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

개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희망이시고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젊음이십니다. 그분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이 젊게 되고 새로워지며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따라서 제가 모든 그리스도인 젊은이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며 여러분이 생기에 넘치기를 바라십니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는 이렇게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로 시작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9년 3월 25일 월요일 로레토 성모의 집에서 ‘젊은이들과 하느님 백성 전체에게 보내는’ 이 교황 권고에 서명하셨습니다. 총 아홉 장, 299으로 이루어진 이 문서에서, 교황님께서는 2018년 10월 바티칸에서 열린 젊은이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풍요로운 대화와 성찰에서 영감을” 얻으셨다고 설명하십니다.

 

1장 하느님 말씀은 젊은이들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십니다. “어떤 구절들은, 젊은이들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다른 눈으로 보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6항). 교황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젊은이들, 곧 요셉과 기드온(7항), 사무엘(8항), 다윗 임금(9항), 솔로몬과 예레미야(10항), 나아만의 젊은 히브리 여종과 젊은 룻(11항)을 간략히 소개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교황님께서는 신약 성경으로 향하십니다. “영원한 젊음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젊은 마음을 주고자 하십니다.”(13항)라고 일깨우시며,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를 얕잡아 보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는 어른들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시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6)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나이는 특권이 아니며, 젊다는 것은 덜 가치 있다거나 덜 존엄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십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고 주님께 마음을 열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데에 청춘을 바치는 것을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17항).

 

2장 영원한 젊음이신 예수님

교황님께서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주제를 다루시며,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찾은 뒤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되돌아간 소년”으로 묘사하는 복음 이야기를 상기시키십니다(26항). 우리는 “예수님이 내향적인 소년이거나 자기만 생각하는 젊은이였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는, 마을에 잘 어우러진 한 가족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는 여느 젊은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특별하다거나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28항). 교황님께서는 소년 예수님께서 “부모님의 신뢰에 힘입어 …… 자유롭게 다니시고 다른 이들과 함께 걸어 나가는 법을 배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십니다(29항). 청년 사목에서 예수님 삶의 이러한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을 가족이나 세상과 격리시켜 버린다거나, 때 묻지 않게 보호받는 선택된 소수로 만들어 버리는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너그럽게 봉사하며 선교에 투신하게 하는 계획들”이 필요합니다(30항).

예수님께서 “젊은이 여러분을 가르치실 때에는 멀리에서 또는 밖에서가 아니라, 몸소 젊은이 여러분과 함께 나누시는 당신 자신의 젊음에서부터 출발하십니다.” 또한 그분에게서 젊은 마음의 전형적인 여러 측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31항).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니, 우리는 참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이 샘물은 우리 꿈과 계획과 원대한 이상이 생동하게 해 주고, 삶에 참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선포하러 나가게 해 줍니다”(32항). 또한 “주님께서는 한밤을 헤매는 다른 젊은이들에게 별빛을 밝혀 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33항).

그런 다음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회의 젊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교회를 늙어가게 하거나 과거에 얽매이거나 퇴보하거나 안주하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를 해방시켜 주시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교회가 또 다른 유혹에서도 벗어나게 해 주시도록 청합시다. 세상이 주는 대로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교회는 젊다고 믿는 것, 교회의 메시지와는 달리 모든 이들과 똑같이 행동하기에 교회는 쇄신된다고 믿는 것이 바로 그러한 유혹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본연의 모습일 때, 곧 날마다 하느님 말씀과 성찬례, 그리스도의 현존과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을 때에 젊게 됩니다”(35항).

참으로 “교회의 일원인 우리는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달라질 수 있는 용기, 이 세상이 주지 않는 다른 이상을 보여 주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관용, 봉사, 순수, 인내, 용서, 자기 성소에 대한 충실성, 기도, 정의와 공동선 추구,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사회적 우애의 아름다움을 증언할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36항). 교회는 열정을 잃고 “그릇된 세속적 안위를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젊은이들은 교회가 젊은 모습을 유지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37항).

그러고 나서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르침을 되새기시며, 예수님의 모습을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그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이는, 몇 가지 구체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39항).

이 교황 권고는 교회를 “성가시고 심지어 짜증나는” 존재로 느끼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중대하고 합당한 원인들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성적 경제적 추문,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적절히 파악하지 못하는 성품 직무자의 미비함, ……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맡겨지는 수동적 역할, 현대 사회 안에서 교회의 교리와 윤리적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서 교회가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40항).

“교회가 더욱 귀여겨들어 줄 것을, 세상을 단죄하고만 있지 말 것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침묵하며 말을 삼가는 교회를 그들은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세 가지 문제에 집착하여 언제나 논쟁만 벌이는 교회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신뢰를 주려면, 다른 이들의 말이 교회가 복음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빛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겸손을 되찾아 그저 경청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41항). 예를 들어,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교회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비판하며, “그러한 요구들의 위험성과 잠재적 오류를 계속해서 지적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살아 있는 교회는 여성들의 정당한 요구에 주의를 기울여 반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 여권 신장 운동 단체들이 제안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42항).

그런 다음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나자렛의 젊은 여인인 마리아’와 그분의 ‘예.’를 제시하십니다. 마리아의 ‘예.’는 “직접 동참하기를 바라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 곧 자신이 약속의 전달자임을 알게 된 확신 말고는 다른 아무런 보증도 없이,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약속의 전달자라고 여깁니까?” 마리아에게 “어려움은 ‘아니요.’라고 대답할 아무런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위험을 무릅쓰시면서 “하느님의 영향력을 전하시는 분(influencer of God)”이 되셨습니다(44항). 교회의 마음은 젊은 성인들로도 가득합니다. 교황님은 세바스티아노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아르크의 요안나 성녀, 푸옌의 안드레아 순교 복자, 카테리 테카크위타 성녀,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제페리노 나문쿠라 복자, 이시도로 바칸자 복자, 피에르 조르지오 프라사티 복자, 마르첼 칼로 복자, 젊은 키아라 바다노 복자를 떠올리십니다.

 

3장 여러분은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십니다. “젊은이들은 세상의 미래입니다.”라고 말하는 데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세상의 현재이기도 하며, 지금도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64항). 그러한 까닭에 “젊은이들의 진정한 물음들을 허용치 않고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때로는 틀에 박힌 정답과 구태의연한 해결책을 제공하려는 경향이 만연해”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귀 기울여야 합니다(65항).

“오늘날 우리 어른들은 흔히 현대 젊은이들의 모든 문제와 실패만 열거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그러한 태도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더욱 간극이 벌어지게 되고 사이는 멀어지며 서로에게 주는 도움은 적어지게 되는 것입니다”(66항). 아버지, 사목자, 청년 지도자가 되도록 부름받는 모든 사람은 “남들이 벽만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 길을 식별하고, 남들이 위험만을 보는 곳에서 가능성을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시선입니다. 그분께서는 젊은이의 마음에 뿌려진 선의 씨앗을 소중히 여기고 길러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젊은이의 마음은 ‘거룩한 땅’으로 여겨져야 합니다”(67항).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반화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68항).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전쟁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들, 착취당하는 이들, 납치, 조직범죄, 인신매매, 노예살이, 성적 착취, 강간의 피해자들을 떠올리십니다. 범죄와 폭력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도 기억하십니다(72항). “많은 젊은이들이 이념화되고 도구화되어, 다른 이들을 파괴하거나 위협하거나 조롱하려는 목적에서 총알받이나 돌격대원으로 이용되고 착취당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 가운데 다수가 다른 이들을 적대시하고 믿지 못하는 개인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정치 집단이나 경제 세력의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계략에 손쉬운 먹잇감이 됩니다”(73항). 지금도 여전히 종교나 인종, 경제적인 이유에서 여러 형태의 소외와 사회적 배척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임신한” 청소년과 젊은이 그리고 “낙태의 상처, 후천성 면역 결핍증의 확산, (마약, 도박, 음란물 등) 다양한 형태의 중독, 집도 가족도 경제 자원도 없는 거리의 아이들의 역경”을 말씀하십니다(74항). 이중의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의 상황도 언급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젊은 자녀들이 겪고 있는 이 비극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비극에 결코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은 세속 정신을 좇는 것입니다. 세속 정신의 유일한 해법이라고는 여러 다른 메시지와 오락거리와 속된 추구로 젊은이들을 마취시키는 것뿐입니다”(75항).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이 자신보다 불행한 또래를 위해 눈물 흘리는 법을 배우도록 초대하십니다(76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설명하신 대로, 사실 “힘 있는 사람들이 갖가지 도움을 제공하지만, 거기에는 흔히 큰 대가가 따릅니다. 많은 가난한 나라들에 제공되는 부유한 나라들이나 국제기구들의 경제 원조에는 대개 성, 혼인, 생명 또는 사회 정의에 대한 서양의 관점을 수용하는 것도 따라옵니다. 이러한 이념적 식민지화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해를 끼칩니다”(78항). 또한 교황님께서는, 아름다운 젊은 모델을 제시하고 젊은이의 신체를 광고에 이용하는 현대 문화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이는 젊은이들과 하등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어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젊음을 가로채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79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람, 상처, 추구”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성(性, sexuality)에 대하여 그리고 젊은이들의 삶과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성의 “본질적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성적 측면을 끊임없이 부각시키는 세상 안에서, 자신의 신체와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며 원만한 정서적 관계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 외에도 흔히 성 윤리가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존재함에도 교회는 “심판과 단죄의 자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학문과 생명 의학 기술과 신경 과학의 발전 앞에서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십니다. 이러한 발전들은 “생명이 선물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타고난 한계를 지닌 피조물이며 기술의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쉽게 착취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82항).

그런 다음에 권고는 “디지털 세상”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디지털 세상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만들어냈고 “독자적인 정보의 유포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여러 나라들에서 웹과 소셜 네트워크는 “이제 젊은이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참여시키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자리가” 됩니다(87항). 그러나 “디지털 세상은 고독, 조작, 착취, 폭력의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크 웹(dark web)’과 같은 극단적 사례까지 있습니다.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중독과 고립 그리고 구체적 현실과의 접촉을 점차 잃어버릴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습니다. …… 사이버 불링(cyber-bullying)의 사례처럼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 나갑니다. 웹은 음란물을 유포하고 성적인 목적을 위하여 또는 도박으로 사람들을 착취하는 창구가 되기도 합니다”(88항). 디지털 세상 안에 “양심과 민주적 절차를 조종하는 기제”를 창출할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편견과 증오를 조장하며 가짜 뉴스와 그릇된 정보의 유포를 촉진”하는 폐쇄적 악순환이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횡행하는 약식 재판을 통하여 개인의 평판이 위험에 처합니다. 교회와 교회의 목자들도 이러한 현상에서 예외가 아닙니다”(89항).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총회 전에 전 세계에서 모인 300명의 젊은이들이 준비한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확언합니다. “온라인상의 관계는 비인간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상 세계에의 몰입은 “많은 사람들을 가족과 문화적 종교적 가치에서 벗어나 고독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디지털 이민’”을 부추겨 왔습니다(90항).

이어서 교황님께서는 “이민을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 제시하시며 수많은 청년 이민들을 떠올리십니다. “교회는 전쟁, 폭력, 정치적 종교적 박해, 기후 변화의 여파를 포함한 자연 재해, 극심한 빈곤을 피해 떠나온 이들에게 특히 관심을 집중합니다”(91항). 그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다른 이민들은 “때때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서구 문화에 매료됩니다. 이러한 기대는 커다란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파렴치한 인신매매범들이 흔히 마약이나 무기 밀매 조직과에 연루되어 이민들의 약점을 이용합니다. ……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 이민이 특히 취약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민을 받아들이는 일부 국가들에서, 이민 현상은 자주 정치적 목적으로 조장되고 이용되어 두려움과 불안을 초래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그들 자신 안에만 갇혀 있을 때에 이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외국인 혐오의 사고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단호한 대처가 필요합니다”(92항). 또한 젊은 이민은 흔히 문화적 종교적 단절을 경험합니다(9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자기 나라에 온 다른 젊은이들과 대립하게 만들고 그들을 위협이 되는 존재로 바라보도록 부추기는 자들의 손에 놀아나지 말라고”(94항) 당부하십니다.

또한 교황님께서는 아동 학대에 대해 언급하시며 아동 학대 방지를 위한 엄격한 조치를 실행하고자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통해 몸소 노력하시며 “용감하게 자신이 겪은 악을 알린 이들”(99항)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과 무관하게 충실하고 너그럽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제들을 떠올리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이 만약 잘못된 길을 들어서 위험에 처한 사제를 보게 된다면, 용기를 내어 그 사제에게 그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에게 한 약속을 상기시켜 주라고 부탁하십니다(100항).

그러나 학대는 교회 안의 유일한 죄는 아닙니다. “모든 이들의 눈앞에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의 나이 들고 주름진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형 수술을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 지체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교회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우리는 결코 교회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101항). 교회 곁을 지킵시다. 그러면 교회는 그 모든 힘과 역량을 다하여 더욱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도움이 있으면, 이 어두운 때는 우리에게 새로운 성령강림을 열어 주는 “참으로 획기적이며 중대한 개혁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102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모든 상황에서도 “탈출구는 있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교황님께서는 부활 아침에 전해진 기쁜 소식을 되새겨 주십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는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지만, 가경자 카를로 아쿠티스(Carlo Acutis)와 같이 디지털 분야를 창의적이고 훌륭하게 이용하는 법을 아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통신 기술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105항). 그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나 고유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많은 이들이 남을 모방하다 삶을 마감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106항). 교황님께서는 당부하십니다. 그 무엇도 “여러분에게서 희망과 기쁨을 빼앗아가거나, 여러분을 끌어들여 노예로 만들게 하지 마십시오”(107항). 성덕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추구하십시오. “젊다는 것은 단지 순간의 쾌락과 피상적인 성과를 추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이 그에 맞는 삶의 목적을 이루려면, 여러분의 젊은 시절은 너그러운 노력과 온 마음을 다한 헌신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108항). “여러분이 젊은데도 힘없고 지치고 실의에 빠질 때, 예수님께 새로운 힘을 청하십시오”(109항).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게 고립된다면 …… 이기적인 세상과 악마의 간계와 유혹에 맞서 싸우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110항). 바로 이때가 우리에게 공동체 생활이 필요한 때입니다.

 

4장 모든 젊은이를 위한 위대한 메시지

모든 젊은이에게 교황님께서는 세 가지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첫 번째 진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를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112항).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11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메모리는 “우리의 모든 데이터를 ‘저장’하고 ‘보관’하는 ‘하드 디스크’가 아닙니다.”라고 단언하십니다. 그분의 메모리는 우리에게서 모든 악의 흔적을 ‘삭제’하며 기뻐하는 부드러운 자애로 가득한 마음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잠시 가만히 멈추어 여러분 스스로 하느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115항). 하느님의 사랑은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우는 사랑입니다.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해시키는 사랑입니다.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사랑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사랑입니다”(116항).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십니다.” 이는 두 번째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흔일곱 번이라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매번 거듭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 어깨에 짊어지십니다”(119항).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사랑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품에 안겨야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문제점, 부족함, 결점보다 큽니다”(120항). 그리고 “그분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있거나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하고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121항).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이는 세 번째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계속 상기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먼 과거의 좋은 모범으로만, 하나의 기억으로만, 이천 년 전에 우리를 구원하셨던 분으로만 여기는 위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러한 분으로만 여기는 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으며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4항).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여러분 삶에서 선은 승리할 것입니다. …… 그리하여 우리는 불평을 멈추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입니다”(127항).

이러한 진리들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드러나시며 예수님께서 드러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성령께서도 계십니다. “날마다 성령께 청하십시오. …… 여러분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빛으로 채우며 더 나은 길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서 어떠한 것도 앗아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필요한 모든 것을 최상의 방식으로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131항).

 

5장 젊음의 길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꿈꾸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는 우리 시야를 편협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 사랑은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하도록 우리를 고양시키고 격려하고 힘 불어넣어 줍니다. 젊은이들 마음에 있는 많은 갈망은 ‘찹찹하지 않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138항).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를, 늘 한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으면서 언제든 도약할 수 있게 준비 자세를 갖춘 이들로 생각하십니다(139항). 젊음은 “대기”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젊음은 직업,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그리고 또한 배우자나 첫 자녀에 대한 “선택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즉시 결과물을 보지 못할 때면 우리는 불안해져 포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꿈들은 조급함이 아니라 희망, 인내, 노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거나 실수를 저지를까봐 두려워하며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142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먼발치에서 삶을 관조하거나 화면 앞에서 삶을 허비하거나 마치 버려진 차량처럼 비참한 처지에 놓이거나 구경꾼처럼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진취적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십시오. …… 활기차게 살아가십시오!”(143항).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끝없이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는 데 집착하지 말고”, 삶의 모든 소소한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라고”(146항) 초대하십니다. 실제로 현재를 살아가라는 것은 “무책임하게 방탕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방탕한 삶은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고 늘 불만족스럽게 만들 뿐입니다”(147항).

“여러분이 지금 젊은 시절에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는다고 해도, 매일의 삶에서 여러분의 가장 친한 친구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시절의 심오하고 완전한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150항).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기에, 그분과의 우정은 깨질 수 없습니다(154항). “우리는 친구와 속 깊은 비밀을 이야기하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우리는 언제나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열어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동하고 개입하여 승리를 이루실수 있도록”(155항) 그분께 자리를 내어드립니다. “여러분의 젊음에서 이 우정을 빼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곁에 계신 예수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경험한 것입니다(156항). 오스카 로메로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믿어야 하는 진리나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금기 사항을 모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멀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나를 무한히 사랑하고 내 사랑을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한 인격체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장과 성숙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영적 성장”을 추구하고 “주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십니다. “여러분의 노력과 지력만으로는 행복해지고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158항).

어른들도 젊음의 가치들을 잃어버리지 말고 성숙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젊음을 새롭게 하고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교황 직무를 시작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저의 시야를 넓혀 주시고 저에게 새로운 젊음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오랜 세월 동안 혼인 생활을 한 부부나 수도원에 있는 수도승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160항). 나이 든다는 것은 “젊음이 선사한 가장 귀중한 것을 소중히 간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한 좋지 않은 것은 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61항). “그러나 저는 또한, 여러분이 다른 이를 모방함으로써는 성화되거나 충만에 이를 수 없음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 여러분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거룩해져야 합니다”(162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신앙 실천을 위한 “형제애의 길”을 제안하시며 다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이를 그러안을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 그러하기에 함께 신앙을 실천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언제나 더욱 바람직합니다”(164항). 그리고 “우리 자신과 자신의 문제와 상처와 슬픔에 머물고자 하는”(166항) 유혹을 이겨 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들의 기쁨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들이 특히 형제적 친교의 기쁨을 나누기를 바라십니다”(167항).

다음으로 교황님께서는 “젊음과 헌신”에 대해 언급하시면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젊은이들은 “작은 무리에만 갇혀 있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그들이 형제애와 사랑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낄지라도 사실 그들의 작은 무리는 확대된 자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평신도의 소명을 단순히 교회 내 봉사의 한 형태로만 생각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 그들은 평신도의 소명이 무엇보다도 가정의 사랑과 사회적 정치적 애덕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168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십니다. “자신의 작은 무리를 넘어서 모든 사람이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사회적 친교를 이루십시오. 사회적 적대감은 파괴를 불러일으킵니다. 적대감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적대감은 나라를 파괴합니다. 적대감은 세상을 파괴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적대감은 전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이 전쟁으로 자멸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없기에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169항).

“사회 참여와 가난한 이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신앙을 발견하거나 신앙에 깊이를 더하고 자신의 성소를 식별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길입니다”(170항). 교황님께서는 본당, 학교, 운동 단체들에서 긍정적 본보기가 되는 젊은이들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이들은 “자주 노인과 병자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가난한 이웃을 방문합니다”(171항).

“또한 어떤 젊은이들은 사회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노숙자들을 위해 집을 짓거나 오염된 지역을 복원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합니다. 이러한 나눔의 힘이 더욱 안정적인 방식으로 전달되고 체계화된다면 바람직 할 것입니다.” 대학생들은 “다른 교회들이나 종교들의 젊은이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사회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에 자신들의 지식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172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의 노력을 격려하십니다. “저는 전 세계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가 더욱 정의롭고 형제애로 가득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 젊은이들은 변화의 주역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발, 변화의 주인공 역할을 다른 이들에게만 맡겨두지 마십시오!”(174항).

젊은이들은 어느 곳에서나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용감한 선교사”라 되라고 부름받습니다. 복음의 증언은 “진리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175항). 그러나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류를 거슬러 헤엄치는 법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을 전하고 그분이 주신 신앙을 함께 나누는 법을 배우십시오”(176항).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거기에는 경계도 한계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곳으로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복음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와 친하고 더욱 수용적이고 환대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177항). “선교가 순조롭고 쉬운 일”(178항)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6장 뿌리를 가진 젊은이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이 때로는 마치 이 세상이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뿌리 없이 미래를 건설하라고 권유당하는 모습”(179항)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가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무시하고 선조들의 경험을 거부하며 과거를 경시하고 자신이 제시하는 미래만 바라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젊은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말한 대로만 행동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젊은이들을 피상적이고 근본 없고 회의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그가 약속만 신뢰하고 그의 계획대로 행동하도록 합니다. 바로 이것이 다양한 이념이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이념들은 모든 차이를 (와해시키거나) 없애버려 반대 세력 없이 군림할 수 있게 됩니다”(181항).

사기꾼들은 젊음에 대한 추앙을 이용합니다. “젊은 육체는 이러한 새로운 추앙의 상징이 됩니다. 젊은 육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우상시하고 음욕을 품습니다. 반면, 젊지 않은 것은 모두 경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젊음의 추앙은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젊은이들에 대한 폄하로 드러납니다”(182항).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그들이 여러분의 젊음을 악용하여 아름다움과 겉모습이 혼동되는 피상적인 삶을 조장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183항). 지치고 때 묻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노동자에게, 병든 남편을 돌보는 나이든 아내에게, 인생의 만추에 서로 사랑하며 신의를 지키는 부부에게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 없는 영성, 공동체 없는 애정 또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 가난한 이들을 위험한 존재로 여기는 두려움, 점점 더 멀게만 여겨지는 미래 낙원에 대한 호언장담들”(184항)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이 이러한 이념에 지배당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이러한 이념은 “문화적 식민지”(185항)로 이어지고, 젊은이들이 소속된 문화와 종교에서 완전히 뿌리 뽑혀 나가게 만들며, 젊은이들을 “일종의 조작 가능한 신상품”처럼 획일화시켜 버립니다(186항).

교황님께서는 “젊은이 여러분이 노년 세대와 맺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관계는, 젊은이들이 과거의 생생한 풍요로움을 발견하고 이를 기억하게 도와줍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가 노인들을 가까이하여 그들의 경험에서 배우라고 권고합니다”(188항). “이는 젊은이 여러분이 노인들의 모든 말에 수긍하거나 노인들의 모든 행동을 용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는 한 세대에서 또 다른 세대로 전해지는 지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입니다”(190항). “세대 단절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 이는 여러분이 새로운 것만 좋고 아름답다고 믿게 만들려는 속임수입니다”(191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꿈과 전망”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십니다. “젊은이와 노인이 모두 성령께 열려 있을 때, 놀라운 화합이 이루어집니다.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 3,1)”(192항). “젊은이들이 그러한 꿈에 뿌리내릴 때에, 그들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습니다.”(193항). 따라서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함께 걸어가며 “함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뿌리는 우리를 옭아매는 닻이 아니라” “우리가 성장하고 새로운 도전들에 맞설 수 있게 해 주는 근본”(200항)입니다.

 

7장 청년 사목

교황님께서는 청년 사목이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젊은이들은 흔히 우리의 일반적인 사목 프로그램들 안에서 그들의 고민, 그들의 요구, 그들의 문제와 상처에 대한 응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202항). 젊은이들 자신이 바로 “청년 사목의 주역입니다. 물론 젊은이들에게는 동행과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창의력과 담대함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자유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통찰력과 독창성과 지식을 활용하여 그들만의 언어로 다른 젊은이들의 사안들과 관심사를 밝히도록”(203항)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 사목은 유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배움의 기회뿐만 아니라, 대화하고 경축하며 노래할 수 있는 기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 살아 계신 하느님과 만나는 경험에 다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여러 행사에”(204항) 젊은이들을 초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 사목은 시노드의 성격을 띠어야 합니다. 곧 “함께하는 여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청년 사목은 두 가지 큰 행동 노선을 수반합니다. 하나는 다가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장입니다. 첫 번째 행동인 다가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 스스로의 역량을 신뢰하십니다. 젊은이들에게는 “함께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길들을 찾을” 역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저마다 비옥한 땅에, 곧 다른 젊은이의 마음속에 첫 복음 선포의 씨를 뿌릴 용기를 내는 것”(210항)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마음에 와 닿는 친밀함의 언어, 관대하고 친근하며 실질적인 사랑의 언어”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설교가 아니라 사랑의 문법으로”(211항)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행동인 성장과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강렬한 하느님 체험으로 감동받은 젊은이들에게 “오직 교리와 도덕 문제들만 다루는 ‘양성’ 모임들”을 제안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그렇게 할 경우에 “결국 많은 젊은이들이 지루해 하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을 때 불타오르던 그 열의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212항).

젊은이들의 성장을 위한 모든 교육 계획이나 여정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교 교리와 도덕에 대한 양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교리적 도덕적 양성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나는 근본적 체험”인 케리그마를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형제적 사랑과 공동체 생활과 봉사를 통한 성장”(213항)에도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청년 사목은 하느님의 사랑과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새롭게 하고 심화하는 기회들을 늘 포함하여야 합니다”(214항). 청년 사목은 젊은이들이 “형제자매로 살아가고 서로 돕고 공동체를 건설하며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215항)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단체들은 “적절한 환경”을, “젊은이들만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힘들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나 기쁘고 축하할 일이 있을 때에 자신이 언제나 환영받고 있음을 느끼고 다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218항).

그 다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육 기관들의 청년 사목”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학교는 “자기 성찰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오로지 자기 보존을 위한 조직으로 여겨지는 일부 가톨릭 학교들이” 있다고 일깨워 주십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풍자적으로 표현하자면, 학교가 마치 ‘외부’의 잘못들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는 ‘방공호’로 바뀌어 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갔을 때, 젊은이들은 “그동안 배운 것과 앞으로 살아갈 세상 사이에 가로놓인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교육자라면 누구나 자기 제자가 전인적 인격을 갖춘 강인한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입니다”(221항).

영성 교육과 문화 교육을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중대한 과제는 바로, 소비지상주의 문화의 되풀이되는 해악에 대해, 신중하고 단호한 결단과 연구, 지식, 나눔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223항). 교황님께서는 “사목 증진”이 필요한 분야로 “예술”(226항), “스포츠”(227항), “환경 보호”(228항)를 가리키십니다.

대중 청년 사목”이 필요합니다. 곧, “젊은이들이 실제로 활동하는 다양한 자리들에서 성령께서 이미 젊은이들 가운데에 씨 뿌려 놓으신 은사들과 타고난 지도력을 촉진하는 더 폭넓고 유연한” 대중 청년 사목이 필요합니다. “이웃에게나 다른 분야들에서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고 있는 신자 젊은이들에게 장애물이나 규범, 통제, 의무 규제를 부과하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젊은이들을 동행하면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230항).

“완전무결한 청년 사목, 추상적 사고를 특징으로 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흠 없이 깨끗한 청년 사목”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는 복음을 진부하고 무의미하고 매력 없는 명제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청년 사목은 결국 젊은이 세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지게 되고, 남들과 다르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공허하고 아무런 결실도 없이 고립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청년 엘리트에게만 적합한 것이 되고 맙니다”(232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린 교회”가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우리의 활동들에 참여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234항). “인생관이 다르거나 다른 신앙을 고백하거나 종교 자체를 멀리하는 모든 이를 위해서도”(235항) 여지를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 대한 복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다가감의 전형적인 모습을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물으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인내로이 들으십니다. 또한 제자들이 스스로 그들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들이 경험한 사건을 성경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때가 되자 그들과 함께 묵으시라는 초대를 받아들여 그들과 밤을 보내십니다. 그런데, 지체 없이 자기들이 왔던 그 길을 되돌아가기로 선택한 것은 바로 그 두 제자였습니다(237항).

항구한 선교사.” 젊은이들이 선교사가 되는 데에는 “긴 여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려고 순례에 나서며 친구나 동료에게 자신과 동행하자고 초대하는 젊은이는 이 소박한 몸짓으로 좋은 선교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239항). “청년 사목은 언제나 선교적이어야 합니다”(240항). 젊은이들의 자유는 존중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동반도 필요합니다”(242항). 가족은 그러한 동반의 첫자리가 되어야 하고(242항), 이어서 공동체도 젊은이들을 동반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젊은이들을 이해와 존중과 애정으로 대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판단하거나 그들 나이에 맞지 않는 완벽함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243항). 그런데 이러한 동반에 헌신하는 숙련된 인력이 부족합니다(244항). 또한 “일부 젊은 여성들은 교회 안에 준거가 될 만한 여성의 역할 모델이 없다고 합니다”(245항).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동반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자질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직접 밝혔습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충실한 그리스도인, 끊임없이 성덕을 추구하는 사람, 판단하지 않고 믿어 주는 사람, 젊은이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고 친절하게 응답해 주는 사람, 깊이 사랑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 영성 생활의 기쁨과 슬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동반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그들 자신도 인간이며 잘못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반하는 사람은 젊은이들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젊은이들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246항).

 

8장 소명

“우리가 첫 번째로 분별하고 발견해야 하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젊은이의 친구가 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250항). 소명은 다른 이들에 대한 선교 봉사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지상 삶은 하나의 봉헌이 될 때에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254항). “우리가 우리 소명에 응답하려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든 면을 증진하고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치장하거나 우리 자신을 무에서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으로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꽃피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257항). “모든 젊은이의 삶 속에서 이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있어 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가족의 형성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와 연관됩니다”(258항).

사랑과 가정”과 관련하여,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들은 사랑의 부름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 함께 가정을 이루는 꿈을 꿉니다”(259항). 혼인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사랑을 감싸 주고 이 사랑이 바로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게 해 줍니다”(260항).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놀라운 선물인 성(性)을 창조하셨습니다. “성은 전혀 금기가 아닙니다.” 성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은 “사랑하고 생명을 낳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은 열정입니다. …… 참사랑은 열정적입니다”(261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별거나 이혼의 증가는 젊은이들에게 큰 고통과 정체성의 위기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나이에 버거운 책임을 떠맡아야 합니다”(262항). 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젊은이 여러분이 가정에 쏟는 모든 노력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은 성장을 위한 최선의 동기 부여를 받을 수 있고, 나눔의 가장 큰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랑을 빼앗기지 마십시오”(263항).

“결정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속임수이고 거짓입니다. …… 대신 저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혁명가가 되십시오. 시류를 거슬러 헤엄쳐 나가십시오”(264항).

노동에 관하여, 교황님께서는 “젊은이 여러분, 일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도움에 의지하여 살아가겠다고는 생각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십니다. “노동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포함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의 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금전적 도움만 주는 것은 위급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임시방편이 되어야 합니다”(269항).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노동계에서 온갖 배척과 소외를 겪고 있는지에 대하여 언급하신 다음(270항), 청년 실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단언하십니다. “이는 정치의 선결 과제로서 매우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노무비 감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수많은 일자리가 기계들로 대체되는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는 특히 그러합니다”(271항), 교황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때로는 주어지는 모든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꿈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부르심을 절대로 완전히 묻어버리지 마십시오. 패배에 굴하지도 마십시오”(272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제8장을 마치며 “특별한 축성의 성소”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성소를 식별할 때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그 부르심을 따르면 이로써 여러분 삶이 더욱 충만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276항).

 

9장 식별

교황 성하께서는 이렇게 일깨워 주십니다. “식별의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모든 유행에 쉽게 휘둘릴 수 있습니다”(279항). “우리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식별의 특별한 한 형태입니다. 이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내려 줄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단이기에, 이러한 식별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독과 침묵이 필요합니다”(283항).

“성소는 선물이지만 분명히 매우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이 선물을 누리려면 우리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289항).

젊은이들의 식별을 돕는 이들에게는 세 가지 감각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감각은 개인을 향합니다. 이는, 말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공유하는 이에게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292항). “두 번째 감각은 식별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는 어디에 은총이 있고 어디에 유혹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려 하는 것입니다”(293항). “세 번째 감각은 상대방을 이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능력입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참으로 원하는 지향”을 식별하는 것입니다(294항).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귀 기울일 때, 상대방이 스스로 발견한 길을 따라가게 하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은 드러내지 말아야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눈앞에서 그러하셨듯이 물러서 있어야 합니다”(296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정표를 강요하지 말고 여정에 함께하며 격려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여정은 언제나 유일무이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길은 없습니다”(297항).

교황 권고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바람’으로 끝맺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의 기쁨과 희망은 여러분이 여러분 앞에 펼쳐진 길을 계속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굼뜨고 두려워하는 다른 모든 이보다 앞서 달려가십시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모습만 바라보며 계속 달려가십시오. 우리가 성체 안에서 경배하는 그분께 이끌려, 고통받는 우리 형제자매들 안에 계시는 바로 그분께 이끌려 달려 나가십시오. 교회는 여러분의 추진력, 여러분의 통찰력, 여러분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 그리고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에 여러분이 먼저 도착하면 거기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려 주십시오”(299항).

– 주교 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 (2019. 4.)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http://www.cbck.or.kr/Notice/13013879?page=4&gb=K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