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4년 10월에서 2005년 10월까지를 성체성사의 해로 선포하셨다. 교황님은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의 해에 이 신비를 새로이 발견하고 개인의 삶과 신앙 공동체의 삶 속에 더 깊이 실행하기를 촉구하셨다.
성체의 신비
비그라츠바트 기도 성지의 공동 창설자 요한 슈미트 신부는 언젠가 “내게 교회가 허락한다면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미사만 드리고 싶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게 느껴지지만 요한 슈미트 신부가 성체에 대해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를 잘 표현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성체의 신비에 대한 경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타도이츠 슈티첸 박사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예전에 교황님과 함께 수학한 학문적 동반자로서 교황님을 만나기 위해 로마에 갔었다. 박사는 교황님이 자신의 경당에서 미사를 거행할 때, “신앙의 신비”를 말하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아주 거룩하고도 깊은 경이를 가지고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했었다고 전한다.
성 비오 신부의 전 생애는 미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에 깊이 사로잡혀있어서 제대를 오를 때 그의 얼굴은 이미 환히 빛났다. 비오 신부와 함께 미사에 참례한 사람 중에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제야 비로소 하느님의 희생 제사를 이해했다’고 증언했다. 순례자들은 성흔을 받은 이 사제가 성변화의 말을 할 때 그리스도의 수난을 얼마나 강하게 겪는지를 알게 되었다. 무서운 경련이 일어나서 거의 미사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언젠가 비오 신부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신부님께 미사는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님과 나 사이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비오 신부는 미사에 자주 참례하고 가급적 매일 영성체하라고 충고한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매일 영성체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이에 대해 당신에게 찾아드는 모든 의혹들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나는 책임지고 말합니다. 대죄를 지었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성체를 영해야 합니다.”
성체의 신비를 생각할 때 생겨나는 경이로움이 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렵게 하는 동신에 매혹한다(tremendum et fascinosum).” 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성체는 거룩한 사람들에게 영광의 장식품으로 주어지는 상이 아니다. 오히려 수고하는 죄인들의 성화를 위해 필요한 양식이다. 자신의 소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약한 순례자를 굳세게 하고, 자신의 사명을 실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
희생 제물로서의 성체는 인간의 신비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한다.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24항)
인간이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이미 체험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상대방을 만들어주셨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순간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교류가 시작된다.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고유한 나’는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해진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충만을 경험한다. 인간은 자신을 주는 만큼 성숙해진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제한적임을 경험한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자를 동경한다.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과 교류할 때에만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헌신이 제한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여기 미사 성제가 그 해답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 죽음이라는 완전한 순종을 통해 성부께 완전히 헌신하였다. 이 헌신은 모든 미사 성제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된다. 세례받은 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된 신자로서 우리는 이 헌신을 우리 것으로 배워 익히라는 초대를 받았다. 미사 성제에 참여하는 것은 성부께 대한 성자의 행위 안에 우리가 ‘결합되는’ 기회다. 성부께 대한 우리 자신의 헌신이 바로 그런 헌신이 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느님 전에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체성사의 해에 부쳐 이렇게 쓴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이 골고타에서 단 한 번 거행하신 희생’을 제시한다. 언제나 새로이 재현되는 이 희생 안에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으로 성부께 향한다. 성부께 향하는 시선 없이 미사 성제를 이해할 수는 없다.”
미사 참례자에게서 그리스도의 이러한 희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예”가 함께 성취되고 하늘에 계신 성부를 향한 그리스도의 헌신에 깨어있는 정신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감사와 더불어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 당신은 지금 저를 위해 희생하십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머물고 싶습니다. 그 옛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도들처럼 도망가지는 않겠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이다.
언젠가 칸탈라 메사 신부는 “만찬을 여시던 방에 예수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 라고 선언했다. 지금 계신 그리스도는 신비체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분의 지체는 신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십자가 상 희생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지만, 이 희생이 열매 맺는 것은 각 개인이 얼마만큼 깨어있는 정신으로 이 헌신에 결합하는지에 달려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동반자로서 성부께로 향한다.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성부께 완전하게 헌신하신 유일한 분이시며, 성부의 응답을 완전히 받으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래서 피조물이 그리스도 편에 서있을 때, 비로소 성부께서는 피조물에게 당신을 완전히 주실 수 있다. 신적 동반자인 그리스도 없이 성부께로 향하는 것은 한정된 가치를 가질 뿐이다.
비그라츠바트 기도 성지에서는 신자들이 보편 지향 기도 후, 예물 준비 기도 전에 요한 슈미트 신부가 도입한 공동기도를 바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을 통하여 당신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우리 자신을 당신께 희생 제물로 바치나이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모든 지향에 따라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 아멘.”
이 기도는 거룩한 전례 안에서 성부께 드리는 예수님의 봉헌에 마리아와 함께 좀 더 깊이 참여하기 위해, 예수님 곁에 계신 하느님의 어머니와 함께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마리아는 ‘피앗(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으로 피조물이면서도 그리스도께 완전히 ‘결합된’ 분이시며,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충만하심을 완전히 받으신 분이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체의 성모님’이신 마리아는 우리에게 모범이 되신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교회가 공식적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예식인 전례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분명 인간이 드리는 것이다. 그 예식에서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과 성자에게 성부께 합당한 흠숭을 바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 거룩한 일은 우선적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봉사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마음을 기울이시고, 받을 만한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적 생명을 인간에게 주신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28). 이것은 특히 성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 활동하심에 적용된다. 성부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 당신을 인간에게 내어주는 이 두 번째 행위는 전례의 핵심으로서 우리는 이에 대해 잘 생각해야 한다.
뒤이어 하느님은 모든 미사 참례자 개개인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다. 미사 성제는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한 은총을 얻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된다. 구원의 신비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는 대행(代行) 안에 존재한다! 누구도 하느님의 생명을 자신만을 위해 얻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느님의 중요한 도구로서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은 특별히 세례받은 이들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기울이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1항)라고 선언한다. 하느님은 성체성사를 위해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받아들이신다. 그들을 통해 온 세상에 나아가고 그들 위에 당신 은총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또한 끊임없이!)
비그라츠바트에서는 영성체 후에 감사기도로서 성 이냐시오의 기도인 “그리스도의 영혼이여, 저희를 거룩하게 하소서.” 를 바친다. 성체성사의 해 동안, 거룩한 성사 안에서 받는 개인적 보화에 대한 감사와 찬미 뒤에 예수님께서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가르쳐주신 자비의 기도 중 한 부분인 희생의 기도를 세 번 덧붙이자.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것을 원하셨다. 이 기도가 강조하는 것은 나 혼자서만 하느님과의 교류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서는 안 되며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온 세상을 위해 청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혼자서만 구원을 받으려는 이기주의를 방지하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하늘에 계신 성부께 당신 아드님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에서 가장 충실한 일은 바로 직접 영성체를 하는 것이다. 영성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실재하시게 된다. 이미 파티마에서 ‘평화의 천사’가 이러한 뜻으로 어린 목격자들에게 지극히 거룩하신 분께 바칠 기도를 가르쳤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 성부 성자 성령님 …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보배로운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
우리는 몸과 피 그리고 영혼의 이해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각하면서 창조주와 창조물 사이의 교류에 들어가고, 또 하느님 자신의 내적 삼위일체적 교류에 들어간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신비를 실현할 수 있는 정점이며, 하늘에서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실현될 정점이다.
그 점에 대하여 성체성사는 언제나 전교적이다. 라틴어로 미사는 “이떼 미사 에스뜨!(Ite missa est)’ 라는 말로 끝난다. 이 말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가시오! 이제부터 미사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스스로 성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기꺼이 성체적 음식이 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쪼개어지고, 먹히고, 완전히 내주고, 내게 의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헌신을 증명하는 것을 포함한다.
미사 집전에서 하느님을 향한 제대와 신자들을 향한 제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교류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안에 우리가 결합되는 예수님의 봉헌은 의심할 바 없이 하느님을 향한 제대에서의 미사 집전을 통해 특별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이 행위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왜냐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주는 정도에 따라서만 그 상응하는 것이 응답되고 또 그 반대로 되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당신이 신적 생명을 충만하게 베풀어주신다. 하지만 아버지께 드리는 우리의 헌신의 정도에 따라서만 우리는 그 몫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께 가는 행위는 충만한 성체성사를 위한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행위이며 성체성사의 결정적 순간인 충만함 그 자체는 신자를 향해 미사를 거행할 때 나타난다. 신자들을 향한 제대는 본질적으로 단순한 잔치 그 이상이다. 신자들을 향한 제대는 참석한 신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성체성사를 거행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로서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다른 사람을 위한 대행(代行)을 떠맡음은 그리스도적 생명과 그리스도적 사랑의 생명 중추라 할 수 있는 헌신의 가장 고귀한 형태다.
– 토마스 마리아 림멜 신부 ,독일 ‘KIRCHE heute, 2005, 1월호
– 마리아 2005년 7~8월 (132호)
– medjugorj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