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 정신적인 고뇌에서 오는 고통을 너는 목요일 저녁에 주시하였다. 너는 너의 예수께서 그의 피를 흘러나가게 하는 상처를 통하여 목숨이 빠져나가는 것을 깨닫는 치명상 입은 사람이나 또는 힘에 부치는 정신적인 심한 충격에 억눌린 사람처럼 쇠약해지는 것을 보았다. 너는 이 충격이 점점 커져서, 나를 이기고 나를 찍어누르는 무게에 저항하는 노력으로 생긴 혈액순환의 불균형으로 유발된 피 흐름에서 그 극도에 달한 것을 보았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언제나 그렇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똑같이 전적으로 완전한 이 두 가지 성질이 분명히 나타나기를 원한다.
  나의 천주성에 대하여는 오직 하느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어조를 가진 내 말이 입증한다. 나의 인성에 대하여는 내가 네게 보여 주고 내 참다운 인간의 육체로 겪었고, 내가 참 하느님에 관한 내 가르침으로 네 정신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 인간성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필요와 격정과 고통들이 입증한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극히 거룩한 내 천주성도 지극히 완전한 내 인성도 ‘너희들의’ 불완전한 인간성의 붕괴 작용으로 그 모습이 줄어들고 변형되었다. 너희들은 인정하기를 원치 않던가 또는 악습과 무신론과 인본주의(人本主義)와 합리주의의 부패로 축소된 너희 정신을 가지고는 인정할 수 없게 된 그 많은 점에서 내 천주성을 부인하면서 내 하느님 모습을 작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인성을 비현실적,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 비극적인 시간에 보편적인 불행의 상징으로 보고, 하느님과 인간의 내 두 가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너희들이 알고, 너희들의 정신을 가렸던 그 많은 혼돈상태 뒤에 그 모습을 알아보고, 그 모습을 사랑하고 그 모습 쪽으로 돌아와서 그를 통하여 구원이 되도록 하느님과 인간의 내 두 가지 모습을 너희들의 정신에 새롭게 하기 위하여 오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 구세주의 모습이니, 이것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요사이 나는 내 육체적 고통을 네게 알려 주었다. 그것들은 내 인성을 몹시 괴롭혔다. 나는 적도 지방 밀림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칡넝쿨이 그렇듯이 내 어머니의 고통과 매이고 얽히고 섞인 내 정신적 고통들도 네게 알게 하였다. 열대 밀림의 칡들은 오직 한 줄기만을 자르기 위하여 서로 분리시킬 수가 없고, 길을 내기 위하여는 도끼로 쳐서 그 줄기를 전부 잘라야 한다. 또는 육체의 정맥과 같이 얽혔으니, 그 안에는 오직 하나의 액체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에서만 피를 뺄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다시 말하자면, 만일 어머니가 죽으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아기에게 죽음이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아기로 하여금 하나의 산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하여는 어머니의 생명과 열과 양분과 피가 어머니 몸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룬 리듬으로 내막(內膜)을 통하여 태어나게 되어 있는 아기에게까지 들어가기 때문이다.
  오! 순결하신 어머니, 한 여인이 남자의 씨를 배고 있는 기간이 아홉달 동안이지만 그분은 일생 동안 나를 지니고 계셨다. 우리의 두 마음은 정신적인 끈으로 이어져 있어서 언제나 같이 뛰었고, 어머니에게서 떨어지는 눈물은 내 마음을 그 짠물로 적시지 않는 것이 없었고, 내 마음속의 신음 치고 어머니의 마음속에 반향을 일으켜 그분의 고통을 살아나게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희는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인하여 죽게 되어 있는 아이의 어머니와, 준엄한 인간의 법에 의하여 사형이 선고된 어떤 사람의 어머니를 보는 것이 괴롭다. 그러나 나를 잉태하신 순간부터 내가 선고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떠신 내 어머니, 갓난 아기인 내 부드럽고 불그레한 피부에 첫 입맞춤을 하실 때 당신 아들의 장래의 상처를 느끼신 그 어머니, 어른이 되어 희생의 순간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하여는 열 번, 백 번, 천 번 당신 목숨을 바치셨을 그 어머니, 주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인류에 대한 호의로 그 무서운 시간을 알고 있었고 갈망해야 한 그 어머니를 생각하여라. 아니, 내 어머니의 고뇌보다 더 오래 계속된 고뇌가 없었고, 그보다 더 큰 고통으로 끝난 고뇌도 없었다.
  그리고 내 고통보다 더 크고 더 완전한 고통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였다. 아버지는 영원으로부터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하실 수 있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셨다. 아버지는 내게 만족을 느끼시고 내게서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의 기쁨을 얻으셨다. 나도 아버지를 오직 하느님만이 사랑하실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였고 아버지와의 결합에서 하느님으로서의 나의 기쁨을 얻었었다. 영원으로부터 아버지를 아들과 맺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관계는 내 말로도 너희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내 말이 완전하더라도 너희 지능이 완전하지 못하여, 너희가 하늘에서 하느님과 같이 있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자꾸 불어나서 어떤 둑에 압력을 가하는 물처럼 내게 대한 아버지의 준엄이 시시각각으로 커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기를 원치 않는 짐승 같은 사람들에 대한 증언으로 아버지는 내 공생활 중에 세 번 하늘을 열으셨다. 요르단강과 다볼산과 수난 전날 예루살렘에서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지, 내게 위안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을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속죄자였다.
  마리아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 종 가운데 하나를 알게 하시어, 그를 통하여 그 사람들을 꾸짖고 당신께 이끌어오게 하시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그 종의 고통을 통하여도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 종 자신이 하느님의 준엄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의 형제들의 위안과 구원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값을 치르는 것이다. 그렇지? 속죄하는 희생들은 하느님의 준엄을 경험한다. 그런 다음 영광이 온다. 그러나 정의가 가라앉혀진 다음에야 오는 것이다. 그의 희생자들에게 입맞춤을 하는 내 사랑의 경우와 같지는 않다. 나는 예수이고, 나는 구세주이다. 나는 하느님께 엄한 눈초리를 받고 하느님께 버림을 받는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개인적인 경험으로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결코 엄하지 않고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나는 똑같이 태워버린다. 그러나 사랑의 불로 태워버린다.
  속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점점 더 아버지에게서 갈라지는 내 인성은 하느님의 천주성으로 덜 지탱된다고 느꼈다. 그 때문에 나는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었다.
  하느님과의 결별은 두려움을 가져오고, 생명에 대한 집념을 가져오고 무기력과 피로와 권태를 가져온다. 그 결별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그 결과가 더 심하다. 그것이 전적일 때에는 실망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결별하여 마땅한 일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명령의 결과로 그것을 겪는 사람일수록 그것 때문에 고통을 더 당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육체가 어떤 지체의 단절을 느끼듯이 살아 있는 정신이 하느님과의 결별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괴롭고 답답한 충격인데, 나는 그것을 겪었다. 나는 아버지께 무슨 일에 대하여도 너희들을 변호할 수 있기 위하여 모든 것을 경험해야 했다. 너희들의 절망까지도.
  오! ‘나는 외톨이다. 모두가 나를 배반하고 버렸다. 아버지까지도, 하느님마저도 이제는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나는 경험하였다.
  그래서 절망에 짓눌리는 가엾은 마음에 불가사의한 은총의 기적을 행하는 것도, 내 특은 받은 사람들에게 경험에 그렇게도 쓰디쓴 내 잔을 마시라고 요구하여, 절망의 바다에서 난파하는 사람들이 내가 그들에게 구원의 닻처럼 제공하는 십자가를 거절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 매달려서 내가 그들을 평화만이 있는 해안으로 데려갈 수 있게 하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요일 저녁에 내가 아버지가 필요하였는지는 나만이 안다! 나는 한 사람의 가장 큰 두 가지 고통, 즉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작별과 불성실한 친구가 가까이 있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노력 때문에 벌써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정신이었다. 그 고통들은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두 개의 상처였다. 하나는 그 눈물로, 또 하나는 그 증오로.
  나는 내 빵을 내 카인과 더불어 나누어 먹어야 하였다. 나는 그들의 폭력을 무서워할 수 있던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죄를 막기 위하여 그에게 친구로서 말해야만 하였다. 하기는 나의 거룩한 죽음도 유다의 자살도 이미 생명의 큰 책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그것은 무익한 죄였을 것이다. 하느님께 빨아들여지지 않는 다른 죽음들은 무익하였다. 내 피 이외에 다른 어떤 피도 흐르지 말아야 했고, 또한 흐르지도 않았다. 밧줄로 그 목을 졸라서 사탄에게 팔린 그의 더럽혀진 피를 배반자의 육체의 더러운 껍데기 속에 가두었다. 그 피는 땅에 떨어져서 죄 없는 이의 지극히 깨끗한 피와 섞여서는 안 되는 피였다.
  나로 하여금 내 자아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에는 이 두 개의 상처면 넉넉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속죄자, 희생물, 어린양이었다. 어린 양은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벌겋게 단 쇠로 낙인이 찍히고, 매를 맞고, 껍질이 벗겨지고, 푸줏간에서 팔리는 일을 겪어야 한다. 끝에 가서야 비로소 목을 찌르고 피를 내고 죽이는 칼날을 알게 된다. 어린 양은 그전에 모든 것을, 즉 그가 자란 목장을, 또 그가 먹고 자라고 몸을 녹였던 엄마의 젖가슴을, 또 같이 살아 온 동무들을 버려야 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인 나는 모든 것을 겪었다. 모든 것을!
  그러니까 아버지는 하늘로 물러가시는데 사탄은 왔다. 그는 벌써 내가 전도를 시작할 때에 와서 내게 그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오는 것이었다. 그의 시간이 된 것이다. 마귀의 소란의 시간이.
  마귀의 많은 떼가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을 끝마무리 짓고 이튿날 그리스도의 살해를 요구하도록 결심시키려고 그날 밤 이 땅에 왔었다. 각 최고법원 판사가 그의 마귀를 가지고 있었고, 헤로데도 빌라도도 그의 마귀를 가지고 있었으며, 내 피가 그의 위에 떨어지라고 불렀을 각 유다인도 그의 마귀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 곁에도 그들의 유혹자가 있어 내가 번민하는 동안 그들을 선잠이 들게 하였고 그들이 비겁해지도록 준비시키고 있었다. 순결한 사람의 힘을 주목하여라. 순결한 사람 요한이 모든 사도 중에서 제일 먼저 독수(毒手)에서 빠져 나와 즉시 그의 예수께로 돌아왔고, 표시하지 않은 예수의 소원을 알아차려 마리아를 내게 모셔왔다.
  그러나 유다는 사탄이 있었고, 나도 사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나는 내 곁에. 우리는 비극의 두 주요 인물이었고, 사탄이 직접 우리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유다를 다시는 뒤로 돌아올 수 없을 지경에까지 끌어가고 나서 사탄은 내게로 향하였다.
  완전한 계략으로 그는 능가할 수 없을 만큼 실감나게 내 육체가 당할 고통을 내게 보였다. 광야에서도 그는 육체로부터 시작하였었다. 나는 기도함으로써 그를 이겼었다. 내 정신이 육체의 공포를 억눌렀다.
  그러자 그는 내 죽음의 무익함을, 배은망덕하는 사람들을 상관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의 유익함을 내게 보였다. 부자로 행복하게 사랑 받으며 살라고, 어머니를 위하여,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시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살라고 오랜 전도로 그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살라고 그 사람들은 내가 죽고 나면 나를 잊어버릴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3년 동안 스승이 되지 않고 오랜 세월을 두고 스승 노릇을 하면 그들의 마음에 내 가르침을 스며들게 하고야 말 것이라고 그의 사자(使者)들이 나를 도와 사람들의 마음을 끌 것이라고 말이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나를 도우려고 개입하지 않는 것을 내가 알고 있지 않았더냐?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내가 그분께 데려가는 믿는 사람들의 추수를 보시고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광야에서도 그는 경솔한 행동으로 하느님을 시험하고 나를 부추겼었다. 나는 기도로 그를 이겼다. 내 정신이 정신적인 유혹을 억눌렀다.
  사탄은 나에게 하느님의 버리심을 보였다. 그분, 아버지께서 이제는 나를 사랑하고 계시지 않았다. 나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하느님께 소름끼치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그곳에 계시지 않고, 나를 홀로 내버려두셨다. 아버지는 나를 사나운 군중의 조롱에 내맡기시고 당신의 하느님다운 격려조차 내게 주시지 않았다. 홀로, 홀로, 홀로였다. 그 시간에는 그리스도 곁에 사탄밖에 없었다. 하느님과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거나 내게 무관심하였다. 나는 내 기도로 사탄의 말들을 들리지 않게 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내 기도가 이제는 하느님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내 기도는 돌로 때려 죽이는 형벌처럼 내게로 다시 떨어져서 그 돌무더기로 나를 짓눌렀다. 내게는 항상 아버지께 드리는 애정의 표시였고, 올라가는 목소리여서 아버지의 애정의 표시와 자애로운 말씀이 응답을 하던 기도가 이제는 죽고 둔해져서 닫힌 하늘을 향하여 쓸데없이 던지는 돌과 같았다.
  그때에 나는 잔으로부터 쓴맛을 느꼈다. 절망의 맛이었다. 이것이 마귀가 원하는 것이었다. 나를 절망으로 끌고 가서 그의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절망을 이겼고, 그를 이기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마귀를 이겼다. 나 혼자만의 인간적인 힘으로. 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더 이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지구 자체도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들기가 쉽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는 날에는 꽃 한 송이의 무게조차도 고역이다.
  나는 하느님을 섬기고 너희들에게 생명을 줌으로써 너희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절망과 절망을 만들어 낸 사탄을 이겼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의 죽음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노력으로 인한 충격으로 심장이 터지고 피를 흘리며, 승리한 후에 쓰러지는 씨름꾼과 같은 전적이고 의식적인 죽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피땀을 흘렸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기 위하여 피땀을 흘렸다.
  그 때문에 내 고통의 천사가 내 희생으로 구원될 모든 사람의 희망을 내 죽음에 대한 약처럼 내게 보여 주었다. 너희의 이름들! 그 이름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내 정맥에 힘과 기능을 다시 주기 위하여 주입된 약 한 방울이었고, 이름 하나 하나가 돌아오는 생명, 다시 오는 빛, 돌아오는 힘이었다. 인정 없는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부르짖지 않고, 하느님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께 바치는 희생에 대하여 너무 엄하시고 불공평하시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하여 너희 이름들을 자꾸 불렀고, 너희들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너희들에게 축복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너희들을 마음속에 지녔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세상에 태어나는 시간이 왔을 때, 나는 하늘에서 몸을 숙여 너희들이 오는 것을 동반하였고, 세상에 새로운 사랑의 꽃 한 송이가 태어났고 그 꽃이 나를 위하여 살 것 이라는 생각을 하고 몹시 기뻐하였다.
  오! 나의 축복받은 자들!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위안! 내 어머니, 사랑하는 제자, 독실한 여인들이 내 죽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너희들도 거기에 있었다. 죽어가는 내 눈은 내 어머니의 가슴이 찢어지듯이 슬퍼하시는 얼굴과 동시에 너희들의 다정한 얼굴도 보았고, 너희들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기쁘게 눈을 감았다. 하느님의 희생에 값어치가 있는 너희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