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는 이 첫번째 고찰을 적어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리니까. 작년에 수난 제목 아래 넣었다가, 반복인 것 같아 쓸 데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뺐던 “예수를 장사지냄”이라는 대목이 오히려 주님께 관계되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알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떤 일들을 설명하는 데 유익한 것이었다. 끝머리에 가서 예수의 시신에 어떻게 향유를 바르고 어떻게 염포로 쌌는지에 대한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 가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좋다, 그 후 일은 제대로 되었다. 그러나 내가 예수께 부축을 받지 않을 때에는 완전히 바보가 되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어 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내 일이 끝난 다음에 내게 와서 무엇을 묻는 것은 전혀 쓸 데 없는 짓이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고, 어떤 대목이 왜 유익한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전한 제로(0) 상태이고 전적인 암흑이다. 오늘 아침 새벽녘에 왜 그 대목이 문제의 제목 아래 들어갔는지 그 이유가 내게 제시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적인 판단의 오만에 대한 내 … 약을 꿀꺽 삼켰다. 이제는 끼워넣은 종이에 가필(加筆)을 하나 해서 시신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부인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유익하고 분명하라고 그것을 삽입했다.
그럼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자.

예수께서 어떤 광장 한 가운데에서 많은 군중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샘 근처에 있는 돌로 된 작은 걸상에 올라가셨다. 사람들이 예수를 에워쌌다. 그리고 예수 둘레에는 열 두 제자도 있는데, 비탄에 잠기거나 지긋지긋해 하거나 또는 어떤 접촉에 대하여 분명히 혐오를 나타내기까지 하는 얼굴들을 … 하고 있다. 특히 바르톨로메오와 가리옷 사람은 그들의 난처한 입장을 숨김없이 나타내서, 가리옷 사람은 그 광경을 내려다보려는 것처럼 어떤 나뭇가지에 걸터앉았고, 바르톨로메오는 광장 한 모퉁이에 있는 대문에 기대어 서 있다. 선입관이 생생하고 강하게 모든 제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평소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내 생각에는 예수께서 당신의 위엄으로 무섭게 하지 않으시려고 애쓰시고, 동시에 일체의 의심을 없애기 위하여 위엄을 나타내시려고 애쓰시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두세 명의 어린이를 쓰다듬어 주시고 이름을 물어보시며, 어떤 늙은 소경에게 관심을 보이시고 친히 동냥을 주신다. 그리고 일반적인 일이 아니고 개인적인 성질의 문제에 대하여 물어보는 두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신다.
한 가지는 사랑 때문에 가출을 하였다가 지금은 용서를 청하는 딸을 둔 한 아버지의 질문이다.
“즉시 용서해 주시오.”
“그렇지만 선생님, 저는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1년도 못 되는 동안에 저는 10년이나 늙었습니다.”
“용서하면 고통이 덜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상처가 남아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러나 상처에는 괴롭게 하는 뾰족한 끝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이 딸에게서 받은 명백한 치욕이고, 또 하나는 당신이 딸에게 사랑을 거절하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이 후자(後者)만이라도 없애시오.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인 용서는 그것을 없앨 것입니다. 불쌍한 아버지, 그 딸이 당신에게서 났고, 그래서 당신의 사랑을 받을 권리를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오. 만일 그 딸이 육체의 병이 든 것을 보고, 당신이, 바로 당신이 치료해 주지 않으면 그 딸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그냥 죽으라고 놓아두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이, 바로 당신이 당신의 용서로 딸의 불행을 막고 딸이 사랑을 건전하게 평가하도록 이끌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오. 그 딸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면, 가장 천한 면이 우세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면 제가 용서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애가 그런 일을 한 다음에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주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당신이 용서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집의 문을 열어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거 보세요, 인자한 사람이 되시오. 아니, 우리가 변덕스러운 송아지에 대해서 가지는 참을성을 우린 아이에 대해서 가지지 못하겠습니까?”
이번에는 한 여자가 고아들인 자식들에게 아버지를 주기 위해서 시동생과 결혼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 사람이 정말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까?”
“예, 선생님. 저는 아들이 셋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애들을 지도하려면 남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오. 그리고 첫 번 남편에게 충실했던 것과 같이 그에게도 충실한 아내가 되시오.”
셋째 사람은 안티오키아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는데, 그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묻는다.
“그런데 그 곳에는 왜 가려고 하십니까?”
“이곳에는 저와 제 많은 자식들이 살아갈 생활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방인을 한 사람 알았었는데, 그 사람은 제가 일을 잘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저를 쓰겠다고 하고, 제 아들들에게도 일거리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 사마리아인으로서는 이런 소심증이 있다는 것이 선생님께 이상히 생각되겠지만, 저는 이런 소심증이 있습니다. 즉 저는 우리가 믿음을 잃기는 싫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교도이거든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면요? 오염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오염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안티오키아로 가시오, 그리고 참 하느님께 충실하시오. 하느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주인에게 은인이 되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성실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니까요.”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여러분 중에서 많은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은밀한 고통과 걱정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만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 고통과 걱정이 여러 세기를 두고 커지는데, 여러분이 말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던지는 욕설도 그것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점점 더 단단해져서, 눈이 얼음으로 변할 때처럼 무게가 나갑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니고, 또 여러분을 비난하는 사람들 축에도 끼지 않습니다. 나는 정의요 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 에제키엘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에제키엘은 예언자의 자격으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해 말하는데, 그들이 같은 배에서 태어난 두 딸이라며 그 이름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우상숭배에 떨어진 것은 첫째 딸 오홀라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벌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영적인 일치를 잃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항상 구원입니다. 그 여자는 참다운 재물과 참다운 능력과 참다운 지혜를 자기 자신보다도 하느님보다도 더 못한 어떤 사람의 보잘 것 없는 재물과 능력과 지혜와 바꾸었고, 그를 유혹한 사람의 생활방식의 노예가 될 정도로 농락당하였습니다. 강해진다고 하다가 약해졌고, 더 커진다고 하다가 더 작아졌습니다. 경솔한 짓을 하다가 분별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모하게 병에 감염되면, 그것을 고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가 작아졌는가? 아니야, 우린 커졌어.’ 하고. 커졌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어떤 대가를 치르고 커졌습니까? 여러분도 그것을 압니다. 여자들 가운데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정절이라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재산을 얻습니까? 그 여자들은 오래 갈 수 없는 것을 장만합니다. 그 여자들은 결코 끝이 없는 어떤 물건, 즉 그들의 좋은 평판을 잃습니다.
오홀리바는 오홀라가 무분별한 짓으로 재물을 얻은 것을 보고 오홀라를 본받으려고 하여 오홀라보다도 더 분별없게 되었고 죄를 이중으로 지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사실 오홀리바는 참 하느님을 모시고 있었고, 이 결합에서 그에게 오는 힘을 결코 짓밟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중으로 분별도 없고 부정한 오홀리바에게는 무자비하고 무서운 벌이 왔고, 또 한층 더 많이 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등을 돌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벌써 그렇게 하시고 유다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로 가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을 강요하지 않으시니까 그분을 불공평하시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팔을 벌리시고 모든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누가 그분께 ‘가시오’ 하고 말하면 그 분은 가십니다. 그 분은 사랑을 찾아가시고,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어떤 사람을 만나실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권유하십니다.
이 때문에 내가 여러분의 고민에 위안을 받을 수 있다고, 이 일을 생각하고 위안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홀라여, 정신을 차리시오! 하느님이 당신을 부르십니다.
사람의 지혜는 뉘우치는 데 있고, 영의 지혜는 참된 하느님과 그 분의 진리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오홀리바도 페니키아도 에집트도 그리이스도 바라다보지 말고, 하느님을 쳐다보시오. 모든 올바른 영의 고향은 하늘입니다. 여러 가지 법률이 있지 않고, 오직 하나, 즉 하느님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 법전으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말하지 말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고 말하시오. 하느님이 아직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당신의 말씀을 당신들에게 보내셔서 ‘오시오’ 하고 말하게 하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시오’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욕을 먹고 추방을 당했습니까? 그런데 누구에게서 그런 일을 당했습니까?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보다 나으신데,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성전에 가지 않은 것을 몹시 기뻐할 날이 올 것입니다. … 여러분의 지성이 그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흩어져 있는 마음이 곧은 사람들 위에 벌써 하느님의 용서가 내려왔을 것이니까 영들은 훨씬 더 기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내려오도록 준비하시오. 길을 잃은 하느님의 아들들이여, 모든 사람의 구세주에게로 오시오.”
“그야, 적어도 저희들 중의 몇 사람은 갈 것입니다.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저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제와 예언자와 더불어 또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에브라임과 그에게 합쳐진 이스라엘 지파들의 손에 들어 있는 요셉의 숲을 빼앗아 유다의 숲과 합쳐서 다만 하나의 숲을 만들겠다 ….’ 그렇습니다. 성전에서가 아닙니다. 내게로 오시오. 나는 여러분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우주의 지배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왕들의 왕입니다. 깨끗해지기를 원하는 백성들이여, 나는 여러분 모두를 깨끗하게 하겠습니다. 목자가 없거나 우상숭배자인 목자와 같이 있는 양떼들이여, 내가 여러분을 모으겠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장막을 주고 그것을 내 신자들 가운데 놓아두겠습니다. 이 장막은 생명의 샘, 생명의 빵일 것이고, 빛일 것이고 구원과 보호와 지혜일 것입니다. 이 장막은 모든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양식으로 준 살아 있는 분이고,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전파되시는 하느님이시겠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것이고 또 이렇게 될 것입니다. 증오와 이해 거부와 공포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오시오! 이스라엘 민족! 갈라진 민족! 고민하는 민족! 물리쳐진 민족! 애지중지하는 민족, 몹시 애지중지하는 민족, 병들고 약해졌기 때문에, 영혼의 핏줄을 뚫은 화살로 인해 창백해지도록 피를 흘리고, 그 영혼에서 너의 하느님과의 생명을 주는 결합이 달아나게 되었기 때문에 무한히 소중한 민족, 오너라! 네가 태어난 태중으로 오너라, 네게 생명을 보내준 가슴으로 오너라. 거기에는 아직도 네게 대한 다정스러움과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 항상 오너라! 생명과 구원을 찾아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