는 그 품에서 죽음을 맞는 것은 참으로 달콤한 일이 될 것이다.
마리아야, 작은 목소리여, 너는 동정녀의 아들의 탄생도 보았고, 동정녀께서 하늘에 나시는 것도 보았다. 그러므로 너는 죄 없는 이들에게는 생명을 낳는 고통도, 죽음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고통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비록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순결하신 분께는 하늘의 선물들이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유보되어 있었지만, 처음 조상들 안에서 끝까지 죄 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남아 있었을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은총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음욕 없이 결합하고 잉태하는 법을 알았기에 마땅히 고통 없이 자녀를 낳았을 것이며, 또한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사탄의 복수에 대한 하느님의 숭고한 승리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의 완전함을 초월적인 완전함으로까지 드높이신 데 있다. 그리하여 적어도 한 사람 안에서는 사탄의 독에 물들 수 있는 인간적 약함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남자의 정결한 포옹에서가 아니라, 영혼을 불의 황홀경 속으로 변모시키는 하느님의 포옹에서 태어나시게 된 것이다.
동정녀의 동정성! 오너라. 이 깊은 동정성을 묵상하여라. 그것을 관상하면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현기증이 일어난다! 어떤 남자와도 혼인하지 않은 여자의 강요된 동정이 무엇이겠느냐? 아무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지만, 몸으로만 동정을 지킬 뿐 영으로는 지키지 못하는 여자의 동정은 또 무엇이겠느냐? 그녀는 수많은 낯선 생각들을 자기 영혼 안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적인 생각들과 더불어 애무하고 또 그 애무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겨우 동정의 그림자이기 시작할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참으로 미약하다.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봉쇄 수도자의 동정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내 어머니의 동정에 비하면 완전한 동정은 아니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언제나 하나의 결합이 있었다. 곧 영과 죄가 맺은 혼인의 결합이다. 세례만이 그것을 끊어 준다. 그러나 세례가 그것을 끊어 준다 하여도, 남편이 죽어 홀로 된 여인이 다시 처녀가 되지 않는 것처럼, 처음 조상들이 죄를 짓기 전에 지녔던 완전한 동정성을 되돌려 주지는 못한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는다. 그 흉터는 아프고, 자신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며, 어떤 병이 주기적으로 독기를 되살려 다시 상처를 터뜨리듯 언제든 다시 상처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동정녀 안에는 죄와의 결합이 끊어졌다는 흔적조차 없다. 그분의 영혼은 성부께서 모든 은총을 모아 그분을 생각하셨을 때와 똑같이 아름답고 온전하다. 그분은 동정녀이시다. 유일하신 분이시다. 완전하신 분이시다.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렇게 생각되셨고, 그렇게 창조되셨으며, 그렇게 머무르셨고, 그렇게 관을 받으셨으며, 영원토록 그러하실 분이시다.
그분은 동정녀이시다. 그분은 범접할 수 없음과 순수와 은총의 심연이시다. 그 심연은 자신이 흘러나온 심연, 곧 완전한 범접할 수 없음과 완전한 순수와 완전한 은총이신 하느님 안으로 끝없이 잠겨 들어간다. 이것이 삼위일체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의 승리이다. 더럽혀진 피조물들에 맞서 하느님께서는 이 완전성의 별을 들어 올리셨다. 병든 호기심에 맞서,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 수줍은 동정녀를 세우셨다. 악에 대한 지식에 맞서, 이 숭고한 무지의 동정녀를 세우셨다. 그분 안에는 타락한 사랑에 대한 무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부부에게 허락하셨던 사랑에 대한 무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은 것이 있다. 그분 안에는 죄의 유산인 육욕의 불씨 자체를 모르는 무지가 있다. 그분 안에는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차갑고도 불타는 지혜만이 있다. 그 사랑은 불이다. 그러나 그 불은 육신을 얼음으로 감싸 준다. 그래서 육신은, 한 하느님께서 한 동정녀와 혼인하시는 제단을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으신다. 이는 하느님의 완전함이, 신부에게 마땅한 질서에 따라 오직 한 점만 신랑보다 낮고, 여인이기에 신랑께 순종하면서도 신랑처럼 티 없는 그분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