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마나엔과 같이 과부의 집에서 나오시며 말씀하신다. “평화가 아주머니와 가족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일 후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요셉아, 잘 있거라. 내일은 쉬고 놀아라, 그런 다음 또 나를  도와 다오. 왜 우니?”
  “선생님이 다시 오지 않으실까 봐 걱정이 돼요….”
  “나는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것이 그렇게도 싫으냐?”  어린 아이는 머리를 끄덕거린다.
  예수께서는 그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신다. “하루는 이내 지나간다. 내일 너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있거라. 나는 내 사도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에게 말을 하겠다. 요사이는 네게 일하는 것을 가르쳐 주느라고 말을 했다. 이제는 사도들에게 전도하는 법과 착하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을 만나러 간다. 너는 나하고 가면 어른들이 많은데 아이가 혼자뿐이니까 재미가 없을 거다.”
  “아이고 선생님하고 같이 있을 데니까 즐거울 거예요.”  “아주머니, 알겠습니다. 아주머니의 아들도 많은 어린이들과 같이 하는데, 이들이 가장 착한 어린이들입니다. 이애가 나를 떠나기 싫어하는데, 나를 믿고 이 애를 모레까지 내게 맡기겠습니까?”
  “아이고! 주님! 아니 제 아이들을 전부 드리기라도 하겠습니다! 주님과 같이 있으면, 하늘에 있는 것처럼 안전합니다.…그리고 제 아버지와 제일 많이 같이 있은 이 아이는 너무나 괴로워했습니다. 그때에…이애가 거기 있었거든요.…보세요.…이애는 그저 울고 괴로워하기만 합니다. 얘야, 울지 말아라. 내가 말하는 것이 참말이 아닌지 주님께 여쭈어보아라. 선생님, 저는 이애를 위로하기 위해서 늘 이렇게 말해 줍니다. 제 아버지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당분간만 우리에게서 멀리 가 있을 뿐이라고요.”
  “그건 사실이다. 요셉아, 꼭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대로다.”        
  “그렇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해요. 그런데 나는 어려요. 내가 만일 이사악 할아버지처럼 늙게까지 살게 되면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가엾어라! 그러나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주님, 아닙니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 3주일 됐는데, 시간이 정말 아주 느 려요! … 난 아버지없이 살수 없어요….”그러며 소리없이, 그러나 몹시 슬퍼하면서 운다.
  “보세요. 이애는 늘 이렇답니다. 특히 무슨 일에 골몰하지 않을 때는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고민입니다. 이애가 죽을까 봐 걱정이 입니다….”
  “아닙니다. 내게는 아버지, 어머니가 없는 다른 어린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애는 마르고 침울했었는데, 지금은 베싸이다의 한 친절한 여자 곁에서, 그리고 부모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시 활짝 피어났습니다. 아주머니의 아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해 줄 것 때문에, 또 세월이 약이니까, 그리고 아주머니가 일용할 양식 때문에 덜 걱정하는 것을 보면 이애도 더 안심이 될 것입니다. 아주머니, 안녕히 계세요. 해가 기울었으니 나는 가야 합니다. 요셉아, 가자. 어머니와 동생들과 할머니께 인사드려라. 그리고 뛰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떠나신다.
  “그러면 이제는 사도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렵니까?”
  “오래된 제자와 새 제자를 데려온다고 말하지요.”  일행은 사람의 무리가 북적거리는 코라진을 건너질러 간다. 한 떼의 사람이 예수를 붙잡고 말한다.  “가십니까? 안식일을 여기서 지내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가파르나움으로 갑니다.”
  “일주일 동안에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요?”  “내가 일주일 동안에 가장 훌륭한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까?”
  “언제? 누구에게요?”
  “모두에게요. 목수의 작업대에서요. 여러 날 동안, 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특히 과부와 고아와 같이 힘없는 사람인 때에는 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코라진의 주민들, 안녕히들 계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준 교훈을 안식일에 묵상하시오.” 그러시면서 예수께서는 어리둥절한 시민들을 뒤에 남겨두시고 다시 길을 가기 시작하신 다.
   그러나 뛰어서 예수를 쫓아온 어린이가 다시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수를 붙들고 말한다. “과부의 아들을 데리고 가십 니까? 왜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하느님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도 만나리라는 것을 이 아이에게 가르치려고 그럽니다. 그리고 또 늙은 이사악 대신에 여기에도 믿는 사람이 있게 하려고 데려갑니다.”
   “선생님의 제자들과 코라진 사람 셋이 있는데요.”
   “내 제자들과 같이 있지, 여기 있지는 않습니다. 이 아이는 여기 있을 것 입니다. 안녕.” 그리고 어린 아이를 당신과 마나엔 사이에 두시고 마나엔과 말씀을 하시면서 들판을 지나 빨리 가파르나움 쪽으로 가신다.
  그들이 가파르나움에 이르니 사도들은 벌써 와 있다. 옥상에 포도나무를 올린 정자의 그늘에 마태오를 둘러싸고 앉아서, 아직 낫지 않은 동료에게 그들이 한 일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오는 가벼운 샌들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가 옥상의 낮은 담장 위로 조금씩 나타나는 예수의 금발 머리를 본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시는 예수께로 달려오다가 예수 뒤에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는 화석처럼 굳어져서 멈추어 선다. 흰 아마포옷을 입어 찬란하게 보이는 마나엔도 올라온다. 그 옷은 값진 허리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더 돋보이며, 불꽃같이 새빨간 물을 들인 아마포 겉옷은 어떻게나 반짝이는지 비단으로 지은 것같이 보이는데, 어깨에만 겨우 고정되어 뒤로 일종의 긴 자락이 되어 있으며, 가는 왕관형 금장식으로 고정된 고운 아마포 두건을 썼는데, 그 왕관형 금장식이란 끌로 새겨진 금속판으로 그것이 그의 넓은 이마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그에게 일종의 에집트 왕과 같은 풍채를 띠게 한다. 그가 있기 때문에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오려는 질문들이 딱 막혔다. 그러나 눈들은 그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이제는 예수 곁에 앉은 사도들이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질문을 한다. “그런데 이애는 요?”
  “이애는 내가 가장 최근에 얻은 제자이다. 내 아버지 노릇을 하신 큰 요셉과 같이 목수인 어린 요셉이다. 그러므로 이애가 내게는 매우 소중하고, 나도 이애에게 매우 소중하다. 얘야, 그렇자? 이리 오너라, 네가 하도 많이 말        하는 것을 들은 내 친구들을 소개해 주마. 이 사람은 시몬 베드로다. 이 세상에서 어린이들에게는 제일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요한이다. 큰 어린이인데 놀면서도 네게 하느님 이야기를 해줄 거다. 또 이 사람은 요한의 형 야고보인데, 형처럼 착실하고 친절하다. 저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아우인데, 어린 양처럼 온순하기 때문에 네가 이내 친하게 될 거다. 그리고 여기는 열성당원 시몬인데, 아버지 없는 어린이들을 어떻게나 사랑하는지 만일 나하고 같이 있지 않았더라면 그런 어린이들을 찾아서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닐 거다. 그리고 시몬의 유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베싸이다의 필립보와 나타나엘이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너를 바라다보는지 알겠니? 이 사람들도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내 사촌들 야고보와 유다이다. 이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랑한다. 그러니까 너도 사랑할 거다. 이제는 발이 아픈 마태오를 보러 가자, 그 사람은 그래도 까불면서 놀다가 뽀족한 돌멩이로 발을 상하게 한 어린이들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지 않다. 마태오, 그렇지?”
  “아이고! 선생님, 안 품습니다. 이애는 과부의 아들입니까?”
  “그렇다. 매우 선량하지만 대단히 침울하게 지내고 있었다.”
  “오! 가엾어라! 어린 야고보를 불러 줄 데니 그애하고 놀아라.” 그러면서 마태오는 어린 아이를 자기 가까이로 끌어당겨서 쓰다듬어 준다.
  예수께서는 토마를 마지막으로, 소개를 마치신다. 토마는 실제적인 사람답게 포도덩굴에서 포도송이 하나를 따서 어린 아이에게 주는 것으로 소개를 보충한다.
  예수께서는 다시 앉으시면서 “이제는 너희들이 친구가 되었다”하고 결론을 내리신다. 그동안 어린 아이는 그들 곁에 붙잡아두고 있는 마태오에게 대답을 하면서 포도를 먹는다.
  “그런데 일주일 내내 혼자서 어디에 가 계셨습니까?“  “요나의 시몬아, 코라진에 가 있었다.”
  “그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나 거기서 뭘 하셨습니까? 이사악에게 가셨습니까?”
  “어른 이사악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요?”
  “마태오가 네게 그 말을 하지 않았느냐?”        
  “아니오. 그저 저희가 떠난 다음날부터 코라진에 가 계셨다는 말만 했습니다.”
  “마태오는 너보다 더 충실하다. 마태오는 입을 다물 줄, 안다. 그런데 너는 호기심을 억제할 줄을 모른다.”
  “제 호기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호기심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을 행동으로 설교하려고 코라진에 갔었다.”
  “사랑을 행동으로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여럿이 묻는다.
  “코라진에는 아이 다섯을 데리고 병든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과부가 한사람 있다. 남편은 작업대 곁에서 갑자기 죽어서 곤궁과 끝내지 못한 일거리를 뒤에 남겼다. 코라진 사람들은 이 불행한 가족에 대해서 조그마한 동정심도 찾아낼 줄을 몰랐다. 나는 일을 끝내주려고 갔다. 그리고…”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물어보는 사람에, 항의하는 사람에, 그것을 하시게 내버려 두었다고 마태오를 몹시 꾸짖는 사람에, 감탄과는 사람에, 비난하는 사람에, 가지각색이다. 하기는 비난하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소동이 일어난 것과 같이 가라앉게 내버려두신다. 그리고 대답으로는 그저 이렇게만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레 또 그 집에 간다. 끝마칠 때까지 이렇게 할 것이다. 또 적어도 너희만이라도 이해하기를 바라고 싶다. 코라진은 빽빽하고 배자(胚子)가 없는 딱딱한 씨와 같다. 적어도 너희는 배자가 있는 딱딱한 씨가 되어야 한다. 얘야, 시몬이 네게 준 호두를 이리 다오 그리고 너도 내 말을 잘 들어라.
  이 호두가 보이지 ! 그리고 내가 이 호두를 든 것은 딱딱한 씨가 당장은 없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를 이해하려면 잣이나 종려나무 열매를 생각하고, 가장 단단한 열매, 예를 들어 올리브의 씨를 생각해 보아라.그것들은 틈이 없고, 매우 단단하고, 빽빽한 껍질로 된 꼭 닫힌 곽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폭력으로나 열 수 있는 마술 상자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땅에 심거나 그저 땅에 놓기만 해도, 어떤 행인이 지나가다가 흙속으로 들어갈 만큼만 밟아서 들여보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껍질이 벌어져서 뿌리와 잎이 돋아난다. 어떻게 저절로 그렇게 되느냐? 우리는 그것을 깨뜨리려면 망치로 세게 쳐야 하는데, 반대로 단단한 씨는 저절로 벌어진다. 도대체 그 씨는 마술이 걸렸단 말이냐? 아니다. 그 씨 안에는 과육(果肉)이 있다. 오! 단단한 껍질에 비하면 약한 물건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훨씬 더 작은 물건인 배자에게 영양을 준다. 그리고 이 배자가 지렛대 노릇을 해서 껍질을 밀어 열고, 뿌리와 잎을 가진 식물을 주는 것이다. 단단한 씨를 땅에 묻어 보아라. 그리고 기다려라. 어떤 것은 돋아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는 것을 볼 것이다. 싹이 트지 않은 씨를 꺼내서 망치로 두드려 깨뜨려 보아라. 그것들은 속이 빈씨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단단한 씨를 벌어지게 하는 것은 땅의 습기나 따뜻한 기운이 아니라, 과육 혼, 즉 부풀어서 지렛대 노릇을 해서 껍질을 벌어지게 하는 배자이다.
  이것은 비유이다. 그러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적용하자.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무슨 일을 했느냐? 위선은 죄이고, 말은 행동이 힘을 주러 오지 않으면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도대체 우리는 아직 그렇게도 별로 서로 이해하지 못했단 말이냐? 내가 너희에게 항상 무슨 말을 했느냐?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은 영광의 비결이요 계명이다’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권장하는 내가 사랑이 없어야 한단 말이냐? 거짓말쟁이 선생이라는 본보기를 너희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 벗들아 우리의 육체는 단단한 씨다. 이 단단한 씨 안에 과육, 즉 영혼이 들어 있고, 이 영혼에는 내가 넣어준 배자가 있다. 이 배자는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지렛대의 역할을 해서 단단한 껍질을 열어 정신을 물질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결합시킨다. 말이나 돈을 가지고만 사랑을 베풀지는 않는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베푼다. 이것을 말장난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돈이 없었고, 또 이 경우에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일곱 식구가 굶주림과 극도의 불안의 일보직전에 가 있었다. 실망이 그 시꺼먼 발톱을 내밀어 움켜잡아 물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냉정하고 이기주의적으로 이 불행 앞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세상은 선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선생은 행동이라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 나는 그렇게 할 능력도 있었고 자유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이 사랑을 베풀지 않고 내버려두는 그 어린 것들을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사랑할 의무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한 것이다. 너희가 아직도 나를 비난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고 내가 너희를 비난해야 하겠느냐? -선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톱밥과 대팻밥 가운데까지 왔고, 또 내가 옥좌에 앉아 있는 것을 애착을 느꼈을 것보다도 나무 위에 몸을 굽히고 있는 나를 보고 내게 더 애착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는 제자 앞에서, 그리고 그의 무식과 그를 찍어 누르는 불행과 메시아가 실제로 어떤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정체를 알아본 어린 아이 앞에서 말이다.
  너희들 말이 없느냐?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 내가 목소리를 높인다고 기분 나빠 하지 말아라. 사랑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 하게 하고 단단한 껍질을 벌리는 배자를 너희 안에 넣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항상 무익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내가 한 것을 너희도 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웃 사랑을 위하여, 한 영혼을 하느님께 데려오기 위하여는 어떤 일도 너희가 너무 벅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은 어떤 것이건 절대로 창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열한 행동, 위선, 거짓말로 하는 밀고, 냉혹, 부정, 고리대금, 중상, 음란 따위는 창피스러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은 부끄러움없이 행해지는데, 자기를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하고, 또 내가 톱과 망치를 들고 일하는 것을 보고는 틀림없이 눈살을 찌푸렸을 사람들까지도 이런 일을 한다. 오! 오! 망치! 멸시할 만한 망치도, 만일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나무에 못을 박는데 쓰이면, 얼마나 고상한 물건이 되느냐! 고상하지 않은 망치도, 그것이 내 손에 들리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쓰이면 얼마나 그 고상하지 못한 외양이 사라지겠으며, 지금은 그 망치 때문에 파렴치한 짓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할 사람 모두가 그것을 얼마나 가지고 싶어 하겠느냐!
  오! 빛과 진리이어야 할 피조물인 사람아, 네가 얼마나 어둡고 거짓말쟁이이냐! 그러나 적어도 너희만은 선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깨달아라! 나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마는 바리사이파 사람이 많고, 또 내 둘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없지 않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희는…저희는 선생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일들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아직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믿음과 바람에 대해서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데에는 내가 사랑을 하도 많이 발산해서 너희에게 그것이 잔득 채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말이 필요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너희가 사랑을 이름으로만 알고 그 본질과 형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겠다. 너희가 달에 대해서 아는 것 모양으로 말이다.
  바람은 믿음과 사랑을 받쳐 주는 가벼운 멍에의 가로대, 같은 것이고, 인류의 십자가이고, 구원의 옥좌라고 내가 말해 준 말을 기억하느냐? 기억한다고? 그러나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 설명을 해달라고 청하지 않았느냐? 설명을 해주마. 바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진리의 무게에 눌려 그의 어리석은 교만을 낮추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멍에이고, 또 그 교오의 십자가이다. 그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바라는 사람은 자기를 ‘신’이라고 선언하고 싶어하는 그의 교만을 필연적으로 깎아내리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전부이시며,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며, 사람인 자기는 지나가는 먼지이고 하느님은 먼지에게 영원이라는 상을 주시어 더 높은 단계로 올려 주시는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은 생명에 이르기 위하여 자신을 그의 거룩한 십자가에 못박고, 믿음과 사랑의 불꽃으로 거기에 못박혀 있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 들어 올려지는 것은 믿음과 사랑 둘 사이에 있는 바람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기억해 두어라. 만일 사랑이 없으면, 옥좌에는 빛이 없고, 한쪽에 못이 빠져서 몸이 진흙 쪽으로 기울어진다. 하늘을 이제는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렇게 해서 바람의 유익한 결과의 효과를 없애버리고, 마침내 믿음 자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되게 하고 만다. 그것이 사람이 대신덕(對?德) 셋 중에 둘에서 떨어져 나오면 무기력과 죽음을 가져오는 냉기에 빠지기 때문이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일에 있어서도 하느님을 물리치지 말아라, 그런데 이교도적인 교만 때문에 이운을 돕기를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물리치는 것이다.
  “내 가르침은 죄지은 인류의 몸을 숙이게 하는 멍에이고, 단단한 껍질을  깨뜨려서 정신을 해방하는 망치이다. 멍에이고 망치이다. 그렇다. 그러나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간의 모든 주의와 인간의 다른 모든 것이 주는 권태는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망치로 맞은 사람은 그의 인간적인 자아(自我)가 부수어지는 데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해방감을 맛본다. 왜 너희들은 이 멍에를 벗어버리고 납이요 고통인 모든 것을 대신 메려고 하느냐? 너희 모두가 고통이 있고 피로가 있다. 인류 전체가 때로는 인간의 힘에 겨운 고통과 피로를 가졌다. 그의 몸을 굽게 하고 그의 입술에서 어린이다운 미소를 빼앗아 가고, 그의 정신에서는 태평한 마음을 빼앗아 가서 인간적으로 말하면 결코 어린이다운 것이 되지 못하게 하는 크고 무거운 짐을 벌써부터 그 작은 어깨에 메고 있는 이 어린이와 같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그 긴 일생의 모든 실망과 피로와 무거운 짐과 상처를 가지고 무덤을 내려다보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내 가르침과 내 믿음에는 이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덮어주는 것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가르침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지극히 행복할 것이니, 그것은 그를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을 모실 것이고, 마치 다정스러운 자매들을 든 것같이 그의 길을 쉽고 밝게 해주는 덕행들을 가지겠기 때문이다. 이 자매들은 그의 손을 붙잡고, 등불을 켜서 그의 길과 생활을 밝혀 주고, 그가 피로한 몸을 땅에 조용히 넘어지게 내버려두어서 천국에 가서 다시 깨어나게 될 때까지 하느님의 영원한 언약들을 노래해 준다.
  사람들아, 너희가 도움을 받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피로하고, 비탄에 잠기고, 싫증나고, 진저리나고, 비관하고자 하느냐? 어찌하여 내 사도들인 너희도 너희 사명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고 그것이 어렵고 엄격함을 느끼고자 하느냐?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를 가지고 있으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지극히 쉽게 느끼고 즐거운 열의만을 느낄 터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임무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엄혹하지만,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마치 길에서 자기 어린 것을 부축해 주면서 그치 확실치 않은 발이 조약돌에 걸리지 않고 가시덤불이나 뱀굴을 밟지 않고 도랑에 빠지지 않게 일일이 일러주어 그것들을 알아서 죽지 않게 하는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깨닫고 느끼기가 그렇게도 쉬운데 말이다.  지금 너희는 슬퍼하고 있다. 너희 비탄은 그 시작이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너희는 우선 내 겸손을 나 자신에 대한 죄인 것처럼 슬퍼하였다. 그 다음에는 너희가 나를 슬프게 했고, 그러므로 너희가 완전하게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슬퍼하였다. 그러나 이 슬픔에 교만이 들어있지 않은 사람은 너희 가운데 얼마 되지 않는다. 너희들이 교만으로 완전한 사람이기를 원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함으로 손상을 입은 교만 말이다. 꾸지람을 받아들이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는 목적에서 완전        하기를 원한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하면서 너희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동의하는 겸손을 가지기만 하여라. 그런 다음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들을 꾸중한다. 그러나 너희를 이해하고 동정한다.
  사도들인 너희들, 내게로 오너라. 그리고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 너희 모두 내게로 오너라. 영적인 고통은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또 열의를 가지고 악으로 돌아가는 일없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줄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고통으로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성화의 길은 길고 알 수 없으며, 때로는 입안에 독약 맛을 느끼며 어둠 속을 걸어가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하늘의 액체를 마시지 못하고, 또 이 영적인 눈먼 상태가 바로 완전의 요소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길손이 모르는 사이에 완성되기도 한다.
  빛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서 전진을 계속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물러서지도 않고 멈추어 서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내게 더없는 기쁨을 주시지 않는 한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극히 행복하고 세 번 행복하다.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지극히 어둡던 길이 하늘의 풍경으로 빠져나가면서 갑자기 대단히 환해질 것이다. 이 용맹한 사람의 경우에는 독약이 인간적인 것에 대한 맛을 모두 없애버린 다음 천국의 단맛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그 용맹한 사람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왜 내가 이렇게 단맛과 이렇게 큰 기쁨을 맛보는 것인가?’ 하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끝까지 꾸준하였으므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부터 천상에 있는 것으로 그들을 몹시 기쁘게 하시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견디어내기 위하여는, 피로하고 지친 너희들, 너희 사도들, 그리고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통 때문에 울고 외로운 가운데에서 기진맥진하는 모든 사도 너희와 함께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 원기를 회복시켜 주겠다. 내 멍에를 메어라. 내 멍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받쳐 주는 것이다. 내 가르침을 사랑하는 아내처럼 껴안아라. 그 가르침에 축복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르침이 하라고 시키는 것을 하는 너희 선생을 본받아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나에게서 배워라. 온유와 겸손은 세상과 하늘에서 나라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너희는 영혼의 안식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너희에게 한 말이다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진짜 승리자는 이 나라를 사랑으로 쟁취하는 사람이며, 사랑은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다. 나는 너희에게 힘에 부치는 일은 절대로 시키지 않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구 하늘 나라에서 너희를 데리고 있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기장(記章)을 차고 내 제복(制服)을 입고, 나와 비슷비슷한 사람, 내 가르침이 시키는 것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힘써라. 내 멍에는 부드럽고 그 무게는 가벼운데, 너희가 충실하면 누리게 될 영광은 무한히 큰 것이니 두려워 말아라. 그 영광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잠깐 너희를 떠나겠다. 아이를 데리고 호수 쪽으로 가겠다. 이애가 친구들을 만날 것이다…그런 다음 식사를 같이 하자. 요셉아, 오너라. 나를 사랑하는 어린이들을 네게 소개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