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겐네사렛 호수와 메론 호수 사이에 있는 상부 요르단강의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 코라진 평야에 계시다. 포도밭이 많은 평야인데, 벌써 포도수확이 시작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시카비논에 있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고, 그중에 또 다시 스테파노와 헤르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이곳에 계신 것이 벌써 며칠째 되는 것 같다. 이사악은 더 일찍 오지 못한데 대해서 용서를 빌면서, 새로 온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고,이렇게 곰곰히 생각하느라고 늦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하고 또 말한다.”저는 하늘의 길이 착한 뜻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은 비록 가믈리엘의 제자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너는 말도 제대로 하고, 행하기도 잘했다. 그들을 이리 데려오너라.” 이사악이 갔다가 두 사람과 같이 돌아온다.
“당신들에게 평화. 사도들의 말이 당신에게 하도 참된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따르기를 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은 더 참됩니다. 선생님, 저희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겠소?”
“저희가 가믈리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나는 위대한 가믈리엘을 존경하오. 그리고 그분은 나와 같이 있을 자격이 있으니까 그분이 나와 같이 있었으면 하오. 그분의 지혜가 완전하게 되는 데에는 이것만이 부족하오. 당신들이 그분을 떠날 때에 그분이 무슨 말을 합니까?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분에게 인사를 했을 터이니까 말이오.”
“예, 그분은 저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믿을 수가 있으니 정말 행복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기 위하여 잊어버리도록 기도하여라’ 하고요.”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 둘레에 바싹 다가서 있는 사도들은 서로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묻는다.”그 사람 말이 무슨 뜻이지? 그 사람은 뭘 원하는 거야? 기억하기 위해서 잊어버리다니?”
예수께서 이 속삭임을 들으시고 설명하신다.”그는 내 지혜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지혜를 잊기를 원한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믈리엘 선생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를 원한다. 그는 진리를 기억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잊기를 원하는 것이다.”
“선생님, 가믈리엘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헤르마가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말한다.
“아니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말로 된 잡동사니가 거짓말이오. 말씀을 대신하는 말들이 그렇소. 그것들을 잊고 그것들을 벗어 던지고 벌거숭이의 순결한 몸으로 진리를 찾아와서 옷을 입고 풍부하게 돼야 하오. 여기에는 겸손이 필요하오. 위험은…”
“그러면 저희도 잊어버려야 합니까?”
“물론이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잊고, 하느님의 것은 무엇이든지다 기억해야 하오. 자, 당신들은 그렇게 할 수 있소.”
“저희는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하고 헤르마가 단언한다.
“벌써 제자의 생활을 한 일이 있소?”
“예, 세례자의 살해 소식을 들은 날부터요. 헤로데의 궁정인들과 조신(朝臣)들에 의해서 소식이 매우 빨리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세례자의 죽음은 저희를 저희 무기력에서 끌어냈습니다”하고 스테파노가 대답한다.
“순교자들의 피는 언제나 무기력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생명이 되오. 스테파노, 이것을 기억하시오.”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굶주렸습니다.”
“나는 이미 말을 했소. 그러나 당신들 제자들에게 아직 많은 말을 하겠소. 당신들의 동료인 사도들은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나서 벌써 임무를 시작했소. 그러나 세상의 필요에 그들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오. 그런데 정확한 시간에 모든 것을 끝마쳐야 하오. 나는 일정한 기한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것을 한정된 시간 안에 끝마쳐야 하는 사람과 같소.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도와주기를 부탁하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은총과 영광스러운 장래를 약속하오.”
예수의 날카로운 눈은 아마포 겉옷으로 몸을 폭 감싼 어떤 사람을 발견하신다.“당신은 사제 요한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선생님, 저주받은 골짜기보다도 유다인들의 마음은 더 메마릅니다. 저는 선생님을 찾아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럼 사제직은 어떻하구요?”
“문둥병이 첫번째로 저를 사제직에서 내쫓았고, 두번째는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쫓았습니다. 선생님의 은총이 자기에게로, 즉 선생님께로 저를 끌어당깁니다. 그 은총이 저를 더럽혀진 장소에서 내쫓아서 깨끗한 곳으로 데려왔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육체와 정신을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물건은 더러운 물건에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깨끗하게 해주신 분에 대한 모욕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엄격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이 부당하지는 않군요.”
“선생님, 집안의 추한 꼴은 집안에 사는 사람이 알게 되는데, 그것은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 외에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기는 선생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선 생님과 선생님의 사도들, 그리고 선생님과 저같이 사정을 아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좋습니다. 아니 그런데… 오! 당신도?!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당신은 다른 음식을 주려고 왔소?”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의 양식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추수를 망쳤소?”
“아이고! 아니올시다. 이번처럼 풍부한 추수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빵과 다른 추수, 즉 선생님의 빵과 추수를 찾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선생님께서 제 땅에서 고쳐 주신 문둥병자도 왔습니다. 이 사람은 제 주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람과 제가 따르고 섬겨야 할 주인이 계십니다. 선생님이십니다.”
“오시오. 하나, 둘, 셋, 넷… 풍성한 수확이오! 그러나 당신들은 성전에 대한 당신들의 처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소? 당신들 알지요, 나도 알고… 그리고 다른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저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따르고 싶은 분을 따릅니다” 하고 사제 요한이 말한다.
“저두요” 하고 새로 온 사람이 말한다. 그 사람은 율법학자 요한인데, 안식일에 진복팔단의 산 밑에서 음식을 준 사람이다.”
그리고 저희들두요” 하고 헤르마와 스데파노가 말한다. 그리고 스테파노가 덧붙인다.” 주님,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는 저희 임무가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주님께 즉시 봉사할 수 있게 최소한의 것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주님을 따르는 동안 올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산에서 진복(眞福)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둘째 사랑, 즉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율법학자 요한이 묻는다.
“엔도르의 요한은 어디 있소?” 예수께서 대답 대신 이렇게 물으신다.
“선생님, 저기 병 고쳐진 사람들과 같이 있습니다.”
“이리 오라고 하시오.”
엔도르의 요한이 달려온다. 예수께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특별히 인사를 하면서 말씀하신다.” 자, 이제는 말을 하겠소. 나는 거룩한 이름을 가진 당신들을 내 앞에 두고 싶소. 너는 내 사도, 당신은 사제, 당신은 율법학자, 당신은 세례자의 요한, 그리고 끝으로 하느님이 만드신 은총의 왕관을 끝맺는 당신. 그리고 내가 당신의 이름을 맨끝에 불렀지만 당신이 내 마음속에서 꼴찌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소. 언젠가 당신에게 이 연설을 약속한 일이 있는데, 이제 그것을 들을 참이오.”
그리고 예수께서는 보통 하시는 대로 모든 사람이 당신을 볼 수 있게 조금 비탈진 곳에 올라가신다. 예수 앞에는 다섯 명의 요한이 있다. 그 뒤에는 제자들이 팔레스티나 각지에서 건강 때문에 또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물려온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다.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그리고 지혜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자 들으시오. 오래 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서 죄인들에 대해 자비로우신지, 또 어느 정도가지 자비로우신지 물었습니다. 이것을 물은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이었었는데, 하느님의 절대적인 용서를 확신하게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비유로 그를 진정시키고 그의 안에서 울고 있는 뉘우친 마음이 벌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그를 위해서 항상 자비에 대해서 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이십니다. 하느님의 종은 하느님을 본받기 위하여 자비로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길잃은 당신 아들들을 당신께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자비를 쓰십니다.
하느님의 종은 길잃은 아들들을 하느님께로 데려오기 위한 방법으로 자비를 써야 합니다.
사랑의 계명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에게는 세 배나 더 의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쟁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에게는 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믿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쟁취하게 하지 못한다’고. 그런데 여러분은, 이 둘레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대부분은 하느님의 종,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완전한 생활, 축복받은 생활, 고생스럽지만 빛나는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종과 대리자로서 어떤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 이웃께 대한 전적인 사랑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목적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봉사합니까? 세속과 육신과 마귀가 하느님에게서 빼앗았던 사람들을 하느님께 돌려드림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어떻게요? 사랑으로. 사랑하게 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수없이 많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요르단강을 생각해 봅시다. 예리고에서는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러나 그 근원에서부터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하나의 가느다란 흐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줄기가 홀로 있었더라면 그런 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산들과 언덕들에서, 계곡 이쪽저쪽에서 수없이 많은 지류가 혹은 홀로 혹은 벌써 많은 개울로 이루어 져서 모두 그 하상으로 흘러들어오고, 그것이 커지고, 커지고, 또 커져서, 조용한 개울이요, 강으로 치면 어린 시절이던 때에 웃고 놀던 하늘빛을 띤 은빛 물줄기이던 것이 에머랄드 빛깔의 기름진 강 한가운데 로 파란 리본처럼 펼쳐지는 넓고 장엄하고, 조용한 강이 되기까지 합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벌이 무서워서 겨우 중죄를 조심할 줄 아는 생명의 길에 있어서의 어린 아이들인 사람들에 있어서는 처음 시작되는 물줄기이던 것이 완전의 길로 전진하는 동안, 울퉁불퉁하고 메마르고 당당하고 거친 인간성이라는 산에서 사랑의 의지로 인해서 이 주요한 덕행의 수많은 개울이 흘러나오며, 모든 것이, 즉 고통과 기쁨이 이 덕행을 나타나게 하고 솟아오르게 하는데 소용됩니다. 마치 산 위에서 얼어붙은 눈과 그것을 녹이는 해가 개울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즉 겸손과 뉘우침이 그들에게 길을 뚫어 두는 데 소용됩니다. 모든 것이 강의 근원 쪽으로 그들을 인도하는데 소용됩니다. 그것은 이 길로 이끌려 가는 영혼이 자아(自我)를 소멸시키러 내려가기를 좋아하기 때문인데, 거기서 힘있고 훌륭하고 유익한 강이 된 다음 태양이신 하느님께 끌려 다시 올라오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존경을 곁들인 사랑의 처음 생겨나는 개울에 영양을 공급하는 개울들은 덕행들 외에 덕행들이 행하도록 가르쳐 주는 행동들입니다. 바로 사랑의 작은 시냇물이 되기 위해서 바로 자비의 행동이 되는 그런 행동들입니다. 이 행동들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떤 것들은 이미 이스라엘에 알려져 있고,어떤 것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내 율법은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오.
이것은 감사와 사랑의 의무이고, 본받음의 의무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그들에게 마련해 주는 빵 때문에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른이 되어서는 아버지를 본받아 자기 자녀들에게 빵을 마련해 주고, 나이가 많아서 이제는 일을 못하게 된 아버지에게도 빵을 마련해 드립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귀중한 것에 대한 애정 넘치는 갚음이고, 정당한 갚음입니다. 넷째 계명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여라’하는 말로 이것을 말해줍니다. 부모가 다른 사람들에게 빵을 청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모의 백발을 공경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넷째 계명 전에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여라’하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둘째 계명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하느님 자신 때문에 사랑하고, 이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완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도 여러 번 기적적인 행위로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하느님을 기억해서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줌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다만 만나와 매추라기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의 호의로 싹트는 낟알의 계속적인 기적을 생각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농사짓기에 알맞는 땅을 주셨고, 바람과 비와 더위와 계절을 조절하셔서 씨가 이삭이 되고, 이삭이 빵이 되게 하십니다.
또 껄끄러운 비늘 같은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해와 같이 따뜻한 냄새가 나는 금빛 낟알 이삭이 끝에 달린 저 키 크고 가는 풀이 거두고 낟알을 꺼내고 가루를 만들고 반죽하고 익혀야 하는 양식이라는 것을 죄지은 당신 아들들에게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가르쳐 주신 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거두고 낟알을 골라내고 빻고 반죽하고 익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삭들 곁에 돌을 놓아두시고, 돌들 곁에는 물을 놓아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과 해의 반사로 땅 위에 첫번째 불을 붙이셨고, 바람은 낟알들을 불 위에 실어다 얹었는데, 낟알들이 기분 좋은 냄새를 풍기면서 구워져서, 이렇게 하는 것이 새들이 먹는 것과 같이 이삭에서 나을 때보다 더 맛있고, 또는 갈고 이겨서 끈적끈적한 반죽을 만들어 불에 굽는 것이 더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화덕에서 구워낸 빵을 먹는 여러분은 이 완전한 굽는 기술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자비의 증거이며, 사람이 말이 하는 것처럼 씹었던 첫번째 이삭에서부터 지금의 빵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오게 되었는지를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누구의 덕택입니까? 빵을 주신 하느님의 덕택입니다. 그리고 죄지은 아들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벌을 내리시는 곳인 땅에 조물주에게 가득 채워 놓으신 식물과 동물 가운데에서 사람이 유익한 지식으로 가려낼 줄 안 모든 종류의 양식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우리를 배불리 먹이시는 주님이시요 아버지이신 분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이고, 우리를 거저 당신을 닳게 하셨고, 또 그분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점점 더 닳게 되어야 하는 아버지를 본받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주시오.
여러분은 만일 아버지께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혹은 또 하느님께서 ‘목마른 사람에 대해서 너희가 냉정하기 때문에 나는 구름이 땅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항의하고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물은 낟알보다도 더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낟알은 사람이 가꾸지 마는, 안개나 눈이나 비나 이슬이 되어 내려와서 밭과 빗물받이 웅덩이에 물을 대주고, 강과 호수를 가득 채워서 다른 동물과 더불어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물고기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게 하는 구름밭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마실 것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 ‘싫소. 이 물은 내 것이니까 당신에게는 주지 않겠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거짓말쟁이! 여러분 중에서 누가 눈한송이나 비 한 방울이라도 만들었습니까? 자기의 천체 같은 열로 금강석 같은 이슬 한 방울이라도 증발시켰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렇게 하십니다. 또 물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은 다만 하느님께서 나머지 것을 조절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이 부분도 조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목마른 사람에게 땅의 수맥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이나 여러분의 우물의 깨끗한 물이나 여러분의 빗물받이 웅덩이에 가득 차 있는 깨끗한 물을 주시오. 물은 하느님의 것이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시오. 여러분에게 돈이 들지 않고, 물잔이나 물병을 내미는 피로 외에 다른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 이 아주 작은 행동에 대해서도여러분은 하늘에서 상을 받으리라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고 평가하시는 데에 중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입히시오
헐벗고 부끄러워하는 가엾고 비참한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갑니다. 버림받은 노인들이 있고, 병이나 사고로 불구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님의 호의로 목숨을 다시 찾은 문둥병자들이 있고, 가족이 딸린 과부들이 있고, 안락을 몽땅 앗아간 불행을 겪은 사람들이 있고, 죄없는 고아들이 있습니다.
눈을 들어 넓은 세상을 바라다보면, 헐벗은 사람이나 겨우 부끄러운 곳이나 가리는 누더기를 걸쳐서 추위를 막지 못하는 사람이 사방에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편안한 샌들을 신고 지나가는 부자들을 모욕을 당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착한 사람들에게는 굴욕감과 착함이 있고, 덜 착한 사람들에게는 모욕감과 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면 더 착하게 되게 하고, 덜 착한 사람들이면 여러분의 사랑으로 미움을 없애서 그들의 모욕감에 대해서 도움을 주지 않습니까?
‘나 입을 것밖에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식탁에 있는 빵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옷장에는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들보다는 더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에는 낡아서 치워 두었던 옷을 가지고 고아나 가난한 어린이를 위한 작은 옷을 만들고, 또 묵은 천을 가지고 기저귀가 없는 아기를 위해 기저귀를 만들 줄 안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또 자기가 거지이면서 그가 고생스럽게 동냥해서 얻은 빵을 부자들의 집에 손을 내밀러 갈수가 없는 한 문둥병자와 여러 해 동안 나누어 먹은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리고 나 진정으로 말합니다만, 이 자비로운 사람들은 가진 사람들 가운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로 인해서 가난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것인지를 아는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 중에서 찾아야 합니다.
또 여기서도 물과 빵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옷을 만들어 입는 양털과 아마포는 동물과 식물에서 오는데, 그것들을 아버지께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부자들만을 위해 만들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시오. 그것은 하느님께서 오직 한 가지의 부(富),즉 은총과 건강과 지성의 부를 사람에게 주셨지, 황금이라는 더럽혀진 부를 주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금속보다 더 아름답지도 않고,괭이,쟁기,쇠스랑,낫,끌,망치,톱,대패,거룩한 일에 쓰이는 거룩한 연장 따위를 만드는 쇠보다도 훨씬 덜 유익한 황금을 귀금속의 지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고귀함은 무익하고 헛된 것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던 여러분을 야수들 모양으로 야만인이 되게 한 사탄의 부추김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의 부는 여러분에게 점점 더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무엇을 주었었습니다! 그 많은 피와 눈물을 흐르게 한 저 살인적인 부를 주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받은 대로 주시오. 헐벗은 채 있게 될까 봐 걱정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주시오. 사랑이 없어서 부드러운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얼게 하는 것보다는 거지를 입히느라고 옷을 벗어 주었기 때문에 얼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선의 따스함은 아주 순수한 모직으로 만든 겉옷의 따스함보다 더 아늑합니다. 그리고 옷을 얻어 입은 가난한 사람의 몸은 하느님께 말씀드리며 ‘저희에게 옷을 준 사람들에게 강복해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내핍생활을 하면서 배불리 먹이고 목을 축이게 하고 옷을 입히고 하는 것이 거룩한 절제와 지극히 거룩한 사랑을 결합시키고, 하느님이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풍부히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람의 악의나 병으로 인해서 가진 것을 잃게 된 사람들을 위해 줌으로써 불행한 형제들의 운명을 거룩하게 바꾸어놓는 지극히 복된 정의도 여러분을 결합시키지만, 길손들에게 베푼 환대(歡待)는 사랑을 이웃에 대한 신뢰와 존경에 결합시킵니다. 이것도 하나의 덕행입니다. 아시겠어요? 이것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랑 외에 정직을 나타내는 덕행입니다. 과연 정적한 사람은 행동을 잘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가 보통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의 진실성을 믿는 신뢰와 순박은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이 큰일에 있어서나 작은 일에 있어서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남의 이야기를 의심하게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에게 재워 주기를 청하는 여행자를 보고, 왜 ‘그러다가 이 사람이 도둑이거나 살인자면 어떡하나’ 하고 생각합니까?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집에 오는 어떤 외부사람을 보고도 벌벌 떨 만큼 그렇게 여러분의 재산에 집착하십니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무서워서 몸이 떨릴 만큼 여러분의 목숨에 그다지도 집착하십니까? 아니?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도둑들에게서 지켜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지나가는 행인을 도둑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면서,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훔쳐가는 어두운 손님은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들의 마음속에 마귀를 머무르게 합니까! 모든 사람이 큰 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때문에 떠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재물과 목숨밖에 귀중한 것이 없단 말입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 빼앗기고 죽게 하는 영혼이 더 귀중하지 않단 말입니까? 저 세상으로는 가져가지도 못하는 물건들을 지키기 위해서 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빗장을 지르고, 개를 기르고, 금고를 설치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물건인 것처럼 그들의 진짜 보물을 빼앗기고 암살자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가엾고 불쌍한 영혼들!
왜 모든 여행자를 도둑으로 보고자 합니까?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지나가는 형제에게는 집의 문을 열어 주는 법입니다. 길손이 우리와 같은 혈족이 아닙니까? 오! 천만에요! 그도 역시 아담과 하와의 피를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구요? 어떻게 아니란 말입니까?! 아버지는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같은 부부에게서 난 아이들에게 같은 피를 주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같은 영혼을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길손이 가난합니까? 여러분의 정신이 주님의 우정을 빼앗겨서 그 사람보다 더 가난하게 되지 않도록 하시오. 그 사람의 옷이 찢어졌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죄로 인해서 더 찢어지지 않도록 하시오. 그의 발이 진흙이나 먼지투성이입니까? 길을 많이 걸어서 더러워지고, 긴 여행을 해서 해진 그의 샌들보다도 여러분의 자아가 악습으로 인해서 망가지지 않도록 하시오. 그의 모습이 불쾌감을 줍니까? 여러분의 모습이 하느님의 눈에 더 불쾌감을 드리게 되지 않도록 하시오. 그가 외국어로 말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언어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되지 않게 하시오.
여러분은 길손을 형제로 생각하시오. 우리는 모두가 천국을 향해 가는 길손들이고. 하늘로 가는 길옆에 있는 문들을 두드립니다. 문들은 성조(聖朝)들과 의인들과 천사들과 대 천사들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몹시 추워서, 그리고 나쁜 정열과 마귀들이라는 늑대와 재칼들의 함정에 걸려들어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지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도움과 보호를 얻기 위하여 그들의 호의를 청합니다. 천사들과 성인들이 우리에게 그들의 사랑의 문을 열어 우리를 보호해 주고, 길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운을 다시 차리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의 길손에 해서 이와 같이 합시다. 그리고 그를 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형제라는 다정한 이름으로 인사하면서 우리 집 문을 열어 주고 팔을 벌릴 때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수 십리 나아가는 것이 되리라는 것을 내가 보증합니다.
병자들에게 문병을 하시오.
오! 정말이지, 사람들이 여행자인 것과 같이 그들은 모두가 병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한 병은 정신의 병, 눈에 보이지 않고 가장 치명적인 병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병들은 불쾌감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헌 데는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악습의 역한 냄새는 구역질이 나게 하지 않습니다. 악마 같은 광기는 무섭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둥병의 회저(懷疽)는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영혼이 죽어서 썩은 사람의 오물이 가득 차 있는 무덤을 보고 사람들은 도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부정한 것들 중 하나에 가까이 가도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가련하고 좁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영이 더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살과 피가 더 가치가 있습니까? 말해 보시오. 물질적인 것이 가까이 있는 결과로 비물질적인 것을 부패케 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은 살과 피와 비교해서 무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영의 능력보다 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은 물질적인 것에 의해서 부패할 수 없고, 정신적인 것에 의해서 부패합니다. 어떤 사람이 문둥병자를 돌본다 하더라도 그의 정신은 문둥병에 걸리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형제에 대한 연민으로 죽음의 골짜기에 외따로 떨어져있기까지 영웅적으로 실천하는 사랑 때문에 그에게서는 일체의 죄의 흠이 떨어져 나갑니다. 사랑은 죄의 사함이고, 깨끗이 하는 것 중에서 첫째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만일 내가 이 사람같이 되었다면,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출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하시오. 지금은 아직 이스라엘이 옛날 율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말한 고통의 사람과 다윗의 시편이 말하는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물질적으로 재현될 어떤 사람의 모습을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경애할 날이 올 것인데, 그 새벽이 이제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문둥병자같이 되었기 때문에 인류의 구속자(救贖者)가 될 것이고, 그의 상처를 향하여, 마치 사슴이 샘물로 달려가듯이, 목마르고 병들고 지친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우는 모든 사람이 달려올 것이며, 그 사람은 그들의 목을 축여 주고, 병을 고쳐 주고, 기운을 회복시켜 주고,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나은 사람들은 그 사람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여 구속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상처투성이가 되고, 핏기가 없어지고, 매 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왕들의 왕이요 세상의 구속자인 그 사람의 사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벌써 하늘나라를 향하여 날아가려고 날개를 펼치는 여러분은 약점들의 이 새로운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여러분에게 좋은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죽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오. 내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이 어느날 그의 형제 중 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둥병자들을 만지는 것을 겁내지 말게. 하느님의 뜻으로, 자네에게 아무 불행도 달라붙지 않을걸세“하고. 그는 말을 제대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흑 여러분이 병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더라도, 내세에서는 사랑의 순교자들의 명단에 오를 것입니다.
갇힌 사람들을 찾아보시오.
감옥에는 지인들만이 있는 줄로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사법(司法)은 한눈은 멀고, 한 눈은 시력 장애가 있습니다. 인간의 사법은 구름들을 낙타들로 보고, 뱀을 꽃핀 나뭇가지로 생각합니다. 판단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재판을 주재하는 사람이 고의로 연막을 만들어 놓아 사법이 한층 더 잘못 보게 하기 때문에 훨씬 더 잘못 판단합니다. 그러나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도둑과 살인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업신여김으로 용서에 대한 희망을 그들에게서 빼앗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도둑과 살인자가 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불쌍한 수인(囚人)들! 그들은 그들의 죄로 짓눌려 있기 때문에 감히 하느님께로 눈을 들지 못합니다. 사실 사슬은 그들의 발보다는 정신을 더 묶어놓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께 대해서 실망하면 불행합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죄악에 용서에 대하여 실망하는 죄를 덧붙입니다. 옥살이는 속죄이고 교수대에서 죽는 것도 속죄입니다. 그러나 지은 죄에 대해서 인간 사회에 빚진 것을 갚는 것으로는 넉넉지 못합니다. 속죄를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는 하느님께 갚아야 할 몫도 갚아야 하고, 특히 그 몫을 갚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항을 하고 실망하는 사람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만 속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죄선고를 받는 사람이나 갇힌 사람에게 형제들의 사랑이 가면, 그것은 어두움 속에 빛일 것이고 목소리일 것입니다. 그 목소리가 ‘내 사랑이 당신에게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을 하길 바랍니다. 불운한 형제인 당신에 대한 이 사랑을 내 마음 속에 넣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고 말하는데 높은 곳을 가리키는 손일 것입니다. 그러면 빛은 동정심 가득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인간의 불의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러 가는 것이 더 당연합니다. 전혀 죄가 없거나 또는 잔인한 힘에 의해서 죽이도록 끌려가게 된 사람들을 말입니다. 판결이 내려진 곳에서 여러분도 판단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사람이 왜 남을 죽일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죽이는 사람이 죽은 사람에 지나지 않고, 이성을 잃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진짜 살인자가 피를 흘리지 않고 비열하고 잔인한 배신으로 그에게서 이성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내세에는 하늘에서 많은 죄수들과 죽이고 도둑질한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고, 지옥에서는 도둑을 맞고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들이야말로 사실로 남의 평화와 정직과 신뢰를 훔친 진짜 도둑들이었고, 어떤 사람의 마음을 죽인 진짜 살인자로서, 가짜 희생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그들이 맞았기 때문에 희생자이지만, 여러 해 동안 자기 자신들이 남몰래 치고 나서 맞은 것입니다. 살인과 도둑질은 죄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께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끌려갔기 때문에 죽이고 흠치고 한 다음에 뉘우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죄로 이끌어가고서 뉘우치지 않는 사람 중에서 남을 죄로 이끌고서 거기 대해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벌을 더 많이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판단하지 말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많이 동정하시오. 만일 모든 살인과 도둑질이 벌을 받아야 한다면, 감옥에서나 교수대에서 죽지 않을 남자나 여자가 별로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아기를 배고 그 아기를 낳기를 원치 않는 어머니들은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오! 말장난은 하지 맙시다! 진정으로 그들에게 ‘살인자’라는 이름을 붙입시다. 명성과 자리를 저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여 주겠습니까? 그야 그저‘도둑’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간통을 하는 저 남자와 저 여자들, 또는 배우자를 괴롭혀서 그들로 하여금 살인을 하거나 자살을 하게 만드는 저 남자와 저 여자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상의 권력자로서 그들에게 딸린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또 실망으로 인해서 난폭하게 되도록 만드는 그 사람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은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도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집과 도시를 가득 채우고, 길에서 우리를 스치며 지나가고, 여관에서 우리와 같이 자고,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는, 사법을 모면한 저 죄수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살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죄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만일 하느님의 손가락이 사람의 생각들이 잔치를 하고 있는 방의 벽에, 즉 여러분의 이마에 여러분이 과거에 어떠하였고, 지금 어떠하고 장차 어떠하리라고 비난하는 말을 쓰신다면 빛나는 글자로 ‘죄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가지게 된 이마는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이마들에는 질투와 같은 푸르거나 배신과 같이 검거나 살인과 같은 붉은 글자로 ‘간통자’, ‘암살자’, ‘도둑’, ‘살인자’라는 말들이 씌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죄를 짓고서도 여러분이 속죄하지 않는 것을 속죄하면서 감옥에 있는 인간적으로 덜 행복한 여러분의 형제들에 대해서 교만을 가지지 말고 자비를 베푸시오.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 내시오.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인생의 학교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죽음 앞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거룩하게 살 줄 알아서 이 죽음만을 당하지 말고, 나중에 당당하게 부활해서 영원히 다시 결합하여 지극히 행복하게 되도록 육체와 영혼의 일시적인 분리를 겪으시오’ 하고. 우리는 모두 알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두 죽으면서 썩게 되어 있는 시체가 됩니다. 왕이나 거지나 세상에 온 것과 같이 죽습니다. 그리고 왕들의 사치로 인해서 시체를 더 오래 보존할 수 있다 해도, 언제나 부패가 죽은 육체라는 것의 운명입니다. 미이라 자체도 무엇입니까? 육체입니까? 아닙니다. 수지(樹脂)로 화석화되고 목화(木化)한 것입니다. 속이 비고 향유로 변질시켰기 때문에 구더기의 밥이 되지 않지마는 오래된 나무처럼 갉아 먹는 벌레들의 먹이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먼지는 다시 먼지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 먼지가 영을 둘러쌌었고 그것으로 인해 생명을 얻었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만진 어떤 물건과 같이 -사람의 영혼이 이러합니다- 장막에 닿았던 물건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거룩하게 된 먼지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완전했던 때가 적어도 한 순간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영혼을 창조하시는 동안이었습니다. 그 후 원죄가 그의 완전을 빼앗아 가며 영혼을 더럽히기는 했어도, 그 기원만으로도 물질에 아름다움을 주고, 또 하느님에게서 오는 이 아름다움 때문에 육체가 아름다워지고 존경을 받은 자격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성전들입니다. 그리고 성전이라는 이 자체로, 마치 장막이 있었던 장소가 항상 존중된 것과 같이 우리는 존경을 받을 자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의 기묘한 조화에서 영혼과 그것을 구상하시고 완전하게 빚으신 하느님의 손을 보고 그 시체에서까지도 주님의 업적을 공경하면서, 죽은 사람들에게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 존경받은 휴식의 자선을 베푸시오.
그러나 사람은 살과 피만이 아닙니다. 그는 또한 영혼과 생각이기도 합니다. 영혼과 생각도 역시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과 윤리 법칙까지도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아무도 양식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굶주린 사람들과 같이 활기를 잃고, 그들에게 영양을 주는 진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됩니다. 영들의 굶주림에 영의 빵을 주시오.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영적인 질서에는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인데, 활기를 잃어가는 육체가 그날 죽지 않도록 그에게 주는 빵에 대해서 상을 주니, 영에게 영원한 진리를 배불리 먹여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상이 주어지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것을 아끼지 마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공으로 또 듬뿍 받았습니다. 그것을 아끼지 말고 주시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과 같이 하느님의 것이고, 여러분이 받은 것처럼 그것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에 대해서 인색하게 굴지 말고 우쭐하지 말고. 겸손하고 너그럽게 주시오. 그리고 은총을 목 말라하는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게 기도라는 맑고 유익한 청량음료를 주시오.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산 사람들의 마음과 죽은 사람들의 영에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기도를 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하게 되었기 때문에 풍부한 결과를 나타내는 기도를 말입니다.
기도는 참되어야 하고, 길 위를 굴러가는 바퀴의 소리처럼 기계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마차를 전진하게 하는 것은 바퀴소리입니까, 바퀴입니까? 마차를 전진시키는 데 쓰이는 것은 바퀴입니다. 음성으로 하는 기계적인기도와 활동적인 기도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음성으로만 하는 기계적인 기도는 소리뿐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활동적인 기도는 기운이 소모되고 고통이 커지지만 목적에 도달하는 그런 일입니다. 여러분의 입술보다는 희생으로 더 많이 기도하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영적인 자비의 제2의 행위를 함으로써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게 휴식을 줄 것입니다. 세상은 요란하고 무익하고 많은 인명을 빼앗는 싸움보다는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의 기도에 의해서 더 구원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압니다. 그러나 굳게 믿을 줄은 알지 못합니다. 마치 서로 적대하는 두 진영 사이에 끼여 있는 것과 같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아무것에도 다다르지 못하면서 다 써버립니다. 이들은 우유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또 그리고’ 하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후에는 이렇게 됩니까?’,‘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내가 실패하면요?’ 하는 것과 같은 말을 묻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유부단한 사람들로서, 매달릴 데를 발견하지 못하면 올라가지 못하고, 발견한다 하더라도 여기저기에 매달리는 바람에, 그들을 받쳐 주어야 할 뿐 아니라, 하루가 지나는 동안 새로운 전기를 만날 때마다 붙들어서 올라가게 해야 합니다.
오! 정말이지 그들은 발육이 뒤떨어진 어린 아이보다도 참을성과 자선심을 단련시킵니다. 그러나 제발 그들을 버리지 마시오!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알쏭달쏭한 병에 사로잡혀 있는 저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빛나는 믿음 전부와 열렬한 사랑 전부를 주시오. 진저리내지 말고 짜증내지 말고, 저 우유부단한 사람들에게 선생이 되어 주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오. 그 사람들이 여러분을 낙담하게 합니까? 좋습니다. 여러분도 수없이 나를 낙담시키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더 낙담시킵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듣는 지금도 아직 망설이고 있으므로, 말씀이 사람이 된 것이 쓸 데 없는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나보다 나은 줄로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므로 ‘그렇지만’, ‘만약’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감옥의 문을 열어 주시오. ‘내가 할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성공을 못하면?’ 하는 따위 사슬을 그들에게서 풀어 주시오. 그들이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만족하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믿게 하시오. 또 그들이 받침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거든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여러분이 다시 일으키시오. 그들의 아이가 넘어지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일으키고, 털어주고, 위로하고, 또 넘어질 염려가 없을 때까지 붙잡아 주는 어머니들이 하는 것과 같이 하시오.그런데 어머니들은 아이의 다리가 약하면 몇 달이고 몇 해고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용서해서 정신이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입혀 주시오.
모욕은 사랑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하느님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므로 모욕을 하는 사람은 옷을 벗었고, 그가 모욕을 준 사람의 용서만이 그에게 하느님을 다시 주기 때문에 그 헐벗음에 옷을 다시 입혀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욕당한 사람이 용서하는 것을 기다려서 용서하십니다. 모욕을 당한 사람도 용서하시고, 사람과 하느님을 모욕한 사람도 용서하십니다. 이렇다는 것은, 정말이지, 주님을 모욕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사람이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웃도 용서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한 대로 여러분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고 싶으면 용서하시오. 그러면 마치 여러분의 거룩한 어깨에 별로 만든 겉옷을 걸쳐 주듯이, 여러분이 베푼 사랑 때문에 하늘에서 복을 누릴 것입니다.
우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오. 그들은 생활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고, 애정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마치 요새에 틀어박혀 있듯이 여러분의 평온 속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버이를 여읜 사람의 빈 마음을 채워 줄 줄을 아시오. 고아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부모에게는 자식이 되어 주고. 서로서로 형제가 되어 주시오.
사랑하시오. 왜 행복한 사람들만을 사랑합니까? 그들은 이미 그들 몫의 태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오. 그들은 세상이 볼 때에는 덜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눈물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슬픔 속에서 체념하고 있으면, 그들을 사랑하시오. 그들이 고통 때문에 반항하면, 그들을 한층 더 사랑하시오. 비난을 하지 말고,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고통이 유익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하여 그들을 다정스럽게 대하시오. 그들은 눈물의 베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비뚤게 보아서, 그 얼굴을 온통 복수심에 불타는 권력자의 표정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눈살을 찌푸리지 마시오! 아니, 그것은 고통으로 인한 흥분에서 모든 환각(幻覺)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그들을 흔드시오.
여러분의 아주 싱싱한 믿음이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갖다 대주는 얼음과 같이 되게 하시오. 그리고 흥분의 절정기가 지나고, 심한 충격을 받은 사람이 쇠약해지고 얼이 빠지고 넋을 잃게 되면, 그때에는 병 때문에 발육이 늦어진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마치 새로운 일에 대해서 말하듯이 천천히 참을성 있게 다시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시오… 오! 사람이라는 영원한 어린이를 즐겁게 하기 위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무시오. 강조하지 마시오.…영혼은 저 스스로 몹시 애를 씁니다. 그 영혼을 애무와 기도로 도와주시오. 그리고 그 영혼이 ‘그럼,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었나요?’ 하고 말하면, ‘아니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죽음이나 다른 일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사람 몫까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을 해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고 말하시오. 그리고 영혼이 ‘그렇지만 나는 하느님을 비난했습니다’ 하고 말하거든, ‘그것은 흥분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걸 잊어버리셨어요’ 하고 말하시오. 그리고 영혼이 ‘그럼, 나도 하느님을 모시고 싶어요’ 하고 말하거든, ‘여기 계셔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시면서 당신의 마음 문 앞에 계십니다’ 하고 말하시오.
성가신 사람들을 참아견디시오. 그들은 길손들이 우리가 사는 집을 어지르듯이 우리 자아의 작은 집을 어지르러 옵니다. 그러나 길손들을 받아들이라고 내가 말했듯이 이 성가신 사람들도 받아들이시오.
그들이 성가신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이 여러분의 일을 방해한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은 여러분을 혹은 많이 혹은 적게, 어떻든 사랑합니다. 이 사랑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시오. 또 그들이 조심성 없는 질문을 하거나 그들이 미워한다는 것을 말하거나 여러분을 모욕하더라도 참을성과 사랑을 보이시오! 여러분의 참을성으로 그들을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할 수 있고, 여러분의 사랑이 없음으로 인해서 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지요. 그러나 그들을 죄짓게 하고, 여러분 자신이 죄짓는 것을 더 괴로워하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들을 여러분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나중에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초자연적인 애무로 언짢은 추억을 지워 주심으로써 여러분에게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죄인들이 은총으로 돌아오는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들을 가려주도록 힘쓰시오. 여러분이 언제 그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그들을 아버지답게 참을성 있고 다정하게 간절히 나무라는 것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일어나서 내게로 오너라’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면서 몸을 무덤에 맡기기 전에 그 추함을 조금씩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히브리인들은 부활하게 되어 있는 육체에 대한 존경으로 우리 몸을 깨끗하게 하지 않습니까? 죄인들을 나무라는 것은 수의를 입히기 전에 그들의 팔다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는 주님의 은총이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과 눈물과 희생으로 깨끗하게 하시오. 영혼을 타락에서 빼앗아 오기 위하여 용맹하게 되시오. 영웅적인 사람들이 되시오. 이것이 상을 받고 그대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목마름을 풀어주려고 주는 물 한 잔에 대해서도 상을 주는데 영혼에게서 지옥의 목마름을 없애 준데 대하여는 무엇을 주겠습니까?
내 말은 끝났습니다. 이것이 사랑을 커지게 하는 육체와 영의 자비의 행위들입니다. 가서 이런 행동을 하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평화와 내 평화가 이제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