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타엘의 깎아지른 듯한 산괴(山塊)가 북쪽의 지평선을 막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 산들의 집단이 무너져서 프톨레마이스에서 세포리스와 나자렛으로 가는 길 위에 거의 수직으로 앞으로 내민 비탈들이 시작되는 곳에는, 산에서 앞으로 내밀어 심연 위에 매달려 있는 바위 덩어리들 사이로 많은 동굴이 있는데, 그 바위 덩어리들은 거기 놓여서 그 굴들의 지붕과 바닥 노릇을 한다.
언제나 그런 것과 같이 가장 중요한 도로 근처에는 문둥병자들이 있는데, 고립되어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여행자들이 보고 구제할 수 있도록 꽤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 요한과 아벨과 함께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경고와 호소의 외침을 보내는 문둥병자들의 작은 집단이다. 아벨은 그들에게로 얼굴을 들며 말한다. “이분은 내가 당신들에게 말한 그분이오. 나는 이분을 당신들이 아는 그 두 사람에게로 모시고 가오. 다윗의 후손께 아무 것도 청할 것이 없소?”
“우리가 누구에게나 청하는 것이오. 즉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동안에 실컷 먹게 빵과 물을 청하오. 그런 다음 겨울에는 굶주리는 거요….”
“내게 오늘은 음식이 없소. 그러나 구원을 모시고 왔소….”
그러나 구원에 도움을 청하라는 암시를 주는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문둥병자들은 비탈을 떠나 등을 돌리고 산의 돌출부를 돌아 다른 여행자들이 다른 길로 해서 오는지 보러 간다.
“저는 저 사람들이 이방인 또는 완전히 우상숭배자들인 뱃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스에서 쫓겨서 온지가 얼마 안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병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저 사람들이 저희들의 나라에서는 건강한 몸으로 떠나서, 라틴사람들에게 팔려고 상아를 싣고, 또 아마 진주도 싣기 위해서 아프리카 해안을 오랫동안 돌아다닌 다음, 병이 들어 가지고 이곳에 왔다는 것입니다. 항구의 행정관들이 그들을 격리시키고 그들의 배를 불사르기 까지 했습니다. 더러는 시로-페니키아의 도로 쪽으로 갔고, 더러는 이곳에 남았습니다. 여기남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걸음을 걷지 못하니까 병이 제일 중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더 병들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믿음을 조금 주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음식밖에는 청하지 않습니다….”
“회개시키는 데에는 꾸준해야 한다. 1년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2년 또는 그 이상에서 성공한다. 그들이 비록 그들이 살고 있는 바위 같더라도 그들에게 꾸준히 하느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러면 제가 그들의 음식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었습니까?…. 저는 항상 안식일 전에 그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 동안에는 히브리 사람들이 여행을 하지 않고, 그래서 아무도 저 사람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요 ….”
“네가 한 일이 잘한 일이다. 네가 그 말을 했지. 저 사람들은 이교도들이다. 따라서 영혼보다는 살과 피를 더 걱정한다. 그들의 굶주림에 대한 네 다정스러운 보살핌은 그들을 생각하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너를 사랑하게 되면, 네가 음식 말고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해도 네 말을 들을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을 따를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언젠가는 너를 따라 영의 길을 걸을 것이다.
육체적인 자비의 일이 영적인 자비의 일을 위한 길을 평탄하게 하고, 그 길을 너무도 자유롭고 평평하게 해서,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렇게 준비된 사람 안으로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 자신도 모르게 들어오시게 된다. 그 사람은 자기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데, 어디로해서 들어오는지 알지 못한다. 어디로 해서! 때로는 한 가닥의 미소 뒤로, 동정의 말 한 마디 뒤로, 빵 한 덩어리 뒤로 닫혔던 마음이 은총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하느님의 길이 시작되었다. 영혼들! 이것이야말로 가장 다양한 것이다. 땅 위에 있는 물질들이 굉장히 많지만, 어떤 물질도 그 모습이 영혼의 경향과 반응만큼 다양하지는 못하다.
저 굵은 테레빈나무를 보느냐? 저 나무는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기 때문에 비슷한 나무들의 숲 가운데 있다. 그 나무들이 몇 그루나 될까? 수백 그루, 어쩌면 천 그루,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이 나무들이 산의 이 가파른 비탈을 뒤덮고 그 시큼하고 몸에 좋은 수지의 향기로 계곡과 산의 다른 모든 냄새를 압도한다. 그러나 보아라. 이 나무가 천 그루도 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굵기나 키나 기운이나 기울기나 모양이 다른 나무와 똑같은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어떤 나무는 칼날처럼 곧고, 어떤 것들은 동서남북으로 기울어져 있다. 어떤 나무는 흙이 많은 데에 났고, 어떤 나무는 산이 불쑥 내민 부분에 나서, 그곳이 어떻게 나무가 떠받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말라 있지만 우기에는 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갈 저 급류 위에 우뚝 서 있는 맞은편 절벽과 사이에 거의 다리를 놓을 정도로 어떻게 저렇게 공중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어떤 나무는 아직 어린 나무였을 때 흉포한 사람이 못살게 굴었던 것처럼 뒤틀려 있고, 어떤 나무는 흠이 없다. 또 어떤 나무는 거의 아래까지 잎이 덮여 있고 어떤 나무는 겨우 꼭대기에 잎이 작은 도가머리처럼 나 있을 뿐이다. 어떤 나무는 오른쪽에만 가지들이 있고, 어떤 나무는 아래쪽에는 잎이 있으면서도 꼭대기는 벼락에 탔다. 어떤 나무는 죽었다가, 꼭대기로는 이제 올라가지 않게 된 나머지 수액을 받아 가지고, 거의 뿌리에서 돋아나다시피 한 단 하나의 새싹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너희에게 보여 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저 나무는 다른 것과는 같은 굵은 가지나 잔가지나 잎이 -저 나무에 있는 수천개의 잎 중에서 오직 한 잎만이라도- 하나라도 있느냐? 나뭇잎들은 비슷한 것 같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제일 낮은 저 가지를 보아라. 그 가지의 끝을, 끝만을 보아라. 거기에 잎이 몇이나 있겠느냐? 푸르고 가는 잎이 아마 2백개는 있겠지. 그러나 보아라. 빛깔이나 튼튼한 것이나 신선함이나 유연성이나 모양이나 나이가 다른 것과 같은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다.
영혼들도 이와 같다. 영혼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들의 경향과 반응의 차이도 그만큼 크다. 그래서 그 영혼들을 알아서, 그들의 다른 경향과 반응에 따라서 그들에게 작용할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혼의 훌륭한 선생도 아니고 훌륭한 의사도 아니다. 벗들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정해진 글을 오랫동안 읽는 것보다 더 잘 비추어 주는 묵상의 습관이 필요하다. 영혼의 선생과 의사가 연구해야 하는 책은 영혼들 자신이다. 잎이 있는 만큼 영혼도 있고, 잎 하나하나에는 과거와 현재와 시작되는 상태에 있는 많은 감정과 격정이 있다. 이를 위하여는 계속적이고 주의를 기울이고 명상적인 연구를 하고, 끊임없는 참을성과 용기를 가져서 가장 쌕은 냄새가 나는 헌데도 치료할 줄 알고, 그 헌데로 인해서 외로워하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혐오감을 보이지 않고 그것들을 처매 주어야 하며, 또 헌데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썩은 부분을 아프게 할까봐 무서워서 깨끗하게 하지 않음으로 괴저에 걸려 온 몸을 썩게 내버려두는 거짓 동정을 가지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너무 거칠게 다루어 악화시키지 않도록, 그리고 죄인들과 관계를 맺어도 감염할 염려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원하여 그들과의 관계로 감염하지 않도록 조심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영혼의 선생과 의사에게 필요한 이 모든 덕행이 보고 이해하기 위한 그들의 빛을 어디서 얻고, 쌀쌀함과 또 때로는 모욕까지도 당하면서도 꾸준히 해 나가기 위한, 어떤 때는 영웅적인 그들의 참을성을 어디서 얻으며, 지혜롭게 치료하는 그들의 용기와 병자와 자기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조심성을 어디서 얻느냐 사랑에서, 언제나 사랑에서 얻는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위한 빛을 주고, 지혜와 용기와 조심성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고쳐진 죄를 지을 수 있는 호기심을 예방한다. 어떤 사람이 전적으로 사랑인 때에는, 다른 소원이 그의 안에 들어갈 수가 없고, 사람의 지식이 아닌 다른 지식이 들어갈 수가 없다. 알겠지. 의사들은 어떤 사람이 어떤 병으로 죽을 뻔 했으면, 그 병에 다시 걸리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의 피가 그 병을 받아 가지고 이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생각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생각도 아니다.
그러나 병이 아니고 건강인 사랑은 의사들이 말하는 그것을 하고, 그것도 좋지 않은 모든 격정에 대하여 그렇게 한다. 하느님과 형제들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영적으로 병자인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그 때까지는 사랑이 숨겨 왔던 일들을 알게 되면서도 타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사랑에 충실한 채로 있어서 죄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관능을 이긴 사람에게 관능이 무엇이겠느냐? 하느님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에서 그의 모든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재산이 무엇이겠느냐? 하느님밖에는 갈망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까지도 바치는 사람에게, 자기의 믿음 안에서 자기의 모든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항상 활동적인 사랑의 불꽃으로 자극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꾸준히 힘쓰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 또 하느님과 비교할 때에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거만해지지 않는 사람에게, 탐식과 인색과 불신과 게으름과 교만이 무엇이겠느냐? 언젠가 너희들은 내 교회의 사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영의 의사와 선생이 될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을 기억하여라. 너희가 가질 이름이나 너희 옷이나 너희가 행할 임무가 너희를 사제, 즉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영혼의 선생과 의사를 만들지 못할 것이고, 너희가 가지고 있을 사랑이 너희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사랑은 너희가 그런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줄 것이고, 서로 완전히 다른 영혼들이, 만일 너희가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작용할 줄 알면, 유일한 유사성(類似性) 즉 하느님과의 유사성에 이를 것이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교훈입니까, 선생님!” 하고 요한이 말한다.
“그렇지만 저희가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하고 아벨이 덧붙인다. 예수께서는 그 두 사람을 들여다보시더니, 두 사람의 목에 팔을 걸어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또 한 사람은 왼쪽으로 끌어당기셔서 그들의 머리카락에 입맞춤을 하시며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랑을 이해했으니까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직 얼마 동안 걸어간다. 거의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길이 험하기 때문에 점점 더 어렵게 걸어간다. 저 아래 아주 먼 곳에는 도로가 하나 있고, 그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선생님, 여기서 멈추십시다. 저기 보이는 저 바위투성이의 평평한 곳에서 그 두 사람이 행인들에게 밧줄로 바구니를 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저 평평한 곳 저쪽에 그들의 동굴이 있습니다. 이제 그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예수와 요한은 뒤에 남아 우거진 나무에 가려져 있다.
얼마 지나서 한 얼굴이… 그것이 몸 꼭대기에 있으니까 얼굴이라고 부르자. 그러나 짐승의 주둥이, 괴물, 무서운 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무딸기 덤불 위에 나타난다.
“자네가? 아니 자넨 장막절을 지내려고 떠나지 않았나?”
“나는 선생님을 만났소. 그래서 되돌아 왔소. 선생님이 여기 계시오!”
아벨이 “야훼께서 당신들 머리 위에 계시오” 하고 말했더라도, 두 문둥병자의 -아벨이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도 왔기 때문에- 외침과 행동과 충동이 아마 덜 갑작스럽고 덜 공손했을 것이다. 그들은 바깥에 해가 쨍쨍 내리쬐는 평평한 곳으로 튀어나와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리며 부르짖는다. “주님, 저희들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저희 죄보다 더 큽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정말 거기 오셨는지, 또는 아직 멀리 계시면서 그들에게로 오고 계신지 확인도 하지 않고 이렇게 부르짖는다. 그들의 믿음은 너무나 커서, 눈꺼풀의 헌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급히 땅에 엎디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틀림없이 보지 못하였을 것도 그들에게 보게 해준다.
그들이 “주님, 저희 죄는 용서를 받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비이십니다! 주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은 정의를 이길 수 있는 사랑이십니다” 하고 되풀이 하는 동안 예수께서 앞으로 나아가신다.
“나는 사랑이오. 그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내 위에는 아버지께서 계시고, 그분은 정의이시오.”하고 예수께서는 요한과 함께 오솔길로 해서 앞으로 나아가시며 엄하게 말씀하신다.
두 사람은 보기 흉하게 된 얼굴을 들고, 고름과 섞여서 흐르는 눈물 사이로 예수를 바라본다. 그 얼굴의 몰골은 소름끼친다. 늙었는가? 젊었는가? 누가 하인이고, 누가 아세르인가? 말할 수가 없다. 병은 그들을 소름끼치고 혐오감을 주는 두개의 형체를 만들어서 똑같이 되게 하였다.
그 빛살로 예수를 감싸고 그분의 금발을 빛나게 하는 햇빛을 받으며 오솔길 한가운데에 서 계신 예수께서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이실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바라보고 나서 얼굴을 가리면서 “야훼! 빛!” 하고 신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또 이렇게 부르짖는다. “아버지께서는 구원하시라고 주님을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주님을 당신의 사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주님을 좋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주님이 저희에게 용서를 주시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용서요, 건강이요?”
“용섭니다”하고 한 사람은 외치고, 또 한 사람은 “… 그리고 건강이요. 제 어머니는 저 때문에 슬픔으로 죽어갑니다.”
“내가 당신들을 용서한다 해도 사람들의 재판은 여전히 남아 있소, 특히 당신의 경우는. 그러면 내 용서가 당신의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데 무슨 가치가 있겠소?” 하고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위하여 기다리시는 말을 하게 하시려고 시험을 하신다.
“가치가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진짜 이스라엘 여자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기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저는 죄를 너무 많이 지었기 때문에 제게는 이곳이 사람들이 하늘을 기다리는 곳이 아닙니다.”
“당신 말대로 죄를 너무 많이 지었소. “
“너무 많이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 그 날은 주님의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주님의 어머님이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님은 아벨의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일 들으시면 제 어머니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주님의 어머님의 이름으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소?”
“그 다음에는요?” 그들은 겁이 나서 서로 쳐다본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의 단죄이고, 업신여김이나 도망, 추방이다. 병나음에 대한 전망 속에서 그들은 구원을 잃는 것처럼 몸을 떤다.
사람은 얼마나 생명에 집착하는가! 두 사람은 병이 고쳐져서 인간의 법률에 의하여 유죄선고를 받느냐, 그렇지 않고 문둥병자로 사느냐 하는 진퇴유곡의 궁지에 몰려서 거의 문둥병자로 사는 편을 택하다시피 한다. 그들은 그것을 말하고 그것을 이런 말로 실토한다. “형벌은 소름끼칩니다!” 이 말은 특히 살인자 중의 한 사람인 내가 알게 된 아세르라는 사람이 한다….
“소름끼치는 일이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정의일 뿐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 형벌을 이 죄없는 사람에게 주려고 했소. 어떤 수상한 목적으로? 돈 한줌 때문에 그랬소.”
“사실입니다! 오 하느님!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죽겠습니다. 그러나 저희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요엘의 아내는 간통한 여자로 돌에 맞아 죽었소. 네 아이는 그 여자의 천정 어머니와 함께 옹색하게 살고 있소. 요엘의 형제들이 요엘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아이들을 사생아라고 내쫓았기 때문이오. 당신들은 그걸 알고 있소?”
“아벨이 그 말을 저희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어린 아이들의 불행에 대책을 세워 주오?” 예수의 목소리는 우뢰 같다. 참으로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목소리여서 무섭다.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홀로 꼿꼿이 서 계신 정말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두 사람은 무서워하며 예수를 바라본다. 비록 해가 그들의 헌데를 악화시키겠지마는,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햇볕을 온 몸에 받으시며 움직이지 않고 계신다. 자연의 힘은 영혼들의 이 시간에 그 능력을 잃고 만다….
얼마 후에 아세르가 말한다. “만일 아벨이 저를 완전히 사랑할 생각이면 제 어머니를 찾아가서 하느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셨다고 말하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소.”
“그러나 주님이 제 마음을 보시니까 주님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에게 제 소유물 전부를 요엘의 아이들에게 가게 하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제 뜻이라고. 제가 죽던 살던, 저를 타락하게 한 재산을 포기합니다.”
예수께서는 미소를 지으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엄한 얼굴에서 연민이 가득한 얼굴이 되시게 하는 미소로 변모하신다. 그리고 완전히 변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당신들의 마음을 아오. 일어나시오. 그리고 정신을 하느님께로 높이 올려 하느님을 찬미하시오. 당신들이 세상에서 격리되어 있으니까 당신들이 가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당신들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을 거요. 그리고 세상은 당신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속죄할 가능성을 주기 위하여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소.”
“주님, 저희를 구해 주시는 겁니까?! 저희를 고쳐 주시는 겁니까?!”
“그렇소. 내가 당신들에게 목숨을 남겨 주는 것은 인생은 특히 당신들과 같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통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지금은 당신들이 여기서 나올 수 없소. 아벨은 나와 같이 가야 하오. 모든 히브리 사람과 같이 예루살렘에 가야 하오. 아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그가 돌아오는 것과 당신들의 병 고치는 것이 동시에 있을 거요. 아벨이 당신들을 사제에게 데려가는 일과 당신 어머니에게 알리는 일을 할 거요. 아벨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말해 주겠소. 내가 당신들 고쳐 주지 않고 가도 내말을 믿을 수 있소?”
“예, 주님. 그러나 저희 영을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을 다시 해 주십시오, 그것은요. 그런 다음 모든 것은 주님이 원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용서하오. 새로운 정신으로 다시 나시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시오. 당신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 외에, 하느님이 보시기에 당신들의 빚을 완전히 갚도록 하는 정의의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따라서 당신들의 빛이 매우 크기 때문에 당신들의 속죄가 계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특히 당신의 빚은 주님의 모든 계명에 관계가 되는 것이오. 주님의 계명들을 생각하시오. 그러면 아무 계명도 제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당신은 하느님을 잊었고, 당신의 관능을 당신의 우상으로 만들었소. 당신은 명절날을 한가한 열광의 날로 만들었고, 당신 어머니의 마음을 상해 드리고 체면을 상하게 했소. 당신은 살인에 협력하고 살인의 뜻에 동조했소. 당신은 남의 생명을 훔쳤고, 한 아들을 그의 어머니에서 빼앗으려고 했고, 네 아이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게 했소. 당신은 음란했고, 거짓 증언을 했고, 죽은 남편에게 충실한 여인을 음란하게 탐냈고, 아벨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그를 없애고자 할 정도로 아벨의 재산을 탐했소.”
아세르는 “사실입니다. 사실입니다!” 하고 긍정할 때마다 신음한다.
“당신도 보다시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벌의 힘을 빌지 않고 당신을 잿더미가 되게 하실 수 있었소. 그런데 내가 한 사람을 더 구원할 수 있도록 당신을 너그럽게 봐 주셨소. 그러나 하느님의 눈은 당신을 지켜보시고, 하느님의 지능은 기억하고 계시오. 가시오.” 그리고 몸을 돌려 비탈의 나무 아래로 피해 들어간 아벨과 요한 곁의 수풀로 돌아오신다.
그리고 아직 얼굴이 흉한 채로 있는 두 사람은 아마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나 문둥병자가 언제 웃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무서운 오솔길로 해서 산을 내려가시는 동안, 문둥병자들의 독특한 날카롭고 금속성이고 단속적인 목소리로 갑자기 음조를 바꾸어 가며 시편 114편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저들은 행복하군요!” 하고 요한이 말한다.
“저두요”하고 아벨이 말한다.
“저는 선생님이 저 사람들을 즉시 고쳐 주실 줄로 생각했었습니다”하고 요한이 또 말한다.
“저두요, 주님이 늘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
“그들은 큰 죄인이었다. 이 기다림은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들어라, 아나니아야….”
“주님, 제 이름은 아벨입니다” 하고 젊은이가 놀라서 말하며, “선생님이 왜 틀리셨을까?” 하고 의아하게 여기는 듯이 예수를 쳐다본다.
예수께서는 빙그레 웃으신다. “내게는 네가 아나니아다. 너는 정말 주님의 인자에서 태어난 것 같기 때문이다. 점점 더 아나니아가 되어라. 그리고 들어라. 장막절에서 돌아오는 길로 네 읍내에 가서 아세르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하라고, 그것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해서, 속죄하기 위하여 10분의 1만 남겨 놓고 모두를 주라고 말해라. 그리고 이 10분의 1도 노모에 대한 동정으로 그러는 것이다. 그 노모는 너와 함께 갈릴래아의 베들레헴을 떠나 프톨레마이스에 아들 있는 데로 가야하며, 아들은 너와 그의 동료와 함께 그의 노모있는 데로 와야 할 것이다. 너는 그 여인을 시내에 있는 어떤 여자제자의 집에 자리 잡게 한 다음, 문둥병자들의 정결의식을 위해 필요한 것을 가서 구하고, 모든 것이 다 행해지기 전에는 그들을 떠나지 말아라. 그리고 사제는 과거를 아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다른 곳의 사제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요?”
“그런 다음에는 네 집으로 돌아가든지 제자들과 합치든지 해라. 그리고 저 사람은 병이 고쳐지고 나면 속죄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나는 필요불가결한 것만 말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하게 내버려둔다….”
그리고 일행은 길이 어렵고 해가 뜨거운데도 지칠 줄 모르고 내려오고 또 내려온다…. 지칠 줄은 모르지만 오랫동안 말이 없다.
그러다가 아벨이 침묵을 깨뜨리고 말한다. “주님, 은혜를 하나 청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것 인데?”
“제 읍내에 가게 놔두십사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떠나는 것은 섭섭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가거라, 그러나 지체하지 말아라. 예루살렘에 갈 시간이 빠듯할 거다.”
“주님, 고맙습니다! 저는 그 가엾은 여인만 가서 만나겠습니다. 그분은 아세르가 죄를 지은 뒤로 무엇이든지 창피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웃음을 찾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의 눈물과 기도가 은혜를 얻었고, 하느님께서 점점 더 희망을 가지라고 권하시며 강복하신다고 말해라. 그러나 헤어지기 전에 한 시간만 쉬자, 그 이상은 말고. 지금은 쉴 때가 아니다. 그런 다음 너는 네 쪽으로 가고 요한과 나는 지름길로 해서 우리 갈 데로 가기로 하자. 그리고 요한 너는 앞서 내 어머니께 가거라. 이 아마포옷이 든 배낭을 가지고 가서 모직옷을 가지고 오너라. 내가 어머니를 뵙고 싶어한다고 말씀드리고, 내가 마타티아의 수풀에서, 그러니까 아내의 수풀에서 기다린다고 말씀드려라. 네가 그 수풀을 알지. 내 어머니와만 말하고 빨리 돌아오너라.”
“그 수풀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혼자서? 혼자남아 계시는 겁니까?”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있다. 염려 말아라” 하고 예수께서 손을 들어 당신 곁에 풀에 앉아 있는 귀여워하시는 제자의 머리에 얹으신다. 그리고 그에게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저녁때에는 그 수풀에 있게 될 거다.”
“선생님,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할 때에는 제가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는 걸 선생님도 아시지요. 그리고 어머니께 가는 것은!…  마치 천사들이 저를 들고 가는 것 같습니다. 또 그리고 그렇게 멀지도 않은 걸요.”
“기쁘게 일을 할 때는 결코 멀지 않지…. 그러나 너는 밤을 나자렛에서 지내라.”
“그럼 선생님은요?”
“나는… 내 어머니와 조금 같이 있은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있겠다. 그런 다음 새벽에 길을 떠나 나자렛에 들어가지 않고 다볼산으로 가는 길로 가겠다. 내가 모레 새벽에 예즈라엘에 가야 한다는 것을 너도 알지.”
“선생님은 매우 피곤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로하신데요.”
“우리가 겨울 동안에는 쉴 시간이 있을 것이다. 염려 말아라. 그리고 언제나 여기서처럼 아주 안심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지 말아라. 우리는 많은 중지(中止)를 경험할 것이다….”
예수께서 생각에 잠겨 머리를 숙이시고 두 사람의 동무가 되어 주시려고 빵을 드신다. 젊은 두 사람은 선생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기뻐서 먹고 싶은 욕망으로 보다는 오히려 맛있게 먹는다. 예수께서 빵을 드시는 것을 잊으실 정도로 침묵에 잠기시니, 두 사람은 그것을 존중하여 입을 다물고, 굵은 나무줄기들 아래 돋아나 있는 풀에서 서늘한 기운을 찾으려고 발을 벗고 산 그늘에서 쉰다. 그리고 졸기까지 할 참인데 예수께서 머리를 드시고 말씀하신다. “가자. 네거리에서 헤어지자.”
그래서 샌들 끈을 다시 매고서 길을 떠난다. 수풀의 그늘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비록 한여름의 몇 달 동안처럼 무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 더운 이 시간의 찌는 듯한 더위를 견디도록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