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과 성탄
낮이 점점 짧아지고 정상적인 겨울 날씨로 첫눈이 내릴 때문 성탄에 대한 생각들이 수줍은 듯이 살며시 일어난다. 그리고 단지 성탄이라는 그 말로부터 거의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이끄는 신비한 힘이 나온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에 대한 오랜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조차 축제를 준비하고 어떻게 여기저기에 기쁨의 빛이 반짝이도록 할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미 한 달 전이나 몇 주 전부터 세상은 온통 사랑의 포근한 물결이 지나가는 것 같다. 사랑과 기쁨의 축제, 이것이 겨울이 시작되는 첫달에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쫓아가게 하는 그 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게 사정은 좀 다르다. 성탄의 별은 이 땅에 평화를 가지고 오신 아기가 태어난 구유로 그들을 이끈다. 수많은 사랑스런 그림들에서 구유는 그리스도교의 예술로서 우리의 눈앞에 제시되고 어린 시절 우리에게 온갖 매력을 다 가지고 있던 옛 풍습은 이것을 노래하고 있다.
교회에 다니며 자란 사람들에게 성탄의 종소리와 대림 시기의 성가는 마음 속에 성스러운 향수를 일깨우고, 교회의 거룩한 전례에 꾸준이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언자는 힘찬 경고의 말과 약속으로 주님의 강생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하늘은 위로부터 이슬을 내리고 구름은 의인을 비처럼 내려라! 주님이 이미 가까이 오셨다! 가서 그분을 경배드리자! 주여, 오소서, 늦추지 마소서! 예루살렘아, 기뻐하라. 너의 구세주가 네게 오신다!”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마니피캇의 후렴은 “어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하고 열렬히 부르고 있다. 그리고 약속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외침. “보라, 때가 찼도다.”(대림 마지막 주일) 이어서 마침내 “오늘은 주께서 오실 것을 알게 되리니, 내일은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그렇다. 저녁에 나무에 장식된 전등에 불이 켜지고 선물교환이 이루어지고 나면, 끝없는 향수는 우리를 또 다른 빛으로 이끈다. 성탄 자정 미사의 종이 울리고 이 거룩한 밤의 기적은 촛불과 꽃들로 장식한 제대 위에서 재현된다.
“그리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이 순간 환희에 찬 성취가 이루어진다.
1)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을 따라감
이와 같은 성탄의 기쁨을 우리 각자는 이미 많이 경험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되지 못했다. 베들레헴의 그 별은 어두운 밤에 감싸여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성탄 다음날 교회는 축제의 흰 옷을 벗고 붉은 피의 색깔로 갈아입으며 나흘 뒤에는 비탄의 보라색을 입는다. 즉, 첫번째로 죽음으로써 주님을 따른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 잔혹한 살인자들의 손에 무참히 죽어간 베들레헴과 유다 지방의 젖먹이들인 무죄한 아이들, 이들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뒤따라가는 사람들로서 그 주변에 서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사들의 합창은 어디로 가고 성탄 전야의 평화로운 축복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이 세상의 평화가 있는가? 땅 위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악의 신비가 어둠으로 이 땅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하신 성부의 아드님께서 하늘의 영광으로부터 내려오셔야 했던 것이다.
어둠이 땅을 덮고 있었고 그분은 어둠 속의 빛으로 오셨으나 어둠은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분은 빛과 평화를 주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평화. 그들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인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는 평화, 그러나 어둠의 자녀들과 함께 나누는 평화는 아니다. 그들에게 평화의 임금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신다. 그들에게 그분은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게 하는 걸림돌이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에 대한 시적인 매력으로 감춰버려서는 안 되는 어렵고도 엄연한 사실이다. 강생의 신비와 악의 신비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과 대조적으로 죄의 어둠은 그만큼 더 어둡고 비밀스럽다. 구유의 아기는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벌리고 그의 미소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 입술에서 나올 말을 벌써 하려는 듯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너라.”
그리고 그의 부름에 따르는, 베들레헴 들판에서 하늘의 광휘와 천사들의 목소리로 기쁜 소식을 전해 받고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가난한 목동들은 “베들레헴으로 어서 가자”라고 말하며 길을 나섰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박한 믿음으로 놀라운 별을 따라온 왕들에게 아기의 작은 손으로부터 은총이 이슬처럼 흘러 나와 그들은 “몹시 기뻐하였다”. 이 작은 손은 은총을 베풀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너희 현자들아, 너희의 지혜를 내려놓고 어린이처럼 단순해져라. 너희 왕들아, 너희의 왕관과 보석들을 바치고 왕중의 왕이신 분 앞에 겸손되이 허리를 굽혀라. 머뭇거리지 말고, 그분을 섬기는 데 요구되는 수고와 고통과 고난을 맡아 져라. 너희 아이들아, 아직 너희 마음대로 바칠 것이 없는 너희는 너희의 연약한 생명을 아직 미숙한 그대로 아기의 손에 바쳐라. 주님을 위해 찬미드리며 희생으로 바치는 것보다 더 낫게 생명을 바칠 수는 없다.
“나를 따르라.”
이렇게 구유에 누운 아기의 두 손은 말한다.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 자신의 입으로 말하듯이. 이렇게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셨고 지금은 다시 구유를 따라온 이들 중 하나가 된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순수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이 사도는 어디로, 왜라고 묻지 않고 따라나섰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배를 버리고 골고타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모든 여정을 따라갔다.
“나를 따르라.”
젊은이 스테파노도 이 말을 들었다. 그는 집요한 불신으로 눈먼 어둠의 세력과 맞서는 싸움터로 주님을 따랐고, 자신의 말과 피로써 주님을 증거했다. 또한 그는 주님의 정신, 죄와 투쟁하는 사랑의 정신으로 주님을 따랐으며 죄인을 사랑했고 죽음의 순간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구유의 주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빛의 모습은 이런 것들이다. 즉 연약하고 무죄한 아이들, 충실한 목동들, 겸손한 왕들, 영감을 받은 제자 스테파노, 사랑받은 사도 요한,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른 모든 이들이다. 이들의 반대편에 불가사의하게 눈멀고 무감각한 어둠이 서 있다. 세상의 구세주께서 탄생하시게 될 시간과 장소를 알려 줄 수는 있으나 “어서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자”는 말로 곧장 이어지지 못하는 율법학자들, 생명의 주인이신 분을 죽이고자 하는 헤로데왕. 구유의 아기 앞에서 영혼들은 갈라진다. 이 아기는 왕들 중의 왕인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주님이다. 그는 “나를 따르라”고 말하며,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우리 앞에 빛과 어둠을 놓고 선택하게 한다.
2) 그리스도의 신비체
하느님과 하나 됨
이 아기가 우리를 이 세상 어디로 이끌지 우리는 모르고 때가 되기 전에 물을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세주께서 이끄시는 길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오, 놀라운 교환! 인류의 창조주께서 하나의 몸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에게 당신의 신성을 주셨다. 이 놀라우신 업적으로 구세주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하느님과의 자녀 관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다시 잇는 대속을 해야 했다. 병들고 황폐해진 줄기에서부터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건강하고 새로운 고귀한 가지가 접목되어야 했다. 그분은 우리들 중의 하나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분리된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고, 이럴 경우 한 사람의 타락이 그 뒤에 태어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위해 속죄의 대가가 지불되어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정의가 죄인들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의화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와 하나의 신비체가 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들이다. 우리의 손을 아기 예수의 손 위에 놓고 “나를 따르라”는 그분의 말씀에 우리가 “네”하고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넘어오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것으로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 아직 영광의 빛 안에서 복되게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믿음의 어둠 속에 머물고 있으나,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미 하늘나라에 서 있게 된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네(Fiat)!”하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하느님 나라는 이 땅 위에 시작되었고, 마리아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최초의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전후로 말과 행동으로 주님과 연관을 맺게 된 모든 사람들, 즉 성 요셉, 성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구유의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다.
이것은 시편과 예언서에 따라 하느님의 통치를 상상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는 맞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이 세상의 지배자로 여전히 남아 있었고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불쌍한 백성들에게 계속 멍에를 지우고 있었다. 주님의 편에 속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늘나라를 그들 안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 세상의 무거운 짐들을 아직 벗어버리지 못했고 더 많은 짐들이 지워졌지만, 이 멍에를 편안하게 하고 이 짐을 가볍게 하는 활기찬 힘을 그들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영혼 안에 불붙은 하느님의 생명은 어둠 속에 찾아온 그 빛이며 성탄의 밤에 이루어진 기적이다. 자신의 내부에 이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곧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모든 것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중얼거림으로 들릴 것이다. 요한복음 전체는 영원한 빛, 사랑 그리고 생명에 대한 이러한 더듬거리는 말들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그 기초를 마련하신 하느님 나라에 우리의 몫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 하나 됨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 첫번째 표지라면 이 첫번째 표지로부터 두 번째 표지가 연역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우리가 신비체 안의 지체들이라고 한다면, 각자는 지체들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되어 하나의 하느님 생명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이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바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척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본성적인 인간의 사랑과는 다르다. 본성적인 사랑은 혈연관계나 비슷한 성격이나 이해관계로 맺어진 사람들 사이에 유효한 것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과 ‘무관한’ 사람들인 ‘이방인들’이고 경우에 따라 그들의 존재는 적대적으로 보일 수 있고 가능한 한 멀리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낯선 사람’이란 없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우리의 ‘이웃’이고 그가 우리의 친척이냐 아니냐, 혹은 우리가 그를 ‘좋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또는 우리가 ‘윤리적으로 품위 있게’되는 데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관계 없이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한계가 없으며 결코 멈추지 않고 추함이나 불결함을 보고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오셨지, 의인들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어 잃어버린 양을 찾아갈 것이다.
본성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가능한 한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하느님 아버지께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오셨으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하느님 안에 간직할 때 하느님 안에서 그와 하나가 되는 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그렇듯이 조만간 그 사람을 놓치게 하고 만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 그리고 모든 외적인 재산에 한결같이 해당된다. 이런 것들을 얻고 간직하려고 외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잃게 된다.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이 얻는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 말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지니는 세 번째 표지와 접하게 된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 첫번째였고 하느님 안에 하나 되는 것이 두 번째였다면, 이 세 번째 표지는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킨다면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는 말에 나타난다.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는 사람은 하느님을 지지하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모든 걱정과 희망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기쁨이 있다. 참으로 경건하고 영웅적인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조차 이러한 자유와 기쁨을 간직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언제나 굴복하다시피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걱정과 의무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 누구나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백합의 비유를 알고 있다. 그러나 무일푼으로 집도 없고 생활을 위한 아무런 보장도 없으며 자신의 미래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무언가 비정상적인 것을 보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마는 것이다. 물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정한 수입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걱정해 주시고 자기는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만큼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확고부동하게 될 것이다. 사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좋은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고난과 궁핍이 안락한 생활보다 적절하고 실패와 멸시가 영광과 존경보다 낫다고 한다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미래의 걱정 때문에 현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신이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 말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 이 척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나온 하루를 재고, 지나간 한 해와 지나온 우리의 삶 전체를 측정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다른 모든 근심은 주님께서 맡아 주신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지녀야 할 유일한 관심은 이것뿐이다. 이 척도는 객관적인 것이며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길을 따르고 있다는 안일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한다. 최초의 인간의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에서 떨어져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듯이 우리 각자는 항상 공허와 영원한 생명의 충만을 갈라놓는 칼날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조만간 이것은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느껴진다.
하느님의 이끄심에 우리 자신을 의탁하게 되는 영적으로 초보인 유아기에 우리를 이끄는 손길을 강하고 확실하게 느끼며 우리가 행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명백히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이런 상태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숙한 어른이 되듯이, 그도 성숙해야 하고 언젠가는 십자가를 지고 게쎄마니와 골고타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고난은 하느님의 빛이 더 이상 비치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겪게 되는 영혼의 어둔 밤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현존하시나 숨어 계시고 침묵하신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이것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비밀이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나 남김없이 해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가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 이렇게 하느님의 비밀은 시작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궁극 목표이다.
그러나 이 시작과 끝 사이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시며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받고자 하는 사람은 신적인 삶과 인간적인 삶에 다같이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신 인간성은 고통받고 죽어야 하는 가능성을 부여한 반면, 그리스도께서 영원으로부터 소유하신 신성은 이 고통과 죽음에 무한한 가치와 구속의 힘을 부여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신비체인 각각의 지체로 이어진다. 누구나 고통받고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된 살아 있는 지체가 될 때 그 고통과 죽음은 머리이신 분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구속력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인들이 한결같이 고통을 갈망해 온 객관적인 이유이다. 이것은 결코 고통 자체에 대한 병적인 욕망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눈에 이것은 성도착증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신비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열망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은 내적ㅇ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림받은 것 같은 어둔 밤 안에서도 굳건히 견뎌 내며, 자신의 고통을 외적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배려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조차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3) 구원의 도구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내부의 빛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계속 하느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방책이 있는가? 방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너무나 확실하여 어떤 경우에도 빗나가는 일이란 영원히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과 결합시키시고, 우리 사이를 결합시키며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와 같게 만드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고 이 본성을 고려하셔서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느님의 아기는 스승이 되어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할지 말했다. 우리의 일생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기 위해 일년에 한 번 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성탄의 밤이 주는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의 삶 전체에 걸쳐 매일 하느님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말씀을 듣고 따라가야 한다. 구세주께서 몸소 가르치셨고 매우 강력하게 거듭 명하셨듯이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것은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는 확실한 보장이다. 매일 마음으로부터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말하는 사람은 그가 더 이상 자기 안에서 확신을 가지지 않게 될 때에도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당신의 성령을 보내셨고 당신의 성령이 인도하는 당신의 교회를 건설하셨으며, 이 교회 안에 당신의 대리자들을 뽑으셔서 그들을 통해 당신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인간의 말로 말씀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로 결합되어 서로 옹호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자신의 의견과 기도에 대해서조차 신뢰가 거부되는 경우 순명의 힘과 다른 사람의 기도의 힘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이것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실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형태로 성취되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며 매일 수많은 결함과 싸워야 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 구세주께서는 참으로 신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도와 주러 오셨다. 현세의 우리 육신이 매일의 빵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도 지속적인 양식을 요구한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것을 참으로 자신의 일용할 양식으로 받아먹는 사람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의 신비는 매일 이루어진다. 또 이것은 지속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유지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나날이 더욱 견고하게 성장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너무 지나친 요구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외적이고 내적인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삶 안에서 변화시키고자 성체성사의 빵이 되신 구세주를 위해 우리의 삶 안에 공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그다지도 지나친 요구인가? 우리는 무익한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책이나 신문, 잡지 등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읽어모으고 카페에 앉거나 길 위에 서서 15분이고 30분이고 잡담을 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조각조각 내며 낭비하는 모든 ‘산만함’을 생각해 보라.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대신 집중시키고, 정력을 낭비하는 대신 그날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기 위한 힘을 얻도록 해줄 한 시간을 매일 아침 별도로 마련한다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사실 한 시간만으로 이렇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와 같이 한 시간을 보낸 마음으로 다른 시간도 살아가며 새롭게 반복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 순간이라도 “될대로 되라”고 말하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나칠 수 없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서로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느끼게 된다. 우리는 주위환경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것이 안 될 때 함께 산다는 것이 고통스러워진다. 구세주와 우리 사이의 교류도 이와 같다. 무엇이 그분의 마음에 들고 그분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우리는 점점 예민하게 느끼게 된다. 이전에 대체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달라졌다. 우리의 나쁜 면을 많이 보게 되고 가능한 한 그것들을 고치게 된다. 우리에게 얼마나 불미스러운 것들이 많은지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도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지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겸손해지며, 제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관대하게 참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밝은 빛 안으로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이것은 ‘착한 가톨릭 신자’로서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채운다’거나 ‘건전한 신문’을 읽고 ‘올바르게 선택한다’는 등의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이며 그 밖에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세리의 겸손으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손길에 의존하고 기쁘게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작아지는 것과 동시에 커지는 것을 뜻한다. 성체성사의 삶은 자신의 삶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자연히 벗어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 집에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주님을 모실 뿐 아니라 주님의 일에 봉사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매일 미사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전례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미사 전례와 기도는 교회 전례력의 흐름에 따라 영혼이 항상 마주치는 구원사로 우리를 이끌고 이 구원사 안으로 더욱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 성찬 예식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가장 큰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 신비는 세계사의 축이며 강생과 구원의 신비이다. 적극적인 마음과 자세로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비록 미사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갈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작은 삶을 구세주의 큰 사업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비들은 서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이 신비들 중의 하나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은 다른 모든 신비들 안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곧 골고타로 이어지고, 구유로부터 십자가로 연결된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실 때 그의 영혼이 비수에 찔리듯 아프게 되고 이 아기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거나 일어나며 사람들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리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수난의 예고이며 구유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던 빛과 어둠 사이의 투쟁의 예고이다!
전례력에 따르면 흔히 주의 봉헌 축일과 칠순 주일(역주:사순절 시작 전 셋째 주일을 일걸음.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독일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 전통 안에 살아 있음), 즉 강생의 축제와 수난의 준비가 겹친다. 죄로 어둔 밤 하늘에 베들레헴의 별은 빛난다. 구유로부터 흘러나온 빛은 십자가의 그늘에 와닿는다. 이 빛은 성금요일의 어둠 속에 사라진다. 그러나 이 빛은 은총의 태양으로 부활절 아침에 더욱 눈부시게 떠오른다. 십자가와 수난을 거쳐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 걸으신 길이다. 성자와 더불어 고통과 죽음을 거쳐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나아가야 할 길이고 인류가 가야 할 길이다.
– 성녀 에디트 슈타인
– 성탄의 신비’, 성바오로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