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코넬 대학교 의대 교수인 버나드 나탄손 의학박사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으며, 아마도 전 세계에서 낙태를 가장 찬성한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낙태가 합법화되도록 하기 위해서,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낙태 시술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지치지 않고 투쟁했다.
그는 1968년에 세워진 국내 낙태 권리 찾기 협회의 창립 멤버이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낙태 전문병원을 운영했으며, 그동안 75,000건의 낙태 시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회한과 고통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고백한다.
“그 숫자에는 태어나지 못한 나의 아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아이를 내 손으로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영혼과 마음에 기적이 일어났다. 지독한 낙태 찬성론자였던 그가 적극적으로 태아 생명 보호자이며 옹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의 준비를 거쳐 1996년에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종교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것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1926년 미국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대학 시절 전통적이고 근본주의 적인 성격이 강한 유대교에서 돌아섰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힘”을 믿었다.
이런 아버지에게서 받은 허무주의적 확신과 신앙은 버나드의 삶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내, 곧 버나드의 어머니를 거의 증오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아들 버나드를 뉴욕의 명문 사립학교에 보냈는데, 매우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버나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났으며, 종교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종교는 목에 걸린 가시마냥 귀찮은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신앙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들 버나드를 일주일에 세 번씩 유대인을 위한 학교에 강제로 보냈다. 버나드는 그곳에서 히브리어로 기도문을 외웠고 그러면서 유대교에 대해 잔인하고 완고한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유년시절에 내가 느낀 하느님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어둡고 위엄만이 가득하고 수염이 있는 모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왕좌처럼 보이는 곳에 기진맥진하여 앉아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저주의 판결을 나의 운명에 내리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유대교에서 받은 하느님의 인상은 위협적인 힘을 갖춘 사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까닭에 공군에서 복무하던 시기에 저녁 성경 공부반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오로지 좌절과 지루함만을 맛보았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느님은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며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드디어 나는 그토록 찾고 있었던 바로 그것, 그토록 오랫동안 열망했던 그것, 바로 용서를 그 하느님에게서 찾게 되었다.”
1945년 그는 캐나다에 있는 맥길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4학년 때 수업 중 그는 유대인이며 정신과 전문의인 칼 스턴 교수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그때만 해도 스턴 교수가 오랜 숙고를 거쳐 1943년에 가톨릭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스턴 교수는 자신의 개종 경위를 ‘불기둥’이라는 제목의 책에 담아 1951년에 출판하게 된다.
버나드는 1974년에 비로소 그 책을 읽게 되는데 그때 그는 어떤 충격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 책은 그가 개종하는 데 가장 많이 기여했다. 그 책 마지막 장에서 스턴 교수는 신실한 유대교 신자인 동생에게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불변이다. 학문에 불변의 진실이 있듯, 초자연적 세계엔 불변의 진리가 있다. 물질의 영역은 진보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정신의 영역은 그에 맞는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쓴 교황의 교서를 네게 보여주었던 그때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너는 진정으로 깊은 인상을 받아, ‘마치 1세기에 쓴 것 같다.’하고 말했었다. 내가 개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낙태의 세계로, 사탄의 세계로
1945년 대학생이 된 버나드는 매력적인 열일곱 살 처녀 롯을 신입생 무도회에서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으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결혼도 계획했다. 하지만 롯이 임신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낙태하기로 결정하고는 수소문 끝에 한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의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그 당시에도 불법이었던 낙태 수술을 비밀리에 하고 있었다.
소원대로 아이를 제거하고 나자 버나드와 롯은 일종의 공모자가 되었다. 몇 년이 흐른 뒤에 버나드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단호한 눈길, 여전한 사랑, 매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우울한 빛을 감출 수 없었으며 그녀의 눈에는 이런 질문을 담고 있었다. ‘왜 이사람은 나와 결혼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이 아이를 낳지 않았는가? 왜 나는 나의 생명과 미래의 내 아이들을 위험 속에 내모는가? 이 사람의 경력을 위해서인가? 하느님께서 내가 한 짓에 대한 벌로 앞으로 절대 임신을 못하도록 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 시기에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규정 등은 버나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글에서 밝혔듯이, 그의 내면에서는 무신론자의 특징이 단단하게 성숙되고 있었다. 그는 단지 롯의 건강과 미래의 임신 능력만이 염려되었다. 곧 그들은 헤어졌다. 이 경험이 버나드를 낙태의 세계로, 사탄의 세계로 이끌었다.
1960년대 중반에 버나드는 산부인과 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그때부터 그의 놀라운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에 이미 그는 두 번의 결혼 실패 경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가 시인했듯이, 그 실패는 “이기주의, 자애심, 사랑에 대한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그를 매우 사랑했던 한 여자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낙태를 강요했다. 더욱이 낙태하지 않을 경우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낙태 시술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전문가답게 직접 자신의 아이를 지워버렸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은 단지 낙태 전문의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대개의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낙태 후유증에 관해 그 당사자들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다. 그는 개종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유방암과 낙태의 관련성이 이제 밝혀졌다. 그리고 엉망으로 낙태 시술을 받게 되면 임신 능력을 상실한다는 사실이 수천 명의 여자들에게서 증명되었으며, 임신 13주 이후에 낙태 시술을 받은 여자들의 사망률이 자연 분만한 여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오만불손은 직업의 특징 정도로 간주되지만 낙태 시술 의사들의 불손은 가히 놀라울 정도다. 그들은 얼음같이 차고 비양심적이며, 자신의 의학 지식을 무자비하도록 규범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해치면서 낙태를 원하는 여자들을 돕는다. 아니, 오히려 그 여자들을 그릇된 길로 이끈다. 자기 학살과 같은 그것을 하기 위해서 자신을 위로하는 그들, 프로 근성을 가진 그들! 그들의 그 다음 행보가 법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는 곳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십자가 고통을 얕잡아 보고서 십자가를 자기 어깨에 걸머진 ‘눈먼 인도자’가 예수님께서 마신 독배를 건네받는다면 그에게 세상은 얼마나 다르게 보이겠는가?”
1968년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미국에서 낙태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인 ‘국내 낙태 권리 행동 단체’의 창립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1970년 뉴욕 주에서 낙태가 합법화 되었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낙태 전문 병원의 원장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75,000건의 낙태 수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개종하기 직전에 그가 쓴 논문(‘어느 낙태 전문의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출간)에서 그와 NARAL의 동료들이 미국과 전 세계의 낙태 금지법을 파기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술을 볼 수 있다.
1960년대엔 미국에서 낙태 반대 의견이 강했다. 그런데 5년동안 NARAL의 “전문가”들이 면밀한 계획 하에 대대적인 광.고 운동을 펼치고 미국 대법원을 설득한 끝에, 임신 9개월 이내엔 낙태를 허용하는 법이 1973년에 제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NARAL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리하도록 거짓 자료를 이용하여 미국인의 60%가 낙태를 찬성하는 결과를 내도록 유인했다. 즉 매년 불법적인 낙태로 사망하는 여자들의 수가 200-250명 정도이지만 만 명으로, 불법적인 낙태 시술을 받는 여자들이 1년에 십만 명가량이지만 백만 명이라고 숫자를 부풀렸다. 언론 매체를 통해 이런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마침내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NARAL은 낙태 반대에 강한 목소리를 내는 가톨릭 교회를 향한 공격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선적인 악당들”로 몰아붙이면서 “성직자들만이 낙태를 반대하며, 전 세계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낙태를 찬성한다.”는 거짓을 언론에 유포했다. NARAL은 또한 학문적인 정보를 봉쇄했다. 인간의 생명은 출생과 함께 시작되므로 태아는 생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학문이 아닌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자신이 유포했던 이 거짓말을 직접 뒤집는다. “그것은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태생학에서는 임신 순간부터를 생명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개탄한다.
“지난 25년 동안을 돌아보니 내가 임신한 여성들과 낙태아들에게 얼마나 혐오스런 짓을 저질렀는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신으로 매우 높은 윤리 도덕의 경계선을 넘어갔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분명 그 모든 것은 파렴치한 것이었다. 왜 우리 개업의들이 윤리의식을 잃어버렸고, 탐욕스런 동기만 깔린 수치스런 행위를 일삼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는가? 왜 기업과 이익의 사슬로 그 안에 얽혀 있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어리석음이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가? 왜 우리는 윤리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없었는가?”
낙태는 살인이다.
1973년 버나드 나탄손은 뉴욕에 있는 성 루카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이 되었다. 그때 태아를 관찰할 수 있는 초음파 기기가 최초로 그곳에 설치되었다. 초음파 기기의 힘을 빌려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았던 그 순간의 감동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인간의 태아를 볼 수 있었고, 진단하고 관찰하며 그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나는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초음파 검사의 도입은 인간의 태아에 대한 그의 시각에 극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초음파 기술 덕분에 태아도 정상적인 인간 생명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기관의 기능을 측량할 수 있고, 태아의 무게를 재거나 나이를 결정할 수 있으며, 삼키고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자거나 깨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모든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태아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원하는 낙태”에 더 이상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낙태 수술 횟수를 철저히 제한했으며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낙태 수술을 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84년부터 그는 낙태에 더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감정을 배제한 채 기구를 여성의 자궁에 삽입하고 태아의 살점을 찢고 도려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낙태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루에 20회 이상씩 낙태 수술을 했던 친구에게 부탁하여, 낙태 과정을 필름에 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튜디오에 앉아 필름을 돌려보았으며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충격을 주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 의사도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그동안 수없이 낙태 수술을 했지만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필름은 전문가의 손을 거쳐 영화 ‘침묵의 절규’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영화는 아무런 죄도 없고 방어력도 없는 피조물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범죄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12주된 태아는 자신의 살점을 찢어내고 흡입하는 기구들을 상대로 필사적인 방어를 되풀이한다. 그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낙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언론 매체도 진실을 가리려고 시도했다. 한 TV 방송국은 이 영화의 방영을 거부할 뿐 아니라 생명 보호 광*고 시간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언론 매체들이 죽음의 문화를 위해 존재하는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학문의 객관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잉태의 순간에 시작되고, 낙태는 살인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하느님께의 믿음에 이르게 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나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지상적이고 육적인 것만을 동경했다. 나의 목표들은 모조리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감각적인 것들이었다. 당장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경직된 유대인 무신론자이며 피상적인 유대인이었던 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모든 것을 경멸했다.”
1978년에서 1988년까지의 기간은 그에게 특별히 힘든 시간이었다. 매우 고통스런 방법으로 자기 삶의 짐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네다섯 시 사이에 일어나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배심원과 판사들이 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 희망으로 기도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희망이 상상으로 끝나고 나면 나는 불을 켜고 죄를 주제로 쓴 문학서를 펼쳤다. 성 아우구스티노, 도스토예프스키, 폴틸리히, 키에르 케고르, 니부르 그리고 루이스 멈포드의 글과 왈도 프랑크의 고백에 나오는 구절까지 읽고 또 읽었다.”
너무 절망한 나머지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의 손에서 생명을 빼앗긴 수천 명의 무죄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에워싸는 정신적인 고통과 절망감을 약물이나 알코올 또는 자기 최면술과 신경정신과 상담을 통해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명 운동에 깊이 참여했다. 강연과 책과 정치적 활동도 동원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낙태 시술 병원 앞에서 수백 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둘러싸인 채 낙태 반대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큰 소리나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용히 기도에만 몰두했다. 기도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진실한 사랑의 빛이 흘렀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기도에 몰두했으며 절대적 비폭력의 원칙을 지켰다. 그것은 그에게 감동과 놀라움을 선물했다.
“그날 나는 그들의 순수한 사랑과 기도에 놀랐다. 그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고, 불안에 휩싸인 임신 여성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의사와 간호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관들과 언론 매체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문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자신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도 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그런 체험 이후 버나드 나탄손 박사는 생애 처음으로 하느님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를 통해서 나에게 구원과 자비의 길을 보여주려 했던 하느님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때껏 내가 굳게 매달려 있었던 18세기 철학과 이별을 고했다. 갑자가 나의 과거는 죄와 멸망의 더러운 늪이 되었다. 그런 생각은 나 자신을 가장 사악한 범죄자로 고발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기적처럼, 나의 죄 때문에 누군가가 2000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나에게 희미하게나 희망의 불꽃을 던져주었다.”
그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영적인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말콤 머저리지, 헨리 뉴먼 추기경, 그레이엄 그린, C. S. 루이스, 워커 퍼시 등의 위대한 가톨릭 개종자들의 전기를 매우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그는 고백했다.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멸망으로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분을 찾기 위해서 온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할 수 없는 강한 원의로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의대 지도교수이며 학창시절 나의 영웅이었던 칼 스턴 교수를 떠올리게 되었으며 그가 자기 동생에게 썼던 편지글도 새로이 다가왔다.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달려간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사물의 한가운데에 계신다.’”
버나드는 생명 운동가들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런 방법으로 영적인 탈바꿈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그에게 내적인 홀가분함과 평온함을 선물했다. 그는 매주 규칙적으로 존 맥클로스키 신부와 만나면서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신앙의 길로 인도되었다. 1996년 12월 9일 뉴욕에 있는 성 페트릭 대성당에서 버나드는 존 오코너 추기경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버나드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다. 이것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살았으며 나는 유대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례했으며, 고해성사를 받았고,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았다. 학자로서 그는 자신의 책과 영화와 세미나를 통해 모든 생명의 주인은 거룩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아무도 생명을 함부로 없앨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로써 전 세계에서 낙태의 최고 옹호론자였던 사람이며, “뻣뻣한 목을 가진 무신론자”였던 사람인 버나드 나탄손 박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개종 사건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는 1996년 10월 19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포르친스키 회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폴란드의 국회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낙태를 합법화하는 방향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런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우리가 했던 실수를 바탕으로 경고합니다. 낙태를 찬성하는 한 표는 동시에 안락사를 찬성하는 표가 될 것이며 나아가 노인과 장애인도 죽이는 표가 될 것입니다. 그 한 표는 궁극적으로 유전학 연구에 쓰이면서 모든 인간을 생명이 아닌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 위 글의 모든 인용문은 버나드 나탄손 박사의 <하느님의 손 -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여행 - 개종한 낙태 전문의의 이야기>(오스트리아, 1997)에서 발췌되었다.)
낙태의 위험에 처해 있는 태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예수, 마리아, 요셉
저는 당신을 매우 사랑합니다.
당신께 간구하오니
낙태의 위험에 처해 있는
영적으로 제가 입양한
태아의 생명을 구해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은 뛰어난 설교가이며 저술가였던 풀톤 쉰 대주교가 작성한 것으로, 특정 대상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낙태의 위험에 처해 있는 어느 생명이 무사히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간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폴톤 쉰 대주교는 이 목적으로 ‘영적 입양 기도 운동’을 창안하여 낙태의 죄를 막고 보속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 M. 피오트로프스키 신부
– 마리아 1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