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겸손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와 청원을 고요와 겸손 가운데 바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면전에 있다고 생각하고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몸 자세와 목소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뻔뻔한 사람이 항상 큰 소리로 지껄인다면 겸손한 사람은 조용히 기도합니다. 더욱이 주님은 복음서에서 은밀하고 떨어진 곳에서, 심지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신앙에 더 알맞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당신의 무한한 엄위로써 은밀하고 숨겨진 곳까지 이르시어 모든 사람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을 보십니다. 성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가까이 있는 하느님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느님이 아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숨어도 내 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하늘과 땅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
“하느님의 눈길은 안 미치는 데가 없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한결같이 살피신다.”
우리가 형제들과 함께 모여 하느님의 사제들과 거룩한 제사를 바칠 때 무질서하고 소란한 가운데 바치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 때 겸양하게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청원은 수다스럽게 지껄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목소리보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가 고함쳐서 하느님의 주의를 끌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주님께서 이 사실을 증명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성서의 다른 곳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무엘 상권에 나오는 교회의 원형인 한나는 이런 점에서 성실하고 순종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께 큰 소리로 청원하지 않았고 마음으로부터 조용히 또 겸손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말은 은밀했지만 신앙은 밖으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즉 목소리로 기도하지 않고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여 청원한 것을 얻었습니다. 성서는 말해줍니다.
“한나는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시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치를 떨며 다시 죄를 짓지 말라. 고요히 자리에서 맘속으로 생각하라.”
성령께서는 예레미아를 통하여 같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주여, 우리가 당신을 마음 속으로 경배해야 하리이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세리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성전에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리는 뻔뻔스레 하늘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오만하게 팔을 쳐들지도 않았습니다. 가슴을 치고 마음 속에 숨겨진 죄를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자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였지만 의화된 사람은 오히려 하느님께 합당히 청한 세리였습니다. 무죄한 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는 구원의 희망을 자기가 무죄하다는 확신에다 두지 않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겸손히 기도했습니다. 겸손한 자를 용서하시는 그 분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평화와 일치의 스승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마치 각자가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하듯이 기도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또는 “오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죄 사함을 청할 때 나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고 나만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또 “나만 악에서 구해 주소서”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한 사람을 위해서만 하지 않고, 우리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온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
일치의 유대를 가르치시고 화목과 평화의 스승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드님 안에 모든 이들을 하나로 모으셨듯이 우리 각자도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불 가마 속에 갇혀 있던 세 젊은이는 입을 모아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을 때 이 기도의 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성서가 이것을 증거해 줍니다. 성서는 그 세 사람이 기도할 때 사용한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그들처럼 되기 위하여 기도할 때 본받아야 할 모범을 제시하였습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그 때에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입을 모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그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입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세 젊은이는 순수하고 영적이며 평화로운 기도로 주님의 마음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효과를 드러내어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그 제자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사도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모두 마음을 모아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그 기도의 열성과 그들의 마음의 일치를 통하여 사람들을 당신 집에 화목하게 살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만 당신의 거룩하고 영원한 집에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의 기도에는 참으로 크고도 많은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몇 마디 말로 표현되지만, 영신적 힘에서는 풍요합니다. 천상 교리의 요약인 이 기도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 청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빠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새사람으로 태어나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되돌아온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성서는 말해 줍니다. “그 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 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분을 맞아들이고 그 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름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분께 감사 드리고, 그 분의 자녀임을 보여 드리기 위해 기도 드릴 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고 우리에 대한 주님의 인자와 은총은 얼마나 풍부합니까! 그 분은 우리가 하느님 면전에서 기도할 때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기도 중에 감히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또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기쁘게 모시듯이 그 분도 우리를 당신 자녀로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행위가 영에 합당치 못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이고 천상적인 존재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직 영적이고 천상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도록 합시다. 주 하느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대하는 자는 소중히 여겨 주겠지만, 나를 멸시하는 자는 천대하리라.”
복된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다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기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누가 하느님을 거룩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
세례로 거룩하게 된 우리는 발 딛기 시작한 그 거룩함에 항구하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매일 매일 청합니다. 매일 매일 거룩해지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죄를 짓게 되므로 끊임 없이 거룩해짐으로써 죄를 씻어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으로 베푸시는 그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을 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의화되었으며 거룩해졌습니다.”
바오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영으로 거룩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함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판관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고쳐 주시어 살리신 사람에게 더 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은 거룩함과 새 생명이 우리 안에서 그 분의 보호로써 보존되도록 우리는 밤낮 쉬지 않고 청하면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다음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안에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스리지 아니하시는 때가 있습니까? 과거에 항상 있었고 또 미래에도 중단이 없으실 하느님의 나라에 시작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전에 세상을 섬겼던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다스릴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실 때 흘린 피로써 얻어 주신 우리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께서 매일 매일 오시기를 원하고 그 분께서 우리 가운데 신속히 돌아오시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활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또 그 분 안에서 다스릴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상의 나라도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늘 나라를 청하는 것입니다. 세속을 포기한 사람은 그 세속의 명예와 권세를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가 그 분이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누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귀는 우리가 만사에 있어 생각과 행동으로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그 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 의지의 업적입니다. 즉 어떤 사람도 자기 힘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인자와 자비를 힘입어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마저 당신 자신이 인간의 나약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그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겸손, 신앙의 항구함, 말하는 데 있어서의 겸양, 행동에 있어서의 정의, 활동하는 데 있어서의 자비심, 윤리 생활에 있어서의 기율, 누구에게나 해를 끼치지 않고 받는 해를 잘 참아 내는 것, 형제들과 화목을 유지하는 것,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곧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우리의 하느님으로 두려워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더 사랑하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 것,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굳게 매달려 있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에 용감히 그리고 두려움 없이 서 있는 것, 그 분의 이름과 명예가 도전받을 때 우리가 하는 말에서 그 확고함을 고백하고 우리가 처리하려는 문제들에서 확신을 가지고 달려들며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월계관을 얻어주는 그 인내심을 보여주는 것 – 이 모든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한 다음 죄의 용서를 청합니다
이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는 모두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그리고 이 빵은 모든 이의 빵이 아니고 우리의 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의 지체들인 우리의 빵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 매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구원의 양식으로 매일 성체를 영하는 우리는 중한 죄에 빠짐으로 천상의 빵을 영하지 못하게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이 양식을 매일 매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실 때 영원히 사는 이들이란 당신의 몸을 이루어 합당한 자로서 성체를 영하는 이들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누가 성체를 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구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두려워하고 이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친히 이 위험을 되새겨 주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의 은총과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우리의 양식 곧 그리스도를 매일 매일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면서 우리 죄의 사함을 청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한 다음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또 우리 죄의 사함을 얻도록 기도하라고 강권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하고 얼마나 슬기로우며 또 얼마나 유익한 가르침입니까?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죄의 사함을 청하는 동시에 죄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됩니다. 아무도 마치 자신이 무죄한 것처럼 스스로 흡족해 하지 않고 또 자신을 추켜 올림으로 더 깊은 데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매일 죄 사함을 얻기 위해 기도 드리라고 명할 때 우리가 매일 죄를 범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성 요한도 그의 첫째 편지에서 이것을 권고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 기도를 바쳐야 하고 또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한다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은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시고 진실하시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죄 사함을 청하라고 가르치신 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다운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 가운데 머뭅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죄의 사함을 청하기를 원하셨지만, 하나의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즉,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는 만큼 우리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잘못에 대해 청하는 용서도 받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 다른 곳에서 주님은 “너희가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주인으로부터 빚을 탕감받은 후 동료가 자기에게 진 빚을 탕감해 주지 않은 종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자기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주인이 이미 탕감해 준 것도 결국 다 갚아야 했습니다.
다음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한층 더 강하게 제시하시고 당신 권위의 힘으로 확인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심판 날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남에게 판단한 대로 심판받을 것이며 행한 대로 당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전에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평화의 화목 속에 있으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 속에 머물고 또 같은 영을 모신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세례로써 받은 새 생명을 계속 보존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형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바치는 예물을 받아들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보시고 화목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로 당신의 분노를 거둘 수 있도록 먼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그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예물은 우리의 평화와 형제간의 화목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유대로 하나가 된 백성의 일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벨과 카인이 바친 첫 제사에서 그들이 바친 제물을 보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에 드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바친 제물만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평화롭고 의로운 아벨이 하느님께 순결한 마음으로 제물을 바칠 때 이것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단순한 마음, 정의의 법 그리고 평화의 정신으로 제단에 나와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이런 정신으로 하느님께 제물을 바친 아벨이 그 다음 자기 자신이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로 가득 찬 아벨은 주님 수난의 첫 증거자가 되고 자기 피의 영광으로 그 수난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주님으로부터 월계관을 받고 심판 날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될 사람들입니다.
반면 복된 사도와 성서가 말하는 것과 같이 투쟁하고 분파를 조장하며 형제들과 화목하지 못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목숨까지 죽음에 부친다 해도 형제간에 불화를 일으킨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살인자는 하늘 나라에 도달할 수 없고 하느님과 더불어 살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기보다 유다의 본을 따르기를 원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렇게 훌륭한 기도가 하느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지혜로써 이 구원의 기도 안에 우리 모든 기도를 요약하셨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엄위와 자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것을 이미 예언했습니다.
“모든 것을 담고 정의로써 집약하는 하느님의 말씀, 즉 집약된 말씀을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에 전하시리라.”
하느님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인을 찾아오시어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을 함께 모으시고 성과 연령에 구애됨 없이 모든 이에게 구원의 계명을 전파하셨을 때 천상 교리를 배우는 이들이 암기하는 데 부담을 주지 않고 단순한 신앙을 얻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신속히 배울 수 있도록 이 모든 계명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요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가르치실 때 그 생명의 신비를 놀랍게도 훌륭히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과 예언서에서 첫째가고 가장 중요한 계명들을 요약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또 다른 데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런데 주님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기도함으로써 우리들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당신 자신이 자주 기도하시고 또 그 기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들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주님은 기도하실 때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고 ―무죄하신 분께서 당신을 위해 무엇을 청하실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죄인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주님은 또 아버지께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하셨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가지셨던 그 자비와 열성은 참으로 큽니다. 그 분은 당신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시는 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주님의 기도’에서 (발췌) : 성무일도III
– 수지성당 청년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