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들을 위해 너희 자신을 희생으로 바쳐라.
내가 하는 말을 너희가 실천하면 많은 영혼들이 구원될 것이요,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다. “
파티마의 사명
20세기의 특징은 정말 슬픈 일이지만, 공습경보 사이렌의 울부짖는 소리로 상징된다. 수많은 로켓이 발사대에서 하늘을 향해 불길하게 날아가는 동안, 모든 민족들을 위해 만가를 연주하는 공습경보 사이렌은 또 다른 대홍수의 예언처럼 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불이었다. 인류를 쓸어버렸던 노아의 대홍수 이래로 그 어느 시대도 이보다 더 하느님을 분노케 하진 않았다. 금세기에 들어 이미 사천이백만 명 이상이 전쟁터에서 죽어 갔다. 이 숫자는 그 앞의 세기와 비교해볼 때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스도 부활 이후 열한 명의 사도들 이후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현재 우리들만큼 이렇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명을 받은 적이 없다.
이 사명은 여섯 번에 걸친 파티마 발현의 계속된 테마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명을 수행할 때 성모님께서 약속하신 세계 평화와 러시아 무신론의 회개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일이 실패한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천이백만 명은 이 세상 죄의 배상으로 하느님께 드린 계약금의 표시가 될 것이다. 그 사명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요구되는 매일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평범하고 전혀 영웅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런 요구가 어떻게 파티마의 숭고하고 훌륭한 약속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문제는 매일의 의무를 고찰할 때 분명해진다.
분석해보면, 하느님을 떠나기에 앞서 언제나 냉담이 선행했고, 매일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냉담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매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이 세상의 못된 억압의 매듭을 풀 수 있다.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매일의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오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영웅적 행위와 희생은 언제나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반대로, 의지를 약화시키고, 불성실을 합리화 시키고 , 앞질러 생각하게 하는 너무나 많은 유혹의 시간이 있다. 그것은 맞서기 버거운 괴로움이다. 때로 하느님과 성모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고 느낄 때, 당신은 기도를 통해 은총을 추구해야 한다. 성공의 비밀이 그곳에 숨어 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보험 증권을 주셨다.
그것의 보험료는 이것이다.
1. 매일의 의무
2. 매일의 묵주기도
3. 갈색 스카풀라
4. 첫 토요 신심
성모님의 요청
성모님께서 파티마에서 말씀하신 희생의 규칙은 우리와 이 세상의 죄를 보속하고,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을 위하여 우리 삶의 자리에서 모든 시련과 속상한 일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매일의 의무를 영웅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성모님께 드리는 것 자체가 영웅적인 것이며, 우리 삶을 살아있는 장미 꽃다발, 즉 묵주기도가 되게 한다.
아이를 원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 위대한 외과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게 점원, 실연의 아픔을 겪고 인생을 홀로 사는 사람들, 가난과 만성적 질병의 고통을 겪으며 살다가 죽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희생이고 보속이다.
막내를 낳자마자 또 임신을 한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임신은 희생을 바칠 기회가 된다. 그녀는 짜증과 스트레스와 늘어난 식구 때문에 겪게 되는 일을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 파티마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남편이자 아버지는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도 가정과 가정에 대한 의무보다 그 일을 우선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꾸미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제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경제적인 희생을 감당할 것이다. 그는 세속적인 문제에서나 영적인 문제에서 가장으로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진지하게 질 것이다.
잘못된 결혼을 한 사람들이 그 시련을 파티마의 지향으로 바칠 때 그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이 있다.
약한 자들의 힘
파티마 메세지를 따르기 위해 가장 힘든 일을 더 많이 하려는 사람들은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보속의 영성체를 할 기회가 있다.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과 이런 일들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그 행위를 통해 공산주의를 처형하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 집권자의 공산주의를 사라지게 할 방법은 군대와 미사일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 가난한 자, 절망하는 자, 힘없는 자, 겸손한 자, 신심 깊은 자의 손이다. 그들의 무기는 바로 병상이고, 휠체어이며, 걱정과 좌절과 실패와 비천함과 불굴의 의지와 신심과 믿음과 희망과 자선이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비극은, 그렇게도 많은 고통들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 그 고통들이 윤리적 쓰레기 더미와 지겨운 자기 연민과 무의미한 동정이 되어 낭비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십자군
파티마 제단에 대한 매일의 의무를 깊은 신앙으로 완수하는 것은 모든 고통과 모든 이의 삶을 고결하고 의미심장한 십자군으로 바꿀 수 있다.
냉소적, 물질주의적 냉담속에서, 영적으로 쇠약하거나 죽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멸의 세기 속에서 이 십자군이라는 개념은 사라졌었다. 그들은 젊음과 하느님에 대한 기쁨을 잃어버렸고, 그리하여 열정과 생기의 원천을 잃어버렸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냉담을 몸소 통렬히 비난하신다. “너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파티마 성모님은 말씀하셨다. “내 요청이 채워지면 러시아는 회개하고 평화가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는 자기 오류를 온세상에 퍼뜨려 전쟁을 일으키고 교회에 박해를 가할 것이다. 착한 이들은 순교를 할 것이고 교황은 많은 고통을 당하고 어떤 나라들은 멸망할 것이다.”
당신은 성모님의 요청에 응답하겠는가? 성모님께 봉헌함으로써, 매일의 의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라!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푸른군대) 회원을 증가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당신의 결정은 무엇인가? “예”가 아닌 대답은 모두 다 “아니오”에 해당한다. 이 두 대답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차이가 오늘날 이 세상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 편에 서지 않은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 미국[Soul]에서
– 마리아 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