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2년 이래 이탈리아인 아닌 첫 교황

1978년 10월 16일 저녁 마침내 기다리던 흰연기가 교황선거장의 굴뚝으로부터 피어올랐다. 이날은 월요일 저녁, 1백 11명의 추기경들이 교황 선거장으로 들어간 지 이틀째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 앞의 광장을 메운 10만명을 넘는 대군중 속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들은 새 교황의 이름이 발표 도기를 기다리며 교황만세를 외치고 손벽을 치며 환호하였다.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앞 발코니에 서칠 라이트가 비쳐지고 추기경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펠리치 추기경이 발코니에 올라 새 교황에 관한 메시지를 라틴어로 전했다.

“여러분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새 교황이 탄생했습니다.” 군중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그들의 박수갈채로 잠시 추기경의 말이 중단되었다. 펠리치 추기경의 말은 계속된다. “그 분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야입니다.” 이 이름은 첫 순간엔 많은 이들에게 아프리카 사람을 연상시킬 정도로 이국풍으로 들렸다.이탈리아 사람들은 당황하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지?”하고 반문하였다. 곧 “외국 사람이다” “폴란드 사람이다”라는 말이 군중 속에서 들려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숨을 지었다. 1522년 이해 이제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사람이 교황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들은 이 놀라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하였다. 요한 23세 때부터 시작된 추기경단의 국제화로 말미암아 교황 바울로 6세의 서거 후 외국인이 교황이 될지 모른다는 말이 많이 나돌았다. 다행히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인 루차아니 추기경을 교황으로 뽑았다. 이어 그 이탈리아인 교황이 서거하게 되지 로마 사람들은 외국인 교황의 당선 가능성을 놓고 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었고 진짜로 외국인 교황이 나올 줄은 정말로 기대 밖이었다.

펠리치 추기경은 끝으로 새 교황이 요한 바오로 2세란 교황명을 택한 사실을 알리고는 사라졌다. 이 사실은 군중들을 조금 기쁘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故) 요한 바오로 1세의 연속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동시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요한 바오로 1세에 대한 존경을 뜻하였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곧 발코니에 나타나게 될 새 교황이 어떤 사람인가를 안타깝게 기다렸다. 그러나 인내가 필요했다. 교황이 나타나기까지는 아직 반 시간이 더 걸렸다. 마침내 새 교황이 발코니에 나타났다. 그도 고요한 바오로 1세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의 선임자의 것과는 다른 아주 남성적이고 건강한 웃음이었다.

이렇게 교황직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 교황은 곧 충격받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교량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그들에게 외국인 교황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주교요, 로마주교로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찬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군중들에게 교황의 첫 강복을 주기 전에 전통을 깨고 “예수 그리스도는 찬미를 받을지어다”고 하며 짧은 연설을 하였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서거로 아직 슬픔 속에 있습니다. 이제 존경하올 추기경들이 새 로마주교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새 로마주교를 먼 나라에서 택했습니다. 먼 나라?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전통 안에서의 공동체를 통해 항상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을 이국인으로 표현했다. 과연 폴란드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이국이었고 게다가 공산권 나라여서 더욱 이국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오히려 자신을 서방을 위한 전초지요, 서방을 위한 가톨릭시즘의 보루로서 이해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가까움’이란 곧 가톨릭 나라 폴란드와 로마 및 교황직사이의 1천년간의 굳은 결합을 의미한 것이었다. “나는 이 지명을 수락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의 전임자도 같은 말을 했었다. 사실 오늘날 교황이 되려하고 또 그런 무거운 직책을 감히 지려하는 추기경은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명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감에서 교황직을 수락했습니다.” 여기서 새 교황의 신심이 어떤 것이고, 무엇보다도 폴란드인들에게 공통된 성모께 대한 깊은 신심이 드러났다.

다음 카롤 보이티야는 웃으면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나라의 말로, 아니 여러분과 나의 말인 우리의 말로 인사하고자 합니다. 내가 말하는 도중에 틀리거나 실수를 하면 여러분께서 나의 말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광장에는 박수가 울려 퍼졌다.

이 말에서 로마인들은 그들이 보이티야에게 속해 있고 보이티야는 그들에게 속해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군중들은 교황의 이탈리아 말을 이해했다. 비록 낯선 액센트이고 이탈리아 사람의 이탈리아 말은 아니었을지라도 이탈리아말을 완전히 매스터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르칠 수 있음을 민중들 앞에 솔직히 고백하였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려는 어려움에 그들의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런 말을 아주 겸허한 자세로 했다. 그는 비록 높은 발코니에 있었을지라도 마음으로는 로마 군중의 한 사람이 되려 했다.

로마인들은 비록 보이티야가 먼나라 이국에서 왔을지라도 그들과 같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새 교황은 처음부터 자기가 결코 외국인이 아님을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실제로 보여주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꾸준히 자신을 이탈리아화하려 했고, 로마화하려 했다. 그는 착좌식에서 “이제 로마 사람이 아니라 폴란드 출신의 한 주교가 성 베드로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는 로마사람이 될 것입니다.”고 말하였다. 그가 첫 나들이로 이탈리아의 주요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의 무덤을 찾기로 한 것도 아마 하루 빨리 로마인이 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동시에 두 가지 일 해내는 놀라운 집중력

오늘날 폴란드의 저명한 저술가의 한 사람인 말린스티 신부는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특성으로서 다섯가지 점을 들고 있다. 말린스키 신부는 현교황과 같이 신학교에 들어간 것을 전후해 38년간이나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다. 특히 감실 앞에 꿇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정한 시간을 기도에 바친다. 그는 아침 일찍 성당에 들어가 미사준비를 하고 다음 경건하고 주의 깊게 미사를 지낸다. 미사 후에도 오랫동안 성당에 남아 감사 기도를 바친다. 그는 그의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든 적든 개의치 않는다. 그는 오후에도 몇 시간을 성당에서 지낸다. 그를 쉽게 찾으려면 성당에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성당에서 불러낼 수는 없다. 그는 기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해 성당을 찾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에 있어서 성당은 창조의 장소이다. 여기서 그는 사색을 하고 휴식을 취하고 힘을 얻는다. 여기서 그는 기도하고 묵상하고 또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의 장궤를 의자 옆에는 반드시 조그마한 책상이 있다. 그는 여기서 아니 성체와 성모님 앞에서 연설과 강론을 준비한다.

둘째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그는 믿지 못할 정도로 집중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위해 위해 모든 상황과 기회를 이용한다. 그는 한가지 일을 마치지 못했을 때 비록 대화중일지라도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그 일을 마치고야 만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읽거나 쓰곤하는 버릇이 있어서 때로는 보는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다 기억한다. 그는 젊어서 연극을 할 때에도 한 동작을 한 뒤재빨리 다른 연기자가 잘해내지 못한 역을 즉흥적으로 해냈다고 한다.

그는 자동차 안에서도 일한다. 그가 운전을 하지 않은 것도 실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란다. 그가 공의회에 참석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한 번은 주말에 틈을 내서 동료 주교들과 같이 시칠리아로 관광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모두들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내다보고 있는데 보이티야 주교만은 내내 책만 읽고 있었다. “도대체 우리 여행이 관광이요? 아니면 독서요?” 이렇게 불평들을 했다. 그러나 보이티야 주교는 딱딱한 철학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곁눈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다 보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주교 시노드에 참석한 보이티야 추기경에게 “나는 지난번 공의회 때 당신 가까이 앉아 있었는데 당신은 늘 무엇인가 쓰고 있더군요”라고 말했다. 사실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공의회의 연설을 메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출판할 책의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의회 일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한대로 그는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등을 작성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크라코프’의 대주교로 있을 때 보좌주교가 네 명이나 있었으므로 그들을 대신 보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모임에 직접 참석했다.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글을 쓰고 편지 회답을 쓰고 밀린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면서도 회의가 끝나면 요약도 잘하고 구체적인 결론도 훌륭하게 내리는 것이었다.

이상의 이야기로 우리는 현 교황이 휴식을 취할줄 모르는 사람으로 오해할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는 휴식을 적극적으로 취하는 사람이다. 그는 겨울이면 적어도 2주간 스키를 즐긴다. 스키장의 산책이 아니라 아주 어려운 코스를 달리는 것이다. 또 여름에는 한달 동안 휴가를 즐기는데 보통 2주간은 카누 놀이를하고 나머지 2주간은 등산을 한다. 이렇게 그가 휴식을 집중적으로 취하게 된 것은 그가 젊었을 때 얻은 병의 예방책으로 그의 주치의가 휴식을 강력히 권장한 때문이라고 한다.

셋째로 요한 바오로 2세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의 재산이라곤 약간의 책 뿐이다. 그것도 수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일에 필요해서이다. 바오로 6세 교황이 사만한 후 교황선거를 위해 로마로 떠나기 직전 그의 운전사가 한 말이다. 닳아 해진 수단, 낡은 모자, 헐어빠진 외투를 걸친 추기경의 모습을 보고 운전사는 “우리 자신이 추기경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하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외관에 무관심하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즉 외모에 무관심하기 보다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하는 일에 너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외모 같은 일로 방해 받기 싫다는 뜻이다.

그는 의복이나 음식을 중요시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전 성직자 생활을 통해서 지위가 높아진 후에까지도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개념은 도무지 갖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늘 주고 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넷째로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목이란 사명감에 심취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보좌주교에서 대주교, 추기경이 된 이후에도 그의 보좌주교 본당 신부, 보좌신부를 통해 사목을 관장하려 하지 않고 직접 사목에 종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혼인과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주고 가족을 방문하고 특히 영명축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큰 축일이 되면 아픈 가족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또 그들을 초대하기도 하였다.

끝으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는 접촉을 좋아한다. 그에게는 대화보다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하기 보다는 듣기를 좋아한다. 한 번은 앉아서 듣고만 있는 보이티야 추기경에게 한 기자가 “왜 추기경은 아무 말도 안 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나는 듣는 교회를 대표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숙고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대화의 자세는 곧 타인의 의견에 대한 존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간 교황청과 완전히 대화가 끊겼던 완고한 보수주의자 르페브르 주교와도 대화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돌계단도 몇 개씩 뛰어넘는 가식 없는 성품

바울로 6세 교황처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아침에 일직 일어난다. 약간의 체조를 하고 나서 소성당에서 미사를 지낸다. 미사후 신문들을 훑어본다. 아침 식사 때 벌써 그는 그날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보고 받는다. 9시부터 11시까지는 ‘크라코프’에서처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당에 은신하여 기도와 명상에 잠긴다. 이 고요한 시간을 이용하여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연설과 강론을 준비한다. 아무리 방문객이 많아도 알현은 11시에야 시작되고 그것은 때로 저녁 때까지 계속된다.

일반 알현은 보통 오호 두시에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흔히 제시간에 끝나지 못한다. 그러니 가끔 교황청 계획표에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흔히 예정된 알현 시간을 넘기는 것은 경비원이나 그의 측근자들의 근무시간에 대한 무관심에서가 아니라 인간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그의 본질적인 사명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가금 시간개념을 잊는다. 보이티야가 교황으로 취임한 이래 ‘바티칸’의 시계탑의 시계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이티야는 ‘바티칸’의 코로노미터를 표준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 것 뿐이다. 그는 아무리 교황일지라도 그의 고유한 스타일의 생활을 지속시켜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감금되기를 원치 않고 미리 짜여진 틀이나 관료주의에 속박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교황의 살림을 돌보기 위해 ‘크라코프’에서 온 폴란드 수녀들은 예정보다 많은 손님이 식사에 초대될 것에도 대비할 줄 안다. 교황은 알현 군중속에서 아는 사람을 보면 즉석에서 그를 식사에 초대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 번은 폴란드의 한 교수가 초대되었고, 또 한 번은 루불린의 전 총장이 저녁식사에 초대된 일이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크라코프에서 식사에 초대되었을 때와 같았다”고 회고했다.

루블린 대학의 전 총장이 교황에게 “당신에 대해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인기를 더해주고 또 당신을 오리지날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교황은 “여전히 오리지날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남아야 하고 나의 개성을 보존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교황으로 변한 사람이 교황 이전의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교황이 된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취소되기 어려운 것이고, 거의 결정적인 것이다.

교황이 되자 보이티야는 그의 아주 사사로운 일까지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마치 죽은 사람의 유산처럼 이제 그의 모든 것이 제3자의 손에 의해 처리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까지의 자아를 가능한 한 수호하기로 결심하였다.

비근한 예로 활기와 정력이 넘치는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저택의 복도를 활보하는가 하면 돌계단을 몇 개씩 넘음으로써 측근 몬시뇰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렇게 그는 계속 ‘크라코프’에서 처럼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바티칸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특히 바오로 6세 때처럼 모든 것이 1초도 여기지 않고 정확하게 움직이던 때는 지나갔다는 새로움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남을 위한 시간과 자신을 위한 시간을 잘 조화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78년 10월부터 불과 3개월 동안에 무려 3백번의 연설과 강론을 했다. 이 연설이나 강론의 대부분은 국무성성과 해당 부서에서 기초된 것으로 교황은 다만 그것을 검토하고 시정하고 보완하는데 불과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그의 연설에서 그가 스스로 작성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전임자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1세가 시도한 것처럼 요한 바오로 2세도 매주 수요일 광장에서 정기 알현을 그의 개인적 교리교수의 광장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순례자들 앞에서의 그의 연설은 곧 하나의 사목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신자들에게 아주 쉬운 말로 그의 신앙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매일 오전 사색과 명상을 위해 취하는 두시간의 정신적 휴식시간으로 말미암아 자연 바티칸의 전체 계획이지연되게 된다. 뿐더러 11시에 시작되는 알현은 전통을 깨고 오후까지 지속되고 때로는 초저녁까지 계속된다.

이와 같은 알현의 인플레를 그의 또 다른 프로그램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듣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시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아마 현 교황의 당면한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다행히 그는 건강하고 튼튼하고 자연을 좋아하고 스포츠를 할 줄 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육체적 힘에도 한계는 있다. 실제로 그는 한때 괴로한 나머지 모든 계획과 약속을 취소하고 1월초 2일간을 카스텔 간돌포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교황이 겨울철에 여름별장을 찾는 것은 4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황에게는 운동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는 언젠가 친구에게 “나는 움직이지 않으면 죽어”란 말을 한적이 있다. 그는 카누와 스키를 좋아한다. 그는 주교의 임명 소식을 듣고 비진스키 추기경으로부터 주교직의 수락 여부를 질문 받았을 때 “네, 수락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이제부터 카누 놀이를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겠지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즉시 호수로 돌아가 카누 놀이를 계속했다.

교황이 되자 그는 “교황에게 스키가 허락될 것인가”하고 남몰래 시름에 잠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멕시코로 떠날 때 비행기에서 눈이 덮인 몽블랑 산맥을 내려다 보면서 기자들에게 ‘저기서 지금 스키를 하면 멋질텐데”하며 한숨을 지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교황이 변장을 하고 스키를 타다고 모자가 벗겨지는 바람에 정체가 탄로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그 사람이 바로 교황이었는가? 아직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있을 법한 일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무엇보다도 대중들과의 접촉을 좋아한다. 군중이 기다리는 곳이라면 어디나 그는 즐겨 그들 가운데 나타난다. 거기에서 테러리스트나 미친 사람들이 표적이 될 위험이 없지 않다. 교황의 한 친구는 교황에게 “여기는 폴란드가 아니니 몸을 조심하셔야 합니다”고 여러번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손에 매여 있지요. 하느님께서 내가 그의 위임을 맡아 보기를 원하시는 한 그분은 나를 지켜주실 거예요”하고 대답할 뿐이다.

탁월한 학자요 뛰어난 예술가이며 만능 스포츠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카롤 보이티야는 시인이며, 배우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문학도였으며 저술까요 언론인인가 하면 노동자요 전쟁중에는 반전운동가들 모임의 한 회원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스키 선수요, 카누, 수영, 스케이트, 등산, 축구를 즐기는가 하면 뛰어난 신학자요, 철학자이며 사제요, 연설가이며 교수이기도하다. 그는 주교에서 대주교, 추기경으로 마침내는 교황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이렇듯 개인으로는 탁월한 학식과 예술적인 재능마저 겸비한 문화인일뿐더러 스포츠인의 자격까지 갖춘 만능인간이다.

고향인 바도비체의 청소년시절부터 그는 거의 모든 학과목에서 A 학점을 받을 만큼 두각을 나타냈으며 시작(詩作)활동과 연극활동에도 열중하였다. 그는 대학일시 직전에는 유명한 폴란드 여배우가 주최한 스피치 페스티벌에서 시 낭송으로 2위에 입상한 적도 있었으며, 학교 연극반에서는 주연배우나 공동제작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특히 한 번에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일에 능숙하여 한 동작을 한 뒤, 재빨리 변장해서 다른 연기자가 잘 해내지 못한 역을 즉흥적으로 손쉽게 해내었다. 그의 이러한 문학과 연극 활동은 대학시절에도 계속되어 크라코프의 친구 아파트에서 시를 쓰고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으며, 크라코프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도 늘 관람하고, 연극단체를 만들어 주연 배우 노릇을 하였다. 그는 전쟁 중에도 크라코프에서 비밀 지하 연극 단체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연극공연을 가졌다. 게쉬타포에서 가택수색을 피해가며 약 30분짜리 연극을 아파트 같은 곳에서 30명 정도의 엄선된 관객에게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또한 보이티야는 친구와 함께 그들의 집에서 끊임없이 문학토론회를 개최하고 시를 쓰는 작업도 계속하였으며 때로는 각본을 써보기도했다. 보이티야는 종전 후, 그이 필명인 안드레아 예비안 이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활동에서 얻은 느낌을 이렇게 기록한 일이 있다. “언어는 극적인 효소를 만드는 열쇠이다-효소를 통해서 인간의 행위가 샘솟고 효소로부터 그들의 동력을 얻어낸다” 그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우리는 이 몇줄의 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그는 또 학생시절부터 스포츠를 좋아하여 축구의 뛰어난 골키퍼이기도 했으며 때로눈 수영도 하고 고향인 바도비체 근처 언덕에서 스키를 즐기었다. 그는 스케이팅도 좋아하였고 등산도 자주 하였다. 그의 한 학교 친구는 어릴적에 가졌던 축구시함에 관해 이렇게 회상하였다.

“우리들의 시합은 해가 져서 어두워지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연습하기 위해 나와 있는 군 파견대에 의해 운동장 밖으로 내쫓길 때까지 계속되곤 했었다”

보이티야는 특히 크라코프에서 사목을 한 20여년간 열심히 각종 운동을 즐겼다. 그 중에도 그의 스키 타기와 카누 타기에 대한 열의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가 주교로 임명되었던 바로 그때에도 실제로 그는 카누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바르샤바의 대교구청에서는 그에게 연락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며 여러 시간 후에야 그를 바르샤바로 오게 할 수 있었다.

“교황이 당신을 주교로 지명하였는데 수락하겠는가 당신도 아는 바와 같이 교황은 거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비진스키 대주교가 보이티야에게 이렇게 물었을 때, 그는 잠시 생각한 후 “예, 수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다시 카누놀이를 하러 갈 수 없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즉시 호소로 돌아가 여러시간 동안 카누를 탔다. 야외로 캠핑을 갈 때 그는 미사를 드리기 위해 운반할 수 있는 간편한 제대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는 카누의 노를 두 개로 엇갈리게 동여매어 십자가를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스키 타기는 더 더욱 유명하다. 그는 1년에 여러 번씩 공식적인 업무에서 떠나 신선한 공기 속에서 등산을 하거나 자주 스키를 탔다. 그의 친구중 한 사람은 그를 대답한 스키어의 하나라고 지칭하면서 그는 아슬아슬한 위험과 드릴을 스키를 통해 즐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번은 체코 국경 근처에서 스키를 타고 있을 때, 군 경비대가 와서 그를 제지시켰다. 보이티야 추기경은 그의 신분증을 내보였으나 머리가 둔한 이 군인은 “추기경이 스티를 카? 내가 바보인 줄 알아!”하며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몇 분 후 모든 것이 분명해지자 이 군인늠 몹시 당황해했다. 크라코프의 교회지도자인 보이티야 추기경은 또 사제시절부터 저술가로서나 문필가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바티칸 기관지는 언젠가 그의 저서 5권가 44편의 긴 철학논문, 27편의 신학적, 철학적 주제에 대한 글의 목록을 발표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밖에도 500여편이 넘은 기사를 여러 출판물에 발표하였다. 그의 시와 수필 등은 ‘안들에아 예비안’이라는 익명으로 혹은 A. J라는 약자로 발표되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사랑과 책임'(Love and Responsibility), ‘막스 쉘러의 학설에 입각한 가톨릭 윤리 기초의 가능성'(On the possibility of grounding catholic Ethics on the system of Mas Scheler) ‘인간과 행위'(Man and Act) ‘쇄신의 기초'(The Foundations of Renwal) ‘모순의 징후'(The Sign of Contradiction) 등이 있다. 보이티야는 또 크라코프의 가톨릭 지성인 클럽 KIK에서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엿는데 그 예로는 KIK가 조직한 아카데믹 성가대(Academic choir)를 들 수 있다. 이 아카데믹 성가대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성가대로서, 이들의 외국공연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교회생활에 있어서의 예술의 가치와 성가의 영성적인 의미,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식에 미치는 영향 등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국제 토마스 대회, 현상학 회의 등 세계적인 학술회의에도 늘 관심을 갖고 논문을 제출하였으며 때로는 직접 참석하여 강연을 하였다. 그는 주교로서 또는 대주교, 추기경으로서 사목활동에 분주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이 루불린 가톨릭 대학 철학과의 윤리학 주임교수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학문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였다. 자연을 사랑하고 신선한 공기와 휴식이 필요했던 그는 그래서 학생들을 데리고 자주 야외 수업을 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확실히 위대한 목자요, 뛰어난 학자이며 동시에 예술적 감감과 재능을 지닌 문화인중의 문화인이다. 또한 그는 스포츠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즐기는 당대의 멋진 스포츠인의 한사람익도 하다. 여기 인간 보이티야를 알 수 있는 그이 시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이 시는 그가 로마의 성베드로 성전을 혼자 산책할 때, 아마도 그가 크게 활약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선하고 충격적인 영향을 받아 씌어진 것 같다)

반석(Marble Floor)

이곳에서 우리는 땅과 만나는도다.

그 숱한 벽과 즐비한 주랑(柱廊)들

그러나 우리는 길을 잃지 않았도다

우리가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됨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이 반석(盤石)

이는 훌륭한 성전의 공간을 채우며

미약함과 좌절가에 걷고 있는

우리를 감싸 주도다.

베드로여, 당신은 반석이니

모든 이들이 당신 위를 걸을 수 있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나이다.

당신은 그들의 발길을 인도하시고 하나의 세계를 보게 하시니

이들로부터 사상이 탄생하나이다

바위가 양들의 발길을 인도하듯이

당신은 그들의 발길을 인도하여 주시나이다.

바위는 거대한 성전의 반석이여

십자가는 풀밭이나이다.

젊은이와 끊임없이 ‘심금 울리는’ 대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처음에는 한 사람의 사제로서, 그 후에는 크라코프 신학교와 루블린 대학교의 교수로서, 크라코프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마침내는 온 세계 가톨릭 교회의 머리로서 젊은이들의 신뢰와 애정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가 젊은이들로부터 이러한 신뢰와 애정을 받는 것은 그가 누구 못지 않게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자신이 “나는 언제나 젊은이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젊은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는 교회의 희망이며 이것은 증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청소년과 접촉을 가지려고 애써 왔다. 청소년은 매우 훌륭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 청소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인격을 인정하는 것이며 개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청소년은 이렇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황이기 이전에 보이티야는 무엇보다 상대방, 특히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인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의 친구, 동료, 스승,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이렇게 그의 매력적인 인상을 말한다.

“그는 사람들을 대할 때, 특히 젊은이들을 대할 때 편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였다.”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은 그를 뛰어난 담화가로, 동반자로 그리고 또한 인자한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라고….

그는 교수시절은 물론, 주교가 된 후에도 학생들과 곧잘 어울려, 그들의 친근한 벗이 되어 주었다. 보이티야는 1975년의 어느날 학생들이 공연하는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를 관람하기 위하여 교회 지하실에 모인 300여명의 관객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보이티야 주교는 젊은이들의 신앙에 근거한 사랑과 기쁨의 중요성에 관하여 20여분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토론에 참여하였으며, 이런 경우 그는 보통 마룻바닥에 둘러 앉은 젊은이들과 함께 앉아 대화하곤 하엿다. 크라코프의 한 젊은 학생은 그 때의 보이티야 주교에 관해 그분은 결코 형식을 중요시하거나 불필요한 거리감을 느끼게하는 분이 아니었고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가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사목자로서의 보이티야의 지도는 대학생들에 국한되지 않고 젊은 노동자들에게도 미쳐 그들을 신경을 써서 보살폈다. 그는 젊은 노동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 수준, 사회적인 문제, 공장에서의 일, 그들의 주택조건, 인생이나 물질적인 것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매력, 흔들리는 도덕관 이 모든 것을 보이티야는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항상 접근하고 그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는 또한 젊은은 신학생들과 사제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보이티야 추기경은 성탄 전야를 전후한 축일에는 언제나 신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나눴으며 연극 같은 것도 같이 관람하였다. 새로 서품을 받은 사제들이 첫 번째 임지인 본당으로 갈 때면 그는 새 보좌신부와 주임신부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항상 “두 분은 똑같이 여러분 본당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다”고 격려하였다. 그는 젊은 신학생들이 나 사제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국에 나가 바깥 세상과 친숙해지도록 격려하고 도와 주었으며, 그들의 가족에게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 젊은 사제는 그가 신학생일 때 보이티야가 자기 부모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금혼 경축 미사에서 훌륭한 강론을 하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들의 어떤 문제에도 건전한 해결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며 모든 문제들은 철저히 분석하고 숙고해서 처리하라고 타일렀다. 만일 어떤 신학생이 간단히 해결책을 찾고자 그를 찾아오면 그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이 문제에 대한 너의 마음을 결정하라. 그리고 내일 다시 나와 이야기하자”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보이티야였기에 그가 성 베드로의 뒤를 이어받게 되었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큰 기쁨과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그들이 다시는 그를 자기들에게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섭섭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로서는 아버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이러한 그들의 심정을 “우리는 교황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크라코프에서 우리는 아버지를 잃었다”는 말로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젊은이들을 누구보다다 아끼고 사랑하며 항상 그들과 대화를 나눠 온 보이티야의 태도는 교황이 된 후에도 여전하였다. 아니 전세계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오히려 그 대상이 넓혀지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특성은 즉위한 첫 주말부터 모든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즉위한 첫 주말, 그는 그를 찬양코자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여러분들 어깨에 세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 여러분들은 교회의 희망이요, 나의 희망이다”라고 그들을 축복하여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교황으로서 젊은이들에게 던진 첫 번째 호소였으며 ‘나의 희망’이라는 그의 말은 로마에서 뿐 아니라 그가 순례한 세계 모든 곳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는 또 바티칸 대성당에서의 일반 알현 중 젊은이들에게 행복을 바라고 있다. 젊은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이와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셨고 청소년들과는 특별히 친밀하셨다. 주님은 특히 청소년을 부르고 계시며 가장 나이가 적었던 요한은 주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가 젊은이들의 가장 친근한 벗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교황의 여러 차례에 걸친 해외 나들이에서도 세계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교황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멕시코의 노상에서, 곡구인 폴란드 크라코프에서의 모임, 뉴욕, 킨샤사, 파리, 리오데자네이로, 일본의 도쿄, 그 어느 곳에서나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을 신뢰하는 그를 에워싸고 환호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미국 젊은이들에게도 대인기였다. 어느 도시에서 벌어졌던 교황과 젊은이들과의 만남 장면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말해 준다. 교황 자신 이날의 만남을 ‘마술적인 한 때’였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것은 서로 ‘실감’을 수없이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두말할 것도 없이 교황과 젊은이들 사이의 ‘친교’그것이었다. 장내는 박수, 환호성과 날카로운 악기의 쇳소리가 합창대의 노래 소리와 겹쳐 요란했으며 2만 여명의 학생들은 교황의 인품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그의 동작 하나, 농담 하나에도 문자 그대로 열광했다. 교황은 그 분위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과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그 속에 융화되었다. 열중하는 것도 빨랐지만 듣는데도 열심이었다. 교황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설교했다. “청소년 여러분, 자기자신의 존재에 경탄할 때는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어른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싶으면 온전한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세계와 장래에 대한 여러분들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스도 안에서만 미국과 세계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가능성을 완성시킬 수 있다”라고….

이어 두 사람의 젊은이가 기타와 진도아 T-셔츠를 교황에게 선물하고 인사말을 했다. 이 때 해프닝이 다시 일어났다. 교황이 이번엔 설교 대신 마이크로 보이스카웃의 신호인 워우(Wow)라는 소리를 낸 것이다. 장내는 다시 열광의 도가니로 화했다. 참석자들은 교황에게 응답했고 그 놀이는 계속됐다. 교황은 두 번, 세 번, 네번 그 소리를 연거푸 발음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젊은이들, 이것은 확실히 보통의 수준을 넘어선 관계이다. 왜냐하면 그와 젊은 세대 사이의 대화는 이처럼 현재도 끊임없이 이어져가고 있으며 그 대화를 통한 서로간의 신뢰와 애정은 나날이 더 두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격한 청년에 용서와 ‘사랑의 면담’까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한 터키 과격파 회교도 청년의 권총 저격을 받았다. 다행히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생명이 무사했다. 복부와 오른팔 및 왼손에 총상을 입은 교황은 피격 직후 가톨릭계 성심대학 부속 제멜리 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오후 1시부터 5시간 반에 걸쳐 9명의 의사들로부터 총탄 제거 및 결장 절개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수술 후 일시 혼미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피결 4일만인 17일 처음으로 병상에서 일어나 앉는 등 병세에 호전을 보였으며 공식 메시지를 통해 “나를 저격한 우리의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했다. 교황이 입원 중인 로마 시내의 제멜리 병원은 교황이 이날 아침 피격 후 첫 공식 메시지를 녹음한 후 약 30분간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6월 3일 건강이 호전되어 20여일만에 병원에서 퇴원하고 바티칸 궁으로 돌아왔다.

한편 교황을 저격한 범인은 터키 국적의 극우파인 26세의 아그자(Mehcmet Ali Agca)로 알려졌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탈리아 경찰로 넘겨졌다.

교황이 피격당했을 때 곁에 있었던 스타니슬라오 몬시뇰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전했다.

“교황은 이날 손님들과 같이 점심을 들었으며 알현은 아주 조용한 가운데 오후 5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장차 일어나려고 하는 일을 예측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두 번째로 광장을 돌고 청동문에 가까이 가고 있었는데 그 때 터키 사라 아그자가 교황을 저격해서 복부와 오른쪽 팔꿈치와 왼손 검지에 부상을 입혔다. 내 생각으로는 총알 두 개가 발사된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한 알은 검지에 맞고 나서 복부를 관통했다. 나는 늘 하던대로 교황 뒤에 앉아 있었는데 총알은 그 힘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나 사이인 내 발 있는 데에 와서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한 알은 오른쪽 팔꿈치에 상처를 입히고 피부에 찰과상을 입히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라 무슨 영문인지를 이내 알아채지는 못했다. 자동차 아래에서 무슨 폭발이 있었는지? 소음에 귀청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교황 사저에 있던 우리 수녀도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광장에 있던 비둘기들이 모두 날아갔다. 물론 나는 곧 누가 총을 쏘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누가 총을 쏟 것인지? 그리고 나는 교황이 총에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교황은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의 몸 위에는 피도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예요?’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배요’하고 대답했다. 다시 ‘아프시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그는 말했다. 교황 뒤에 서서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해 드렸다. 교황은 엉거주춤하니 차 안에서 내게 기대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구호소 앞 앰블런스 있는 데까지 갔다. ….교황의 눈은 가며 있었고 몹시 괴로워 하며 화살기구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특히 ‘어머님, 마리아! 어머님, 마리아!’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교황은 병원까지는 의식이 있다가 병원에 가서 비로소 의식을 잃었고, 부상이 치명적이 아니라는 확신을 줄곧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하였다. 참으로 일 순간에 일어난 뜻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8억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받아오던 교황으로서는 정말 다행히도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총알은 대동맥에서 몇 밀리미터 떨어진 곳을 지나갔고, 척추도 맞히지 않았으며 생명에 관계되는 어떤 부분도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이렇듯 쉽게 저격을 당한 데는 자신이 타는 차에 유리 덮개를 씌우는 것같은 어떤 형태의 보호도 달가와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하는 그의 대중적 성품에도 원인이 있다. 교황은 항상 군중에게서 그의 힘의 일부분을 얻어 내고 또 군중에게는 그가 탁 믿고 무장없이 그들 앞에 있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유리덮개를 하면 그들과 분리되니 싫다는 것이다. 그가 어쩌다 이런 차에 오르기를 수락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손님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교황은 이렇게 말하다. “용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쓰러지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살아날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 나를 떠난 적이 없다. 첫 번 수술 후에나 바이러스에 의한 병을 앓는 동안에 있어서나 최악의 순간에까지도 그러했다” “한 손은 총을 쏘았고 또 다른 한 손은 총알을 인도했다” 그는 자기를 그 죽을 고비에서 구해준 보호를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기적은 그 날짜로 인증되었다. 그 날은 파티마의 첫 번째 성모발현 기념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듬 해 5월 파티마를 직접 방문하여 자신의 목숨을 보호해준 성모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한편 암살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아주 좋은 조건에 있다. 그들은 붙잡히기가 무섭게 용서를 받는 것이다. 교황의 재판은 중세기의 재판이 아니며, 이번 아그자의 경우도 교황으로부터 즉각적인 용서를 받았다. 그에게는 어떤 구석에도 원한이 자리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이 모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처음부터.

교황 저격범 아그자는 제 나라에서도 이미 살인을 했었고 영국 여왕의 암살을 단념한 것은 다만 여자들에 대한 코란의 규칙이 때마침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곧 알려졌다. 그는 그만이 알고 있는 어떤 이유 때문에 절대로 누군가를 암살해야 했다는 것이며, 참 동기에 관해서는 횡설수설하였다.

그는 이내 재판결과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그가 지은 큰 죄악을 피해자인 교황으로부터 직접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 해(1983년) 성탄절엔 감옥에서 교황의 따듯한 방문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해 12월 27일, 그가 갇혀 있는 로마의 레비비아 교도소를 방문, 경당에서 400명의 남자 재소자들과 기도모임을 가진 후 20분간 그와 단독면담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그를 ‘나의 완전한 진실을 믿는 형제’라고 호칭하였다.

바티칸 신문의 한 대변인은 교황과 아그자가 “매우 낮은 목소리로 거의 고백하는 듯한 어조로 얘기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아그자의 감방 안에서 단 둘이 만났으며 몇 개 바티칸과 교도소 관리들은 문이 열린 감방 밖에서 기다렸다고 전한 대변인은 “교황과 아그자는 감방내 두 개의 의자에 마주 앉아 있었으며 감방 밖에서는 아무런 이야기의 내용도 들을 수 없었다”고 덧붙혔다. 면담이 끝나자 아그자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추었으며 교황이 감방을 떠날 무렵부터 텔레비젼 촬영이 허용됐다고 대변인은 말했다. 면담 후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자들에게 “나는 나의 완전한 진실을 믿는 한 형제와 얘기를 나눴다. 면담내용은 그와 나 사이의 비밀이다”라고 말했다. TV에 나온 장면 중에는 교황과 아그자가 머리를 가까이한 채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으며 한 순간 아그자가 교황의 귀에 속삭일 때 요한 바오로 2세가 아그자의 팔을 잡는 광경도 보였다. 25세의 아그자는 쉐타와 블루진을 입고 있었으며 면담 중 몇 차례 미소를 짓기도 했다. “2년여가 지난 오늘에야 본인은 나를 저격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며 저격 후 즉시 내가 베풀었던 용서를 되풀이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한 그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서 형제로서 만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신의 섭리가 구원의 성년기간 중에 면담을 이루게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따뜻한 사랑의 대화! 인간으로서, 형제로서 만나 죄를 용서하고 그를 나의 완전한 진실을 믿는 형제’라고 까지 부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참으로 위대한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