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Louis Marie Grignion de Monfort) 성인은 1673년 1월 31일 프랑스의 몽포르 라 깐(註. 지금은 ‘몽포르의 쉬르 므’로 지명이 바뀜)에서 태어났다. 루도비코가 태어나던 해, 예수께서는 파리에 있는 파레이 르 모니알 (Paray-le-Monial)의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게 발현하셔서 당신 성심의 불타는 사랑을 인류에게 드러내 보여주셨다.

루도비코의 아버지 요한 그리뇽은 랄 바쉘르레의 공작으로 왕실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혈통 좋은 가문 출신으로 렌느 시 집정관의 딸이었다. 그는 18명 형제 중의 둘째였으나 맏이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맏이 노릇을 했다. 그리뇽 일가는 어디를 가든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이 있었지만 루도비코는 칼 차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남다른 이름을 갖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무명인사로 남아있기만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루도비코 그리뇽이 아니라 몽포르의 루도비코라고 정하기로 했다.

그는 나이 아홉 살이 되어서야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부모와 삼촌인 로베르 신부, 그리고 여러 신부님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루도비코는 천재라고 생각될 정도로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는 불과 12세에 렌느에 있는 성 토마스 아 베케트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갈라카니즘 (Gallicanism)과 얀세니즘 (Jansenism)을 대적해 싸우고, 또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회가 이 학교를 운영했기 때문에 그는 대단히 만족하게 생각했다. 그는 천재라고 생각될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또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의 신앙심은 대단히 두드러졌으며 선한 마음씨는 더욱 그러했다. 사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보냈지만 그는 항상 반에서 일등을 할 만큼 공부를 잘했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노는 시간까지도 그는 기도하기를 아주 좋아했으며 감실 앞에서 혹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몇 시간이고 보내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성 소베르 성당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성모님께서 그가 분명히 사제가 될 것이라고 그의 마음 속에 아주 다정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루도비코는 어릴 때부터 성모님을 대단히 좋아했으며 하느님께 대한 큰 사랑을 갖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는 두 부류의 성인들이 있다. 한 부류는 태어날 때부터의 성인, 즉 실제로 성인의 기질을 다분히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며, 다른 한 경우는 그들의 일생 중 어떤 때에 하느님께서 직접 그를 변화시켜주신 경우이다. 그런데 그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뿐만 아니라 성모님께 대해서도 큰 사랑과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가 어린이였을 때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갖고 계신 문제들, 즉 18명의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고민을 위로해 드렸다고 전해주고 있다. 그는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선하신 하느님과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하늘에 계신 성모님게서 우리들을 잘 돌봐주실 거예요.”라고 위로해 드렸다고 한다. 그의 형제들 중에서 세 명은 사제, 네 명은 수녀가 되었다.

루도비코는 묵주를 손에 들고 자랐다. 그는 동생들이 기도문을 읽게 되었을 때에는 묵주기도의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학교에서는 급우들을 설득시켜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그는 성모님의 성화나 성상만 보아도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고 성모님의 성화나 성상 앞에서 무릎을 끓은 채 한두 시간 기도하는 모습이 여러 사람에게 목격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 준 어머니보다 천상의 어머니가 더욱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견진성사 때 성모님의 이름을 세례명 루도비코에 덧붙여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가 그의 이름이 되었다. 몽포르는 그가 태어난 고장의 이름이다.

루도비코가 대학에 들어간 지 몇 년이 지나서 그의 아버지가 사업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렌느로 데려왔다. 이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렌느에서 아버지와의 사업관계로 그곳으로 온 ‘드 몽띠뉘’라는 여인을 통해 당신 ‘전 세계 모든 신학교의 표본’이었던 파리의 성 슐피스(St. Sulpice) 신학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더욱이 드 몽띠뉘는 루도비코가 그 신학교에 진학할 경우 모든 후원을 약속해주었다. 그 신학교는 많은 성인들의 빛인 쟌 쟈크 올리에(Jean Jacques Olier 1608-1657) 신부에 의해 1648년에 설립되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집이었다. 설립자 올리에 신부는 어렸을 적부터 모든 것을 성모님과 의논했으며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가가는 분이었다. 그는 성모님의 노예, 성모님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노예였다. 어디를 가든 그는 성모님의 성화와 성상들에 정성껏 경의를 표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운 신학교의 모든 사제들이 한결같이 성모님께 봉헌되기를 바랐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그곳 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고, 성 요한 세례자 드 라살이 그곳의 학생이었다. 성 빈센트 아 바울로는 친구인 올리에 신부가 세상을 떠날 때 곁에서 지켜주었다. 그리고 루도비코는 바로 1695년에 이 성 슐피스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는 파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렌느에서 파리까지 350km의 거리를 오로지 도보로 여행했다. 그때 그의 나이 20세였다(1693년). 많은 기록들은 루도비코가 열흘 동안 걸어서 파리까지 갔다고 전한다.

그는 그 여행길에서 첫 번째로 만난 불쌍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었으며 두 번째 사람에게는 돈을 다 털어 주었고, 더욱이 그 열흘 동안 거의 비를 맞았지만 몸을 말릴 곳을 찾을 수 없었던 탓에 파리에 도착할 때쯤엔 마치 거지나 부랑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가 신학교에 나타났을 때 한 당국자는 그가 너무 초라하게 보여 그이게 “당신은 좀더 가난한 자들이 가는 학교로 가야 할 것 같소”라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미망인들과 고아들이 많았고 백성들은 비참과 절망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모두가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그의 후원자였던 드 몽띠뉘도 파산으로 인해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활비와 수업료를 직접 벌어야만 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를 지키며 밤을 세워주는 사람에게 그 댓가로 돈을 지불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으로 그는 돈을 충당했으며 그 일을 할 때면 4시간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4시간은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신학생이었을 때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아주 남달랐다. 그래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매우 초라한 모습의 신학생이 조롱받고 있는 것을 본 루도비코는 그들 사이에 들어가 급우들에게 사랑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그는 “이 친구를 비웃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이 형제에게 뭔가를 해주어야 합니다. 나는 이 형제에게 새옷을 한 번 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모금을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모금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즉시 그 학생을 옷가게로 데리고 가서 가게 주인에게 “이 형제에게 이 액수에 맞는 새옷을 한 벌 주십시오.”하니 주인은 그 돈을 보고 “이 돈으로는 속옷 한 장도 살 수 없어.”라고 했다. 그러자 루도비코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 형제는 제 형제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형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치셨으며 당신은 저보다 더 많이 이 형제를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주인은 루도비코로부터 너무나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되자 “좋아, 새 옷을 한 벌 주지”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루도비코는 그 신학생에게 새 옷을 얻어 입힐 수가 있었다. 루도비코는 가게를 나오면서 그 주인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 선행에 후히 갚아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사람이 루도비코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는 그의 손에 한 줌의 돈을 집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 즉시 그 가게 주인에게 되돌아가서 말했다. “부족했던 돈이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후히 갚아주실 것이라고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는 1700년 6월 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몽포르의 착한 사제”라고 불렀다. 사제로 서품된 후 1700년에서 1716년까지 16년 동안 그는 문자 그대로 걸어서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전했다. 루도비코 성인의 생애 마지막 16년 동안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위한 도보행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16년동안 그는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가 당한 것들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그를 학대한 자가 누구이며, 왜 그는 마침내 독살당하게 되었는가?

성 루도비코는 얀세니즘(Jansenism)이 만연한 시기에 태어났다. 얀세니즘는 17세기에 일어나 이단으로서 얀세니우스라는 주교에 의해서 생겨났다. 얀세니우스에게 있어 하느님은 오로지 정의의 하느님이었으며, 결코 자비의 하느님이 아니었다. 얀세니스트(Jansenist)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대신에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루도비코가 태어난 1673년에 주님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에게 발현하셔서 당신의 성심을 보여주시며 “이것은 내가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데도 단지 배은망덕과 냉대만을 받은 내 성심이란다”하고 말씀하시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계시해주셨다. 루도비코는 얀세니즘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죄인들의 구원의 희망에 대해 늘 강조하며 다녔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얀세니스트들이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갖고 있지 않음을 보고 그는 성모님께 대한 진실하고도 애정깊은 신심에 대해 강론했다. 이로써 그는 수많은 신자들을 포함하여 사제들을 회개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루도비코는 많은 교구에서 추방당해야 했다.

성 루도비코는 교황 클레멘스 11세로부터 교황 특사, 교황 파견 선교사 (Missionary Apostolic)라는 자격을 얻어 어느 교구를 막론하고 그곳에서 전교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아 많은 곳에서 반대를 받으면서도 강론을 계속했다. 마침내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체포하여 그의 국 그릇에 독약을 넣었지만 그 즉시 내뱉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느 전기 작가는 말하기를, 그는 가장 훌륭한 웅변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강론할 때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으며 몇 시간이라도 끄덕없이 열정적인 강론을 할 수 있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날엔 그렇지 않았다. 그날 그는 그리스도의 친절과 온유에 대해 강론했는데 주교를 비롯한 모든 청중들을 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강론대에서 내려왓을 때는 완전히 지쳐있었으며 열이 펄펄 났다. 그리고 그 이틀 후에 그는 선종했다. 1716년 4월 28일, 그의 나이 43세였다.

성 루도비코는 43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무엇보다도 두 가지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얀세니즘 이단을 대항한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 있어 그의 승리를 확인이라도 하듯 그가 세상에 아직 살았을 때인 1713년 얀세니즘은 로마로부터 공식적으로 파문당했다.

또 하나는 마리아론의 정립이다.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마치 우리 육신이 공기로 숨쉬는 것처럼 영혼은 마리아를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나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전파했다. 마리아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으며, 마리아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께로부터도 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거룩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개론』(Traite de la vraie devotion a la Sainte Vierge, 주,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봉헌을 마리아께 대한 가장 완전하고 참된 신심으로 언급하고 있다.

성 루도비코는 사제요 예언자며, 사도요 개혁자였다. 그는 마지막 시대를 예언자적 식견으로 바라보며 마리아의 시대를 예언했다.

성 루도비코는 1716년 4월 28일 43세의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모든 이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으며 『거룩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개론』을 비롯하여 『묵주기도의 비밀』, 『마리아의 비밀』, 『십자가의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 『완전한 지혜에 대한 사랑』등 수많은 훌륭한 저서들을 남겼다. 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개론』은 “이 작은 책을 이빨로 물어뜯기 위해서 으르렁거리면서 분노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은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어두운 구석이나 궤짝 깊은 곳에 쳐박아 두게 할 것이며, 더욱이 이 책을 읽어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박해할 것이다.” (114항)라는 그의 예언대로 오랜 세월 묻혀있다가 1842년 4월 21일에 가서야 발견되어 널리 전해졌다.

성 루도비코는 또한 「지혜의 딸들」 수녀회를 창설하였으며, 그 수녀회는 오늘날 로마에 총본부를 두고 전 세계에 걸쳐 사천여 명의 회원이 있다.

1888년 1월 22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7월 20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는데 이 시성으로써 교회는, 루도비코 성인이 행하신 그 방법으로 신자들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결합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엄숙히 인정했고 모든 신자들에게 그의 이같은 본보기를 따르도록 권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