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마리아 발또르따의 사적 계시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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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글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속담이 있다. 이는 본래 테르툴리아노 성인이 이교도 박해자를 조롱하면서 했던 다음의 말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더 많이 베어 넘어뜨릴수록, 우리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씨앗이다.”
교회의 성립 이래, 대지는 입을 벌려 셀 수 없는 교회의 자녀 순교자들의 피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는 최상의 희생을 바친 그 자녀들의 피로써 원기를 회복하여 자신의 오래된 덩굴로부터 수없는 새싹을 틔웠다. 우리는 교회의 이 숭고한 자녀들의 이름을 생명의 책이 펼쳐지는 최후의 날에 가서야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애로우신 섭리는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이 세상에 알려지고, 존경받고, 기억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어머니 교회는 미사 경문에 몇몇 순교자의 이름을 간직해왔다.
이들 가운데 본 글의 주인공이 있다. 아프리카의 예비 신자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인하여 카르타고의 원형 경기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203년 3월 6일 순교하였다. 이들의 순교에 대한 이 글은, 이탈리아의 현대 신비가 마리아 발또르따에게 주어져 그녀의 “노트”에 기록된 환시와 받아쓰기로부터 특별히 번역한 것이다. 발또르따는 점점 인기를 더해가는 그녀의 주요 작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많은 환시와 받아쓰기도 기록하였다. 이들은 “1943년 노트”, “1944년 노트”, “1945-1950년 노트”라는 세 권의 두꺼운 책이며, 대부분이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 글은 “1944년 노트”의 비평판으로부터 번역한 것인데, 버틀러의 Acta Sanctorum (Lives of the Saints; 성인들의 생애) 3월 7일분과 같은, 보다 전통적인 이야기와 함께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 글은 먼저 발또르따가 그녀에게 보여진 순교자들의 투옥과 죽음에 대한 생생한 목격으로 시작되고, 그 다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순교자들의 아낌 없는 희생에 대하여 받아쓰게 하신 두 가지 화법의 주석이 이어진다.
슬프게도, 현 시대에서 우리는 위와 같은 지대한 희생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성론, 유물론, 음란, 그리고 권력에 굶주린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냉담해지고 무감각해진 오늘날의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의 선조들, 형제 자매들의 희생으로 극진히 간직되고 이어 내려온 이 유서깊은 믿음의 진리를 일부 혹은 전부를 내팽개쳤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은총으로 다시 불리움 받고 있다. 이는 아마 어리석고 배은망덕한 자들,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들이 수많은 “가톨릭/그리스도인”들이 남긴 그토록 값비싼 유산을 낭비한 것에 대한 배상일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중국, 아프리카, 구 유고슬라비아,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신실한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그들 생명의 피의 궁극적인 희생을 위해, 그리스도,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믿음의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오늘날 새로이 부름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오늘날의 그 전혀 별개의, 수없이 많은 예언자들 및 선견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일치를 믿음으로 (믿는게 당연하다!) 받아들인다면, 미국의 거리에도 새로운 순교자의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특히 가톨릭 신자들에 대하여 고조되고 있는 비난의 물결이 모욕이나, 비웃음, 정부와 법 시행기관에 의한 매스미디어에서의 언어적인 혹은 심지어 물리적인 폭행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현대의 예언자들이 우리에게 대비시키려 했던, 보다 폭력적인 박해의 어두운 전조를 보고있는 것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 기록된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의 순교는, 이분들의 순교 시대처럼 점점 더 험악해져 가는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고 도움을 줄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시어 저희의 운명을 직면할 힘과 용기를 얻게 해 주소서.
발또르따: [“오후 5시 무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녁, 나는 이 환시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네게 ‘믿음의 복음’(복음서에 나타난, 혹은 복음서에 관련된 상세한 환시)에 속한 또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만족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는 어떤 이 (아마 발또르따의 영적 지도자 Migliorini 신부를 언급하시려는 것이다. 그는 발또르따가 손으로 쓴 환시와 구술을 받아 면밀히 조사하고 인쇄하였다) 가 자기 희망을 표현했고, 나는 그를 만족시켜 주려 한다.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보고, 관찰하고, 묘사하여라. 너의 고통은 내게 맡기고, 서술한 글은 네 형제들에게 맡겨라. ”
“그래서 저는 저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쓰기 시작합니다. 이 고통은 대단히 심하여 마치 바이스(vise: 조임장치)에 머리를 넣은 것 같았고, 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마로, 그리고 등의 척추로 내려갔습니다. 뇌수막염으로 폭발해버릴 것 같은 끔찍한 고통으로 저는 쓰러졌습니다. 지금도 그 고통은 극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가 순명하여 이 글을 무사히 써 내려가도록 하셨습니다. 다음엔…, 다음엔…, 어떻게 될지, 어떻게 될지.
한편, 정말이지 저는 놀랐던 상태에서 다른 놀라움으로 옮겨갔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제가 어느 아프리카인, 혹은 적어도 아랍인 앞에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이 성인들이 유럽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의 사회적 물리적 상태와 순교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녀 아녜스의 경우에는 그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마치 미지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쓰러지기 전에 본, 첫번째 환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사람이 없는 콜로세움 (폐허의 상태가 아닌) 같은 원형 경기장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젊고 대단히 아름다운, 피부색이 짙은 한 여성만이 한가운데에 똑바로 서 있습니다. 지면 위에 돋우어진 그녀로부터는, 갈색빛 몸과 이를 감싸는 어두운 색의 옷에서 뿜어 나오는 지복의 빛이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곳의 천사 같습니다. 그녀가 저를 바라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그 다음 저는 쓰러졌고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환시가 끝났습니다. 저는 어느 건물안에 있는데, 그 우울한 외관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보아 감옥으로 사용되는 어느 요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제가 어제 보았던 툴리아넘 (Tullianum: 발또르따가 1944년 2월 29일 환시에서 본, 로마의 지하 감옥) 같은 지하는 아닙니다. 여기에는 작은 방들과 높은 통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에는 공간과 빛이 부족하고 창살, 철문, 자물쇠로 가득하므로, 그 가혹함은 [툴리아넘과 비교했을 때보다] 위치상의 ‘다소 나은’ [측면] 을 상쇄시켜 버립니다. 이는 자유에 대한 털끝만큼의 작은 미련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이 ‘구멍’ 같은 방들 가운데 하나에, 제가 원형 경기장에서 보았던 어두운 피부색의 젊은 여성이 추하고 작은 테이블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테이블은 침대도 되고 의자도 되고 테이블도 됩니다. 이번엔 그녀로부터 어떠한 빛도 발산하지 않지만, 아까의 그 평화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생후 몇 개월 밖에 되지않은 어린 남자아기를 안고 젖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장가를 부르며 사랑의 몸짓으로 아기를 다정스럽게 껴안고 있습니다. 아기는 젊은 엄마와 놀고 엄마는 아기의 작은 얼굴을 애무하는데, 아기의 얼굴은 엄마의 갈색빛 가슴과 대조되어 보다 올리브색을 띱니다. 아기는 욕심을 부리며 엄마의 가슴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면서 젖을 가득 먹은채 갑자기 작은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젊은 여성은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균형 잡힌 둥근 얼굴에, 매우 크고 아름다운 벨벳 같은 검은 눈을 갖고 있습니다. 작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매우 희고 정돈된 치아가 보입니다. 약간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머리를 삼단처럼 치렁치렁하게 덮고 있습니다. 그녀의 피부색은 거무스름하지만 과하지 않은 갈색빛입니다. 그러한 피부색은 이태리, 특히 남부 이태리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좀더 밝은 색입니다. 그녀가 아기를 재우기 위해 일어서서 아기를 안은채 작은 방을 왔다 갔다 할 때, 저는 그녀의 키가 크고 우아한 몸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 지나치지 않고 잘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그녀의 위엄 있는 태도는 마치 여왕과 같습니다. 그녀가 입은 단순한 옷의 색상은 피부색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 옷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따라 부드럽게 아래로 흐르며 주름이 져 있습니다.
한 노인이 들어옵니다. 역시 짙은 피부색입니다. 간수가 무거운 철문을 열어 노인을 들여보낸 뒤 자신은 방에서 나갑니다. 젊은 여성은 몸을 돌리고 미소를 짓습니다. 노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슬피 웁니다. 몇분 동안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있습니다.
곧이어 노인의 고통이 폭발하고, 그는 딸에게 자신의 고통을 동정해줄 것을 갈망하며 애걸합니다.
‘내가 너를 낳은 것이 이런 꼴을 위해서 였더냐!’ 노인은 딸에게 말합니다. ‘자식들 중에서 너를 가장 사랑했었다. 너는 우리 집의 기쁨이자 빛이었다. 그런데 이제 너는 네 자신을 망치고, 너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가슴에서 죽음을 느끼는 너의 가련한 아버지를 멸망시키고 있구나. 내 딸아! 나는 몇 달동안 너에게 간청해왔다. 그런데 너는 내 뜻을 거역했고 감옥에 갇혔다. 온갖 안락함 가운데에서 태어난 네가 말이다. 나는 권세가에게 조아려서, 비록 죄수일지언정 네가 집에 머물수 있도록 허가를 얻었다. 나는 이 판결이 네가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조롱하겠구나. 네가 아버지의 명령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가 말한 그 “완전”하다는 교리가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네가 따르는 그 신, 너를 낳은 아버지조차 존경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도록 부추기는 그 신은 어떤 신이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런 크나큰 슬픔을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저 죄없는 아이에 대한 동정심조차도 정복하지 못했던 너의 완고함은 결국 우리 집으로부터 너를 빼앗아 이 감옥 안에 가두었구나.
이제 저들은 더 이상 감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들은 죽음, 그것도 잔학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왜?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죽기를 원하는 것이냐? 이것이 바로 너의 하느님이 원하는 너의, 우리의 희생이냐? 나의 희생과 앞으로 엄마 없이 살아갈 네 자식의 희생이란 말이냐? 너의 하느님이 승리하기 위해선 네가 피를 흘려야 하고 내 통곡이 끝을 봐야 하는거냐? 하지만 어떻게? 야생 동물도 자식을 사랑하고 그 가슴에 자식을 안을 때마다 더욱 사랑하는 법이다. 이 감옥 안에서도 나는 계속 희망했었고, 그래서 네가 자식에게 젖을 물릴 수 있게 해주려고 허가를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는 달라지지 않는구나. 너는 아이를 먹이고 따뜻하게 해주고 네 자신을 베게 삼아 아이를 재운 다음에는, 아이를 물리치고 후회도 없이 포기하겠지.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 아이를 위해 간청하는 것이다. 너에게는 이 아이를 고아로 만들 권리가 없다. 너의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할 권리가 없다. 너의 하느님이 이런 잔인한 희생을 원한다면, 우리의 신들보다 그가 더 선하다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너는 나로 하여금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를 언제나 더욱 저주하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아니다! 아니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냐? 오! 페르페투아, 나를 용서해 다오! 슬픔 때문에 미쳐가는 이 늙은 아버지를 용서해 다오!
너는 내가 그분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하지. 나는 그분을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겠다. 그러니 우리 곁에 있어다오. 재판관에게 네가 순종하겠다고 말해다오. 그런 다음 이 세상의 모든 신들 중에 네가 원하는 어떤 신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더 이상 “내 딸”이라 부르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라 너의 하인이며 너의 노예이다. 그리고 너는 나의 주인이다. 주인님, 명령하십시오. 당신께 복종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불쌍히, 불쌍히 보아 주십시오. 할 수 있을 때 스스로를 구하십시오.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 네 동료 하나가 자기 자식을 폭로한 것을 알지. 이제 더는 무엇도 그의 판결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사람들은 너로부터 네 아들을 떼어낼 것이고 너는 다시는 아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내일, 어쩌면 바로 오늘일지도 모른다. 내 딸아, 불쌍히 여겨다오! 나와, 그리고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네 아들을. 네 아들이 너를 어떻게 바라보며 미소짓는지 알지! 이 아이가 네 사랑을 어떻게 청하는지를! 오! 주님! 나의 주인님! 내 마음의 빛이여! 여왕님! 네 갓난 아들의 빛이며 기쁨! 불쌍히 여겨다오, 불쌍히 여겨다오 !’
노인은 무릎을 꿇고 딸의 옷자락에 입을 맞춥니다. 그는 딸의 무릎을 끌어안고, 손을 잡으려 합니다. 그녀는 인간적인 고통을 억누르려는 듯 손을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녀를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제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려는 것은 아버지와 제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에요.’ 그녀는 대답한다. ‘세상의 어떤 영광도 저의 죽음이 가져다 줄 그토록 아름다운 장식을 아버지의 백발과 죄없는 제 아이의 머리 위에 얹어주지 못할 거에요. 아버지는 믿음을 갖게 되실 거에요. 그리고 만일 한순간의 비겁함으로 제가 믿음을 포기한다면 아버지는 저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저의 하느님은 승리를 위해 저의 피흘림이나 아버지의 눈물이 필요치 않으신 분이세요. 하지만 아버지를 생명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죄없는 제 자식이 생명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필요해요. 아버지가 제게 주신 삶과 제게 주신 기쁨을 통해 저는 진실하고, 영원하고 더없이 행복한 지복의 생명을 얻게 되었어요. 아니. 저의 하느님은 아버지와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시지 않아요. 오히려 참된 사랑을 갖기를 가르치세요. 지금 아버지는 슬픔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셨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아버지 안에 빛이 있게될 것이고, 아버지는 저를 축복하실 거에요. 저는 천국에서 그 빛을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겠어요. 그리고 죄없는 제 자식에게도요. 제 자식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제는 이 아이에게 양분을 주기 위해 제 피를 쏟아부어야 해요. 이교도의 잔인함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적대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제 자식에게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되었을 것이고 제 자식은 제 인생의 목표가 되었을 거에요. 하지만 하느님은 저에게서 난 이 살보다 더 위대하시고, 그에게 바쳐야 할 사랑보다 무한히 더 위대하세요. 저는 제 모성의 이름을 걸고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피조물의 사랑 다음에 놓을 수 없어요.
아뇨. 아버지는 당신의 딸의 노예가 아니세요. 저는 언제나 아버지의 딸이고 모든 것에 순종할 거에요. 아버지를 위해 참된 하느님을 포기하는 것만은 제외하고요.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아버지, 저를 사랑하신다면 믿음 안에서 저를 따라오세요. 거기에서 아버지는 당신의 딸을 영원히 만나시게 될 거에요. 그것은, 참된 믿음은 천국을 주며, 거룩하신 목자께서 이미 저에게 그분의 왕국으로의 환영 인사를 보내오셨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환시가 바뀌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남자와 매우 젊은 여자입니다. 이들은 서로 교대로 키스하고 포옹합니다. 페르페투아의 아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간수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강풍을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지만, 회복합니다.
페르페투아의 여자 동료가 그녀를 위로합니다.
‘저도 역시 제 자식을 빼앗겼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를 잃지 않았어요.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제가 자식을 얻고 그 아이의 세례가 제 피와 더불어 보석으로 치장되도록 해주셨어요. 제 자식은 아기였어요… 아름다운 꽃 같았지요. 페르페투아, 당신의 아이도 무척 예뻐요. 하지만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하기 위해선, 이 꽃들에겐 우리의 피흘림이 필요해요.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갑절의 생명을 주게 될 거에요.’
페르페투아는 아기가 곤히 잠든 간이 침대에서 아기를 데리고 옵니다. 잠든 아기가 깨지 않도록 살짝 입을 맞춘 다음 아기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건네줍니다. 페르페투아는 아기를 축복하고,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에 손가락을 적셔 아기의 이마, 작은 손, 작은 발, 그리고 가슴에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이 모든 일을 그토록 부드럽게 하여 아기는 마치 애무처럼 느껴지는 듯 잠을 자면서도 미소를 짓습니다.
그런 다음 사형수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몇 명의 군인들이 둘러싸고, 군인들은 사형수들의 순교를 기다리는 원형경기장의 어두운 대기장소로 그들을 데리고 갑니다. 그들은 몇 시간을 기도하며, 성가를 부르며, 그리고 서로 영웅적인 행위를 권하며 보냅니다.
이제는 저도 이미 본 적이 있는 원형경기장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경기장은 수많은 군중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구리빛 피부입니다. 군중들 속에는 로마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군중들은 층층이 놓인 자리마다 매우 시끄럽고 동요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있는 쪽으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햇빛은 강렬합니다.
군인들은 6명의 순교자들을 한 줄로 세워 투기장으로 들여보냅니다. 투기장은 벌써 피로 얼룩져 있는 것으로 보아 벌써 어떤 잔인한 경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중들은 휘파람을 불고 저주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페르페투아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로 순교자들이 일렬로 서서 노래를 부르며 들어갑니다. 이들은 투기장 한가운데에 멈추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설명을 위해 군중 쪽으로 돌아섭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우리를 따름으로써, 그리고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여러분들의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증오에 기도와 사랑으로 보답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매질, 감금, 고문, 그리고 두 어머니로부터 자식을 빼앗은 일, 이런 일들이 당신들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닌 그런 마음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시민이라 부르지만, 여인이 아이를 낳기만 하면 아이를 어머니로부터 떼어놓고 어머니의 육체와 마음을 죽이는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잔인한 사람들, 살인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당신들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게다가 자기 자식 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런 어머니들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을 위해, 여러분들을 위해, 당신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수 있도록 우리 목숨을 3번, 6번, 아니 100번이고 바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 천국이 이미 열려있고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6명의 순교자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낮고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맹수들이 마치 경주라도 하듯 재빨리 돌진해 나옵니다. 맹수들은 야생 황소나 버팔로 (아마 매우 위험한 아프리카 케이프 버팔로일 것이다) 처럼 보입니다. 끝이 뽀죡한 뿔을 가진 맹수들은 한꺼번에 달려나와 이 무방비의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맹수들은 그들을 마치 수많은 넝마 조각처럼 뿔로 받쳐 공중으로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땅에 내어 던지고 짓밟아 뭉갭니다. 맹수들은 빛과 소음으로 광분한 듯 급히 질주하면서 돌아와 다시 공격을 가합니다.
페르페투아는 황소 뿔 위에 작은 나뭇가지처럼 받쳐 수 야드 멀리 내던져집니다. 온통 상처투성이 임에도 다시 몸을 일으킨 그녀의 첫번째 관심사는 가슴이 찢어진 그녀의 웃옷을 정돈하는 일입니다. 오른손으로 옷을 붙든채, 그녀는 펠리치타 쪽으로 몸을 끌고 갑니다. 펠리치타는 몸통 중간이 찢어져 내장이 밖으로 나온 채 등을 대고 누워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펠리치타를 덮어주고 일으켜주며, 그녀를 위해 스스로 버팀대가 되어줍니다. 맹수들은 반쯤만 살아서 땅에 누워 있는 나머지 5명의 순교자들에게 되돌아가 공격을 합니다. 그런 다음 간수가 맹수들을 굴로 데리고 들어가고, 이제 검투사들이 나머지 살육을 끝냅니다.
페르페투아의 검투사는 동정심 때문인지 아니면 경험이 부족해서 인지, 그녀를 어떻게 죽여야 할지 모릅니다. 그는 페르페투아를 공격했으나 급소를 겨냥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님, 여기, 내가 당신을 도울께요,’ 그녀는 매우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런 다음, 검투사의 칼 끝에 그녀의 오른쪽 경동맥을 기대면서 말합니다: ‘예수님, 저를 당신께 맡깁니다!’ ‘찌르세요, 형제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미숙하고 난처해 하는 검투사를 돕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칼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발또르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환시는 나의 순교자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동료 펠리치타, 그리고 그들 동료들의 순교의 모습이다. 페르페투아는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유죄였다: 그녀는 아직 예비 신자였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얼마나 두려움 없는 것이냐! 페르페투아는 육체의 순교에 그녀 마음의 순교를 합하였으며 펠리치타도 함께 하였다. 그들이 그들 사형 집행인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는데, 그들의 자식들을 사랑하는 법은 얼마나 더 잘 알았겠느냐?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는 젊었고, 남편, 부모,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하였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만유 위에 사랑받으셔야 할 분이시므로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그들은 어린 자식들과 헤어지면서 내장을 찢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또다른 삶을 믿었다. 굳건히. 그 또다른 삶이란,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충실히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유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느님의 계명 중의 계명은 사랑이다: 주 하느님께 대한,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 구세주께서 사랑하는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느냐? 그들은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들은 피흘림과 영혼의 사랑으로 자식, 부모, 남편, 형제,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이들 가운데는 그들의 사형 집행인들도 있는데, 나는 ‘너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사랑하여라’ 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왕국을 살게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을 내 왕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의 피로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였다. 그 길은 빛나고 있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고통받는 것? 죽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그것은 날아가는 순간일 뿐이다. 슬픔과 고통의 순간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맹수들? 검투사의 칼?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었으므로 축복하라.
죽음의 순간에서 순교자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정숙함을 지키는 것이었다. 누구든 거룩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거룩하기에 그렇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어질러진 옷매무새였다. 왜냐하면 [심지어] 동정녀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은 언제나 정숙하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영혼의 동정성을 준다. 그리고 영혼의 동정이란, 부부 관계와 자녀의 출산이 동정녀를 천사로 만드는 봉인을 앗아 갈지라도, 아름다운 순결을 보존하게 해준다.
세례 성사로 죄가 씻어진 사람의 몸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정숙하지 못한 행동이나 옷차림으로 몸을 더럽히지 말아라.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 여성에게서는 타락한 자녀와 부패한 사회만이 탄생한다. 하느님은 떠나시고, 사탄은 쟁기질을 하여 너희를 절망 속에 빠뜨릴 덤불과 괴로움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발또르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순교자들은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증거자들도 그렇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에 대한 이 사랑을 자기 삶의 목표로 했던 그들은 모두 지혜를 갖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이를 또렷하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세상에게는] 약점으로 보일 뿐이다. 단지 이용하고 이득을 취할 어떤 것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마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안된다. 만일 내가 모세의 율법의 엄격함을 줄이고, 너희들 모두에게 계명을 실천하고 완전에 도달하는데 도움을 줄 엄청난 권능의 원천을 주었다해도, 너희의 주 하느님께 가져야 하는 공경과 순종의 의무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하게 만드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정도까지 하셨다면, 너희는 더욱 선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구원은 그분이 고민하게 하시고, 우리는 삶을 즐기자.’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신성 모독이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가 아니다.
나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사악한 자들이 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오늘을 즐기자.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모든 기쁨은 결국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즐기기 위해 우리의 권리를 으스대자. 착취가 금지된 약한 자와 선한 자로부터 착취하여 그들로부터 우리의 강탈물을 끌어내고, 그것으로 우리의 지갑을 채우자. 그리하여 우리의 배를 채우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욕망을 실컷 배불리자.’ 순교자들은 사악한 자들처럼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의롭다는 것은 희생이고 그렇게 사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의로운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짐이 되지 않는가. 그러니 그를 우리 가운데에서 끌어내자. 그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연상시키고 짐승처럼 사는 우리를 꾸짖기 때문이다.‘
나의 순교자들은 대신 세상의 이론을 뒤엎고 하느님의 이론만을 따르기를 원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시험에 빠뜨렸다. 그 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들을 격분시키고, 괴롭히고, 죽였다. 그러나 세상은 어리석어서, 그들의 영혼을 파멸시키기 위해 가한 이 모든 타격이, 완전한 사랑의 융합으로 그들을 내 안으로, 그리고 나를 그들 안으로 스며들게 하는 하나의 도구와 같았음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점점 더, 감옥과 원형 경기장에서 그들은 이미 천국에 있었고,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지난 뒤 영원히 나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죽지도, 파멸되지도, 괴로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새 생명을 위한 산고의 고통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죽음도, 파멸도, 고통도, 절망도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은 생명을 얻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 뿐이던 육체가 늘어나 [이제는] 둘이 되는 것이다. 그 고통은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어머니가 된다는 희망이며, 그 모성으로부터 얻어지는 생명 전체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고통은 희망이었고, 보증이었으며, 그들을 더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생명이었다.
세상은 순교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이 거룩한 미치광이들의 미친 짓이란, 피조물에게 가능한 모든 완전함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혼례는 하느님인 나와의 혼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불임상태로 만들었다. 영적인 사랑을 위하여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의 육욕을 잘라내 버리고 마치 천사들처럼 순결하게 살았다. 그들 스스로 잘라낸 것이다. 세상은 이런 숭고한 미친 영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기꺼이 그들의 사랑인 나를 위해, 나의 사랑을 위해 그들의 아이들과 남편에게 남아있는 마음을 찢어버렸다. 신혼 침실과 자식의 달콤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을 끊어버리고 고통으로 향하는 법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구했다. 너희가 그러한 본보기를 갖고, 정화의 피로 그토록 씻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야수가 되었는데, 거룩하고 복된 나의 순교자들의 세대가 없었다면, 너희는 대체 얼마나, 어떻게 되었겠느냐? 바로 그들이 너희의 욕망이 일어나는 순간보다 훨씬 먼저 너희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왔던 이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너희가 하는 짓을 멈추고 하늘로 오르는 길로 돌아서기를, 사탄에게로 빠져드는 길을 내던져 버리기를 청하고 있다. 너희에게 구원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폭군들에게 했던 말로, 사랑으로, 겸손에 대한 염려와, 끈기, 순결, 믿음과 항구함으로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필요한 지식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말한다 : 영원한 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지식 말이다.
솔로몬보다 더 현명했던 그들은, 바로 이 지혜를 지상의 모든 권좌와 부귀보다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지혜를 얻고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박해와 고문에 용감히 맞서고, 지혜를 잃지 않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 안는다. 그들은 건강과 아름다움보다도 지혜를 더 사랑하고, 지혜를 자신들의 빛으로 간직하기를 원한다. 지혜의 광채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기 때문이고, 지혜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영혼에게 있어서 영원한 날의 지복의 빛을 고대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곧은 마음으로 그들은 지혜를 배우고, 사랑으로 그 지혜를 원수들에게까지 나누어 준다. 지혜를 잃어버렸던 군중들과 그 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빼앗기는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그들 안에 살아있는 그 지혜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받는 것이다’(루카6,38; 사도20,35)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샘에서 그들에게 쏟아져 나오는 그 천상의 샘물을 더 많이 전파할수록 그 물은 더욱 증가하여, 영원하신 사제에 의해, 세상에의 선익을 위해 소용되는, 거룩한 미사의 성배처럼 넘쳐흐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지혜의 왕은 (솔로몬) 슬기롭고 거룩하며, 유일하면서 다양하고, 오묘한 지혜의 은사를 나열하였었다. 나의 순교자들은 이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솔로몬이 ‘하느님의 떨치시는 힘의 바람이며, 전능하신 분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티없는 빛이다.’(지혜7,22~30) 라고 부른 지혜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의 (다른) 누구도 하지 못한 하느님의 반영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성을 그대로 보임으로써 그분을 반영하였고, 희생 제사를 겪던 나를, 구세주 그리스도를 반영하였다.
오! 솔로몬이 젊어서부터 지혜를 그리워하고 찾았으며 지혜를 아내로 얻으려고 찾아 다녔다고 찬양하던 그 말들을 모든 순교자들은 그들 입술 위에 어떻게 올려놓을 수 있었느냐! 지혜를 그의 선생으로, 그의 부요로 원했다는 그 말들을! 너희는 솔로몬의 입술과 순교자들의 입술 위에서 꽃피었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잘못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얼마나 잘 생각할 수 있느냐.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희들이 얼마나 노력해야 하겠느냐 – 오, 육체의 탐욕으로, 나의 순교자들의 빛을 받았던 자들의 어두움보다 훨씬 더 깊은 이교도의 어두움 속으로 다시 끌어내려진 너희들이 – 너희 자신으로 하여금 지혜를 사랑하고 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해야만 하겠느냐. 지혜가 너희의 사적인, 공적인 일의 인도자로서 오도록, 그리하여 너희가 더 이상 지금의 모습, 즉 너희의 생명과 본질을 파멸시키고 – 이 두 가지는 너희가 집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너희 영혼의 구원을 망치는 – 이는 너희 영혼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내가 죽기까지 매달렸던 것이다 – 지금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려면 얼마나 투쟁해야 하겠느냐.
‘이렇게 해서 지혜는’, 솔로몬은 말한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가르쳐 주었다.’ 이 말을 기억하여라. 그리고 너희의 선함이 아닌 그 무엇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너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이 길을 알고 따른다면, 너희는 지상과 천상 모두에서 너희들 스스로에게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번역 : 평화의 오아시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