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아, 네가 나자렛에 왔을 때 배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에스드렐론 평야에 등을 돌리시고 동북쪽을 향하여 다볼산 방향으로 가시며 물으신다.
“고기잡이 하라고 도로 보냈습니다. 선생님, 그러나 사흘에 한 번씩을 타리케아에 오라고 일렀습니다…. 제가 얼마 동안이나 선생님을 모시고 있게 될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잘 됐다. 너희들 중의 누가 내 어머니와 알패오의 마리아에게 가서 우리가 있는 티베리아로 오시라고 알리겠느냐? 약속 장소는 요셉의 집이다.”
“선생님… 저희 모두가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누가 가야 할지 선생님이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오, 필립보,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야고보가 다녀오너라.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이 타리케아로 가자. 어머니와 알패오의 마리아에게 왜 늦었는지 이유를 말씀드리고, 집을 잠그고 오시라고 하여라. 우리는 한 달 동안 줄곧 같이 있을 것이다. 가거라. 갈림길에 왔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예수께서는 떠나는 네 사람에게 입맞춤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시 걷기 시작하신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신 후 발을 멈추시고, 머리를 수그리고 조금 뒤에서 걸어오는 마륵지암을 눈여겨보신다. 젊은이가 당신 계신 곳까지 오자, 손을 턱 밑으로 넣으셔서 얼굴을 들게 하신다. 약간 거무스름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자국이 보인다.
“너도 나자렛에 갔으면 좋겠니?”
“예, 선생님… 그렇지만 선생님 마음대로 하세요.”
“얘야, 나는 네가 위안을 받기를 원한다…. 가라, 뛰어서 저 사람들을 따라 가라. 어머니께서 너를 위로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입맞춤 하시고 가게 하신다. 마륵지암은 네 사람을 빨리 따라잡으려고 뛰기 시작한다.
“아직 어린 아이야….”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그리고 많이 괴로워해. 어제 저녁 집 모퉁이에서 눈물에 젖어 있는 걸. 내가 만났는데, 이렇게 말했어. ‘마치 아버지 어머니가 어제 돌아가신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 해서 제 슬픔이 되살아났어요….” 하고 요한이 말한다.
“가엾은 아이!… 하지만 그 애가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에 거기 있었던 것은 잘된 일이었네…”하고 열성당원이 말한다.
“그 애는 할아버지를 도와드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자기 자신을 달했는지 몰라…”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폴피레아가 말하는데, 그 애는 돈을 저축하려고 온갖 희생을 다했다네. 밭에 가서 일을 하고 화덕에 절 나무를 해 오고, 고기잡이를 하고, 치즈를 팔려고 먹지 않고, 꿀도 팔려고 먹지 않았다네…. 그 애는 마음속에 한이 맺혀서, 꼭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싶어했어…. 아아! 슬픈 일이야!”
“착한 결심을 가진 사람이야. 그 애는 희생과 일 앞에서 물러서지를 않아. 훌륭한 장점이야”하고 바르톨로메오가 말한다.
“그렇다, 훌륭한 아들이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제자 중에 낄 것이다. 가장 불안한 순간에도 그가 얼마나 큰 자제력을 가지고 처신하는지 보아라…. 그의 슬픈 마음은 마리아 어머니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겠다고 청하지 않았다. 그 애는 기도 중에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이해해서 어른들을 훨씬 능가할 지경이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 애가 미리 목적을 정해 놓고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토마가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사실이야”하고 알패오의 야고보가 말한다. “어제 그 애는 과일을 어떤 노인에게 주면서 말했네. ‘제가 잃은지 얼마 안 되는 친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하고. 그래서 내가 ‘마륵지암아, 할아버지는 평화 중에 계신다. 너는 예수님의 사죄가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하고 비평을 했더니 그 애는 이렇게 대답했네, ‘유효다고 믿어요. 그렇지만 저는 전구(傳求)를 하면서, 아무도 기도를 해 주지 않은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할아버지께 그것이 필요 없으면, 이 희생들이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기를 바랍니다’ 하고. 그래서 나는 거기에서 많은 감화를 받았네.”
“그래”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어제 내게로 와서 양팔로 내 목을 껴안으면서 -아직 어린 아이니까- 말했네. ‘이제는 아버지가 제게는 정말 아버지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친절해서 제게 저축하게하신 걸 도로 드리겠어요. 이 돈이 할아버지에게 소용이 없게 줬어요….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걸 해 주세요…’하고. 나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말했네. ‘아니다, 아들아. 이 돈을 가지고 곤궁한 노인들이나 가난한 고아들을 위해서 애긍을 하자. 그러면 하느님께서 라 애긍을 가엾은 할아버지의 평화를 증가시키는데 쓰실 것이다. 그러니까 마륵지암이 두번 어떻게나 세게 입맞춤을 하는지… 정말이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네. 그리고 바르톨로메오, 자네가 지출을 결산해 준 것을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르네, 그 애는 이런 말을 했네. ‘제게 있어서는 할아버지께 드린 경의는 값이 없어요. 저는 바르톨로메오 아저씨께 하인으로 써 달라고 말하겠어요’ 하고”
“아이고! 가엾은 녀석! 한 시간도 그렇게는 안 되네. 그 애는 주님께 봉사하고 우리를 교화하네. 나는 의인에게 경의를 표했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은 것은 내 이름이 알려져 있어서, 내게 돈을 꾸어 줄사람을 만나기가 쉬웠기 때문일세. 베싸이다에서, 사실은 하찮은 그 작은 빚을 갚는 일을 하겠네…” 하고 바르톨로메오가 대답한다.”그렇다. 예즈라엘 사람들이 너그러웠으니까 돈으로서는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료 제자에 대한 네 사랑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는 무엇이든지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신다. “너희들은 이웃에 대한 이 사랑을 훈련하는 중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율법의 기본 계명의 둘째 부분이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에서 효력을 일었었다. 간결하면서도 옳고 완전한 시나이산의 율법에 뒤이어 나온 수많은 계명들과 자질구레한 일들이 기본계명의 첫째 부분을 왜곡해서, 그것들에게 가치와 힘줄과 진실을 주는 것이 없는 외적인 의식 무더기를 만들어놓고 말았다. 즉 외적인 예배의 형식에 내적인 활발한 찬성이 없고, 그 찬성이 이룩하는 행동이 없고, 그것이 쳐 이기는 유혹이 없는 것이다.”
“예배를 과시하고 나서 내적으로는 마음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존경하는 사랑속에서 겸손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 그리고 우선 지상에 있는 피조물 중의 결작품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고 탄복하며 우러러보지 않으면, 그 예배를 과시하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느냐? 너희들은 이스라엘에서 잘못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직 하나인 계명을 가지고 두 계명을 만들고, 그다음에는 정신이 타락하면서, 첫째 계명에서 둘째 계명을 마치 쓸데없는 가지인 것처럼 깨끗이 잘라 버림으로 말이다. 그것은 쓸데없는 가지가 아니었다. 두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줄기였는데, 밑동에서부터 두 가지 사랑의 독특한 덕행으로 꾸며졌었다. 언덕 꼭대기에 돋아난 저 큰 무화과나무를 보아라. 저 나무는 저절로 돋아났는데, 거의 뿌리에서부터, 즉 땅에서 나오면서부터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어떻게나 단단히 붙어 있는지 두 가지의 껍질이 들어붙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가지가 각각 양쪽에 아주 이상하게 따로따로 잎이 우거져서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저 작은 마을에 ‘쌍동이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오직 한 줄기인 저 두줄기를 지금 갈라놓으려고 한다면, 도끼나 톱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되겠느냐? 나무를 죽게 하거나, 그렇지 않고 두 줄기 중에서 한 줄기만 상하게 할 만큼 도끼질이나 톱질을 능란하게 하면, 한 줄기는 살리겠지만, 다른 줄기는 어쩔 수 없이 죽게 될 것이고, 남아 있는 줄기는 비록 아직 살아 있기는 하지만, 허약할 것이고, 아마 시들시들해 져서 열매를 맺지 않게 되거나 아주 조금밖에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오직 하나를 이룰 정도로 결합한 두 부분을 갈라놓고 분리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완전한 것을 다시 손질하고자 하였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완전하고, 어떤 생각이나 어떤 말씀이나 다 완전하니까 말이다. 과연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오직 하나의 계명으로 주셨으니, 이 계명과 저 계명 사이에 서로 관계없이 지킬 수 있는 두 가지 계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고귀한 덕행, 모든 덕행 중에서 제일 큰 덕행, 하늘에는 이 덕행만이 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영과 더불어 하늘에 올라가는 이 덕행에 너희를 넉넉히 훈련시킬 수는 절대로 없으므로, 영의 온 생명의 바탕인 이 덕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영의 사랑을 잃으면 하느님을 잃기 때문에 생명을 잃는 것이다.
내 말을 알아들어라. 매우 부유한 두 부부가 어느날 너희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일생 동안을 너희 집에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너희들이 ‘남편은 받아들이겠지만 아내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남편의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는 내 살의 살과 갈라질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내 아내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면, 나도 당신들의 집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을 한몫 끼게 했을 모든 재물을 가지고 갑니다’ 하고?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결합하여 계신다. 사랑은 정말,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두 부부보다도 한층 더 친밀하고 참된 당신의 성령의 영이다. 하느님 자신이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느님의 가장 뚜렷한 모습, 하느님을 더 돋보이게 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의 모든 속성(屬性) 중에서 사랑은 가장 으뜸가는 속성이고, 원천이 되는 속성이다. 하느님의 다른 모든 속성은 역시 사랑에서 나기 때문이다. 능력은 행동하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냐? 지혜는 가르치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냐? 자비는 용서하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냐? 정의는 다스리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리고 나는 하느님의 수 없이 많은 모든 속성에 대해서 이렇게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말한 것으로,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모시고 있지 못한다. 그 사람이 하느님을 맞아들이면서 사랑은 맞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오직 하나뿐이고, 창조주와 인간들에 미치는 사랑, 창조주께 드리는 쪽인 반쪽만을, 인간들에게 주는 쪽인 다른 반쪽 없이 가질 수 없는 사랑을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 안에 계시는데, 지워지지 않는 표를 가지고, 아버지와 정배와 왕의 자격을 가지고 계신다. 영혼은 하느님의 옥좌이고, 육체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그러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형제의 집의 주인을 업신여기고 슬프게 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전부이시고 형제 안에, 모든 형제 안에 계신 저 위대하신 분이 더 작은 존재, 전부의 일부분, 즉 개별적으로 사람 하나하나에게 가해진 모욕을 당신의 모욕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자비의 행위를 가르쳤고, 이 때문에 너희 형제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이 때문에 너희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고, 물리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너희 형제들이 착하건 착하지 않건, 신자이건 이방인이건, 친구이건 원수이건,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잠자리에서 잉태가 이루어질 때에는, 그것이 금으로 만든 침대에서 이루어지건 외양간의 짐승의 잠자리짚 위에서 이루어지건 같은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왕후의 태중에 생겨나는 인간이 거지의 태중에 생겨나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 잉태, 즉 새로운 인간의 형성은 주민들의 종교가 어떤 것이건, 세상의 어느 부분에서나 똑같다. 모든 인간이 하와의 태에서 아벨과 카인이 난 것과 같이 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자녀들의 임신과 형성과 나는 방식의 평등은 하늘에서의 다른 평등과 일치한다. 태아가 사람의 태아가 되고 짐승의 태아가 되지 않도록 태아에게 불어넣어줄 영혼의 창조가 그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창조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을 동반하고, 살아남아서 전체 인류의 부활을 기다려 그 때 부활한 육체와 다시 결합하여 육체와 더불어 상이나 벌을 받게 되어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행한 행동에 따란 갈이나 벌을 받는 것이다. 과연 사랑이 불공평할 수 있다고,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종교가 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종교를 따르면서 덕행을 닦았는데도 영원히 상을 받지 않은 채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세상이 끝난 다음에는 사랑만이, 즉 창조주와 의롭게 살았을 모든 인간의 결합 말고 다른 덕행은 살아남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천국이 하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천국이 하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천국이하나, 이방인들을 위한 천국이 하나, 이교도들을 위한 천국이 하나, 이렇게 천국이 많지 않을 것이다. 천국이 그만큼 많지 않고, 다만 하나만 있을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상도 오직 하나일 것이다. 즉 의롭게 살았을 피조물들과 결합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인들의 영과 육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피조물들 안에서 아버지와 하느님으로서의 기쁨을 가지고 당신 자신을 감탄하며 보실 것이다. 오직 한분의 주님만이 계실 것이지, 이스라엘을 위한 주님 한분, 가톨릭교를 위한 주님 한분, 다른 각 종교를 위한 주님이 한분씩 계시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큰 진리를 너희들에게 알린다. 이것을 기억하고, 너희 후계자들에게 전하여라. 모호한 것이 여러 해나 여러 세기 지난 후에 성령께서 항상 다시 진리들을 밝혀 주시리라고 기대하지 말아라. 잘 들어라. 너희들이 혹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 마칠 때에 저희들이 이방인들과 같은 모양으로 취급된다면, 그러면 거룩한 종교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 무엇인가?’하고 나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거룩한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거룩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지 못할 사람들을 위하여도 같은 정의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참 정의이다’ 하고, 덕행이 있는 이교도는 자기의 종교가 좋은 종교라는 확신을 가지고 진정한 덕행을 닦았다는 이유만으로 끝에 가서 천국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세상이 끝나서, 죽은 사람들의 네 군데 체류지 중에서 두 군데, 즉 천당과 지옥만이 남아 있게 될 때에. 그 때에는 정의가 자유의지의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골랐을 사람들이나 나쁜 열매를 원했을 사람들에게 영원한 두 나라를 보존해서 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행 있는 이교도가 이 상에 이르기 전까지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 너희들은 그 생각을 하지 못하느냐? 그리고 이 기다림은, 특히 구속이 그 뒤이어 일어난 모든 기적과 더불어 이루어지고, 복음이 세상에 전해졌을 때부터는, 다른 종교에서 의인으로 살았지마는 참 믿음의 존재와 그 실재(實在)에 대한 증거를 알고서 그 믿음에 들어오지 못했을 영혼들의 정화(淨化)가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는 세상 마칠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임보가 있을 것이다. 참 하느님을 믿었지마는, 영웅적으로 거룩하게 될 줄을 알지 못했을 사람들에게는 오랜 연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연옥이 세상 마칠 때에야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속죄와 기다림 후에는 착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건 모두 하느님의 오른편에 있을 것이고, 악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건 왼편으로 갔다가 무시무시한 지옥으로 갈 것이고, 구세주는 착한 사람들을 데리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제가 알아듣지 못했으면 용서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매우 어렵습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주님은 주님이 구세주이시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속하실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전에 살았기 때문에 주님을 알지 못해서, 또는 -세상이 하도 넓으니까요!- 주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바르톨로메오가 묻는다.
“내가 네게 그 말을 해주었다. 즉 그들의 의로운 생활 때문에, 그들의 선행과 그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었던 그들의 신앙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구세주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세주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도 고통을 당할 것이다. 바르톨로메오야, 너는 하느님인 사람으로서의 내 공로가 어떤 정도의 가치를 가질지 상상하지 못하그냐?”
“주님, 그 공로는 역시 하느님의 공로보다는 떨어집니다. 따라서 주님이 영원으로부터 가지시는 공로보다는 떨어집니다.”
“네 대답은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하느님의 공로는 무한하다고 너는 말했지. 하느님께 있는 것은 모두가 무한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공로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 공로를 세우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특유한 속성과 덕들을 가지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즉 완전이시고 무한이시고 전능이시다. 그러나 공로를 세우기 위하여는 우리 본성을 지나치는 어떤 일을 힘들여 실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는 것은 공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약하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진짜 희생을 하면 아껴 먹는 것은 공로가 될 수 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공로가 아니다. 그러나 모욕 등등에 대꾸를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면 공로가 된다.
이제 너는 하느님께서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강제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겠지. 그러나 하느님인 사람은 무한한 천주성을 인간적인 한계에까지 낮춤으로 자기 자신을 강제할 수 있고, 자기 안에 없거나 은유적(隱喩的)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모든 감각과 감정, 고통과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가능성, 자유의지를 가진 실제적인 인성을 이김으로 자신을 강제할 수 있다.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죽음이 고통스럽고, 너무 이르고, 억울할 때에 더 그렇다. 아무도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보는 것과 똑같이 침착하게 죽음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죽음을 사랑하도록 내 인성을 강요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나는 죽음을 당할 수 있기 위하여 생명을 선택하였다. 인성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과연 하느님인 사람의 자격으로, 나는 하느님으로 있으면서는 세울 수 없었던 공로를 세운다. 그리고 인성에 결합한 내 천주성 때문에, 그것들로써 내가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처지에 스스로 놓이게 된 사랑과 순종의 덕행 때문에, 그리고 내 아버지 하느님께 잘 받아들여지도록 내 마음속에 넣은 힘과 정의와 절도(節度)와 조심성과 그밖의 모든 덕행 때문에, 내가 그것들을 세운 형태로는 무한한 그 공로들로써 나는 하느님으로서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즉 사랑의 극한(極限)에까지 이른 사람으로서 무한한 능력을 가질 것이다. 공로를 주는 것은 희생이다. 희생이 크면 클수록 공로도 크다. 온전한 희생에는 온전한 공로가 있다. 완전한 희생에는 완전한 공로가 있다. 그리고 공로는 희생자의 거룩한 뜻에 따라 쓰일 수 있다. 아버지를 한없이 사랑하고, 이웃을 한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네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해 주신 희생자의 거룩한 뜻대로 말이다.
자, 내가 너희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도 자기를 희생하기가지 사랑할 줄을 알면, 가장 부유하게 될 수 있고, 수없이 많은 형제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나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빵 한 조각, 물 한잔, 누더기 옷 한 벌이 없게 되더라도 여전히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고통을 당함으로써. 누구에게 좋은 일을 하는가? 모두에게. 어떻게? 모두 거룩한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너희들이 사랑할 줄을 알면, 하느님처럼 행동하고, 가르치고, 용서하고,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하느님인 사람처럼 구속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오 주님, 그런 사랑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고 요한이 탄식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너희들에게 주시니까 사랑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서 점점 더 완전하게 실천해야 한다. 어떤 사건에서도 너희로서는 사랑에서 갈라져 있어서는 안 된다.육체적인 사건에서 정신적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한다. 너희 행동과 너희 그날 그날의 일을 거룩하게 하고 너희 묵상기도에 자극을 주고, 너희 행위를 밝게 하여라. 빛과 맛과 거룩하게 함이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의식이 가치가 없고, 기도가 헛것이고, 제물이 거짓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가난한 사람이 너희들에게 형제로서 인사하는 미소가 어떤 사람이 사람의 눈에 띄고자 하는 목적만으로 너희 발 앞에 던져줄 수 있는 돈주머니보다 더 가치가 있다. 사랑할 줄을 알아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항상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주님, 저희들에게 그렇게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너희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2년이나 된다. 내가 하는 것을 보는대로 하여라. 그러면 너희들이 사랑 안에 있을 것이고, 사랑이 너희들 안에 있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표시와 성유(聖油)와 관(冠)이 있어, 너희들을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제로 알아보게 할 것이다. 이제는 이 그늘진 곳에서 쉬자. 키가 크고 우거진 풀이 있고, 나무들이 더위를 덜어준다. 저녁 때쯤에 다시 길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