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라자로가 죽지 않도록 때맞추어 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그 부활이 상반되는 효과를 동시에 가진 무기였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유다인들은 회개시켰을 것이고,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증오심을 더 품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들에게서, 그리고 내 능력의 이 마지막 일격이 있은 후에 내 죽음에 대한 결정이 내려진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 때문에 왔었고, 그것이 실현될 때가 이제는 무르익었던 것이다. 나는 즉시 달려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이 부패한 것을 부활시킴으로써 가장 고집 센 의심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또 내 믿음을 세상에 전하기로 되어 있는 내 사도들도 제1급 규모의 기적으로 뒷받침 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사도들에게는 인간성이 아주 많았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어른이 된 나이에 내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그들의 처지의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정신상태와 정신의 경향이 하루 이틀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 지혜로 어린이들을 선택해서 가르치고 내 생각대로 자라게 해서 내 사도들을 만들기는 원치 않았다. 그렇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은 것은 사람들이 내가 죄 없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업신여겼다고 비난하고, 또 이미 형성된 사람들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내 선택으로 분명히 표명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변호와 변명을 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다. 사람이 원하면 무엇이든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과연 비겁한 사람들, 싸움꾼, 고리대금업자, 호색가, 의심 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순교자와 성인,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변하기를 원치 않은 사람만이 변하지 않았다. 비루한 것과 약한 것 안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따를 뜻만 있으면, 나는 그것들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ㅡ너도 그 한 가지 예이다.ㅡ 그리고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내 특별한 혜택을 받는 사람, 내 친구, 내 사제들을 만든다. 나는 항상 그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나를 믿게 이끌고, 기적의 가능성을 죽이지 않도록 이끌기 위하여 내가 행하는 계속적인 기적이다.
  그런데 이 가능성이 지금은 얼마나 침체해 있느냐! 기름이 떨어진 등잔과 같이 이 가능성은 기적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나 부재로 시들어서 빈사상태에 있고 죽어간다. 기적을 청하는 데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한 가지 형태는 사랑으로 들어주시고, 또 한 가지 형태는 분개해서 등을 돌리신다.
  첫째 형태는 내가 그렇게 청하라고 가르친 것과 같이, 불신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고 청하는 형태이며, 하느님은 인자하시고, 또 인자하신 분은 청을 들어주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청을 들어 주실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형태이다. 이것은 사랑인데,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청을 들어주신다.
  또 한 가지 형태는 하느님이 그들의 하인이 되어 그들의 심술궂은 짓에 복종하고, 자기들은 하느님께 드리지 않는 것, 즉 사랑과 순종을 그들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반항자들의 요구이다. 이 형태는 죄가 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거절하시는 것으로 그것을 벌하신다.

너희들은 내가 이제는 집단적인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내가 어떻게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 나를 믿는 집단이 참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화재로 타버린 수풀 속에 살아남은 꽃들처럼, 나는 이따금씩 믿는 사람을 만난다. 나머지는 사탄이 그의 주의 주장으로 태웠고, 점점 더 태울 것이다.
  너희들이 초자연적으로 행동하려면 내가 토마에게 한 대답을 머리 속에 늘 간직하라고 부탁하겠다. 누구든지 인간 생명에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참 생명을 얻는 방법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무게를 질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 말을 되풀이 한다. 시련은 무엇이냐? 지나가는 뜬 구름이다. 하늘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시련 너머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내 영웅적 행위로 하늘을 쟁취하였다. 너희들도 나를 본받아야 한다. 영웅적 행위는 순교를 체험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세속과 마귀와 육신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영웅적인 행위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그러나 나는 위선자는 원치 않는다. 나와 함께 나와 같이 하거나, 나를 반대하거나 하는 것이다. 물론 너희가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나를 너희들이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원수와 동맹을 맺지는 않는다. 만일 너희가 나보다 원수를 더 낫게 여기면, 동시에 나를 친구로 가질 생각은 할 수 없다. 원수냐? 나냐? 선택하여라.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정신이 다르고 그들이 하여온 행실이 다르기 때문에 마르타의 고통은 마리아의 고통과 다르다. 이제는 죽어서 없는 사람, 그래서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해서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된 사람을 슬프게 했다는 가책을 가지지 않도록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의 하느님을, 즉 나 예수를 슬프게 해드렸다는 가책을 가지지 않은 사람, 그리고 나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일생 동안 안타깝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이루어진 꿈처럼 나와의 만남을 갈망하는 사람은 한층 더 행복하다.
  나는 너희들에게 아버지요, 형이요, 친구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자주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너희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느냐? 속죄하기 위하여 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말이다. 너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시간마다 날마다 옳게 행동하여라, 항상 옳게. 그러면 나를 항상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고통은 성화이고 육체의 부패를 예방하는 몰약(沒藥)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항상 너희들 안에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그 고통 중에서도 너희들을 사랑한다는 확신과 내 사랑에서 오는 평화를 가질 것이다. 작은 요한아, 내가 고통 중에서도 위로할 줄을 아는지는 내가 알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드린 기도에는 내가 처음에 말한 것이 되풀이되어 들어 있다. 유다인들과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암우를 일급 규모의 기적으로 떨쳐 없앨 필요가 있었다. 묻힌 지 나흘이나 된 사람, 잘 알려진 오래 되고 불쾌한 만성적인 병을 앓다가 무덤에 묻힌 사람의 부활은 사람을 무관심하게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내가 라자로를 살아 있는 동안에 병을 고쳐 주었거나, 숨을 거두자마자 숨을 불어넣어 주었더라면, 신랄한 원수들은 기적의 사실성에 대해 의심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체의 악취와 붕대들이 썩은 것과 무덤 안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그리고 기적 속에서의 기적으로, 나는 라자로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정리되고 깨끗하게 되어, 생명뿐 아니라, 전에 살의 궤양이 피 속에 죽음의 원인을 넣어주던 곳에 신체의 부분의 온전함이 돌아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를 원하였다. 내가 은총을 줄 때에는 항상 너희들이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준다.
  내가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울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눈물을 여러 가지로 불렀다. 그러나 너희들은 은총이 영원한 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 섞인 고통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알아라. 내가 운 것은 친구를 잃은 것과 그의 누이동생들의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닥이 뒤집히는 것처럼, 못 세 개처럼 내 마음에 뾰족한 끝을 항상 깊이 박던 세 가지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시간에 노출했기 때문이었다.
  사탄이 사람을 악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그에게 가져다 준 파멸의 확인. 그 파멸의 인간적인 선고는 고통과 죽음이었다. 빛의 나라에서 살기로 되어있던 여왕인 영혼을 어두움 속에 잠금으로써 죄가 영혼에게 주는 영적인 죽음의 상징이며 살아있는 판박이인 육체적인 죽음.
  3년 동안의 복음 전도의 말하자면 숭고한 필연적 귀결 모양으로 행한 그 기적도 유다 사람들을 내가 가져간 진리에 대해서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확신과, 어떠한 기적도 장래의 세상을 그리스도에게 회개하는 사람들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오! 그다지도 적은 사람들을 위해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고통.
  임박한 내 죽음을 정식으로 보는 것. 나는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구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속죄의 무게를 느껴야 하였고, 따라서 죽음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그처럼 참혹한 죽음의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껴야 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고, ‘머지않아 나도 죽을 것이고, 라자로처럼 무덤에 묻힐 것이다. 머지않아 가장 끔찍한 임종의 고통이 내 동무가 될 것이다. 나는 죽게 되어 있다.’ 하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너희들이 미래를 아는 것을 면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면제 되지 않았었다.
  오! 정말이지, 너희들은 너희 운명을 불평한다마는, 아무런 운명도 내 운명보다 참담하지는 않았다. 내가 당하게 되어 있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미리 알고 있고, 거기에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와 동행한 가난과 궁핍과 격렬한 고통이 겹쳐진 내 운명보다 말이다. 그러므로 불평하지 말고, 내게 희망을 걸어라. 너희들에게 내 평화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