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 John D. Dreher
70년대 중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아빠스 토마스 키팅은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방법을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바꿀 수 있을까요? 동양적인 (명상 등의) 기술을 수련한 사람들이 어떤 유사성을 보고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뿌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윌리엄 멘니거 신부와 베이실 페닝턴 신부는 이러한 도전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가 바로 향심기도이다. 짧은 몇 년 사이에 향심기도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렇게 향심기도는 메사츄세츠 스펜서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성 요셉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키팅 신부가 수도원장이었던 1961년~1981년 사이에는 성 요셉 수도원에서 불교, 힌두교 대표들과 함께 자유롭게 대화할 수도 있었고, 선불교의 스님이 수사들에게 일주일 피정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도원에서 퇴회한 후 초월명상 강사가 된 전(前)수사가 다른 수도자들에게 초월명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향심기도가 가톨릭 전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향심기도의 기법은 그리스도교적이지도 않고 기도라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인간적 기술의 정도이며, 이는 사람의 방식이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다. 그 기만성과 위험성은 중대할 수 있다.
향심기도가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다른 점은 그 기법의 목적이 이를 실행하는 사람을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추측컨데, 자기 중심에 내재하고 있는 신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인격적으로 구분된 존재로, 관계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을 중심에 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무한히 초월하고 계시면서도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안다. 하느님은 인간과는 구별되는 분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교 기도에서, 인간의 내적인 면만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존재 전체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다. 향심기도에서는 ‘하느님의 내재함’이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간적 기술과 경험에 의해 원하는대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본질적으로 자기최면의 한 형태이다. 자신의 내면 깊이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며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한 단어, 곧 만트라(mantra:주문)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효과는 최면과 유사한 상태로, 한 가지에 집중하고, 다른 자극으로부터 이탈하며, 암시에 대한 고도의 개방성과 심리학적, 생리학적으로 잠과 유사한 상태가 된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그렇지만 의식 상태는 내면화되고 정신은 암시에 종속된다. 한 심리학 교수는 향심기도 관련 서적을 읽어본 후 “이게 최면과 비슷하냐고 물으셨죠? 당연히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한 최면 상태는 혈압 저하, 호흡수 감소, 혈액내 젖산 수치 감소, 피부의 전기전도율 하락 등의 생리학적 상태로 입증될 수 있다고 말했다. 키팅 신부는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그들이 향심기도 연수를 시작했을 때, 수도자들과 참석자들 중의 일부가 “피정의 집 주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좀비’같이 보여서 무섭다”라고 불평하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 증상에 대해서는 인식했지만, 병을 진단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향심기도가 가톨릭 전통과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영성과 동양 종교들의 영성의 차이점을 알아보기로 하자. 이러한 차이는 무엇보다도, 동양 종교에서의 신, 인간, 그리고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데에 있다. 이 극명한 차이를 고려하며, 우리는 향심기도가 어디로부터 그 접근과 기법을 이끌어냈는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이 피조물이고 무지로부터 하느님을 알도록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 죽을 운명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이들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서, 스스로를 자기 행위의 근본적인 원천이자 수단, 목적이라고 여기는 ‘죄인’의 입장이나 자세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 그리하여, 그 삶의 근원은 그리스도께, 삶의 목적은 성부 하느님께로 향해지도록 되어있다. ‘되어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고,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세례의 은총은 순종 안에서 육화되어야만 한다. 세례를 받은 이후라도,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즉, 그리스도를 따르느냐,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따르느냐-다시 말해서, 죄를 짓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동양의 종교는 피조물들을 철저하게 초월하는 인격적인 창조자로서의 신에 대한 계시가 없다. 높이 평가할 만한 요소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동양의 종교에서는 창조주로서의 신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일부로서의 신을 찾는다. 동양의 종교가 모든 실존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신은, 감추어있긴 하지만, 인간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실체와 같은 존재의 한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종교의 목적은 영적 실존에 다가가기 위하여 외부 세계를 벗어던지는 데에 있다. 신은 인격체가 아닌 자기 존재의 한 상태로 이해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은 실제하는 분이시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의 자주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고, 창조는 이차적이고 부가적인 현실이다. 더욱이, 이 부가적인 우주가 만들어진 것은 단지 ‘존재’에 불과한 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랑하고 계신 아버지이시다.
신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신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달라지게 된다. 동양에서는 신에게 가기 위하여 인간적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을 찾는 것이 어떤 다른 사람을 찾는 것과는 달리 자기 의식 상태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의 대화와 상호작용을 추구하고, 그분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로1:4)”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의 회복”을 추구하지만, 동양 종교는 자기 안의 신을 찾고 외부 세계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한다. 신을 체험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만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 생리학적인 기술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만남’에 대한 기술적 혼동은 하느님의 내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기인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기술적으로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자아의 깊은 내면이 그분의 존재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은총에 의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고, 은총은 인간의 본성과 신의 본성을 혼합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은총은 인간의 제한된 능력을 완전하게 하고 힘을 더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실체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처럼, 은총의 내재성도 심리학적 기술로 조작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데, 어린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자기 부모를 알기 위해서는 내적 죽음의 상태로 가거나, 그 잉태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부모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어린이가 성장하여 그 부모처럼 되기 위해서 잉태됐을 때 받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영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사용해서 하느님과 상호작용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는다. 어린이가 자기 부모에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 전통에서 말하는 “성화 은총”이다. 성화 은총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은총이다. 성화 은총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 거룩하심의 한 몫을 나누어 받게 된다. 성화 은총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하시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이는 인간적 능력에 의해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화 은총이 우리에게 하느님과 이어지게 하는 ‘능력’을 준다. 그 능력으로 우리는 새롭고 특별한 ‘신적 본성’을 받게 되며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우리는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행위를 통하여 이 은총이 육화(구체화)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점차 우리의 죄스러운 본성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게’ 되며, 그분 신비체의 일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육화된 주님이신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에는 외부로부터의 해방이나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께의 봉헌이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단순한 내적 평화에 그치지 않고, 육체와 정신과 마음의 성화,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성화에 있다.
향심 기도는 외부 현실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타성(他姓)”을 극복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특징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힌두교에서 초월명상의 매개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초월명상은 힌두교 교사(guru)인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에 의해 힌두교에서 서양의 문화적 환경에 맞도록 이용하기 위해 정립된 것이다. 향심기도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자 열렬한 초월명상 지지자인 페닝턴 신부는 “마헤쉬 요기는 고대 베단타(인도 철학 주파, 범신론적 관념론적 일원론) 전통의 용어를 사용하며, 초월명상 수련에 대해 말하기를 절대존재를 경험하기 위해 ‘하루에 두 번 15분에서 20분 동안 깊고 깊은 마음의 평정으로 돌입하여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절대존재라는 것이 우리 안에 계시는, 바로 사랑이신 우리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뜻하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심상과 감응을 발견하게 되며, 결국 하느님 자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페닝턴 신부는 초월명상의 준비예식, 푸자(Puja, 힌두교 의식)가 죽은 힌두교 교사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있고, 시작예식의 주문(mantra)이 사실 힌두교 신들의 이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초월명상 참여를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의로 초월명상에 참여하는 것은 그릇된 숭배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교회 영성의 권위자인 아토스 산의 소프로니 대수도원장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했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정교회 신앙으로 돌아오기 전에, 여러 해를 동양 종교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명확하고 힘있게 말한 내용을 여기 인용해본다.
“초월 명상과 같은 인위적 기술에 심취하는 자들에 대해 조언하자면, 나는 교회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방식은 굳은 믿음과 오랜 인내가 필요합니다. 반면 우리 시대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인 관상까지도 강제적이고 즉시 말입니다. 또한 종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와 요가나 초월명상 같은 것을 나란히 놓고 비교합니다. 나는 그런 오류의 위험에 대해서 강조를 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의 영원한 기원, 모든 존재의 근원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하여, 또한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익명의 절대존재에게로 돌아가 합일하기 위해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벗어던지려 애씁니다. 그러한 수련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이성을 초월한 존재에 대한 응시를 할 수 있게 했고, 어떤 신비적인 전율을 느끼게 하며, 마음의 침묵 상태를 알게 해주고, 정신은 시공의 경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가시적인 세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로움을 느낄 수도 있고, 영원에 대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이신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은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 자신의 아름다움이며, 마치 하느님처럼 보여지거나 관상하게 되지만, 여전히 피조물성의 한계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의 비극성은 바로, 영원한 삶에 대한 동경으로 신기루를 보게되지만, 정작 진짜 오아시스는 놓치고 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런 비개인적인 형태의 수련은 결국 인간의 본성 안에 신적 본질이 있음을 단언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신격화의 관념에 빠져들고, 이는 원죄의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명상하는 것의 헛된 위엄이나 후광에 의해 눈이 먼 사람은 사실 자기 파괴의 행로에 자신의 발을 묶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내버린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지 무존재로의 끌림일 뿐이고, 소위 말하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His Life is Mine’, 115-116)
쉽게 말해, 참된 기도는 자기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자기 존재 중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관상기도에서 우리의 능력은 하느님께로 이끌어져야하며, 초월명상에서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류와 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생시키고 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세상을 구속하기보다 세상으로부터 이탈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기도’나 (그리스도교의 만트라(주문)처럼 자주 암송하는) 묵주기도 역시 근본적인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내용을 깊이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주님과 동정 마리아께로 상호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기 위하여 사용된다. 유사한 이유로, 가톨릭 교회의 영성 서적 저자들은 개인이 관상의 삶에 들어가기에 앞서 윤리적인 삶과 영적인 성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일관된 주장을 한다. 관상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그의 온 마음이 하느님의 말씀에 잠겨야 하고, 그의 행동은 윤리 법칙에 순응해야 하며, 절제된 삶을 통해 육체가 영혼을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겸손하게 자기 뜻을 하느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온 마음을 바쳐야 한다. 이러한 방법이 육화의 방법이고 구속의 방법이다.
종종 향심기도의 선행하는 가르침으로 주장되는 책으로 14세기 영국에서 쓰여진 ‘무지의 구름’이라는 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허황된 것이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향심기도에서 강조하는 ‘기술’들에 대해서 명확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로써 더 분명히 해두려고 하는데, 경험이 더욱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기술과 방법은 관상적인 사랑을 자각하는데 있어 결국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의 구름’을 볼 때는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 봐야한다. 이 책에서 ‘소극적인 방법’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의 독자들이 하느님 말씀이나 창작물, 성사적 수단에 의해 ‘적극적인 방법’에 충분한 기초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전제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와 같은 조건이 선행될 때, 이런 책은 기도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자존하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향심기도가 강조하는 것 처럼) ‘무지의 구름’이 기술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원문을 크게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향심기도를 장려하여 퍼뜨리는 이들 가운데에는 미심쩍은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처음 향심기도를 접했던 것은 피정 중이었는데 주제나 순서에서 향심기도 얘기는 전혀 없었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피정지도자는 우리 전부를 향심기도로 이끌어갔다. 처음엔 지시에 따랐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서 나는 지시를 따르지 않기로 했었다. 피정 주최자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더라도, 어떠한 이해나 선택을 구하지도 않고 이렇게 행한다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다.
이것이 보기 드문 상황은 아니다. 나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은사와 관련된 집회에서 향심기도를 한 사건을 안다. 물론 어떠한 설명이나 선택도 없이 말이다.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특별히 반대할만한 사건이었다. 집회를 이끌던 사제가 그리스도교적 ‘만트라'(주문)를 사용하는 데에 걱정하기는 커녕 최면 기술을 노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상상하세요.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당신 내면의 아래쪽으로 내려갑니다. 21층, 20층..” 등) 많은 가톨릭 학교에서도 교사들과 공직자들이 학부모에게 어떠한 이해나 공지, 선택도 구하지 않고 향심기도를 종교수업의 일부로 정했다. 또한 미심쩍은 것은 전통적으로 안전한 방법들은 모두 치워버린다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종종 큰 모임에서 시행되는데, 그런 모임에서는 구성원 가운데 일부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심리학적, 영적 문제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이는 정말로 위험한 문제이며,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1) 하느님을 찾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망상.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느님은 우주 만물의 일부가 아니다. 인간적 기술로 하느님께 접촉하려는 시도는 무익한 일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죄가 된다.
(2)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의 삶이 ‘관계’라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관계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자기 몰입.
(3) 악한 영에게 자신을 개방하게 되는 위험성. 이러한 기술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영역에 닿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영적 영역이라는 것은 하느님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 천사의 영을 포함한다. 도덕적, 심리학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악마적 영향에 어느정도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어머니가 내게 조언을 구하며 편지를 한 적이 있다: “OOO 마을에 있는 가톨릭 학교에서, 수녀님이 종교 시간에 이런 것(향심기도와 ‘예수기도’)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열 살짜리 제 딸은 즉시 이것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건 2년 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애가 저에게 예수님께서 자기한테 말씀하셨다고 얘기하는 것을 듣는데, 저는 상상이 안 갔습니다. 그 기도가 제 딸에게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충 한달 반 정도 전에, 크리스티는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자기 방에 가서 눕고 눈을 감기가 너무 무섭다고 해서 나는 그 애 언니 방에서 같이 자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애가 털어놓기를, 눈을 감으면 뭔가 무서운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닌다. 며칠 전에는 그 무서운 것이 웃는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크리스티는 자기 전에 향심기도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크리스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웃음소리는 악령이 보이는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접촉과 기도를 통한 분별이 필요할 것이다. 위의 편지에서, 나는 악한 영이 그녀를 괴롭히는게 아닌가 의심했다. 만일 부도덕한 행동이 있었거나, 그녀의 심리 상태에 특별한 취약성이 있지 않는 한, 그녀에게 어떤 심각한 영향력이 끼쳐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향심기도를 한 것이 악한 영과 그런 괴롭힘에 자신을 개방하게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나는 지난 수십년 동안 영성적이거나 심령 현상에 관련된 단체나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을 보았다. 일부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하느님께 대한 것이지만, 일부는 명백하게 아닌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사실 그 운동이 수단을 끌어냈던 동양 종교와 같이 오래된 것인데, 정말 놀라운 성장을 보여왔다. 유물론적 문명이 스스로 내던졌던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 것이다. 이는 사회적 현상보다 훨씬 중대한 것이며, 또한 하느님 나라와 어둠의 왕국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수히 많은 영성 운동, 심령 운동이 하느님께 대항하는 인간과 악한 영의 폭동의 한 부분처럼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20세기의 전체주의 운동은 인간 사회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그로인해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파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인류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부족했다. 내면의 삶에서 인간은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와 공산주의는 설득과 사회경제적 억압, 또 폭력적 세뇌에 의해 인류의 내면의 삶으로 침투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했다.
오늘날 인류는 그러한 조작에 대해 단 반 세기 전보다도 훨씬 더 약해져있다. 윤리규범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철저하게 쇠락했고, 인간의 기술과 관리 단속 능력은 강해졌다. 폭정은 사람들을 지배할 더 훌륭한 수단을 갖게 되었으며 더더욱 상황은 무르익어 간다. 악령의 활동을 억제하는 영향력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윤리 규범의 상실, 가정생활의 붕괴, 파괴, 단지 기능적으로 연결된 관계, 의미의 결여. 이러한 상황에서 향심기도가 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의 영적 공허를 채우려고하는 거짓 영성을 모양새 좋게 만드는 것이다.
추측컨데, 이는 사탄의 전략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인간 영혼이 갖고 있는 생리적, 심리적인 힘, 즉, 타락한 인류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이중 보호장치를 없애버리려는 것이다. (‘무법자와 그를 저지하는 어떤 이’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2테살로니카 2장 6-10절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사탄은 온 세상의 인간 영혼을 손에 넣고 어둠의 왕국을 세우려는 기대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악마의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고,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특별한 표적이 되어왔다. 물론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부터였다. 지난 십수년간 향심기도가 가톨릭 신앙의 한복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급속도로 퍼진 것은, 아마도, 교회에 대한 악마의 전략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이 가운데 아무것도 하느님의 손길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는, 하느님께서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교회의 한복판에 놓아주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집안 문제만 해결한다면, 우리는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음과 같은 주님의 위대하신 명령을 읽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지 못할 수는 없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18-20).
– ‘이 바위에’ (This Rock) Vol. 8, No. 11, 1997년 11월호.
– ‘Catholic Answers’ http://www.cathol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