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태중 교우이며 어머니의 젖과 함께 하느님에 대하여 배운 사람입니다. 판공 찰고 받을 의무가 없었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청하여 구전으로 배운 기도문과 교리를 잘 외운 덕분에 상까지 탄 경력도 있습니다. 그후 예수님을 더 배워 알게 되었고 신학도 공부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신학 서적을 읽었고 저명한 신학자들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신학을 아는 사람으로 오인되어 그것을 강의하는 직분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과연 나는 표본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자타가 공인할만한 인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성령께서는 내가 하느님과의 비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시쳇말로 직업적인 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요 사제라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나는 그분의 선언에 큰 충격을 받아 내 자신을 스스로 진단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하느님은 나로부터 저 멀리 계셔서 내가 매일 몇 차례씩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는 분이었고 한편 예수님은 내가 입버릇처럼 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주님으로 체험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여’를 날마다 그리고 하루에도 십여 번씩이나 바치게 한 신학교 규칙의 존재 이유를 내게 알려 준 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여인상을 마음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언제나 내 가까이에 계셔 주시는 마음의 어머니였습니다. 불안이나 걱정이 있을 때 내 눈길은 자연히 그분에게로 향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그분은 내게 미소를 보여 주시곤 했는데 그 미소에는 내 마음을 달래며 확신을 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신부가 되리라는 생각으로 나는 신학교를 지원하였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사는 13년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밝은 때가 있었는가 하면 숨어 계시는 하느님의 침묵으로 어둡고 침울한 때도 있었습니다. 사제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멋도 모르고 덤벙대는 가운데 몇 해가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내 사제 성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내가 사제직에 대한 감흥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그 고귀한 선물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 말하자면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시기였습니다. 스스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나는 내 마음의 여인이며 어머니이신 분께 특별한 부탁을 드리기로 하고 그분께 한가지 약속을 해드렸습니다. 내 그 특별한 부탁이란 사제성소에 끝까지 항구하는 은혜였고 그분께 드린 내 약속이란 매일 로사리오기도 15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약속드린 로사리오 기도 15단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내 약속을 기쁘게 받아들여 전구해 주신 성모님 덕분에 마침내 나는 입학생 50명 중 사제직에 오른 15명 가운데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에 내가 깨달은 것은 사제생활에 있어서 기쁨과 보람과 활기를 좀먹는 요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신자나 신학생 생활이 있듯이 그러한 사제 생활이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모님께 드린 나의 약속은 사제가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지켜져야 할 것임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사제 생활에서 늘 어떤 아쉬움이나 불안을 느낀 것으로 보아 나는 갖추어야 할 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사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각 속에서 나는 늘 내 곁에 계시는 성모님께 그 진단과 해결책을 부탁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뜻밖에도 내가 백안시하고 이단시까지 해오던 성령쇄신운동에 내 눈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는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한 어느 성령묵상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성모님은 나를 당신의 짝이신 성령과 대면시키셨습니다. 그분이 대면시킨 성령은 내게 결코 낯선 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교리에서도 배웠고 신학에서도 배웠습니다. 또 나는 그분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바쳐왔는지 모릅니다. 13세 때부터 그날까지 ‘오소서 성령이여’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외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연례피정 같은 기회에 ‘임하소서 창조주 성령이여’를 장엄하게 노래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 그때 나를 안내하여 대면케 해주신 그 성령은 내게 매우 낯선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만으로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나 사제로서 생활할 수 없음을 그때에 나는 깨달았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나 사제로서 제대로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성령께 활짝 열리고 한편 성령은 나를 완전히 차지하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령 없이는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네.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러 계시고 복음은 죽은 문자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는 단순한 조직일 뿐이네. 권위는 지배 아닐 수 없고 선교는 선전일 수밖에 없네. 전례는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이며 그리스도인 생활은 노예윤리이네’라고 한 정교회 신학자인 이그나시오스 대주교의 말은 진실입니다.
나는 지나치게 이지적이며 엄격했던 신앙풍토에서 자라난 탓으로 예수님을 매우 어려운 분으로 알고 지냈습니다. 성체성사와 그 신심에 관한 그 당시의 전례 규정이나 규례는 나로 하여금 예수님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그분을 오해하게까지 만들었습니다.
내 탓이 컸겠지만 하여간 나의 지난 날의 신심은 일종의 공포신심 아니면 눈치신심이었습니다. 성체를 생각하거나 성체 앞에 나아가거나, 특히 영성체를 할 때에는 흔히 마음이 묵직하고 이상야릇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곤 했습니다. 사랑의 성사란 말뿐이라고 생각되기까지 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성체조배를 부담스럽게 여기던 나에게 이러한 말씀을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내 사랑에 네 정신과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를 만나도록 하여라. 내 성체 앞에서는 더욱 그렇게 하여라. 오직 내 사랑만을 생각하여라.
흠숭은 네 마음을 긴장시키고 굳어지게 만듦으로써 성체 조배를 무척 고되고 무겁고 따분한 일이 되게 하지만 사랑의 대면은 그것을 매우 부드럽고 따스하고 흐뭇하게 만들어 그런 시간을 자주, 그리고 오래 오래 가지고 싶게 해줄 것이니라. 내게로 오너라. 우리 함께 시간을 보내자. 내 성체에는 능력이 있고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단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러한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내가 만일 사람들로 하여금 나와의 거리감을 가지게 하려 했다면 나는 애당초 사람으로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베들레헴, 나자렛, 갈릴래아, 유다, 사마리아, 골고타 등지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처신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으냐?
너도 나를 생각하거나, 나를 대할 때 거리감을 가지지 말고 늘 평범한 차림을 한 나를 연상하여라. 사실 나는 늘 초라한 모습으로 네 곁에 서 있다. 성체 성사도 네가 행여 나와의 거리를 느끼게 될까 염려하여 내가 택한 가난인 것이다.”
이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에는 형제지간의 그것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형님이십니다. 인자하고 자상하고 사려 깊고 힘 있는 형님이십니다. 그분은 나와의 형제 관계를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분과의 형제 관계가 올바로 성립되기만 하면 그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나와의 부자 관계도 자연히 옳게 성립될 것입니다. 사실 성부는 나의 친부, 육친보다도 더 친근한 아버지시고 나는 그분에게 친자보다도 더 가까운 아들입니다. 그분은 내게 존재를 주신 진짜 아버지시고 나는 그분으로부터 나의 전 존재를 받고 있는 진짜 아들입니다.
삼위일체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나는 이런 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나는 형제이다. 그 예수님은 나를 동생으로 삼아 당신의 아버지께로 나를 데리고 가셔서 당신의 동생이 된 나를 아들로 삼으시기를 청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결정하고 계셨던 터라 성령 안에서 나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면서 나로 하여금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밖에 드러내서 하는 것은, 가령 배우자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부부간에 있어서 사랑의 유대를 튼튼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답니다. 사랑을 자주 고백하다 보면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법이랍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당신에 대한 사랑을 고백케 하신 것은, 그것도 세 번씩이나 거듭 고백하게 하신 것은 의미 심장한 일입니다. 나로서도 맏형이신 예수님께 수시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유익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예수께서 베드로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듯이 나에게서도 그것을 듣고자 하신다고 믿고 나는 무시로 그분에 대한 내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께 나의 사랑을 확인시켜드리는 동시에 내 자신이 그것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그 사랑의 고백이란 이것입니다.
“예수 형님, 저는 형님을 사랑해요.”
이게 바로 내 팔자 고친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김창렬 주교님 : 가톨릭 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