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하올 파티마 성모님의 세계 순례 여정 – 세츠 데겐

1917년 8월 13일 일요일, “우리의 사랑하올 부인” 의 파티마에서의 네 번째 발현 때 루치아는 성모님께 순례자들로부터 받은 예물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성모님은 대답하셨다.
   “두 개의 들것을 사서 하나는 루치아와 히야친타 그리고 흰옷을 입은 다른 두 소녀가 들도록 하고, 다른 하나는 프란치스코와 같은 나이의 세 명의 소년들이 들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소년들도 흰옷을 입어야 한다. 나머지 예물들은 묵주기도 축일의 준비와 성당건축에 쓰도록 하여라.”
   성모님의 순례가 만족스러운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것은 성모님께서 직접 내리신 첫번째의 지시이다. 들것을 통해 묵주기도의 모후의 모습을 100만 신자들이 동시에 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유럽 순례에 오른 성모님
   때는 1943년이었다.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가 인류에게 닥친 가장 무서운 전쟁에 휘말려있었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하늘의 아주 특별한 특전을 통한 평화의 오아시스가 있었으니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그해 파티마에서, 높으신 보호자 동정 성모님의 발 아래 J.C.F.(여성 청년 가톨릭)의 전국적인 회합이 열렸다. 회합을 축하하는 연설에서, 이 전쟁이 끝나면 곧 바로 파티마의 성모 발현 장소인 ‘코바 다 이리아’로의 국제적 순례를 계획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고 이 순례여행은 평화의 은총에 대한 전 세계의 감사여행이여야 했다.
   1945년 5월, 도처에 깃발이 나부끼고 집집마다 갖가지 장식으로 단장되었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대자연도 사람들의 기쁨에 동참하는 듯이 보였다.
   그로부터 다시 1년 정도 지난 1946년 4월 포르투갈의 J.C.F.는 벨기에 젠트(Gent)에서 열릴 여성 가톨릭 청년 단체들의 국제적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때 한 참가자인 룩셈부르크의 대표자에게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제안은 이러했다. “여러분! 사랑하올 성모님의 상을 코바 다 이리아 언덕에서 모셔내어, 비참하고 고통받고 있는 유럽으로 평화의 사절로 모셔가면 어떻겠습니까?”
   그 당시 페허 속에서 불안정한 상태의 유럽은 아직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유럽에 “우리의 사랑하올 부인”을 모셔 가는 일이 가능하다면! 루치아 수녀는 우리에게 레이리아(Leiria)의 주교에게 성모상을 달라고 청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1947년 5월 13일, 병자들을 위한 대미사 후에 에보라(Evora)의 주교는 성모상에 왕관을 씌워 드렸다.

   그런데 그 지역에 한 창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사창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모상에 대관식이 있기 몇 달 전에 그녀는 장님이 되었었다. 우리의 사랑하올 부인이 지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녀는 착하신 어머니께서 자신을 고쳐 주신다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아가겠다고 성모님의 성심께 진심으로 약속드렸다. 그리고 그날 5월 13일 대미사 때 그녀는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감히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무릎을 꿇을 수가 없었다. 복음서의 세리처럼 그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그녀 앞을 지나가신 후 그녀는 눈을 뜨게 되었고 다시금 볼 수 있게 되었다.

비둘기의 기적
   이 순례 여행 중에 놀라운 일들이 비둘기들에게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파티마의 순례 성모상이 지나갈 때 날려 보내려고 흰 비둘기를 샀었는데, 그 비둘기들은 잠시 날아서 성모상 발치에 내려 앉아서는 성모님과 계속 동행하는 것이 아닌가. 리스본에서는 비둘기들이 성모님을 따라 성당에 들어가서는 축하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성모상 발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비둘기들은 파티마의 성지로 돌아갈 때까지 성모님을 보호하면서 동행했고 그곳에 마지막으로 정착했다. 그러한 “비둘기의 기적” 은 벌써 쉰 번 이상 일어났다.
   또한 스페인 살조나(Salzona) 교구에서는 마흔 마리의 비둘기들이 위와 같은 현상을 보여줬는데 그러자 누군자가 주장하기를 “그것은 모두 훈련시킨 비둘기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날려 보내는 비둘기 역시 성모상 발치에 날아가는지 보겠다” 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는 며칠 후 성모상이 지나 간 후에 자신의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그 비둘기도 역시 곧장 성모상으로 날아가 성모님의 발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는 매우 놀랐고 그리고 회개했다.
   스페인 국경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의 순례가 진행되는 곳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살라망카의 어느 누구도 과거 언제 그런 군중을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성모님은 열광적이고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발라돌리드(Valladolid)에선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성모님의 도착을 기다렸다. 부르고스(Burgos)에서는 성모상이 총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그곳 사령관이 자신의 검을 성모님의 발치에 내려 놓으며 성모님을 환영했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팜플로나(Pamplona)에서는 사랑하올 성모님께 대한 어린이들의 봉헌이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빌바오(Bilbao)에서
   성모님의 순례가 있는 날 빌바오의 아침은 흐리고 하늘엔 뇌성이 치고 있었다. 그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복되신 동정녀를 맞이하여 태우기 위해 자신의 말들을 치장했다. 농장에 할 일이 무척 많아서 말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이 사용되는 것을 거절한 농부 한 명을 제외하고는… .
   성대한 도착의 한 순간이 왔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을에 뇌우가 쏟아졌다. 번개가 번쩍이고 한 순간의 섬광이 그 농부의 집 위에 떨어졌고 그리고 그의 말 두 마리가 순식간에 죽고 말았다! 그 사건이 그 마을의 주민 모두에게 매우 충격적인 인상을 주었던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한두 시간도 자신의 말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던 그 사람은 이제 한 순간에 그것들을 영원히 잃고 말았던 것이다!
   작은 항구 베르메오(Bermeo)에서는 어부들이 성모님을 마중하러 나갔다. 그들은 경외심에 가득차서 ‘파티마의 동정녀’ 라고 명명한 배에 성모님을 모셨다. 그리고 바다의 별이시며 바다의 여왕께서는 많고 크고 작은 어선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신의 왕국을 순회하였다.
   로욜라(Loyola)에서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까지의 행렬은 참으로 화려하고 훌륭했다. 자전거를 탄 400명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꽃으로 가득 꾸미고서 행렬의 선두에 섰고 약 25,000명의 남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거룩한 미사봉헌이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성체를 영한 사람이 8,000명에 달했다.
  공산주의자이며 여러 해 동안 병을 앓고 있던 어느 젊은이에게 사람들이 병자성사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는 갔고 그리고 사랑하올 성모님은 그에게 그가 원했던 것보다 더 큰 은총을 내렸다.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던 한 부인은 복되신 동정녀께서 순례하실 때 갑자기 무릎을 꿇고 그녀의 친척들이 놀라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 순간 완전히 변화될 수 있었다.

프랑스 순례
   순례 성모상이 스페인 순례를 마치고 프랑스에 가까와 졌을 때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 사이의 다리 한가운데에서 스페인의 주교와 프랑스의 주교는 서로 진심어린 포옹을 하며 만났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올 부인은 프랑스 땅에 들어섰다. 끝없이 많은 군중들이 성모상 아래 밀려 들어와 감격하며 노래를 불렀다. “프랑스의 여왕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라벤느(Labenne)에서는 감동적이고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성모상이 한 병원에 모셔졌는데 그곳에는 불치병에 걸린 어린 소녀가 입원해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 성모상이 어린 그 환자의 침대 앞에 오자마자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놀라는 가운데, 더없이 아름다운 “대화” 가 깊은 감동 속에 진행되었다. 그 소녀는 나흘 전부터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순간 복되신 동정녀께 몸을 돌리고는 이렇게 외쳤다. “…아 어머니, 거기 계시는군요! 저를 찾아오셨나요?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우셔요! 이제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환자는 자주 끊기는 짧은 문장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소녀는 매우 경건하게 성모송을 외었다. “어머니! 당신은 얼마나 착하신지요. …모든 병자들을 낫게 하소서! 그러나 비오니, 저로 하여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고통을 참아내게 하소서! 그리고 순례 행렬이 계속되어 … 프랑스 거리에 … 중단없는 설교가 … 부르짖는 기도가 따르고 … 파티마의 우리 사랑하올 부인이시여, 이 세상이 회개하게 하소서! … 파티마의 성모님, 프랑스를 구하소서! … 파티마의 성모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꽃으로 장식된 파티마의 성모님은 그날 오후 5시쯤 그곳을 떠나 가셨다.

포르투갈 순례
   데 오우렘(De Ourem)은 군청 소재지인데 발현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그 무렵에 끝났다. 꽃비! “여왕께 경의를!” 이란 환영인사가 적힌 수많은 작은 종이조각들이 흰옷의 부인 위로 팔랑이며 떨어졌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자 우리의 사랑하올 부인의 환영 행렬은 작은 마을 프레상다(Freixeanda)에서 멈추었다. 주민들의 기쁨은 굉장했다. 종이 울리고 악대의 연주가 이어지고 폭죽이 터졌다.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들었다. 성직자, 지방의원, 조합원들, 마리아 단체, 청소년 연맹, 남녀노소 할것없이 어느 누구도 빠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첫 밤샘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파티마의 연장이었다.
   페레이라 도 제제레(Ferreir Do Zezere)는 빛의 바다였다. 곳곳마다 불을 밝혔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성모님의 순례를 환영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집에 불을 밝혔다. “순례하는 동정녀!” 가 지나가신다는 소식은 산과 골짜기를 지난 모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리로 달려나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동정 성모께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깊이 절했다. 그것은 전 포르투갈을 중단없이 관통하는 행렬이었다. 파티마에서 스페인 국경까지 한 번도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 순례
   순례 성모님은 스페인 국경에 있는 마르바오(Marvao)에 이르렀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순례 성모님의 도착에 참석하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했던 비신자 한 명이 있었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은 집에 둔 채 그 자신을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와 일부러 행렬이 지나가야 할 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손에 뒷짐을 지고 입에는 담배를 문 채… .
   행렬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함께 나아가는 군중들의 경건한 노래를 들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뒷짐진 자신의 손에 묵주가 들려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는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또한 그가 그렇게도 분명히 느꼈던 묵주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때, 자신이 느꼈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 상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떻든 그일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또다시 묵주 구슬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져 들어왔다! 특히 그것은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는 채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되었다. 그러자 그는 불안해졌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모든 설명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사랑하올 부인이 너무나도 온화하고 천사같이 지나갈 때 그는 그분께 굴복하여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달려가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모두와 함께 성당으로 갔다.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멀리 떨어져 살았던 하느님과 화해하고는 이제는 깊은 믿음으로 그분을 자신의 마음 속에 모셨다.

프랑스 순례, 루르드
   루르드의 주교 역시 파티마의 사랑하올 어머니를 영접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나타냈다. 그래서 성모상이 그 동굴 앞에 모셔졌다. 주교좌 성당의 몬시뇰 바르사스(Barthas)가 훌륭한 축하 연설을 했다. 그는 “파티마의 사랑하올 어머니의 이 방문과 모든 순례여행은 말하자면 동일한 천상 어머니의 다른 두 가지 발현의 만남이다” 라고 말했다. 루르드와 파티마의 발현은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들 중에서 동시대에 일어난 역사적인 중요한 사건들이다.
   이어서 우리는 한 지역을 지났는데 그곳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많이 약해진 곳이었다.
   그런데 공산당원인 시장이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존경을 바치는 모든 예식에서 사회자가 될 것을 자청하였다.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모셔져 전 프랑스를 여행했다. 그분이 가시는 곳의 가정마다 철야기도와 미사가 봉헌되었다.
   어떤 곳에 동방 정교회의 수녀원이 있었다. 그곳의 수녀들은 하늘의 어머니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모두 성모님을 마중하는 데 동참했고, 깊은 신심으로 손에는 성모님이 그려진 이콘을 들고 4km에 달하는 순례길에 동행했다.
   몇 명의 동방 정교회 신부들도 같이 순례하면서 경건하고 아름다운 성가들을 불렀다. 우리의 순례단이 지나는 어떤 곳에 죄중에 있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방으로 숨어버렸다. 그녀는 성모님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성모님께 존경을 바치기 위해 부르는 노래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행렬이 지나갈 때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소녀를 행렬에 합류하도록 압박했다. “싫어! 나는 가고 싶지않아! 나는 내맘대로 할거야! …” 그러나 이상하고 불가사의한 힘이 점점 더 세게 느껴졌다. 소녀는 그 힘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고 일어나 방문을 잠궜다. 그러나 하늘의 여왕께서 원하신다면 가련한 소녀가 어떻게 그것을 대항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소녀는 벌떡 일어나 두려움에 떨며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 날아갈듯이 교회로 달려갔다. 교회 안에 들어 가자 곧바로 하얀 성모상이 그녀에게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어린 소녀는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리며 얼굴을 적셨다. 그것은 기쁨과 행복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오랫동안 피해왔던 하느님과 화해하고 프랑스의 한 벽촌을 방문하여 그녀를 되찾아 주신 순례하는 동정녀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한 노인이 순례자들을 따라왔다. 그는 사제에게 말했다. “할 줄 안다면 기꺼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소년시절 이후 한 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지금에 교회에 왔습니까? 어떤이유로 그랬습니까?” 라고 사제가 묻자 그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우연히 이 지역을 여행하게 되었고 역 근처에서 밤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의 상을 모신 행렬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당에 들어가 그곳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에 내가 탈 기차는 벌써 떠났습니다.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내일 다른 기차를 타면 되지요.”
   사제가 그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갑자기 그에게 덮쳤다. “하지만 나를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내 삶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신부는 노인과 함께 무릎을 꿇고 성모송을 바쳤다. 그들은 함께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 노인은 열두 살 이래 처음으로 하느님을 맞이하였다.

벨기에 순례
   8월 2일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께서는 벨기에 국경에 도착했다. 벨기에 국경에서 투르나이(Turnai)의 주교는 땅에 무릎을 꿇고 순례하는 동정녀를 영접했다. 사람들은 깊고 경건한 침묵으로 천상의 손님께 경의를 바쳤다.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문은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투르나이가 그러한 영광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떤 세계적 축제도 그러한 큰 기쁨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여왕으로 오신 분께 머리숙여 절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겠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도시”인 샬레로이(Chaleroi) 역시 순례하시는 동정녀를 영접했다.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고해석이 모자랐다. 사람들은 거리 한가운데서, 심지어 개방된 장소에서까지 고해를 했다. 기억에 남을 그 밤에만 이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성체를 모셨다. 며칠 후, 그 도시의 사제가 한 환자를 방문했을 때, 거기서 가톨릭을 지독히도 반대하던 한 부인을 만났다. 그녀가 말했다. “신부님, 제가 최근에 파티마의 밤에 종교적 의무를 지킨 것을 아시는지요? 저는 광장에서 고해성사를 받고 다시 성체를 모셨답니다.” 오 여주인이신 순례하는 동정녀의 기적이여!
   어디에서나 그랬다. 20년, 30년 또는 40년 동안 하느님과 떨어져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 주 하느님과 화해를 했던가?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께서 샬레로이를 방문하신 며칠 후 한 사제가 일반인의 복장을 하고 설문조사를 했다. 그는 언론인, 학생, 의사, 가정주부, 시장 상인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파티마의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의 방문 이래로 이 도시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께 찬미를!”
   3일 동안 성모님은 벨기에의 뤼튀히에서 머물렀다.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는 더없이 큰 사랑으로 당신을 환영했던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의 수도회 신부들을 첫 번째로 방문하시고 이어서 모든 본당들을 차례로 방문하셨다. 성모님 앞에서 두 시간 동안 침묵기도를 한 후에 주교의 집전 하에 자정미사가 이어졌다. 성모님은 본당 외에 병원과 수도원들도 방문하셨다.
   한 사제는 어떤 남자가 순례 행렬을 따르는 것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종교적인 모든 것에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제에게 조언을 구하고 고해성사를 청했을 때 사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 마침내 사제가 그에게 물었다. “종교적인 것에 대해 그다지도 적대적이었던 당신이 어떻게 해서 성당에 나오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내 집 앞을 지나가셨지요. 그리고 그때 나는 그분을 따라가야만 했어요.” 사제의 호기심은 그것으로 만족되지 않았다. 그 기적은 그에게 그렇게도 컸던 것이다. “당신은 혹시 어쩌면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께서 이런 큰 은혜를 베푸실 만한 어떤 일을 하셨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 남자는 그 어떤 것을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최근에 하느님의 어머니께 몹쓸 말을 한 녀석을 코가 깨지게 한방 먹였던 적이 었거든요.” 축복받은 주먹질은 그가 원죄없으신 동정녀께 존경을 드러내는 방법이었으므로 성모님께 그렇게 큰 용기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10월 21일에 파티마의 사랑하올 어머니는 당신의 축제행렬을 브뤼셀에서 멈추셨다. 그것은 승리의 행진이었다. 행렬을 이끄시는 분은 진정 여왕이셨다. 오만 명의 가톨릭 노동 청년 회원(Jocistes)들이 감동적인 예식 중에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자신들을 봉헌했다. 감동적인 일들이 계속되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순례하셨던 어느 지역에 두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열심한 가톨릭 신자였고 다른 한 명은 투쟁적인 공산당이었다. 은총과 축복을 내리면서 성모님이 지나가셨다. 다음 주일에 놀랍게도 그 가톨릭 신자는 성당에서 자신의 형을 보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제가 없었지만 동생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형에게 다가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신의 놀라움을 전했다. “여기에서 형을 보다니!” “네가 원하는 바잖아!” 그가 말했다. “동정 성모님께서 지나가셨지. 그리고 나는 그분께 내 삶을 변화시켜 달라고 청했어.”
   마침내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는 러시아 정교회를 향했다. 가톨릭 신자들과 정교회 신자들이 교회를 가득 메웠고 열광적인 기쁨으로 기적의 성상을 맞이했다.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가톨릭 신자나 정교회 신자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의 방문 이후로 러시아 정교회에는 매일같이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러시아의 회개를 빌고 있는 많고 많은 정교회 신자들을 본다.

네덜란드 순례
   벨기에 다음으로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가 방문하신 곳은 네덜란드였다. 수없이 많은 군중들을 이끌고 성모님은 9월 1일 저녁 무렵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국경에 다다랐다. 두 나라의 항공기들이 행렬 위를 선회비행하며 하늘의 어머니께 꽃을 뿌렸다.
   특히 파티마의 사랑하올 어머니는 마스트리트(Maastricht)의 국제 마리아 대회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그곳에 도착하셨다. 거기서 성모님은 주교들과 추기경들이 겸손되이 당신의 발 아래 무릎을 꿇는 것을 보실 수 있었다.
   로에르몬드(Roermond) 시의 주교는 며칠 후 이렇게 썼다. “대회는 성대하고 장엄한 예절이었다. 파티마의 사랑하올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신앙의 정신이었다.”

   어머니는 이 나라를 떠나 룩셈부르크로 향하셨다. 그 작은 나라는 대단한 정성으로 사랑하올 하느님의 어머니의 방문을 준비했다. 모든 본당은 “사흘” 동안 성모님을 맞을 준비를 계획했고 어머니가 그곳에 머무시는 동안 매일같이 모든 장엄미사에 순례자들을 위한 기도가 마련되었다. 이십 오만 명의 인구 중에서 십만 명이 영성체했다는 사실은 분명 그 훌륭한 준비의 결실임을 나타낸다.

   1948년 2월 29일, 파티마의 순례 성모상은 배를 타고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그러나 파티마의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의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파티마의 순례 성모상은 전 세계를 다녔다. 성모님은 아직도 여전히 순례하시면서 파티마에서 예언하셨던 것을 이루고 계신다.
   “결국 내 티없는 성심은 승리할 것이다. 교황은 내게 러시아를 봉헌할 것이다. 러시아는 회개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는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다”

– 마리아지 112,1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