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아무도 나보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지 않고 슬픔으로 인해서 너희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도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위로자가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분을 보내겠다. 그분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에게 부어 주실 지혜와 말씀을 통하여 또 일과 영웅적 행위로 그가 하느님을 죽인 죄와 내 성덕의 정당함을 세상에 확인시키실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하느님의 원수인 하느님께 버림받은 자들과 믿는 사람도 뚜렷이 갈라질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에 따라 더 거룩하거나 덜 거룩하거나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왕과 그의 종들에 대한 심판은 이미 행하여졌을 것이다. 너희들이 알아듣지 못하겠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더 말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위로자이신 그분이 너희에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하느님의 정신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말씀하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도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서 오는 것, 즉 아직 아버지께 속해 있는 것에서 오는 것을 가지고 오셔서 너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서로 또 너희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아라. 너희 스승의 마지막 비유이다.
  아기를 가진 여인이 해산 때가 되면 걱정이 태산 같다. 고통을 겪고 신음을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일체의 걱정이 없어지고,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너희 경우도 이와 같다. 너희들은 울고 세상은 너희들을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너희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그 기쁨은 세상이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너희가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도 가득한 기쁨이어서 동시에 정신과 마음과 육체를 위하여 청할 필요가 일체 희미하게 할 지경이다. 너희는 다른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잊어버리고 나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부터 너희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청할 수 있을 것이고, 너희 기쁨이 점점 더 커지도록 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구하여라,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제 아버지에 대하여 명백히 너희에게 말할 수 있을 때가 온다. 그렇게 되는 것은 너희가 시련 중에 충실하였고 모든 것을 극복하였기 때문이다. 너희의 사랑은 시련 중에 너희에게 힘을 줄 것이기 때문에 완전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부족한 것은 나의 무한한 보고(寶庫)에서 꺼내어 보태 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보십시오. 저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믿고 저를 사랑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내려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겠다.”
  “오! 지금은 선생님이 명백히 밝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고, 선생님이 무엇이든지 아신다는 것과 누가 여쭈어보지 않아도 대답하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참으로 선생님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십니다!”
  “이제야 믿느냐? 마지막 시간에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 3년째나 된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빵과 사람에게서 오지 않은 피인 포도주가 벌써 너희 안에서 효과를 내고 너희에게 신격화(神格化)의 첫번 전율을 준다. 너희들이 내 사랑과 나를 차지하는 데에 꾸준하면 하느님이 될 것이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말한 것처럼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선과 생명의 나무의 진짜 열매이다.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 안에서는 악이 지고 죽음이 사라졌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이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으면 하느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보아라… 너희 안에 이 빵과 이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희가 흩어질 시간이면 너희를 위하여 떠나버리고 나를 혼자 남겨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아버지, 아버지!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말을 다 했다… 너희에게 평화를, 내 평화를 주기 위하여 너희는 또 압제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져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께서는 일어나셔서 팔을 십자형으로 벌리시고 빛나는 얼굴로 아버지께 장엄한 기도를 드리신다. 요한이 이 기도를 그대로 다 적어 놓았다.
  사도들은 크게, 작게 드러내놓고 소리를 내서 운다. 끝으로 그들은 찬가를 하나 부른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신 다음 이렇게 명령하신다.
  “이제는 겉옷을 입고 떠나자. 안드레아야, 집 주인에게 내 뜻이 그러니 모든 것을 이대로 놓아두라고 일러라. 내일… 너희가 이곳을 다시 보는 것이 기쁠 것이다.”
  예수께서 그곳을 둘러보신다. 벽과 가구와 모든 것에 강복을 주시는 것 같다. 그리고는 겉옷을 입으시고 제자들과 앞장을 서서 떠나신다. 예수님 곁에는 요한이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의지하신다.
  “어머니께 인사 안하십니까?” 하고 제배대오의 아들이 묻는다.
  “아니다. 벌써 다 했다. 소리를 내지 말아라.”
  램프에 횃불을 붙인 시몬이 문으로 가는 넓은 복도를 밝힌다. 베드로가 조심스럽게 대문을 여니 모두가 길로 나간다. 그런 다음 열쇠를 돌려 밖에서 문을 잠그고 행길로 들어선다.
  – 19장 끝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최후의 만찬 일화에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음식이 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고찰 이외에 네 가지 주요한 가르침이 나타난다.
  첫째는 하느님의 아들들에 있어서 율법에 순종할 필요성이다.
  율법에 의하면 과월절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모세에게 주신 의식에 따라 어린 양을 잡아 먹어야 하였다. 그런데 참 하느님의 참 아들인 나는 하느님이라는 신분 때문에 율법이 면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내가 사람들 가운데에 있었고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께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게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해야 되었다. 하느님의 총애는 순종과 성덕을 점점 더 크게 하려는 노력을 면제시키지 않는다. 너희가 가장 높은 성덕을 하느님의 완전과 비교하면 그것이 항상 결점 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그 결점들을 없애고 할 수 있는 대로 하느님의 완전함과 비슷한 완전의 정도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둘째는 마리아의 기도의 힘이다.
  나는 육체가 된 하느님이었다. 흠이 없기 위하여 육체를 억제하기 위한 정신적인 힘을 가진 육체였다. 그런데도 나는 은총이 가득한 분의 도움을 거부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청한다. 그분은 그 속죄의 시간에도 그의 머리 위에 하늘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천사의 모후이신 그분이 아들의 용기를 돋구어 주기 위하여 천사 하나를 빼내 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 가엾은 어머니! 당신을 위하여 그러신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께 버림받는 쓰라림을 맛보셨다. 그러나 구속을 위하여 바치신 그분의 고통으로 올리브 나무 동산의 고민을 이길 수 있는 힘과, 그 갖가지 모진 과정을 거쳐 수난을 끝까지 견디어 나갈 수 있는 힘을 내게 얻어 주셨다. 그 모진 과정 하나하나가 죄의 한 가지 형태와 한 가지 방법을 씻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세째로, 자제력과 모욕을 참아받음과 모든 것을 초월한 숭고한 사랑은 내가 주창한 사랑의 율법을 그들의 생활의 생명으로 삼는 사람들밖에는 가질 수가 없다. 나는 그 사랑의 율법을 주창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였다.
  나를 배반하는 자를 내 식탁에 나와 함께 앉히고, 나를 그에게 주어야 하고, 그의 앞에서 나를 낮추어야 하고, 의전에 의한 잔을 그와 함께 나누어야 하고, 그가 입술을 댔던 자리에 내 입술을 대고 어머니의 입술을 대게 하는 것이 내게 있어서 얼마만한 고통이었을지 너희는 상상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의사들은 내 최후가 빨랐던 것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지금도 토론하며, 그 원인을 매질에 의한 심장의 장해에 돌린다. 그렇다, 그 매질에 의해서도 내 심장이 병들었었다. 그러나 내 심장은 최후의 만찬에서부터 벌써 병들어 있었다. 배반자를 내 곁에 두고 견디어야 하는 노력으로 인하여 부서질 대로 부서진 심장이었다. 나는 그 때에 육체적으로 죽기 시작하였다. 나머지는 벌써 존재하는 죽음의 고통의 가중(加重)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사랑과 일체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내게서 멀리 떠나가신 때에도 나는 사랑일 수가 있었다. 내 33년의 생애를 사랑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애덕의 습관이 들어 있지 않으면 우리를 모욕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기를 요구하는 완전과 같은 그런 완전에 도달할 수가 없다. 나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라는 대표적인 모욕자를 용서하고 용납할 수가 있었다.
  네째로, 성체성사는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할수록 더 효과를 나타낸다. 육신을 이기고 정신이 본성을 지배하도록 하겠다는 끊임없는 의지로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은 정욕을 이기고 덕행을 따르게 하며 활모양으로 완전한 덕행, 특히 사랑의 덕행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사랑하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를 지향한다.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고 또 순결하던 요한은 성체성사에서 최대의 변화를 얻었다. 그는 그 시간부터 익숙하고 쉽게 하느님의 하늘까지 올라가서 영원한 태양을 똑똑히 보는 독수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사죄(死罪)로 끊임없는 인간적인 부당함을 자라게 하면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 때에는 성체성사가 죄의 예방과 생명의 싹이 아닌 부패와 죽음의 싹이 된다. 정신의 죽음과, 베드로가 유다의 육체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이 그것으로 인해서 ‘죽는’ 육체의 부패가 된다. 그 죽음은 그 주홍빛 속에서 항상 생명을 주고 아름다운 액체인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열정으로 인하여 시꺼멓게 된 그 속과 더러운 짐승의 썩은 시체에서와 같이 부패한 육체에서 흘러나와 행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부패를 퍼뜨린다. 성체성사를 모독하는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절망한 사람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성총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평온한 죽음을 알지 못하고, 심하게 고통을 당하지마는 시선은 하늘에 고정시키고 영혼은 평화를 확신한 채 고통을 당하는 희생의 영웅적인 죽음도 모른다. 절망한 사람의 죽음은 뒤틀림과 공포를 뚜렷이 나타낸다. 그것은 벌써 육체에서 떼어내려고 목을 조르고 그 메스꺼운 입김으로 질식시키는 사탄의 손에 붙들인 영혼의 무시무시한 경련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과 믿음과 바람과 그 밖의 일체의 덕과 하늘의 가르침과 그 이득과 더 낫게는 그 실제적인 현존으로 마지막 가는 길에 그와 동행하는 천사들의 양식으로 길러진 후에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사람과,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한 후 은총과 성체성사가 용기를 돋구어 주지 않는 짐승과 같은 죽음으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사람 사이에 있는 차이는 이런 것이다. 첫째 죽음은 성인의 평화로운 죽음이니, 그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나라의 문을 열어 준다. 둘째 죽음은 저주받은 자의 무시무시한 떨어짐이니, 그는 자기가 영원한 죽음 속으로 곤두박질한다는 것을 느끼고 그가 무엇을 잃기를 원했는지를 알고 이제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유해지는 것이고, 또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박탈이다. 한 사람에게는 기쁨이고 또 한 사람에게는 공포이다.
  너희의 믿음과 사랑을 가지거나, 또는 불신을 가지고 내 선물을 업신여기고 하는 데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이 고찰이 가르치는 것은 이것이다.”