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목요일에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2005년 3월 24일)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1. 그리스도의 사랑이 “극진히”(요한 13,1 참조) 드러났던 날, 곧 성찬례의 날이며 우리 사제직의 날인 성목요일에 해마다 여러분과 갖는 영적인 만남을 올해에는 성체성사의 해에 가지게 되어 특히 기쁩니다.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저는 다른 환자들과 나란히 병원에서 회복을 기다리며 성찬례를 통하여 저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시키면서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우리의 사제 영성의 몇 가지 측면을 여러분과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해골산에서 단 한 번 영원히 드리셨던 희생 제사를 우리의 제대 위에서 재현하고자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바치는 성찬 축성문을 저의 성찰의 영감으로 삼고자 합니다. 성찬 축성문에서 우리는 사제 영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습니다. 온 교회가 성찬례에서 생명을 얻으므로, 사제의 삶은 더욱더 성찬례로 ‘구현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찬 제정문은 축성문 이상의 것, 곧 “생명의 조문”이 되어야 합니다.
깊이 “감사하는” 삶
2.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시고”. 모든 미사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빵을 쪼개시며 드러내신 첫 마음, 곧 감사의 마음을 기억하고 되살립니다. 감사는 “성찬례”라는 말 자체의 근원을 이루는 마음자세입니다. 이 감사의 표현에는 성서 전체의 영성인 놀라우신 하느님에 대한 찬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당신의 섭리로 우리를 이끄시고, 끊임없는 구원 행위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찬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또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감사드리십니다. 예수님의 이 감사 행위가 어찌 사제 생활의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제는 자기가 살아오면서 받았던 수많은 은혜에 대하여 끊임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특히 자신이 선포하여야 할 신앙의 은혜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나라에 봉헌하게 한 사제직의 은혜에 대하여 끊임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고 갈 십자가가 있으나 - 물론 우리만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기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마니피캇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어진” 삶
3.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삼위일체 생명에 근원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자기 증여는 최후의 만찬에서 성사적으로 선취되었던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축성문을 바칠 때마다 이러한 영적인 흐름에 휩싸이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제는 “받아 먹어라.” 하고 말을 할 때 그 말을 자신에게도 적용하여야 하며, 또 진실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 말을 하여야 합니다. 사제가 공동체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또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때에 사제의 삶은 참된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복음사가가 발씻김 이야기에서 강조하듯이,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이며, 또한 하느님 백성이 사제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더욱 깊이 생각해 본다면, 사제가 서품식에서 하였고 성유 축성 미사 때에 갱신하여야 하는 순명의 서약은 성찬례와 맺고 있는 바로 이러한 관계로 빛을 얻습니다. 주교의 권위 있는 판단이 요구할 때, 사제는 자신의 정당한 자유를 어느 정도 희생하더라도 사랑으로 순명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교회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받아 먹어라.” 하신 말씀을 자신의 온몸으로 구현합니다.
구원하고자 “구원 받은” 삶
4.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인간의 전인적 구원을 위하여 내어준 것입니다. 이 구원은 완전하며 동시에 보편적입니다.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그리스도의 피의 구원 능력에서 배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서에서 말하듯이(마르 14,24; 마태 26,28; 이사 53,11-12 참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바치는 희생입니다. 이러한 전형적인 셈어식 표현은 유일하신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수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대상인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몇몇 번역문에서 명시하듯, 주님의 피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이며, 그리스도의 살은 실로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요한 6,51; 1요한 2,2 참조) 주어진 것입니다.
전례 때 모두 경건히 침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엄한 말씀을 되풀이할 때 우리 사제들은 이 구원의 신비를 전하는 특별한 전령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설득력 있는 전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에서 우리를 일으켜 주는 은총을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느껴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가지고 “아빠, 아버지” 하고 외쳐야 합니다(갈라 4,6; 로마 8,15 참조). 이러한 확신은 우리에게 완덕의 길로 나아가도록 촉구합니다. 사실 성덕은 구원의 완전한 표현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낼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확실한 전령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지를 끊임없이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선교의 열정을 새로이 받아, 우리 각자 “그들 중에 단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1고린 9,22) 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기억하는” 삶
5.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루가만이 아니라(22,19) 바오로도(1고린 11,24)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사실상 유다인들의 “기념제”인 파스카 만찬의 배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보다 이집트 탈출을 가장 먼저 기념하지만, 그들 역사의 또 다른 중요한 사건들, 곧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지키시기 위하여 하신 많은 일들, 곧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 이사악의 희생 제물, 시나이 산의 계약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찬례는 “기념제”이지만, 그것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성사적으로 실현하는 독특한 기념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례는 단지 하나의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기념제”의 말씀을 되풀이함으로써 ‘기억의 영성’을 발전시키도록 권유받습니다. 사회 문화적인 급속한 변화가 전통에 대한 의식을 약화시키고 특히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근원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이 시기에 사제는 자신에게 맡겨진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충실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되고 신약에서 완성된 그 신비를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더욱 깊이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하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봉헌된” 삶
6. “신앙의 신비여!”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다음 이 말을 선포할 때마다, 사제는 자기 손에서 이루어지는 엄청난 기적에 언제나 새로운 경이로움을 표현합니다. 이 기적은 바로 신앙의 눈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자연적 요소들은 그 외형적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과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성과 신성을 온전히 지니신 채 ‘참으로 실제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제대 위에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탁월하고 거룩한 실재입니까! 이러한 연유로, 교회는 이 신비를 지극한 경외심으로 다루고,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이 성사를 수호하기 위한 전례 규정의 준수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 사제들은 집전자이지만, 또한 이 지극히 거룩한 신비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찬례와 맺는 관계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 거룩한 삶은 우리의 모든 존재 방식,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찬을 거행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빛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인들에게서 배웁시다! 성체성사의 해는 우리에게 성체 신심을 열렬히 옹호하였던 성인들을 재발견하도록 권유합니다(「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Mane Nobiscum Domine], 31항 참조). 수많은 복자와 성인 사제들은 이에 대한 모범적인 증거를 보여 주면서 미사 거행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장시간의 성체 조배로 유명하였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 ‘고독의 시간들’을 지내며 그분의 현존으로 이 시간들을 채움으로써, 우리는 우리 삶에 기쁨과 의미를 주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어 우리의 봉헌에 더욱 깊은 활력을 불어넣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
7.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파스카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우리는 그분과 온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는 사제직의 영성으로, 하느님 백성 가운데 살면서 그들이 나아갈 길을 인도하고 그들의 희망을 북돋워 주도록 재촉하는 목자의 사랑으로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 임무는 사제들에게 바오로 사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요구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필립 3,13-14). 사제는 세월이 흘러도 계속해서 젊음을 발산하여 그가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젊음을 ‘전염’시키는 사람입니다. 그 비결은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열정’에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했듯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
특히 새로운 복음화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사제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기를’ 희망하며(요한 12,21 참조) 사제들에게 의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러한 갈망을 느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부르시며 친구로 삼으시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완전히 투신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참으로 사제답다면, 분명 성소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린” 사제는(필립 3,12 참조), 더 쉽게 다른 이들을 “붙들어” 그들도 같은 모험의 길로 들어설 결심을 하게 합니다.
성모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성찬’의 삶
8. 제가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 지적하였듯이(53-58항 참조),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와 성찬례의 관계는 매우 긴밀합니다. 모든 감사기도는 이를 전례 용어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감사기도 제1양식에서 우리는 “저희는 온 교회와 일치하여, 우리 주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영광스러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 공경하오니,” 하고 말합니다. 다른 감사기도들에서도, 예를 들어 감사기도 제2양식에서처럼, 공경이 청원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하소서.”
최근 몇 년 간, 특히 교서 「새 천년기」(23항 이하 참조)와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9항 이하 참조)에서, 저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열심히 권유하며, 성모님을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라 일컬었습니다. 이어서 저는 성체성사에 관한 회칙에서 성모님을 “성찬의 여인”(53항 참조)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성모님 말고 누가 더 성찬의 위대한 신비를 맛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합당한 열정으로 거룩한 신비들을 거행하고 성체 안에 감추여 계신 당신 아드님과 친교를 맺도록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성모님께 기도드리고, 특히 노인들과 병자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그분께 맡겨드립니다. 성체성사의 해에 맞이하는 이 부활대축일에, 저는 예수님의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기쁘게 되풀이하여 드립니다. “보라, 너의 어머니를!”(요한 19,27 참조).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진심어린 축복을 보내며, 부활의 커다란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교황 재위 제27년
2005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원문 Letter of the Holy Father Pope John Paul II to Priests for Holy Thursday 2005,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letters/2005/docu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