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강 건너편의 넓은 지역에 펼쳐지는 기름진 평야를 지나 10월 밀이라는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에 길을 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뚜렷하게 두드러진 한 산맥의 첫번 비탈 아래 전개된 작은 마을에서 잠시 머무르신 다음-그 산맥의 어떤 봉우리는 정말 산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네발짐승과 무장을 잘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긴 대상과 합쳐져서 다시 걷기 시작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이 마을 광장의 수반에서 짐승들에게 물을 먹이는 동안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이 키가 크고 살갗이 매우 거무스름한 것이 벌써 아시아인의 모습을 띠고 있다.
대단히 힘이 센 수노새를 타고 있는 사람이 대상의 우두머리인데, 그 사람은 철저히 무장하였고, 안장에도 무기들이 걸려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께 대하여는 매우 공손하였다.
사도들이 묻는다. “누구입니까?”
“유프라테스강 저쪽에서 오는 부유한 상인이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매우 공손하였다. 이 사람은 내가 가려고 하는 도시들을 거쳐 간다. 우리가 여자들을 데리고 가는데,이 산골에서 이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다.”
“무엇인가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도둑질에 대해서 아무 염려도 없다. 그러나 여자들이 겁을 집어먹는 것으로 충분하다. 몇 명 안 되는 도둑이 이렇게 강한 대상은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가장 좋은 통로를 알고 가장 어려운 통로를 지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 사람이 내게 ‘선생님은 메시아이십니까?’ 하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며칠 전에 이교도들의 마당에 있었는데, 저는 키가 작기 때문에 선생님을 보았다기보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보호할 테니 선생님은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 저는 값어치가 많은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개종자입니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우리 민족에서 나온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대상은 천천히 전진한다. 마치 네발짐승들을 너무 걷게 해서 그놈들의 기운을 지치게 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보통 걸음으로 따라가기가 쉽고, 또 짐승 모는 사람들이 어려운 통로에서는 고삐를 잡고 짐 실은 짐승들을 한 마리씩 지나가게 하기 때문에 자주 걸음을 멈추기까지 해야 한다.
비록 본격적인 산이기는 하지만, 이 고장은 매우 기름지고 잘 경작되어 있다. 아마 통북쪽에 있는 점점 더 높아져 가는 산들이 찬 북풍과 해로운 동풍을 막아 주어서, 그 때문에 농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대상은 어떤 급류를 끼고 가는데, 그 급류는 틀림없이 요르단강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고, 물이 아주 많은데, 어느 산봉우리에서 흘러 내려오는지는 모르겠다. 전망이 아름답다. 서쪽으로는 요르단 평야 쪽으로 전개되는데, 올라갈수록 점점 아름다워진다. 저 너머에는 북쪽 유다의 야산과 높은 산들의 우아한 모습들인데, 동쪽에는 파노라마가 계속 변하고 있다. 어떤 전망은 멀리까지 넓게 트여 있고, 어떤 것들은 나무가 우거지거나 바위투성이의 둥근 언덕 꼭대기와 높은 산꼭대기가 얼기설기 뒤얽혀 있는 것이 보여, 마치 미로(迷路)의 뜻하지 않은 담처럼 길을 막는 것 같다.
해는 하늘과 구릉의 비탈들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유다의 산 뒤로 내려가고 있다. 그때 부유한 상인이 멈추어 서서 대상행렬을 지나가게 하고 예수를 부른다. “밤이 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 피로해 보이는 사람이 많군요. 이것은 힘든 대목입니다. 호송하는 수노새에 그들을 타게 하십시오. 그놈들은 얌전한 짐승들입니다. 그놈들은 밤새 내내 쉴 터이고, 게다가 여자는 태우고 가기에 힘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제안을 받아들이시니, 그 사람은 여자들을 짐승에 태우기 위하여 정지를 명한다. 예수께서 엔도르의 요한도 노새에 오르게 하신다. 예수를 포함하여 걸어가는 사람들은 여자들을 위하여 걸음걸이가 더 안전하게 하려고 고삐를 잡는다. 마륵지암도 남자… 노룻을 하고자 하며, 피로해 죽겠는데도 아무하고도 같이 올라타기를 절대로 원치 않고, 오히려 성모님이 타신 노새의 고삐를 잡는다. 그러니까 성모님은 예수와 어린아이 사이에 계시게 되었다. 아이는 용감하게 걸어 나아간다.
상인은 예수 곁에 남아 있었는데 성모님께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저 동네가 보이지요. 저기가 라모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머무를 것입니다. 제가 1년에 두 번씩 이 길로 다니기 때문에 여관 주인이 저를 잘 압니다. 또 두 번은 물건을 팔고 사고  하려고 해안을 끼고 갑니다. 이것이 제 생활입니다. 힘든 생활이지요. 그러나 저는 아이가 열둘이나 되는데, 다들 어립니다. 저는 늦게 결혼했습니다. 제가 떠날 때 막내는 난지 아흐레째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게 될 때는 첫이가 났을 것입니다.”
“다복한 가정이로군요…”하고 성모님이 말씀하시고 “하느님께서 댁의 가정을 보존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말을 마치신다.
“저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정말 별로 없지만, 그 도우심에 대해서 불평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신다 “댁은 적어도 개종자이기는 합니까?”
“그래야 하긴 할 것입니다.…제 조상들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들은 그곳 환경에 적응하고 말았습니다….”
“영혼이 적응하는 공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공기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시겠어요? …증조부께서 이스라엘 여자가 아닌 여자와 결혼하셨습니다. 그 아들들은 덜 충실했습니다.…아들들의 아들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여자들과 결혼해서 아이들을 나았는데, 그 아이들은 유다의 이름에 대해서 경의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근본을 따지자면 유다인이니까요. 이제 손자들의 손자인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접촉하는 바람에 모든 사람에게서 따와서 아무에게도 소속되지 않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은 틀리게 추론합니다. 내가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 길로 가다가 대여섯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아니오. 이쪽으로 가시오’, ‘뒤로 돌아가시오’, ‘걸음을 멈추시오’, ‘동쪽으로 가시오’, ‘서쪽으로 도시오’ 하고 말하면,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길이 제일 가깜고 제일 쉬운 길이라는 것을 아오. 그러니 나는 이 길을 버리지 않겠소’ 하고요.”
“혹은 또 거래를 해야 하고 성공하는 방식을 아는 당신이 순전히 허풍으로나 교활한 타산으로 다르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제 경험으로 가장 좋은 것임을 아는 것을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근본이 이스라엘 사람인 당신은 당신 뒤에 수천 년을 내려온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리석지도 않고 무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돈 문제나 길의 안전 문제에서는 그것을 물리칠 줄 알면서, 왜 믿음의 문제에서는 모든 사람의 절충을 받아들입니까? 인간적으로만 말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돈과 길 뒤로 물리쳐 놓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뒤로 물리쳐 놓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장사와 돈과 생명을 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당신이 가지도록 허락하시는 것도 역시 하느님이십니다.…그러면 왜 성전에 들어갔었습니까?”
“호기심으로요. 길을 오는 중에 상품매매를 한 집에서 나오다가 선생님을 떠받드는 한떼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스칼론에서 양탄자를 짜는 여인집에서 가졌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이 그 여자가 말한 분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들어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알고서는 선생님을 따라갔습니다. 저는 그날 장사는 끝냈었습니다.…그러다가 선생님을 놓쳤습니다. 예리고에서 선생님을 다시 보았지만 그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다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보시오, 하느님께서 우리를 연결시키시고, 우리의 길을 교차시키십니다. 나는 당신의 친절에 감사하기 위해 당신에게 줄 선물이 없소. 그러나 당신을 떠나기 전에 선물을 하나 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그 전에 나를 떠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는 안 합니다. 알렉산드르 미사스는 한 번 스스로 나선 다음에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저 모퉁이를 지나면 마을이 시작됩니다. 저는 앞서 가겠습니다. 여관에서 다시 만나십시다.” 이러면서 그는 수노새에 박차를 가하여 행 길가에서 거의 구보(驅步)로 달린다.
“아들아, 그 사람은 성실한데 불행한 사람이로구나” 하고 성모님이 말씀하신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사람이 지혜에 따라서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거지요?”
두 분은 저녁의 첫 어두움 속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신다.
… 10월의 긴 저녁시간에 여행자들은 여관의 큰방에 모두 모여서 해지는 시간을 기다린다. 한 구석에는 상인이 혼자서 계산에 골몰하여 있다. 맞은편 구석에는 예수께서 당신의 일행 모두와 함께 계시다. 마굿간에서는 나귀의 울음소리와 말의 울음소리와 양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로 인하여 여관에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아마 벌써 잠자리에 든 모양이다.
마륵지암이 이번에는 “어른”이라는 것을 잊고 성모님의 품에서 잠들었다. 베드로도 졸고 있는데, 졸고 있는 사람이 그 혼자만은 아니다. 말이 많은 나이 든 여자들도 반쯤 잠이 들어서 말이 없다.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성모님, 라자로의 누이동생들, 신디카, 열성당원 시몬, 요한, 그리고 알패오의 유다이다.
신디카는 무엇을 찾으려는 것처럼 엔도르의 배낭을 뒤지고 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바빌론의 귀양살이의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알패오의 유다 가까이로 오는 편을 택한다. 유다는 이렇게 말해서 이야기를 끝낸다. “…어쩌면 저 사람도 역시 그 결과인지 몰라요. 귀양살이는 어느 것이나 파멸이예요….” 신디카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알패오의 유다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여러 세기 동안 내려온 보물을 버리고 완전히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특히 종교 문제에서, 그것도 우리의 것과 같은 종교 문제에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이스라엘 속에 사마리아가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
침묵이 흐른다.…신디카의 검은 눈이 예수의 차분한 옆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신디카는 예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는 하지만 말은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그 눈길을 느끼시고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다보신다.
“취미에 맞는 것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소?”
“못 찾았습니다. 주님. 저는 과거와 현재를, 전에 가졌던 사상과 지금의 사상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제 이전 사상들이 지금의 사상을 얻는데 정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배신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사도가 말을 잘 했습니다.…그러나 제 파멸은 행복한 파멸입니다.”
“그대에게는 무엇이 무너진 것 같소?”
“주님, 이교적인 올림퍼스산의 신들에 대한 신앙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약간 어리둥절합니다. 그것은 주님네 성경을 읽으면서 -요한이 성경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있습니다. -주님네 역사에도…시작이라고 할까요? 우리네 역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실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저는 알고 싶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말했지, 물어봐요 대답해 줄 테니.”
“신들의 종교에는 모든 것이 오류입니까?”
“그래요. 다른 신들에게서 오지 않고, 인간적인 격정에도 필요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신은 다만 한 분뿐이오, 오직 한 분뿐이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느님.”
“저는 그걸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이교도들이 제게 할 수 있을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하고 싶은데, 토론을 용납하지 않는 형태로 하지 않고, 설득하기 위해 토론하는 형태로 대답하고 싶습니다. 저는 저 자신으로 또 자비로우시고 온정이 넘치는 하느님의 덕택으로 틀이 덜 잡히기는 했지만, 제 정신에 평화를 주기에는 충분한 해답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보다 덜 고민하면서 이 진리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 탐구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영혼들 곁에 무기력하게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얻은 것을 주기를 원합니다. 주기 위해서는 제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 길을 오면서 산들을 바라다보는 동안, 그리이스의 산맥들과 제 조국의 역사가 생생하게 기억에 떠올랐고, 연상으로 프로메테우스(불의 신, 그리이스 신화)의 신화와 데우칼리온(프로메테우스의 아들. 피라의 남편, 그리이스 신화)의 신화가 생각났습니다.…주님네도 루치페르(사탄의 다른 이름 Lucifer)가 벼락을 맞은 것, 진흙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 노아의 홍수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사소한 공존(共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추억이기는 합니다.…그러니 이제는 말씀해 주십시오. 만일 선생님네와 우리들 사이에 접촉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수 있었겠는지, 또 선생님네가 그것들을 확실히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는데 우리도 그것들을 알았다면,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방법은 없겠는지요? 우리들은 지금 많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수천년 전에 선생님네 진리들을 상기시키는 전설들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이봐요, 그대는 그 누구보다도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할 거요. 그대는 과연 그 자체로 그대의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있을 책들을 읽었소. 그대는 오늘 연상으로 고향의 산에 대한 추억에서 고국의 신화들의 추억과 그 비교로 넘어갔소. 그렇지요? 왜 그렇게 되었소?”
“제 생각이 잠을 깨면서 기억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잘 대답했소. 그대의 땅에 종교를 준 가장 옛날 사람들의 영혼들조차도 기억을 한 거요. 계시된 종교에서 떨어진 불완전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기억한 거요. 그러나 그 영혼들은 여전히 기억을 한 거요. 세상에는 종교가 많아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여기에 분명한 그림으로 그 종교들의 모든 특색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많은 진흙 속에 파묻혀 있는 금실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된 진리의 작은 조각들이 들어 있는 매듭들이 있는 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그러나 우리가 모두 같은 포도나무 그루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원그루에서 온 옛날 사람들의 또 옛날 사람들은 왜 참된 진리를 가져올 줄을 몰랐습니까? 그들이 진리를 가지지 못하게 한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닙니까?”
“그대는 창세기를 읽었지요?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소? 처음에는 사람의 세 가지 상태, 즉 물질, 생각, 정신을 포괄하는 복잡한 죄를 발견했고, 그 다음에는 형제 살해, 다음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빛을 간직해 두려는 예속의 일을 상쇄하기 위한 이중 살인을, 그 다음에는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관능적인 결합을 발견했소. 그리고 그대들의 신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에서가 아니고, 또 인간의 작업으로 생명을 주는 불을 훔쳐온 데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으로 생명을 주는 불을 불어 넣어주신 것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닳은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진 첫번째 진흙에 생명이 주어졌었는데, 홍수로 깨끗하게 하고 좋은 씨에서부터 인정을 다시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교오의 누룩이 생겨나고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 생겨났소. ‘우리는 하늘에까지 올라간다’ 하고, 그리고 ‘그들이 흩어지고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라’는 하느님의 저주가 있었소.…그래서 하나밖에 없던 그루가 마치 물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여러 줄기의 개울로 갈라져 다시 합쳐지지 않는 것 모양으로 갈라져, 하나밖에 없던 인종이 여러 인종으로 갈라졌소. 그의 죄와 하느님의 벌로 인하여 도망치는 인류는 이렇게 흩어져서 다시는 합쳐지지 않으며, 교만이 만들어낸 혼란을 가지고 다니는 거요. 그러나 영혼들은 기억하고 있어요. 영혼에는 항상 무엇인지 남아 있고, 가장 덕이 많고 가장 지혜로운 영혼들은 신화들의 어두움 속에서 비록 희미하나마 빛을, 진리의 빛을 어렴풋이 보는 거야. 생명이 있기 전에 본 이 빛의 기억이 그 영혼들 안에서 계시된 진리의 단편들이 들어 있는 진리들을 움직이는 거요. 내 말 알아들었소?”
“부분적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걸 곰곰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밤은 곰곰히 생각하고 깊이 내성하는 사람의 친구입니다.”
“그럼 우리 각기 깊이 내성하러 갑시다. 여자들, 당신들에게 평화. 내 제자들, 너희들에게 평화. 알렉산드르 미사스, 당신에게도 평화.”
“주님, 안녕히 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기를” 하고 상인이 몸을 구부리면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