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팔레스티나의 많은 곳에서 온 병자나 순례자들 가운데 계신다. 바다의 사고로 인하여 마비된 띠로의 뱃사람까지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의 불운을 이야기 한다.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바람에 무거운 짐이 떨어졌는데, 무거운 상품들이 그의 몸을 덮쳐서 척추를 상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죽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 지경으로 회복의 가망이 없게 되어서 부모가 그를 간호하기 위하여 일을 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죽은 것보다도 더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부모와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갔었고 그 다음에는 나자렛으로 갔다고 한다. 거기서 예수께서 유다에 가 계시고 마침 예루살렘에 계시다는 말을 성모님에게 들어서 알았다고 한다.
“어머님은 선생님께 숙소를 제공할 수 있는 친구들의 이름을 제게 가르쳐 주셨는데, 세포리스의 갈릴래아 사람이 선생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아무도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사마리아 사람들까지도.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제 청을 들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말을 하지 않고 병자가 누워 있는 병상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서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애원하는 눈으로 예수를 쳐다보고 있다.
“어디를 다쳤소?”
“목 아랫쪽입니다. 바로 거기에 충격을 받았고, 제 머리 속에서는 청동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다음 충격에 뒤이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고, 빛들이, 가지각색 빛들이 제 앞에서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저는 여러 날 동안 아무 감각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친티움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는데, 저는 집으로 왔지만,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 날 동안 머리 속에는 바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고, 눈에는 빛들이 다시 보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팔이 죽어 있었고, 다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세에 끝장이 난 남자, 그런데 저는 자녀가 일곱 명이 있습니다, 주님.”
“아주머니, 남편을 들어 올리고 타격을 입은 자리를 드러내 보이시오.”
여인은 말없이 순종한다. 오빠인지 시아주버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여자와 같이 온 남자의 도움을 받으며, 능란하고 어머니다운 움직임으로 한 팔은 남편의 밑으로 넣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받치며, 갓난아기를 돌려 누이는 것같이 조심스럽게 무거운 몸을 자리에서 일으킨다. 아직도 붉은 흉터가 주요한 충격의 자리를 알린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신다. 모든 사람이 보려고 목을 늘인다. 예수께서는 손가락 끝으로 흉터를 누르시면서 말씀하신다. “나는 원한다!”
그 남자는 그의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이 몸이 흔들리며 소리를 지른다. “아이고 뜨거워!”
예수께서는 손가락을 상처 입은 척추에서 떼시고 말씀하신다. “일어나시오!”
그 남자는 즉시 말을 듣는다. 여러 달째 꼼짝 못하는 팔로 병상을 짚고, 그를 부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몸을 흔들고, 들것 아래로 발을 내리고, 일어서고 하는 것이 내가 기적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쓴 시간보다도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여자가 외치고, 친척이 소리를 지르고, 고쳐진 사람은 기쁨으로 인하여 말을 못하는 채 팔을 하늘로 올린다. 깜짝 놀란 기쁨의 순간이 지난 다음, 그 사람은 빙 돌아 가장 날쌘 사람과 같이 민첩하게 예수 앞에 와 선다. 그 때에야 그는 목소리를 다시 찾아 외친다. “선생님과 선생님을 보내신 분은 찬미 받으십시오! 저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메시아이신 선생님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땅에 엎드려 예수의 발에 입맞춤 한다. 그동안 사람들은 환성을 올린다.
그리고는 대부분 어린이와 여자와 늙은이들에 대한 기적이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부러졌던 뼈가 다시 단단해지고, 죽었던 팔다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튼튼하게 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하여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내 치유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끌려 건강을 찾아 이곳에 온 모든 곳의 사람들에게 베풀어 졌습니다.
여기에는 유다인들과 갈릴래아 사람들, 레바논 사람들과 시로-페니키아 사람들, 멀리 떨어진 바타네아와 해안지방 주민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모두 계절이 나쁘고 길이 먼 것은 걱정하지 않고 왔고, 부모는 일이 중단되고 장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은 어떤 희생도 그들이 얻으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건강과 위안을 원하고 바라기 위하여, 사람의 이기주의와 망설임이 사라진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모두 형제이고 삶과 고통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는 일종의 벽을 만드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사상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벌써 믿음이 되는 바람으로 일치할 줄을 안 모든 이에게 건강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양의 목자입니다. 그래서 내 양떼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모든 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건강한 양들과 병든 양들, 약한 양들과 튼튼한 양들, 벌써 하느님의 양떼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아는 양들과 지금까지 나를 알지 못하고 참 하느님조차도 알지 못하던 양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온 인류의 목자여서 양들에 있으면서 내게로 향해 오는 모든 장소에서 내 양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을 부정하다고 말하면서 물리친 목자들에게 매를 맞은 야위고 더럽고, 천해지고, 무식한 양들입니까? 깨끗해질 수 없는 부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깨끗해지기를 원하고 깨끗해지기 위하여 도움을 청하는데, 부정하다는 핑계로 배척을 받을 수 있는 부정도 없습니다.
착한 소원은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소원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그 소원들이 실현되기를 원하신다는 표입니다. 같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도로 사랑의 부탁에 따라서 모는 사람을 흡수하기를 청하십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퍼지고 부유하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만족시킬까 말까 한 무수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퍼지고, 당신의 달콤한 향기로 당신에게로 끌려오는 무수한 사람들의 사랑으로 부유해지기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양떼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물리치는 일은 아무에게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 중에서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사람의 사상, 즉 하느님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차별과 판단의 사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사상은 모든 민족을 당신께서 보내신 메시아의 이름을 가진 오직 하나의 민족을 만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의도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밖에서 온 모든 양들, 즉 지금까지는 야생양으로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인 목자의 오직 하나뿐인 양떼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양들에게도 말합니다. 그런데 내 말은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그들을 낙담시켜서는 안 되고 아무 것도 그들을 비천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새 씨앗을 받고 새 옷을 입을 수 있기 위하여 어떤 잡초에서도 해방되어 다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기 위하여 버리고 배척할 수 없을 이교도 없고 우상숭배도 없으며, 내가 가르치는 것과 다른 생활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팔다리의 건강보다도 한층 더 민족들을 내게로 이끌어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고 이것은 팔레스티나의 히브리인들에게나 디아스포라의 히브리인들과 개종자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모두 소용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의 병든 육체에서 병약이라는 멍에가 벗겨지게 하려고 내게 올 줄 아는 것과 같이 여러분의 정신에서 죄나 이교의 멍에가 벗겨지도록 하기 위하여 내게로 올 줄을 아시오. 여러분은 모두 제일 먼저 여러분의 정신이 그것을 지배하는 악한 힘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에서 해방되기를 내게 청하고 힘을 다해 원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선 이 해방을 원하고, 여러분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르는 것을 첫째 기적으로 원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 안에 오기만 하면, 다른 것은 무엇이든지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이고, 또 그 선물이 저 세상에서 벌처럼 괴롭게 느껴지지 않도록 주어질 것입니다.
팔다리는 오늘 고쳐진다 하더라도 가까운 장래에 육체의 죽음으로 죽을 터인데도, 여러분은 그 팔다리의 건강을 얻기 위하여 일기불순과 피로와 돈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마음으로 정신의 건강과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무릅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나 동향인이나 권력의 업신여김이나 위협은 여러분 모두가 진리와 생명으로 올 줄 알면, 여러분이 어떤 곳에서 오던지 받게 될 것과 비교하면 무엇입니까? 해가 지면 끝날 즐거움에 하루를 남아 있기 위해서 행복한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곳으로 가기를 망설일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의 재미없고 무익한 기쁨을 잠간 동안 실컷 누리기 위하여, 그들은 참된 음식과 참된 기쁨을, 그것도 적의 증오로 인하여 빼앗기게 될 염려가 없이, 영원히 가질 곳으로 달려가기를 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증오도 없고 전쟁도 없고 불의도 없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갈 줄 아는 사람은 고통과 불안과 굴욕을 겪지 않고 내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기쁜 평화를 차지합니다.
여러분을 돌려보내겠습니다. 가시오. 여러분의 마을로 돌아가시오. 이제는 내 제자들이 많아졌고, 팔레스티나의 모든 지방에 퍼져 있습니다. 내 가르침을 알고 싶고. 많은 사람의 영원한 생명이 거기 달리게 될 결정의 날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기를 원하면 그들의 말을 들으시오. 내 평화가 여러분과 같이 가도록 내 평화를 여러분께 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강복하신 다음 집 안으로 들어가신다…. 사도들은 아직 얼마 동안 밖에 그대로 있다가, 중천에 높이 떠있는 해가 오정이 되었음을 알리기 때문에 식사를 하려고 들어온다. 그들은 치즈와 삶아서 기름으로 조미한 풀상치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하여 촌스러운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 음식의 강복이 있은 다음 아침나절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한다. 그들은 선생님이 이제는 지금과 같이 피로한 상태에서 계속 말씀하시는 피로를 더시게 될 만큼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수가 많아진 것을 기뻐한다. 과연 예수께서는 요즈음 한층 더 야위셨다. 원래는 짙은 흰 상아색이고, 뺨위쪽 갈색 살갗 밑에 약간 분홍빛을 띠기만 하던 살빛이 이제는 완전히 희어서 신선함을 잃은 목련 꽃잎과 비슷하다. 밀라노에오래 살아서 찬란한 대성당 건축에 쓰인 깐돌리아의 대리석의 섬세한 빛깔을 아는 나에게는 지상에서 살으신 생애의 이 고통스러운 마지막 몇 달 동안의 주님의 얼굴은, 정말 희지도 않고 분홍빛도 아니고 노란빛도 아니고, 이 세 가지 빛깔의 가장 미묘한 뉘앙스로 상기시켜 주는 대리석 빛깔처럼 보인다. 눈은 더 깊숙하고, 그러니까 더 어두워 보이고, 아마 피로의 그림자가 눈꺼풀과 눈구멍을 가리는지도 모르겠다. 잠을 별로 자지 못하고 많이 울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눈이다.
그리고 손은 야위고 창백해졌기 때문에 더 길어 보인다. 벌써 두드러진 힘줄과 정맥이 보이고 너무 야위어서 오목한 데가 있고, 그 밑으로는 아래에 있는 뼈가 비척 보이는 내 주님의 부드러운 손, 그것을 꿰뚫을 못을 받을 준비를 벌써 갖추고 있고, 내 주님의 고행자로서의 손에는 지방이 가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들이 못을 박을 자리를 찾기가 쉬울 학대받는 거룩한 손이다. 지금은 그 손이 지쳐서 그런 것처럼 식탁의 우중충한 나무 위에 힘없이 놓여 있는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에게 애써 미소를 보이시며 머리를 흔드신다. 사도들은 예수의 팔다리와 목소리가 극도로 피로하였음을 알아차리고, 특히 서로 다른 그 많은 마음을 일치시켜야 하고, 고치기 어려운 제자의 불명예를 숨겨 두어야 하는 노력으로 인하여 너무 고민하고 너무 지친 선생님의 마음이 극도로 피로하였음을 알아차린다….
베드로가 선언한다. “선생님은 성전 봉헌 명절까지는 절대로 쉬셔야 합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희가 유념하겠습니다. 선생님은 가십시오…. 그렇구 말구요! 토마의 집으로 가세요. 선생님은 아주 가까이 계시고 평안히 계실 것입니다.”
토마가 베드로의 제안을 지지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머리를 흔드신다.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리로 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면 요 며칠 동안은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고상한 말들은 아닐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저 저희가 아닌 것이나 말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병자들만 돌보십시오.”
“그것은 우리도 할 수 있어” 하고 가리옷의 유다가 말한다.
“흠! 난 그거 포기하네”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그렇지만 자네도 벌써 그 일을 했는데.”
“암, 했지. 선생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우리가 선생님을 대표하고 선생님을 사랑하게 해야 할 때는 말이야.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이 여기 계시니까, 기적을 행하는 것은 선생님이셔. 선생님만이 기적을 행할 자격을 가지고 계시단 말이야. 기적을 우리가! 아니 그보다도 우리의 쇄신의 기적을 우리가 받을 필요가 있네.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좋은 일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아차리니까 말일세. 우리는 하찮은 인간이고, 죄인이고, 무식쟁이란 말이야.”
“제발 자네에 대해서나 말하게. 나는 조금도 하찮은 인간이라고 느끼질 않네”하고 가리옷의 유다가 대꾸한다.
“선생님은 지치셨네. 선생님의 피로는 육체적이기 보다는 정신적이야. 우리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다툼을 그만두세. 이것이 선생님을 가장 지치시게 하는 걸세”하고 열성당원이 엄하게 말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항상 매우 현명한 나이든 사도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식탁 위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쓰다듬으신다. 열성당원은 그의 갈색 손으로 이 흰 손을 잡고 입맞춤 한다.
“자네 말이 옳으네. 그러나 선생님이 절대로 쉬셔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것도 옳은 말이야. 선생님은 병자 같으셔!…”하고 베드로가 역설한다.
모두가 찬성한다. 늙은 요한과 엘리사까지도. 엘리사는 말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말을 했어요. 그 때문에 나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에서 제일 가까운 데에 있는 안드레아가 문을 열고 나가서 문을 다시 닫는다.
안드레아가 다시 들어온다. “선생님, 어떤 여자가 있는데, 선생님을 뵙겠다고 간청합니다. 계집아이를 하나 데리고 있습니다. 옷은 수수하게 입었지만 높은 신분의 여자 같습니다. 그 여자도 딸도 병자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왜 그 여자가 그렇게 두꺼운 베일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집아이는 눈부신 꽃들을 안고 있습니다.”
“돌려보내라. 우리는 선생님이 쉬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너는 선생님께 식사를 마치실 시간도 드리지 않는구나!” 하고 베드로가 불평한다.
“그 말을 했어, 그렇지만 그 여자는 선생님을 피로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선생님이 그 여자를 보시면 분명히 기뻐하실 거라고 대답했어.”
“내일 모든 사람이 오는 시간에 오라고 말해라. 이제는 선생님 쉬실 참이다.”
“안드레아야, 그 여자를 이층 방으로 데리고 가라. 곧 가마”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자 봐! 내 그럴 줄 알았어! 선생님은 이렇게 당신 몸을 아끼신단 말이야! 우리가 하시라고 청하는 꼭 그대로 하신단 말이야!” 베드로는 화가 났다.
예수께서는 일어나신다. 그리고 나가시기 전에 베드로 뒤로 지나가시면서 양손을 그의 어깨에 얹으시고, 몸을 약간 굽히시고 그의 머리카락에 입맞춤을 하시며 말씀하신다. “됐다, 시몬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침대에서 쉬는 것보다도 내 피로를 더 덜어 준다.”
“그 여자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십니까?”
“오! 시몬아! 불안으로 인해서 너는 그 말이 어리석은 말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벌써 후회한 말을 하게 되었구나! 됐다! 됐어! 죄없는 계집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 꽃을 잔뜩 안은 죄없는 자기 딸을 데리고 온 여자는 나를 사랑하는 여자일 수밖에 없고, 이렇게도 많은 증오와 더러움 가운데에서 사랑과 깨끗함을 조금 얻어 만날 내 필요를 보는 여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옥상으로 올라가는 층계를 올라가시는데, 안드레아는 그의 임무를 마치고 부엌으로 돌아온다.
여인은 위층방 문 앞에 있다. 두꺼운 회색 겉옷을 입고 머리에 쓴 두건에서 얼굴 둘레에 내려오는 상아색 비단으로 얼굴을 가린 키가 크고 날씬한 여자이다. 기껏해야 세 살이나 되었을까 말까 하기 때문에 아직 어린 계집아이는 흰 모직으로 된 작은 옷을 입고 두건이 달린 역시 흰 빛깔의 망또를 입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품에 꼭 껴안고 있는 꽃에서 드러나는 작은 얼굴을 들어 여인을 쳐다보기 때문에 두건이 우아한 엷은 밤색의 곱슬한 머리 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추운 12월에는 이 나라들에서만 만날 수 있는 찬란한 꽃들이다. 살색 장미꽃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우아한 흰 꽃들과 섞여 있다. 나는 화초 재배에는 별로 능력이 없다.
예수께서는 옥상에 발을 들여놓으시자마자 여인의 부추김으로 당신께로 마주 달려오는 어린 아이의 작은 목소리로 “아베, 도미네 예수!”(“Ave, Dominejesu!”(예수님, 안녕하세요?)라는 라틴어 인사.) 하고 인사하는 소리를 들으신다.
예수께서는 그 큰 키를 꼬마 신봉자에게로 굽히시고 그의 머리에 한 손을 얹으시며 “평화가 너와 함께 있기를”하고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몸을 일으키시고, 기쁘게 종알거리며 여인에게로 돌아가는 계집아이를 따라 가신다. 여인은 선생님을 지나가시게 하기 위하여문 앞에서 비켜나면서 몸을 깊이 숙였다.
예수께서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시고, 방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만나시는 의자에 않으셔서, 기다리시는 것처럼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매우 왕다우시다. 등받침도 없는 초라한 나무 의자에 앉으셨지만, 품위가 얼마나 엄숙한지 옥좌에 앉아 계신 것 같다.겉옷을 입지 않으시고, 비와 햇볕과 먼지와 땅이 빛깔을 침식한 어깨에는 빛이 좀 바랜 매우 짙은 파란색 모직 옷만을, 깨끗하지만 초라한 옷만을 입고 계시지마는, 태도가 어떻게나 위엄이 있는지 주홍빛 옷을 입으신 것 같다. 목위에 매우 꼿꼿이 세운 머리는 거의 엄숙할 정도이고, 손은 손바닥을 펴신 채 무릎에 올려놓으시고, 맨발은 아무 것도 깔지 않은 오래된 벽돌 바닥을 딛고 계시고, 배경으로는 아무 장식도 없고 겨우 회로 희게 바른 벽에, 예수의 머리 뒤에는 천이나 닫집이 늘어져 있지 않고, 밀가루를 치는 체와 마늘과 파 뭉치가 매달려 있는 밧줄이 걸려 있는데, 발아래 값진 포석(鋪石)이 깔려있고, 예수 뒤에는 금으로 된 벽이 있고, 머리 위에는 보석으로 꾸며진 주홍색 포장이 늘어져 있는 것보다도 더 위엄이 있다.
예수께서 기다리신다. 예수의 위엄은 몹시 놀란 존경으로 여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계집아이도 말이 없이, 아마 조금 무서워하며 여인 곁에 꼼짝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신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 여기 왔소. 두려워 마시오.”
그러니까 일체의 두려움이 사라진다. 여인이 계집아이에게 무슨 말인지 속삭이니, 계집아이는 여인의 앞장을 서서 예수의 무릎 앞으로 다가가서 예수의 무릎 위에 꽃을 전부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저를 살려 주신 분에게 파우스띠나가 드리는 장미꽃이예요.” 계집아이는 그 말을 마치 모국어가 아닌 외국 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말한다. 그러는 동안 여인은 베일을 뒤로 젖히고 계집아이 뒤에 무릎을 꿇었다. 그 여자는 계집아이의 어머니 발레리아이다. 발레리아는 로마식으로 예수께 인사한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부인, 하느님께서 당신께 오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여길 오셨습니까? 또 이렇게 혼자서?” 하고 예수께서는 계집아이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말씀하신다. 계집아이는 이제는 겁이 없어져서, 예수의 무릎에 꽃을 갖다 놓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향기가 나는 꽃다발에서 제 딴에는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꽃들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찾으면서 말한다. “받으세요! 받으세요! 이건 선생님 거예요. 아세요?” 그러면서 혹은 장미꽃 한 송이를, 혹은 향기 나는 작은 별모양의 술이 있는 넓은 흰 꽃 한 송이를 예수의 얼굴 가까이로 올린다.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받아 향기 나는 꽃다발 위에 얹으신다.
그 동안 발레리아가 말한다. “제 딸이 좀 병이 들고 저희 의사가 권고했기 때문에 저는 티베리아에 갔었습니다….”
발레리아는 오랫동안 말을 끊고 얼굴빛이 변하더니 말을 빨리 한다. “그런데 저는 마음에 아주 큰 고통이 있어서 선생님을 뵙기를 갈망했습니다. 제 고통에 대해서는 오직 의사 한분만이 치료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으니까요. 그 의사란 모든 일에 정의의 말씀을 가지고 계신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떻든 왔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격려를 얻는다는 이기심으로도 그렇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도요… 그렇습니다. 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주신 선생님과 선생님의 하느님에 대한 제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요…
그러나 선생님, 저희들은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식민지의 아주 작은 사건에 대한 보고까지도 날마다 본시오 빌라도의 책상에 놓입니다. 빌라도는 그것들을 읽어봅니다. 그러나 그 문제들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끌라우디아에게 맡기는 일이 많습니다…. 많은 보고에 선생님과 나라 안에서 계속 소란을 일으키는 히브리인들에 대한 말이 많이 있는데, 선생님을 민족 각성의 깃발과 동시에 시민들의 증오의 동기로 묘사합니다. 끌라우디아가 팔레스티나 전체에서 빌라도에게 불행의 원인이 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즉 선생님뿐이라고 남편에게 말할 때에 끌라우디아는 정확히 본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날마다 끌라우디아의 말을 듣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장 강한 사람이 끌라우디아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일 다른 세력이 빌라도를 지배하면… 그래서 저는 죄없는 제 어린 딸이 선생님을 위로해 드리리라는 것을 알았고 또 느꼈습니다….”
“부인은 동정심 가득하고 견식 있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제와 또 항상 부인을 온전히 비추시고, 따님을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저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발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렇습니다. 부인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부인은 어떤 위안이든지 다 받을 것이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용서하고 아직도 사랑하는데 있어서, 특히 이 어린 딸이 참 하느님의 자녀들의 행복한 생명을 가지도록 교육하는데 있어서 인도자를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보세요. 부인이 알지 못하시던 하느님, 부인이 당신네들의 신들과 당신네들의 종교적 규범과 의례(儀禮)와 전혀 다른 그분과 그분의 율법을 비웃었을지도 모르는 하느님, 아직 가벼울지도 모르지만 덕행을 더 심하게 어기고 당신을 창조하신 신께 죄를 짓도록 이끌어가는 많은 일에서 덕행이 존중되지 않는 생활 방식으로 틀림없이 모욕을 했을 하느님, 그 하느님께서 부인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어머니로서의 부인의 인간성으로, 즉 내세를 알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혈육의 육체의 이별의 성격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머니로서의 인간성으로 느낀 고통으로 인하여 부인을 내게로 데려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인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임종의 고통 속에서 벌써 싸늘하게 식어가는 부인의 어린 아이의 육체를 보면서, 말하자면 부인이 임종의 고통을 느끼고 있던 가이사리아로 나를 인도하실 정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인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부인이 참 하느님의 인자와 능력을 항상 정신에 새겨 가지고 있고, 부인이 이교적인 방종에 대한 억제력과 기혼녀로서의 모든 고통에 위안을 얻도록 그 아이를 부인에게 돌려주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인을 하도 사랑하셔서 또 다른 고통으로 부인 안에 길과 진리와 생명에 와서 부인의 딸과 더불어 거기에 자리 잡아, 따님만이라도 어려서부터 세상의 보잘것없는 세월에 위안과 평화, 구원과 빛이 되는 것을 차지하고, 부인을 자신의 가장 훌륭한 부분과 감정적인 부분에서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보호되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훌륭한 부분이란 그것이 살 수밖에 없는 어두운 진흙을 견디어 내지를 못하는 본능적으로 착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고, 감정적인 부분이란 그 착함에 있어서 무질서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인은 부인의 애정에 있어서 이교적 입니다. 그것은 부인의 탓은 아닙니다. 부인이 살고 있는 세기와 부인이 자란 이교도국의 탓입니다. 한 종교에서 사는 사람만이 애정에 그 가치와 알맞은 정도와 올바른 표현을 줄줄 압니다.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는 어머니인 부인은 어린 것을 무질서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오려고 하는 죽음으로 미치다시피 되어 그 잃음에 대해 절망적으로 반항했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미치광이에게 붙잡혀, 떨어지기만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심연위에, 그의 사랑의 입맞춤을 받을 차디찬 시체로도 돌아올 수 없을 심연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사람과 같이, 부인은 따님 파우스따가 벌써 허무의 심연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딸을 잃게 될 가엾은 어머니! 육체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지고 있지 못하게 될 딸, 허무, 영의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끝장, 가혹한 끝장입니다.
사랑하고 충실한 이교도 아내인 부인은 남편을 지상의 신처럼 육체적인 사랑으로 사랑했습니다. 남편은 동등한 부인의 품위를 노예의 지위로 떨어뜨리며 부인에게서 숭배를 받는 부인의 아름다운 신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겸손하고 충실하고 정숙하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남자인 남편은 가장입니다. 그러나 가장이라는 것이 횡포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이란 아내의 육체뿐 아니라 가장 훌륭한 부분에까지 어떤 변덕스러운 짓을 해도 되는 제멋대로인 주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당신네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까이우스, 당신이 있는 곳에는 까이아 저도 있어요’하고. 방종이 당신네 신들의 이야기에까지 있는 곳의 불쌍한 여인들, 당신들 중에서 과도하게 음란하지 않은 여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남편들이 있는 곳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방탕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은 여자가 자기가 신처럼 숭배하던 남편이 짐승 같은 동물성에 지배되고, 추잡스럽고, 간통하고, 정신이 산만하고, 무관심하고, 아내의 감정과 품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에게서 혐오감을 가지고 떨어져 나가고, 그 때까지 신처럼 생각하던 남편에 대하여 심금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정말 지독한 고통과 공포를 느끼고 모든 숭배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울지 마시오. 나는 다 압니다. 백부장들의 보고를 볼 필요도 없이 다 압니다. 부인, 울지 마시오. 오히려 남편을 질서 있게 사랑하도록 배우시오.”
“이제는 남편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사랑을 받을 자격을 잃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업신여깁니다. 저는 남편을 본받는 것으로 저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 사이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저는 남편이 떠나는 것을… 붙잡으려고 애쓰지 않고… 가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사실은 남편이 멀리 간데 대해 마지막으로 그에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남편을 다시 찾지 않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도대체 남편이 언제 제게 동반자 노릇을 했습니까? 제 숭배의 눈가리개가 벗겨지고 나니까 이제는 그의 행동이 기억나고 판단하게 됩니다. 제가 갓 시집오고 산월이 가까웠을 때 어머니와 고향을 떠나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와야 하는 것 때문에 울 때에 혹 남편이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는 친구들과 같이 제 눈물과 구역질을 어리석게 비웃으면서, 제 옷을 더럽히지 말라고만 주의를 주었습니다. 낯설은 곳에서 향수에 젖어 있을 때 혹 제 곁에 있어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제 몸의 상태로 인해서 갈 수가 없는 밖의 연회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혹 저와 같이 아기의 요람을 들여다보았습니까? 그에게 딸을 보였을 때 남편은 웃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애를 땅에 파묻으라고 하고 싶구먼. 내가 결혼의 멍에를 멘 것은 계집애들을 낳으려고 한 것은 아니거든’하고요. 그는 그것이 쓸데없는 무언극이라고 말하면서 청결의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우니까 나가면서 ‘그 애에게 리비티나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여신에게나 바쳐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파우스따가 죽어 갈 때에 저와 같이 극도의 불안을 나누었습니까? 선생님께서 오시기 전날 밤 남편이 어디에 가 있었겠습니까? 발레리아노의 집 연회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바로 말씀하시는 대로 남편은 제 신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있는 모든 것이 제게는 좋은 것으로, 옳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남편은 제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뜻에 가장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노예였습니다. 남편이 왜 저를 멀리하는지 아십니까?”
“압니다. 부인의 육체 안에서 영혼이 깨어났고, 부인이 이제는 암컷이 아닌 여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 집을 고결한 집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안티오키아의 집정관에게로 파견되도록 하고, 저는 따라 가지 못하게 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노예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오! 저는 따라 가지 않겠습니다! 저는 딸이 있으니까 전부를 가졌습니다.”
“아닙니다. 전부를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부인은 일부분을, 전체의 작은 일부분을 가졌습니다. 부인이 덕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데 소용되는 것입니다. 전체는 하느님이십니다. 부인의 딸은 전체이신분에 대한 불의의 이유가 되어서 안 되고, 정의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딸을 위하여, 딸과 함께 부인은 덕있는 여자가 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위로해 드리려고 왔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위로하시는군요. 그러나 저는 제 딸이 그를 구해 주신 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게 하려면 이 어린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도 여쭈어보려고 왔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개종자가 되고, 제 딸도 그렇게 만들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면 남편은요?”
“오! 남편과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부인은 여전히 그의 아내이십니다. 훌륭한 아내의 의무는 남편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편은 이혼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이혼을 하지 않는 한 부인은 당신들의 법률에 의해서도 그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아내로서 부인의 자리에 있을 의무가 있습니다. 부인의 자리는 딸에 대해서 또 하인들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남편 다음으로 집 안의 둘째의 자리입니다. 남편이 나쁜 모범을 보였다고 부인은 생각하시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인이 덕행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의무를 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간 것은 사실입니다. 부인은 딸과 하인들에 대해서 남편을 대신하시오.
당신네들의 풍습에서 모든 것이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가 덜 부패했을 때에는 여자들이 정숙하고 근면하였고 덕행과 믿음의 생활로 신을 섬겼습니다. 이교도라는 그들의 불쌍한 처지로 인해서 거짓 신들을 섬기게 되기는 했지만, 그 사상만큼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그들의 덕행을 종교 사상에, 종교와 신에 대한 공경의 필요에 바쳤습니다. 그 신의 진짜 이름을 여자들은 알지 못했지마는, 그 존재는 느끼고 있었고, 또 신화적인 전설에 따라 타락한 신들이 살던 난잡한 올림포스산의 신들보다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당신네들의 올림포스산의 신들도 없는 것이고, 다른 신들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당신네들의 옛날 덕행은 신들이 사랑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하여 덕행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참된 신념의 결과였습니다. 그 덕행들은 당신네들이 숭배하던 신들에 대하여 가졌다는 느낌을 가진 의무의 결과였습니다. 세상 사람들, 특히 우리 유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당신네들이 드리는 그 존경 때문에 당신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참된 정의에게는, 모든 인간과 모든 것의 오직 한 분뿐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그 덕행과 존경과 의무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선과 믿음과 종교를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자기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면, 선은 언제나 선이고, 믿음은 언제나 믿음의 가치가 있고, 종교는 언제나 종교의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부인에게 부인의 집안에 또 부인의 집의 기둥과 빛으로 부인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정숙하고 근면하고 충실하던 당신네들의 옛날 여자들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부인은 혼자 남아 있다고 해서 하인들이 부인에 대해서 존경을 덜 가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두려움으로, 또 때로는 눈에 띄지 않는 미움과 반항의 감정을 가지고 부인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사랑을 가지고 섬길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노예들은 고통을 압니다. 부인의 기쁨은 그들에게 쓰라린 자극이었습니다. 부인의 고통은 이 단어의 가장 불쾌감을 주는 뜻으로서의 여주인이라는 차디찬 광채를 부인에게서 없애고 동정이라는 따뜻한 빛으로 감쌀 것입니다. 발레리아, 부인은 하느님과 딸과 하인들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내가 아니고 이혼녀가 되었더라도, (예수께서는 일어나신다) 법적인 별거도 아내로서의 맹세에 충실해야 하는 아내의 의무를 없애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부인은 우리 종교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지요. 하느님의 계명 중의 하나는 아내가 남편의 몸의 몸이고, 하느님께서 오직 한 몸을 만드신 것을 아무 것도 아무도 갈라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혼이 있기는 합니다. 이혼은 인간의 음란과 원죄와 남자들의 타락의 나쁜 결과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자발적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직 죄를 짓지 않은 그러니까 죄가 가리지 않은 지능으로 말하는 아담에게 이 말을 불어 넣어 주시면서, 부부는 한번 결합하면 오직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음이나 병의 불행으로 인해서가 아니고 갈리는 몸에서 갈라지지 않습니다.
잔인한 죄를 피하기 위하여 인정한 모세법에 따른 이혼은 여자에게 매우 보잘것없는 자유밖에 주지 않습니다. 이혼한 여자는 그대로 있건 재혼을 하건, 사람들의 생각에 언제나 가치가 줄어든 여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으로는 여자가 남편의 악의 때문에 이혼을 당하고, 이혼녀로 남아 있으면 불행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비열한 죄로 인하여 이혼을 당하고 재혼을 하면 죄녀와 간부(姦婦)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부인이 우리 종교에 들어오기를 원한다면 나를 따르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인데, 하느님의 말씀인 나는 완전한 종교의 시대가 왔으므로 많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부인에게도 말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는 없고, 배우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재혼을 하는 남자나 여자는 항상 간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혼은 남자와 여자를 음란죄를 지을 상황에 놓아두는 합법적인 매음입니다. 이혼당한 여자는 살아 있는 남자의 과부로, 충실한 과부로 남아 있기가 어렵습니다. 이혼한 남자는 첫번 결혼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다른 결합을 하면, 사람의 수준에서 짐승의 수준으로 내려갑니다. 짐승들은 관능의 유혹에 따라 암컷을 바꾸어도 되는 것입니다. 가정과 조국에 대한 합법적인 간음이 죄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대하여는 죄가 됩니다. 이혼한 부모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를 심판하게 됩니다. 자녀들의 심판은 엄한 것입니다! 자녀들은 적어도 부모 중의 한 사람은 단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손상된 감정적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후 죄없는 자녀들에게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빼앗아 가는 이혼의 가정적 결과에 자녀들을 맡은 배우자의 재혼이 덧붙여지면, 부모 중의 한 사람의 절단된 감정적 생활의 선고에 또 다른 절단이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갈라졌거나 새사랑이나 재혼에서 얻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빠져버린 부모 중 한 사람의 애정을 다소간 전적으로 잃는다는 절단입니다.
이혼한 남자나 여자의 새 결합의 경우에 결혼식이니 결혼이니 하고 말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와 실상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배우자 중 한 사람의 죽음과 그로 인한 남아 있는 사람의 홀아비나 과부의 신분만이 재혼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하긴 내 판단으로는 사람들의 운명을 조절하시는 분의 항상 옳은 결정에 복종하고, 죽음으로 인하여 결혼상태가 끝났을 때에는 순결 속에 들어박혀 자기를 온전히 자녀들에게 바치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을 자녀들을 통하여 사랑하는 것이 나을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일체 물질성이 없어진 거룩하고 참된 사랑입니다.
가엾은 어린 아이들! 죽음이나 가정의 붕괴 후에 둘째아버지나 둘째어머니의 박정을 맛보고, 형제들이 아닌 다른 자녀들과 애무가 나누어지는 것을 보는 고민을 맛보다니!
아닙니다. 내 종교에는 이혼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결합을 맺기 위하여 세속적인 이혼을 하는 사람은 간통자이고 죄인일 것입니다. 인간의 법률이 내 법령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내 종교에서는 결혼이 그 일을 위하여 세운 증인들의 참석으로 이루어지고 확인되는 세속적인 계약이나 정신적인 약속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사가 되는 계약에 내가 줄 힘으로 고정되고 접합되는 풀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부인에게 알아듣게 하기위해서 말하자면, 신성한 의식일 것입니다. 그 힘은 결혼의 모든 의무를 거룩하게 행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겠지만, 관계의 파기불가능에 대한 확인도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결혼이 이성 두 사람 사이의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상호 계약입니다. 그러나 내 법이 존재하는 때부터는 그것은 부부의 영혼에까지 확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제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확인하시는 영적인 계약도 될 것입니다. 부인은 이제 하느님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은 인간의 아무 권한도 아무 법률이나 일시적인 기분도 갈라놓지 문할 것입니다.
당신네들의 의식에 있는 ‘까이우스, 당신이 있는 곳에 까이아 저도 있겠습니다’라는 것은 저 세상에까지, 우리 의식까지, 내 의식에까지 계속됩니다. 그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부 사이의 일시적인 이별에 지나지 않고,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죽음 다음에까지도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홀아비나 과부에게 순결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순결하게 될 줄을 모릅니다. 역시 그렇기 때문에 부부는 서로 상대방을 개선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흔들지 마시오. 의무는 이러합니다. 그리고 정말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오늘은 엄격하십니다.”
“아닙니다. 나는 선생이고, 내 앞에는 은총이 생명으로 커질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다. 만일 부인이 지금의 부인과 같은 사람이 아니면, 나는 부인에게 짐을 덜 지워 줄 것입니다. 그러나 부인은 정신력이 판단하고, 고통은 부인의 정신력을 점점 더 깨끗하게 하고 단단하게 합니다. 언젠가는 부인이 나를 기억하고 내가 이러했던 것 때문에 나를 찬미할 것입니다.”
“제 남편이 뒤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은 앞으로 나아가시오. 부인의 죄없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미워하지 말고, 복수할 생각을 가지지 말고, 그러나 또 쓸데없이 기다리지도 말고, 잃은 것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말고 정의의 길을 걸으시오.”
“그러면 제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도 아십니까?”
“압니다. 그러나 부인이 남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남편이 부인을 잃은 것입니다. 남편은 부인의 남편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들으시오…. 이것은 엄격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인은 나를 위로 하기위하여 장미꽃들과 죄없는 어린이의 미소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부인이 써야 할 버림받은 아내들의 가시관밖에 마련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시오. 만일 시간이 뒤로 돌아갈 수가 있어서 부인을 파우스따가 죽어 가던 그날 아침으로 도로 데려가고, 부인의 마음이 딸이나 남편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잃어야 하는데, 둘 중에 한 사람을 골라야 하게 되어 있다면, 부인은 누구를 고르시겠습니까?”
부인은 대화 첫머리에서 눈물을 좀 흘린 후 얼굴이 창백해 졌으나, 고통 중에도 용맹하게 곰곰 생각한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방바닥에 앉아서 예수의 발 둘레에 작은 흰 꽃들을 놓으면서 놀고 있는 어린 딸을 껴안으며 외친다. “이 애를 택하겠습니다. 이 애에게는 제 마음까지도 줄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가 배운 것과 같이 이 애를 키울 수가 있으니까요. 제 딸! 그리고 세상에서도 결합해 있어서, 저는 이 애의 어미로, 이 애는 항상 제 딸로 있게요!” 그러면서 딸에게 입맞춤을 퍼부으니, 어린 딸은 온통 사랑과 미소가 되어 엄마의 목을 꼭 껴안는다.
“말씀해 주십시오. 오! 영웅적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서 저희 둘이 다 선생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이 애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말을, 어떤 행동을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특별한 말도 행위도 필요치 않습니다. 딸이 부인의 완전을 반영하도록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 이 아이가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시오. 세상에서 하느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사시오. 그러면 딸이 부인을 본받을 것입니다. 우선은 이렇게 하시오. 이다음에는 당신들을 특별히 사랑하신 내 아버지께서 당신들의 영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실 것이고, 그러면 당신들은 내 이름을 가질 믿음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해야 할 일 전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부인은 악에 대한 일체의 억제력을 얻을 것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는 짓누르는 고독에 대한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도록 가르치시오. 부인 자신과 따님에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습니까?”
“알아듣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말씀입니다…. 선생님, 가겠습니다. 불쌍한 여자에게 강복해 주십시오…. 저는 충실한 배우자를 가진 거지보다도 더 불쌍합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아닙니다. 베델에 있습니다. 매우 친절한 요안나가 그의 저택으로 저를 보냈습니다…. 저기서 저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요안나가 예루살렘에 올 때까지 그곳에 있겠습니다. 요안나는 머지않아 예루살렘으로 올 것입니다. 요안나는 선생님의 어머님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봄이 되어 따뜻하기 시작하면 유다로 올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얼마 동안 요안나와 함께 있겠습니다. 그런 다음 여자들이 오면, 저는 그 여자들과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벌써 제 상처를 그전에 낫게 했을 것입니다.”
“시간도 그렇고, 특히 하느님과 부인의 어린 딸의 미소가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발레리아, 안녕히 가세요. 부인이 착한 정신으로 찾는 참 하느님께서 부인의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부인을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계집아이에게 강복하시려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신다. 그런 다음 닫힌 문으로 가까이 가시면서 물으신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해방된 노예 한 사람과 같이 왔습니다. 마차가 마을 어귀 수풀 속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또 만나 뵙게 될까요?”
“성전 봉헌 축일에는 예루살렘에 가겠습니다, 성전에.”
“선생님, 저도 거기 가겠습니다. 제 새 생활을 위해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안심하고 가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사람을 돕지 않고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믿습니다…. 오! 저희들의 이교 세계는 정말 슬픕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참 생활이 없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슬픔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사람들이 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평화가 부인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여인은 몸을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딸에게 무슨 말인지 암시를 준다. 그러니까 계집아이는 얼굴을 들고, 그 작은 팔을 내밀면서 매우 명랑한 작은 목소리로 “예수님, 안녕히 계세요!” 하고 되풀이 한다.
예수께서는 그 작은 입에 벌써 만들어지는 죄없는 입맞춤을 받으시려고 몸을 굽히시고 또 한번 강복하신다…. 그런 다음 방으로 돌아오셔서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꽃들 가까이에 앉으신다. 얼마 동안이 지난 다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너라.”
문이 벙싯 열리고 반쯤 열린 틈으로 베드로의 성실한 얼굴이 나타난다.
“너냐? 오너라….”
“아닙니다. 선생님이 저희들 있는 데로 오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는 춥습니다. 참 아름다운 꽃들이로군요! 아주 비싸겠습니다!” 베드로는 말을 하면서 선생님을 살펴본다.
“그렇다. 아주 비싼 것이다. 그러나 행위와 그 행위가 행해진 방식은 꽃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이 꽃은 끌라우디아의 로마 여자 친구 발레리아의 어린 딸이 가져온 것이다.”
“예! 저도 압니다! 알아요! 그렇지만 왜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들은 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를 안다. 그래서 발레리아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여자는 죄없는 어린 아이의 꽃이 나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로마 여자가!… 그런데 저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생님께 고통밖에 드리지 않는군요…. 유다가 잘 알아맞혔습니다. 유다는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틀림없이 로마 여자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베드로는 몹시 의아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저 “유다는 어디 있느냐?” 하고만 말씀하신다.
“밖에 있습니다. 길에, 수풀 근처에 가 있단 말씀입니다. 그 사람은 누가 선생님을 뵈러 왔는지 보려고 합니다….”
“내려가자.”
유다는 부엌에 있다. 그는 예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돌아서며 말한다.
“선생님이 부인하시려고 하셔도 그 여자가 무슨 불평을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 여자들이 다른 말 할 것이 또 있습니까? 그 여자들이 할 일은 그저 염탐하고 고자질 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네게 대답할 의무는 없다만, 모든 사람을 위해서 대답한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나는 모두에게 그 여자가 왜 왔는지 말하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도 위안과 조언의 필요를 느낄 수가 있다…. 안드레아야, 올라가서 계집아이가 가져온 꽃들을 어린 레위에게 가져다주어라.”
“왜요?”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고 있다구요? 그렇지만 제가 아침 아흡시쯤에 그 애를 보았는데, 아주 건강했는데요”하고 바르톨로메오가 몹시 놀라서 말한다.
“건강했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었다.”
“그애가 그렇게 병이 중하면, 꽃을 즐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 그러나 겁에 질린 집에서는 구세주가 보낸 꽃들이 빛나는 말을 해 줄 것이다.”
예수께서 앉으시는데 모두가 인생의 약함에 대하여 말하고, 엘리사가 겉옷을 입으면서 말한다. “저도 안드레아와 같이 가겠습니다. 그 가엾은 어머니!….”
안드레아와 엘리사가 꽃들을 들고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예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신다. 유다도 어쩔 줄을 몰라 잠자코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나 엄격하지는 않으시다…. 유다는 알고자 하는 욕망과 양심의 평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의 괴롭히는 극도의 불안에 자극되어 빙빙 돌아다닌다. 그러나 마침내 베드로를 외따로 끌고 가서 물어본다. 그는 베드로와 말을 한 후에 안심하고, 식탁 구석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있는 마태오에게로 가서 귀찮게 군다.
안드레아가 뛰어서 돌아온다. 그는 숨이 턱이 닿아서 말한다 “선생님 어린 아이가 정말 죽어갑니다…. 갑작스레 미친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아주머니가 ‘이건 주님이 보내시는 거예요’하고 말해서, 저는 그들이 ‘상여에 놓으라고’ 라는 뜻으로 알아듣는 줄로 생각했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말했습니다. ‘오! 맞아! 뛰어 가서 선생님을 모셔 와요, 선생님이 얘를 고쳐 주실 거예요’하고.”
“믿음의 말이다. 가자.”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뛰다시피 하며 나가신다. 자연 모두가 예수를 따라 가고, 늙은 요한가지도 다리를 절면서 모든 사람 뒤에 따라 간다.
집은 마을 끝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내 그곳에 도착하셔서, 열린 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시며 가신다. 그리고 출입문 저 안쪽에 있는 어떤 방으로 곧장 가신다. 아마 형제끼리인 많은 사람이 사는 넓은 집이기 때문이다.
방안에는 임시변통으로 만든 침대를 아버지와 어머니와 엘리사가 몸을 굽히고 들여다 본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 집에 평화”하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예수를 본다.
그러자 불행한 부모는 침대를 떠나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린다. 엘리사만이 그대로 남아서 싸늘해져 가는 팔다리를 방향성(芳香性)물질로 문지르는 일에 골몰해 있다.
어린 아이는 정말 임종이 가까워서, 그의 몸은 벌써 죽은 사람처럼 무겁게 축 늘어져 있고, 그 작은 얼굴은 밀랍 빛깔이고, 콧구멍에서는 매연이 나오는 것 같고, 입술은 보라빛이 돈다. 어린 아이는 그 작은 가슴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어렵게 숨을 쉬는데, 앞에 숨쉰 것과 너무나 사이가 떨어지기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마지막 숨인 것 같다.
어머니는 예수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운다. 아버지도 몸을 땅에 닿도록 굽히고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말한다. 다른 말은 할 줄을 모른다.
예수께서는 “레위야, 이리 오너라”하고 말씀하시면서 팔을 내미신다.
다섯살쯤 되었을 그 어린 아이는 자고 있는 동안에 누가 큰 소리로 부른 것같이 몸을 흔든다. 그는 어렵지 않게 앉아서 그 작은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에게 미소를 보내시는 예수를 보고, 그의 작은 침대에서 아래로 뛰어 내려, 작은 속옷바람으로 구세주를 향하여 자신 있게 간다.
부모는 구부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영원히 인자하신 분!” 하고 외치는 엘리사의 감탄과 출입문에서 놀라서 “오!” 하고 소리를 지르는 사도들과 구경꾼들의 외침으로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된다. 그들은 방바닥에서 얼굴을 들고 그들의 어린 아들이 언제 죽어갔었느냐는 듯이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거기 있는 것을 본다.
각자의 반응에 따라 기쁨으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잠자코 있기도 한다. 여기서는 기쁨이 마치 공포에 질린 것 같은 말없는 심한 놀람을 자아낸다…. 바로 앞에 있었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달라서, 고통으로 인하여 벌써 어리둥절해졌던 부모는 기쁨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인다. 어린 아이가 예수의 품에 안겨 있자, 마침내 그들은 기쁨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때에는 무언(無言)에 뒤이어 기쁨과 찬미의 외침이 섞인 말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무질서하게 넘쳐흐르는 이 말의 홍수를 따라 가기가 어렵다. 그 말에 따라 이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오정때쯤 해서 정원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신음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었다. 할머니가 안고 불 곁에 데리고 있었더니, 아픈 것이 덜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 오후 세시 좀 못 미쳐 아이는 냄새나는 더러운 물을 토하기 시작하였고, 이내 임종으로 들어갔었다. 전형적인 격렬한 급성복막염이었다.
아버지는 병의 첫번 증세를 보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의사를 데려 왔었다. 의사는 그동안 토하기 시작한 아이를 보고 나서 “이 애는 살 수 없습니다”하고 말하고 갔었다…. 과연 병은 시시각각 악화하고, 아이는 벌써 몸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었다. 부모는 그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인한 극도의 불안 속에서 아들이 머지않아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안드레아와 엘리사가 꽃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예수님이 이 꽃을 레위에게 보내십니다”하고 말하였을 적에야 비로소 그들은 일종의 내적인 빛을 얻어 “예수님이 이 애를 살려 주실 것이다”하고 말하였었다.
“그런데 이 애를 살려 주셨습니다.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분! 선생님의 꽃! 소망! 믿음! 오! 그렇구 말구요! 저희에 대해 가지신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찬미 받으십시오!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을 저희에게 요구하십시오! 노예들에게 명령하듯이 명령하십시오! 저희들은 모든 것을 선생님께 바쳐야 합니다! ….”
예수께서는 여전히 어린 아이를 안으신 채 그들의 말을 들으신다 그들이 지칠 때까지, 그렇게도 몹시 긴장하였던 그들의 신경이 편해지면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말을 하게 그냥 놔두신다. 그러다가 조용히 말씀하신다. “나는 어린이들과 충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노베의 주민 여러분은 모두 내게 대해 친절하십니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주겠습니까?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또 고통으로 인해서 당신들이 생명의 원천을 잊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길을 일러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왜 직접 오지 않으셨습니까, 주님? 혹 저희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을까봐 염려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이 나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내가 사람들과 사람들의 심경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나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구원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안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점점 더 믿으십시오. 평화가 당신들 모두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레위야, 잘 있어라. 이제는 엄마한테 가거라. 부인, 안녕히 계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에게 베풀어 주신 친절을 기억하고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도 하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주인 양반, 당신의 정신을 정의 안에 보존하시오.”
예수께서는 떠나시려고 돌아서시어, 출입문에 몰려 있는 친척들, 즉 기적을 받은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과 사촌들이 몰려있는 가운데를 어렵게 헤치며 지나가신다. 그들은 모두가 예수께 말을 하고, 예수를 찬미하고, 예수의 강복을 받고, 예수의 옷과 손에 입맞춤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많은 친척 다음에는 마을 사람들도 같은 일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으로 축복받은 집의 식구들은 기쁨을 맛보며 있으라고 놔두고 예수의 뒤를 따라 길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이제는 어두워진 길로 즐거운 때에 으레 있는 소란스러운 소리와 더불어 노베 사람 전체가 예수를 요한의 작은 집으로 다시 모시고 간다. 그리고 선생님을 조용히 놔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읍내 사람들을 설득하는데는 사도들의 온 권위가 필요하였고, 또 만일 그들이 예수를 쉬게 가만두지 않으면, 사도들의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하여 이튿날 모두 그곳에서 떠나겠다고 위협하는 더 단호한 방법을 그들의 권위에 덧붙여 야만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피로하신 분께서 쉬실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