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난 일월, 그러니까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먹은 저녁식사를 네게 보여준 때부터 너와 너를 지도하는 사람은 막달라의 마리아와 내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더 알고 싶어 했다. 일곱 달 후에 너희들을 기쁘게 하고, 문둥병에 걸린 저 영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들, 그들의 악습의 무덤 속에서 숨이 막히는 저 불행한 사람들이 거기에서 나오도록 그들에게 말하는 목소리를 알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생활규칙을 주려고 과거의 이 책장들을 너희에게 드러내 보인다.
하느님은 인자하시다. 모든 사람에게 인자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척도(尺度)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보통죄와 사죄(死罪)를 구별하지 않으신다. 죄는 어떤 것이든 하느님을 슬프게 한다. 뉘우침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용서할 마음을 가지시게 한다. 은총에 반항하면 하느님께서는 가혹하리만큼 엄하게 되신다. 그것은 회개하라고 받은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뉘우치지 않은 그 상태에서 죽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가 용서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한 회개 가운데 반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열에 넷은 첫째 원인이 회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태만과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거짓 열성에 있다. 이 거짓 열성은 그들의 실제적인 이기주의와 교만을 덮어씌우는 보자기이다. 이 교만으로 인해서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진흙에서 꺼내기 위해 그 속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들의 피신처에 편안히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깨끗하고,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타락이 있는 곳, 사람들이 내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곳에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옛계율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들뿐 아니라 세리와 창녀들도 회개시키려고 가셨다는 말이 있는 복음서를 읽지 않았단 말이냐? 아니, 그 사람은 교만이 정신의 더러움이고, 사랑이 없는 것은 마음의 더러움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는단 말이냐? 네가 비방을 당할 것이라고? 내가 너보다 먼저, 너보다 더 비방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네 옷을 더러움과 접촉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나는 그 더러움을 다시 깨끗해지게 하고 그에게 ‘이 새로운 길을 걸어가라’ 하고 말하기 위해서 그 더러움을 내 손으로 만지지 않았더냐?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의 맨 처음 선배들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느 읍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 사람 집에 머물러라.’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일에서 잘못된 것을 보려는 마음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집들에 -나는 ‘집들’이라고 말했지 ‘한 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 들어가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뉘우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까지는 너희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해서 가르침을 보충했다. 그리고 누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들과 읍내에서 나을 때에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 꾸준히 사랑을 받으시는 인자하신 하느님이 말하자면 반들반들한 수정덩어리로 바꾸어 놓으시는 착한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가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털거나 불기만 해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날아가 버리는 먼지란 말이다.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 되어라, 그리고 영원히 인자하신 분을 중심으로 하고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라. 그러면 아무런 부패도 땅을 밟고 있는 신발 바닥 위로 올라와서 너희를 더럽힐 수가 없을 것이다. 영혼은 아주 높이 있기 때문이다! 착하고 하느님과 오직 하나를 이루는 사람의 영혼은 말이다. 영혼은 하늘에 있다. 원한을 품고 사도의 영에게 먼지와 진흙을 던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늘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먼지나 진흙이 육체는 해칠 수가 있고, 악이 선을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를 박해하거나 너희에게 모욕을 줌으로써 너희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대수로운 일이냐? 나는 모욕을 당하지 않았느냐? 상처를 입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 매들과 외설한 말들이 내 영에 감명을 주었느냐? 내 영을 흐리게 했느냐? 아니다. 마치 거울 위에 뱉은 침이나 어떤 열매의 즙이 많은 과육을 맞힌 조약돌과 같이 그것들은 스며들지 않고 미끄러졌거나 혹 스며들었더라도 표면에만 뚫고 들어갔지 씨에 들어있는 싹은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싹이 더 쉽게 트게 한다. 그것은 싹이 온전한 덩어리에서 나오기보다는 벙싯 벌어진 덩어리에서 나오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밀알은 죽어서 싹이 나고 사도도 죽어서 풍부한 열매를 맺는다. 때로는 육체적으로 죽어서, 또 인간적인 자아(自我)가 그로 인해서 부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은유적(隱喩的)인 뜻으로는 거의 날마다 죽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것에 대한 영의 승리이다.
그 여자는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모르는 일이 없는 여자의 변덕으로 내게 왔었다. 그 여자를 노예처럼 차지하기 위하여 관능적 쾌락에 대한 찬가로 그를 현혹하는 거짓된 아첨으로 멍멍하게 된 그 여자의 귀에 진리의 맑고 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인정하지 않을까 봐 겁내지 않는, 하느님을 쳐다보면서 말하는 진리 말이다. 그리고 명절날의 종악(鍾樂)과 같이 모든 목소리가 말에 섞이었다. 하늘과 확 트인 파란 하늘에 울려서 계곡과 야산의 평화가 호수에 퍼지면서 주님의 영광과 그분의 명절 기분을 상기시키기에 익숙해진 목소리들이다.
평화로운 시절에 주님께 바쳐진 날을 그렇게도 즐겁게 만들던 축제의 종악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큰 종이 그 추로 하느님의 율법의 이름으로 첫번째 음을 냈었다. 큰 종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심판자이시고 임금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한다’ 하고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제일 작은 종들이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은방울 소리를 가장 잘 내는 종이 천사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희들에게 용서가 원한보다 더 유익하고 준엄보다 동정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용서와 동정으로 이끈다. 용서하는 분께로 오고. 동정하는 분께 대해 믿 음을 가져라.’ 나도 죄녀가 짓밟은 율법을 상기시키고 나서 용서의 바람을 노래하게 하였다. 푸르고 파란 비단 띠와 같이 나는 그 용서에 대한 바람을 검은 빛깔들 가운데에서 흔들어 거기에 위로의 말을 퍼뜨렸다.
용서! 그것은 죄인의 화상(火傷)위에 내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다. 이슬은 화살같이 찌르고 상처를 입히고 튀어서 스며들지 않고 가며 꽃들을 죽이는 우박 같지 않다. 이슬은 아주 가만히 내려서 가장 약한 꽃도 그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꽃잎에 이슬이 내려와 앉은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 시원한 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한다. 이슬은 뿌리 근처와 타는 흙덩어리 위에 내려 앉아서 스며들어 간다.… 이슬은 축축한 눈물, 별들의 눈물, 목마른 어린 아이들 위에 떨어지는 엄마의 사랑 가득한 눈물과 같은 것이어서 내려와서는 달고 영양가 있는 젖과 함께 어린 아이들의 기운을 회복시켜 준다. 오! 사람이 쉬거나 죄를 짓는 때에도 작용하는 자면의 힘의 신비 !
용서는 이 이슬과 같다. 용서는 깨끗함을 가져올 뿐 아니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즙도 가져오는데, 그것을 자면의 힘에서 얻어오지 않고 하느님이 계신 고향에서 얻어 온다. 그리고 용서의 약속 다음에는 지혜가 말을 하고, 합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해 주고, 환기시키고 꾸짖는다. 냉혹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는 어머니로써의 걱정으로 그러는 것이다.
차돌과 같은 너희 마음이 너희를 굽어보는 사랑에 대하여 더 뚫고 들어갈 수 없고 더 날카롭게 된 적이 얼마나 많았느냐! … 사랑이 너희들에게 말하는데 도망친 적이 몇 번이나 되었느냐! 사랑을 비웃은 적이 몇 번이나 되었느냐! 얼마나 여러 번 사랑을 미워했느냐! … 만일 너희들이 사랑에 대해서하는 것처럼 사랑도 너희에게 대해서 행동한다면 너희 영혼들은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너희들이 보다시피 사랑은 너희들을 찾아 지칠 줄을 모르고 걸어간다! 너희들이 몹시 더러운 소굴 속에 틀어박혀 있어도 사랑은 너희들 있는 데까지 찾아간다.
왜 내가 그 집에 가고자 했느냐? 왜 그 집에서 내가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너희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세상 사림들의 편견과 비판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고상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그런 것들을 무릅쓰라는 것이다.
왜 내가 유다에게 이 말을 했느냐? 사도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기질에 매우 연연하고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런 지경에 있고, 이 세상의 성인들까지도 정도는 덜하지만 그런 상태에 있다. 완전한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이 조금은 남아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아직 완전하지도 못했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인간적인 것이 스며 있었다. 나는 그들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성의 무게 때문에 그들은 다시 아래로 내려오곤 했다. 그들을 점점 더 높이 올라가게 하기 위하여는 그들이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들을 올라가는 길에 놓아서, 그들이 기기에서 멎어 깊이 생각하고 휴식을 취하고 나서, 그 전번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게 해야 했다. 그들이 내려오는 것을 막는 것들은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어야 했다. 이 때문에 마음 속을 꿰뚫어 보았고, 이 때문에 자연의 힘에 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이 때문에 기적들을 행했고, 이 때문에 현성용(顯聖容)이 있었고, 부활과 동시에 여러 군데에 있는 현상이 있었다.
나는 최후의 만찬실에 있으면서 동시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도 있었다. 그리고 사도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대조된 이 두 현존의 시간이 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어 그들을 자신들의 이익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의 안에서 벌써 죽음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던 사도들이 일원인 유다보다도 열 한 사도를 위해서 말했다. 나는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들의 눈에 반드시 띄게 해야 했다. 교만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교육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이요 선생님이었다. 이 단어들이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으로 나를 드러냈고, 완전을 가르셨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으로도 나쁜 회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는데, 깨끗한 마음을 보셔야 그리로 내려오셔서 거처를 정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 집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위엄의 위대함에 대한 존경으로 깨끗한 환경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그러나 더 마음에 스며드는 말로 죄녀의 영에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였다. ‘불쌍한 여자야, 알겠느냐? 너는 하도 더럽혀져서 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더럽혀졌고, 너무 더럽혀져서 하느님께서 여기서는 일하실 수 없을 정도이다. 너는 이 사람보다도 더 더럽혀졌다. 그것은 네가 하와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아담들에게 열매를 주면서 그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의무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종인 네가 말이다’ 하고.
그러나 고민에 빠진 어머니가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을 왜 내가 원치 않느냐? 어떤 이유도 모욕과 증오를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실히 요구되는 첫째가는 필요성과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을 모시는 데 요구되는 첫째 조건은 원한을 품지 않고 용서할 줄을 아는 것이다. 둘째 필요성은 우리와 우리의 것에도 유죄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이다. 즉 남의 잘못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셋째 필요성은 은총을 받은 다음에 영원하신분에 대한 정의로 꾸준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충실할 줄을 아는 것이다. 은총을 얻고 나서 개보다도 못한 사람이 되어, 개는 은인을 기억하는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마디 말로 하지 않겠다. 그 여자가 조상(彫像)인 것처럼 그를 잠간 바라다보고는 눈을 딴 데로 돌렸다. 나는 구원하기를 원하던 ‘산 사람들’에게로 돌아왔다. 대리석상과 같이, 아니 그보다도 더 차가운 재료와 같은 마리아를 나는 표면상의 무관심으로 감쌌다. 그러나 나는 내가 구속하기를 원하던 그의 가엾은 영혼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가지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마지막 말인 ‘나는 모욕을 주지 않는다. 너도 모욕을 주지 말고,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아라’ 한 말은 사람들이 만드는 꽃줄과 같이, 내가 산에서 말한 첫번째 말인 ‘용서는 원한보다 더 유익하고, 동정은 냉혹보다 더 유익하다’고 한 말과 합해졌다. 그리고 이 말들이 가엾고 불행한 여자를 부드럽고 시원하고 향기로운 친절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서, 하느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사나운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과 얼마나 다르고, 죄의 악취와 비교해서 하늘의 향기가 얼마나 기분 좋으며, 악마같이 차지되는 것보다 거룩하게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아늑한지를 깨닫게 하였다.
주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얼마나 조절하시는지 보아라. 주님은 전격적인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어떤 마음이 절대적이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기다릴 줄을 아신다. 만족할 줄을 아신다. 그리고 길을 잃었던 그 여자가 길을 다시 찾고, 미쳤던 여자가 이성을 다시 찾기를 기다리시는 동안, 어쩔 줄을 모르는 그 여자의 어머니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신다.
나는 그 어머니에게 ‘용서할 수 있어요?’하고 묻기만 하였다. 만일 내가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판단했더라면 그 어머니가 기적을 받을 만한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을 물어보야야 했겠느냐! 그러나 나는 하느님답게 너희들의 힘을 헤아려 본다. 엉망이 된 가엾은 그 어머니로서는 용서하게 되는 것도 벌써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당장은 그에게 그것밖에 요구하지 않았다. 그후 그의 아들을 돌려 주고 나서 ‘거룩하게 사시오, 그리고 당신 집을 거룩하게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은 잘못한 딸을 용서해 주라는 것밖에 요구하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어두움 속에 있던 사람에게 모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 어머니는 그 후 완전한 빛으로 왔고, 그 어머니와 더불어 아내와 아이들도 완전한 빛으로 왔다. 그 당장은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그의 눈에 희미한 빛, 즉 하느님이 주신 날의 새벽빛인 용서가 와야 했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나는 유다는 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 맞아들여진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내 제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만이 빛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실패는 사도직의 승리를 늘 따라다닌다. 사도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 실패로 인해서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사도는 모든 것을 얻기를 열망해서는 안 된다. 사도 앞에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반대 세력이 있는데, 그것들은 문어의 발과 같이 사도가 그들에게서 빼앗았던 먹이를 다시 나꿔챈다. 그러나 사도의 공로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곳에서는 내가 회개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그곳에는 가지 않는다 하고 말하는 사도는 불행하다. 이런 사도는 가치 없는 사도이다.
천 명 중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한 명밖에 없더라도 가야 한다. 사도의 하루는 이 한 사람 때문에 천 사람에게 유익했을 것만큼이나 유익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겠기 때문이니, 하느님께서 상 주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회개시켜야 할 사람이 너무나 단단히 사탄에게 독점되어있고, 요구되는 노력에 비해 사도의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가 회개를 시킬 수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보다 더 낫단 말이냐?
사도가 절대적으로 실천해야하는 또 한 가지는 사랑이다. 뚜렷한 사랑이다. 충실한 마음 속에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랑만이 아니다. 이런 사랑은 착한 형제들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나 사도는 하느님의 일꾼이니,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도 해야 한다. 사도는 사랑을 가지고, 큰 사랑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준엄은 사도의 일을 마비시키고 빛을 향해 가는 영혼들의 움직임을 정체시킨다. 준엄이 아니라, 사랑을 가져야 한다.
사랑은 나쁜 열정의 불길이 공격할 수 없는 석면옷이다. 사랑은 너희에게 방부제를 가득 채워서 인간적이고 악마적인 부패가 너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영혼을 얻기 위하여는 그 영혼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영혼을 얻기 위하여는 그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죄 되는 그의 보잘 것 없는 모든 사랑을 물리치고 선을 사랑하도록 말이다.
나는 마리아의 영혼을 원하였다. 작은요한(마리아 발또르따의 애칭임) 아, 네게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선생의 강단에서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죄의 길로 그를 찾아 내려갔다. 나는 마리아를 내 사랑으로 뒤쫓고 괴롭혔다. 다정스러운 괴롭힘이었다! 순결 자체인 내가 부정 자체인 마리아가 있는 곳에 들어갔다.
나는 나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빈축(嚬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자비 자체이기 때문에 내 안에 빈축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자비는 잘못을 보고 슬퍼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지는 않는다. 분개하고, 그 분개라는 병풍 뒤에 숨어서 영혼을 돌보지 않는 목자는 불행하다! 영혼들이 육체들보다 더 쉽게 일어나고, ‘자매야, 네 이익을 위해 일어나라’고 하는 연민과 사랑의 말이 자주 기적을 행한다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나는 남의 빈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눈에는 내 행동이 정당한 것으로 보였고, 착한 사람의 눈에는 내 행동이 이해되었다.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악의가 끓어오르는 사람의 악의를 품은 눈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런 눈은 하느님에게서도 잘못을 찾아낸다. 그런 눈은 자기 자신밖에는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눈은 상관하지 않았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은 이런 것들이다.
말문이 막힐 염려없이 말할 수 있기 위하여 우선 매우 청렴결백해야 한다. 한 군중에게 말하되, 신비로운 배 주위에 모여 있는 군중에게 하는 사도로서의 우리 말이 퍼져 나가는 파동(波動)으로 점점 더 멀리 가서, 진흙 속에 빠져들어서 진리를 알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누워 있는 진흙투성이의 물가에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
이것이 단단한 땅을 파서 씨뿌리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맨 처음에 할 일이다. 이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나 그 일을 당하는 사람에게나 가장 어려운 일이다. 말은 날카로운 보습날과 같이 파헤치기 위하여 상처를 입혀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하지만, 착한 사도의 마음은 열기 위하여 상처를 입혀야 하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그러나 이 고통도 역시 많은 성과를 올리는 것이다. 사도의 피와 눈물로 불모의 땅이 기름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특성은 그의 사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도망을 하는 곳에서도 일을 하는 것이다. 가라지와 개밀속(屬)과 가시나무를 뽑아내서 경작된 땅을 드러나게 해서 그 위에 하느님의 능력과 인자가 태양처럼 비치게 하려고 애쓰느라고 몹시 피로해야 하고, 동시에 재판관과 의사의 자격으로 엄격하면서도 동정심을 많이 가져서 멈춰서 기다리고 영혼들에게 위기를 극복하고 깊이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셋째 점은 이렇다. 자기의 잘못을 슬퍼하고 곰곰히 생각하면서 조용한 가운데에서 뉘우친 영혼이 쫓겨나지 않을지 걱정하면서 사도에게로 머뭇거리며 감히 오기만 하면, 사도는 바다보다도 더 넓고, 엄마의 마음보다도 더 자상하고, 신랑의 마음보다도 더 사랑하는 마음, 물결같이 풍부한 애정을 쏟으려고 활짝 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이신 하느님을 너희 안에 모시고 있으면, 영혼들에게 말해야 하는 사랑의 말을 쉽게 찾아낼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들 안에서 너희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것이고, 벌의 집에서 흘러 나오는 꿀과 같이, 작은 병에서 흘러 나오는 향유와 같이 사랑이 바싹 말라서 입맛을 잃은 입술에 가고 상처입은 정신에 가서 위로가 되고 약이 될 것이다. 죄인들이 영혼들의 교사인 너희들을 사랑하게 만들어라. 영혼들이 하늘의 사랑을 맛보게 하고, 그로 인해서 다시는 다른 음식을 찾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여라. 영혼들이 너희들의 다정스러움에서 너무도 많은 위안을 느껴서 그들의 모든 상처에 그 위안을 찾게 하여라.
너희 사랑이 죄인들에게서 일체의 두려움을 몰아내야 한다. 오늘 네가 읽은 사도의 편지에 있는 것과 같이 ‘두려움은 징벌을 가정하며, 두려워하는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게 하는 사람도 완전하지 못하다. 너희는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하고 말하지 말고, ‘가라’ 하고 말하지도 말고, ‘너는 맛있는 사랑을 맛볼 수 없다’고도 말하지 말아라. 오히려 ‘사랑해라, 그러면 너를 용서해 주마’ 하고 말하고, ‘오너라, 예수님은 팔을 벌리고 계시다’ 하고 말하고, ‘이 천사의 빵과 이 말씀을 맛보고, 지옥의 송진과 사탄의 업신여김을 잊어라’하고 내 이름으로 말하라. 너희들의 약한 남들을 위하여 짐바리 짐승처럼 되어라. 사도는 자기의 짐과 남의 짐을 져야 하고, 동시에 자기의 십자가와 남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리고 상처 입은 양들을 메고 내게로 올 때에는 그 길 잃었던 양들을 안심시키면서 이렇게 말하여라.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잊혀진다’고. 또 이렇게도 말하여라.‘구세주를 무서워하지 말아라. 구세주께서는 일부러 너를 위해 하늘에서 오셨다. 나는 고백에 의한 사죄(死罪)의 통로가 되는 외에, 너를 기다리시는 구세주로 너를 인도하고, 거룩한 목장으로 너를 데려가는데 쓰이는 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거룩한 목장은 여기 이 세상에서 시작되지만, 그 후 영양을 주고 즐겁게 하는 영원히 아름다운 하늘에서 계속된다’ 하고.
이것이 해설이다. 이것은 착한 목자에게 충실한 양들인 너희들에게는 별로관계가 없다. 그러나 작은 신부(新婦)인 네게는 신뢰가 증가할 것이고, 신부(神父)에게는 재판관으로써의 그의 빛에 빛을 더해 주는 것이 될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는 선으로 몰고 가는 자극제가 아니라, 스며들어가고 영양을 주어서 시들은 꽃들을 다시 세워 주는 내가 말한 이슬이 될 것이다.
머리를 들어라 하늘은 저 위에 있다. 마리아야 편안히 가거라. 주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